♣복음말씀의 향기♣ No3195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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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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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wEcxcZEDFg (심현보 루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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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호흡은 짧지만 하느님의 호흡은 깁니다!>
청소년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을 때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아이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을 낳습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어떤 죄에 대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 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기대를 합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의 원천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지체없이 공격하여 하루빨리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오게 하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보다 깊게 호흡하시며 보다 큰 걸음을 옮기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람도 너무 기대치가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추구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의 이 고통, 이 부족함, 때로는 참혹함을 견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순간순간 분노하시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과연 남아있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고 막차라도 타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늘 당신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열려계시는 하느님, 늘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환대의 주님, 우리가 돌아갈 때마다 그저 용서하시고 등 두드려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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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리옷 유다는 나머지 11제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그는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어떤 사람은 첫 영성체 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구원을 위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 같은 은총이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밭에서 자라지만 어떤 것은 열매를 맺는 밀이 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불속에 던져질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시스템’의 차이를 말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젖이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이것이 시스템의 차이이고 본성의 차이입니다. 같은 요리사라도 해적선에 타고 있으면 악당이 되고 경찰선에 타고 있으면 애국자가 됩니다. 같은 돼지고기라도 어떤 시스템에 들어가면 햄이 되어 나오고, 어떤 시스템에 들어가면 소세지가 되어 나옵니다.
돼지가 하루는 암소에게 평소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암소야, 너도 보다시피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주니? 사람들은 내 고기로 햄과 베이컨을 만들어 먹잖아? 또 내 창자를 빼내 순대를 만들어 먹고 심지어는 발도 족발로 만들어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만 좋아할까?”
암소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먹잖아! 그러나 나는 살아있을 때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주고 또 맛있는 우유도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한단다.”
돼지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스템을 벗고 살아있을 때도 무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소와 같은 새 시스템을 입어야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칫 오늘 복음이 이미 인간은 밀과 가라지로 결정이 되어있다는 식의 예정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역할이 없어집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당신을 통해 구원될 가능성이 있어야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사실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다 가라지에 속합니다. 모두가 불속에 던져질 운명이었는데 그 가라지들 중에 어떤 것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본성을 변화시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본성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든 시스템은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해적선은 해적질을 하는 목적이 있고, 경찰선은 그런 해적을 잡는 일을 합니다. 햄을 만드는 기계에 돼지고기를 넣고 소세자가 나오길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에 다 가라지라는 시스템이었자면 이제 밀이라는 시스템으로 변화되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시스템이 지향하는 것을 바꾸면 됩니다. 본성이나 시스템은 그것이 지향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뱀이었다가 산삼을 먹기 시작하면서 몸의 색소가 빠져나가 백사가 된 이 뱀은 더 이상 개구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다면 더 이상 나뭇잎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좋아하고 지향하는 것으로 우리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우리 본성을 변화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변화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뱀이 백사가 되려면 반드시 산삼을 먹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삼만을 좋아하게 되어야합니다.
2005년 일본인 돗토리 카즈미치 씨는 당시 9살이었던 돗토리 쇼지로 군을 데리고 한국에 관광을 왔습니다. 그런데 쇼지 군이 경찰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했고 그 순간 순찰을 마치고 들어오는 경찰관에게 이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경찰관은 흔쾌히 아들과 사진을 찍어주었고 머리에 자신의 모자까지 씌워주었습니다.
이 사진을 책상에 올려놓고 공부하던 쇼지 군은 한국 경찰관의 친절이 너무 좋아서 결국 자신도 경찰관이 될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1년 당당히 경찰학교를 졸업하여 경찰관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마워 한 아버지 돗토리 카즈미치 씨가 당시 사진을 들고 와 그 사진 속의 경찰관을 수소문해 찾게 되어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가현 경찰기동대에 근무하게 된 돗토리 쇼지로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10년 전 한국 경찰관과 사진 찍었는데 그때가 너무 좋아 경찰이 되고 싶었다.”
좋아해야 닮게 됩니다. 가라지는 자신을 밀로 만들고자 하는 분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의 변화가 시스템의 변화입니다. 한 아이가 경찰관이 좋아지자 자신이 경찰관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고 돈을 원했기에 결국 가라지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면 좋은 시스템을 가진 밀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그분이 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바란다면 가라지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기가 예수님이 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피를 빨아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고 남을 위해 피를 흘려주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 모든 이들은 시스템적으로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가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웃사랑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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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법>
김지은씨는 북한에서 9년간 한의사로 일하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와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맨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시골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공안에 잡혔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정으로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그녀는 더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쳐 3년간 파출부와 도시락 판매원으로 일했습니다. 거기서도 불안을 느껴 미얀마로 피신했지만 또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러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다단계 판매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착금으로 받은 것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의사가 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무심하게 “북한에 가서 대학졸업증명서를 가져오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죽는 수밖에 ...’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1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밀려왔습니다. 시야가 매우 투명해지고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갔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많았구나! 그런데 왜 세 끼 밥을 다 먹을 수 있는 지금 죽으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씩 잘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직장동료들은 한의대 진학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는 국회청원을 내서 지방 한의대 편입학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침내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북한의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최초의 한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잘 나가는 한의원 원장입니다.
주님의 씨는 밀이고 사탄이 뿌린 씨는 가라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심판 때 구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밀이고, 태어날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가라지입니다.
밀은 사랑할 줄 알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사랑과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너무 좋아서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면 그건 집착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옥 간다고 지옥까지 쫓아가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집착일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자아의 집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고 자살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잃더라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김지은 원장은 자살하려고 할 때까지가 가라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내려놓자 밀이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다른 본성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도 미워하고 가족도 미워하고 돈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 장애가 되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지 않으면 굳이 가난을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라는 말은 일부러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랩퍼 중 가장 돈을 많이 번다는 도끼는 돈이 엄청 많습니다. 한 달에 수천만 원하는 백 평이 넘는 초호화 호텔 방에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명품 옷, 장신구, 운동화들을 갖춰놓고 살아갑니다. 고양이 방이 보통 집 안방보다 큽니다.
차고엔 초고가 외제차들이 즐비합니다. 진열장엔 5만 원짜리 돈다발이 수북이 놓여있습니다. 매달 한 뭉치씩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그는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아는 사람입니다. 2년 간 기획사 옥상 컨테이너에 살며 랩을 배울 땐 단 돈 5백 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술, 담배, 커피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뒤풀이를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말은 그가 돈 버는 것이 돈에 집착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돈이 없어도 잘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볼 때 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은 사랑하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가라지는 집착의 본성이고 밀은 사랑의 본성입니다.
내가 사람이나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지, 집착하는지 살펴야합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른 심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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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24-30: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서 악의 폐해가 있지만 결국에 악은 가려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자연 식물로서의 가라지는 결코 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언제나 회개하면 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이다. 영혼 깊이 좋은 것이 뿌려진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 좋은 씨를 뿌린 이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말씀이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계속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 이 말씀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며 우리 인간은 저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는 삶은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나태한 때에, 악마는 좋은 씨들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린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고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깨어있지 못하는 그때에 가라지를 뿌렸고, 악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악한 자의 자녀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다.
밀과 가라지는 주님의 밭이라고 하는 교회에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르다. 밭에 있던 밀은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던 것이 밀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종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하면서 가라지를 뽑거나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다른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 악으로 타락하였다 해도, 내일 진리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고 말씀하신다. 또 가라지는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대가 자라나지 않았을 때는 밀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 종말”(마태 13,39) 때에, 즉 심판 때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에서 가라지들을 모두 거두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 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자는 동안에 받아들인 것이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그리고 의인들은 그저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으로 좋은 씨를 받고, 가꾸고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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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게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가라지를 뽑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 ‘왕따’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지매’라고 부릅니다. 약하고, 부족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대항할 힘이 없고, 도와줄 친구가 없는 사람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왕따를 경험한 사람은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에는 ‘악플’로 괴롭히기도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미리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억지로 마침표를 찍기 때문입니다. 왕따와 이지매가 이념이 되고, 신념이 되면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나치의 독일은 유대인, 집시, 사회 부적응 자들을 포로수용소에 가두었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는 인류와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교회도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시작했었고, 많은 무고한 이방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범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주도하는 미국사회에도 여전히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이 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기도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라지들은 뽑아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가끔, 제 몸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지우고 싶은 흉터도 있습니다. 줄이고 싶은 뱃살도 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빼고 싶은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모두 내 몸의 일부이고, 제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와 함께 계속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삭제하고 싶은 기억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역사의 기억을 삭제하고 싶으신지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시간, 이념과 사상의 갈등으로 벌어진 폭력과 전쟁의 시간, 부끄러운 시간, 치욕의 시간, 분노와 미움의 시간들은 지워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죄의 역사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제자들의 배반, 박해와 순교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서 잘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고통과 박해의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통해서도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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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가 빠르고 강력하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방해자들만 늘어가는 것 같은 상황에,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바뀌고 예수님을 향한 마음도 흔들렸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그 영향력과 힘, 생명력을 느끼기 어려울 때도 있고 가라지와 같은 악의 존재 때문에 그 열매들이 흐릿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성장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마태 13,32 참조) 씨앗은 ‘저절로’ 자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활동에 의존하거나 인간의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박해와 같이 퇴보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성장합니다. 또한 누룩은 온 반죽에 파고들어 그 반죽을 부풀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마태 13,33 참조) 우리 안에 넣어 주신 신앙이라는 누룩이 우리 삶의 모든 곳에 파고들고, 신앙인 한 사람이 가정과 사회에 파고들어 점차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빠르고 강력하며 큰 반향을 일으키는 하느님 나라에 주목하는 사이 작지만 소중한 성장의 표지들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돌봄이 필요한 이를 떠올리고,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좀 더 행동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피조물 보호를 위하여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장바구니를 이용하는 것 등. 그 또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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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하화식 베드로 신부님]
<사람의 마음 안에는 늘 선과 악이 공존한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늘 선과 악이 공존한다. 바로 그래서 가라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가라지는 무엇일까?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밀보다는 가라지를 더 자세히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은 현재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완성되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선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현재의 시점에서만 사람들을 바라보고 한 번의 잘못이 마치 내 모든 삶이 그런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이 내 안에도 있는가 보다.
좀더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내 안의 가라지도 그렇지만 특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볼 때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줄 아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불편함은 이 가라지 문제, 곧 자신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일 수도 있다.
“추수 때까지 다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는 말씀은 우리 삶에 참으로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라지를 어떻게 몽땅 뽑아버릴 수 있겠는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 인간이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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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태환 요셉 신부님]
<예수를 배반한 두 사나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가라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가라지란 밀밭에 자라나는 일종의 잡초입니다. 이 가라지는 이삭이 달릴 때까지 밀과 너무도 닮아서 쉽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날 중동 지방에서는 원수를 갚는 수단으로 원수의 밀밭에다 몰래 가라지 씨를 뿌려 밀농사를 망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정을 빗대어 가라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무성히 자라는 가라지를 발견하고 뽑으려는 일꾼에게 주인은 가라지로 인해 밀이 뽑힐 위험이 있으므로 같이 자라도록 내버려 둡니다.
악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악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선과 너무도 흡사해서 사람을 속입니다. 악은 항상 선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신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모인 우리 공동체에도 마찬가지고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 안에서도 선과 악은 계속 싸웁니다. 왜 세상에 악이 있는지 묻는다면 명백한 답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모릅니다.
그럼 하느님은 왜 이런 악을 당장 멸하지 않는 것인가?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놀라운 하느님의 기다림.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참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하느님께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 그리고 악이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자비하신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회개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두 사나이가 있습니다. 은전 서른닢으로 유명한 유다와 첫 번째 사도인 베드로가 주인공입니다. 성서는 똑같이 배반한 제자 두 사람의 죄를 전하지만 죄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유다는 목을 매달았고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가장 큰 도전이요 위협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풍성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이치입니다. 존재하는 악에 대해 유다처럼 목을 매달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 사도처럼 슬피 울면서 뉘우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새로운 여정을 출발할 것인가? 그건 우리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자비로 우리의 악행을 참아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잘못을 기도로써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아는 우리이기에 나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 베드로 사도와 같은 삶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현세에서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신비를 묵상합니다.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동시에 우리도 남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됨을 깨달았습니다.
알려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회개와 용서의 삶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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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과 가라지>
마태오 13,24-30 (가라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밀과 가라지>
가라지를
보기에 앞서
밀을
보는 겁니다
가라지를
뽑기에 앞서
밀을
가꾸는 겁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린다고
밀이
자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가라지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밀을
거두기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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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좋아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사실 하느님께서는 무던히도 우리를 기다려 주셨고 참아주셨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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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 사람은 왜 저런 거야?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이런 식으로 남들에 대해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소위 ‘자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믿거나 자신에게 반하여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잘 보면 오히려 단점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너는 뭐 잘하니?’
솔직히 ‘자뻑’ 보다는 ‘자학’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자존감 떨어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자학하는 사람이 더 변화의 가능성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는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더 이상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자뻑’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며 자기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학’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가라지는 성경 원문에서 ‘지자니아’라고 하는 해로운 식물로 밀과 아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밀과 가라지는 모두 커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그 누구도 식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따라서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가라지가 꽤 자랐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양도 종들이 놀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는 밀 이삭 하나가 아깝고 귀중하기에, 추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밀과 가라지를 가려내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선한 사람만이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우리 공동체 안에 선한 사람만이 아닌, 악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뽑아내려다가 선한 사람까지 뽑혀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은 마지막 날의 하느님 심판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느님 심판 전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두고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 끈기 있게 기다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대신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선한 사람이 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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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존의 지혜와 사랑, 평화>
-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리스도파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시편84,2)
오늘 화답송 후렴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리스도파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생전生前보다는 사후死後, 더 위대해지는 느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세월 흐를수록 여운의 향기 짙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성인들은 물론이고 위인들이 그러합니다. 제게는 평범해 보였던 어머니가 그러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러합니다. 때로는 살아 현존해 있는 듯이 생각됩니다.
제 서품식때 사진을 보니, 제 어머니는 지금 제 나이와 같은 74세입니다. 저절로 어머니의 삶과 지금의 제 삶을 비교해보게 됩니다. 새롭게 깨닫는 바, 어머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회한悔恨의 마음 가득합니다.
전에도 그렇지만 요즘 제 관심사는 주로 사람이요 읽는 책은 위인偉人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입니다. 주문한 책을 어제 받아 보았습니다.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만델라 자서전(넬슨 만델라 지음, 김대중 번역)-”, 책 표지가 선명했습니다. 김대중이 누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이 와닿는 이가 없었습니다. 거의 1000쪽에 달하는 두터운 책이었습니다.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이 방대한 책을 대통령 퇴임 후, 돌아가시기 3년전 2006년 82세에 출판한 책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보를 보니 1924년 출생하여 1998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니 만 74세 나이였고 이후 5년 만79세까지 대통령직을 노령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수행해 냈던 것입니다.
제 나이 지금 만73세인데 이보다 한 살 늦은 만74세에 대통령이 됐으니 그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참 놀랍습니다. 새삼 저를 부끄럽게 하고 분발하게 합니다. 역시 하늘이 낸 인물이요 세계적 거인巨人이란 생각이 듭니다. 만델라 자서전을 읽고나면 한국 근현대사라할 수 있는 방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2권을 읽을 계획입니다. 책소개 앞부분입니다.
“김대중의 삶은 곧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이다. 1924년 남녘의 외딴 섬마을에서 태어나 2009년 8월 세계인의 애도속에 고단한 몸을 누일 때까지, 그는 파란으로 가득 찬 한반도 현대사의 한복판을 헤쳐왔다.”
넬슨 만델라와 절친했던 김대중 대통령, 위대한 두분의 삶의 궤적이 너무 닮았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바, 이 위대한 두분의 공통점은 통합의 인물,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은 용서와 화해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파였다는 것입니다. 사후 뚜렷이 입증되기에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하여 찾는 분입니다. 문득 어제 받은 어느 자매님의 카톡메시지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주고받은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신부님이 보내 주신 우편물을 오늘 받았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백합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신부님의 사랑하는---이라는 글을 보며 눈물이 핑돌고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주님께 늘 사랑받고 있구나하는 온기를 느낍니다. 쓸쓸할 때면 이 글을 다시 보며 기운을 차리겠습니다.”
참 진솔한 고백입니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깊이의 사람들이요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시 사랑밖에 길이,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밖에 길이,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평생 공부하고 배워 닮아가야 할 공존의 지혜와 사랑, 평화의 주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 비유중 하나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깊은 지혜와 인내와 연민의 사랑을 배웁니다. 이런 지혜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런 지혜와 사랑의 인물만이 극단의 미친, 광(狂)의 분열의 시대에 공존과 통합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주님의 지혜와 연민의 사랑, 인내와 관용, 이해와 수용입니다.
참 불가사의한 가라지의, 악의 출현입니다. 좋은땅에 좋은씨 밀을 뿌렸는데 악의 가라지가 자라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로 초대교회 당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공동체 현실을 반영합니다. 여전히 오늘날도 반복되는 현실입니다. 얼핏보면 나라 안팎이 온통 가라지밭 같습니다. 날로 왕성해지는 가라지 세력의 세상같습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세상의 축소판이 내 마음밭입니다. 그대로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내 마음밭입니다. 발본색원, 범죄와의 전쟁도 수행하고 악의 척결을 위한 무수한 피흘림의 혁명도 겪었고, 적폐청산도 시도했지만 가라지 악의 현실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피할길 없습니다. 평화의 선을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계속되는 분쟁과 전쟁의 악입니다. 선과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 묻는 종들에 대한 예수님의 해법에서 깊은 지혜와 인내의 사랑을 배웁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일체의 판단이나 차별, 심판을 하느님께 맡기고 유예하라는 것입니다. 악의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입니까? 가라지인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별의 미움은 나쁩니다만 분별의 사랑과 지혜는 좋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가라지가 없는 순수한 좋은 밀밭의 유토피아는 환상입니다. 가라지가 없는, 영적전쟁이 없는 삶이라면 참 무기력한 삶에 내적성장과 성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악의 가라지를 뽑을 것이 아니라 밀의 선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영적 단련과 훈련을 통해 선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것이, 박멸撲滅하는 것이 서양의학의 특징이라면 밀과 가라지의 균형과 더불어 선을 상징하는 밀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한의학의 특징입니다. 모든 병은 균형과 조화가 깨졌을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선의 역량 강화를 위해 부단한 회개를 비롯한 온갖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수행이 절대적입니다. 죽을 때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수행자로, 구도자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영적 훈련병으로 사는 것입니다.
밀도 가라지도 고정 불변이 아닙니다. 변질과 변절로 밀도 가라지가 될 수 있고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가라지도 밀이 될 수 있는 인간의 내적현실입니다. 다음 예언자 예레미야의 성전설교의 신랄한 비판은 그대로 오늘날 가라지밭이 된 악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다른 신들을 따라 간다.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말할 수 있느냐? 너희에게는 네 이름으로 불리는 이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참으로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요 여전히 무성한 가라지밭의 현실입니다. 급기야 기후재난의 위기로 지구와 인류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도 대비책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이래선 종말의 파국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답은 하나 삶의 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구체적 회개의 실행입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주님의 성전에 전적으로 맹목적으로 의탁할 것이 아니라, 거짓 프레임들에 속을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길과 행실을, 탐욕과 낭비의 삶의 방식을,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이 죄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숲도 보고 나무도 보듯, 전체를 보면서도 지극히 섬세하며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클래식 기타리스트 허원경의 인터뷰 내용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허병훈은 마치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기타에 몰두했다. 거의 매일 새벽까지 연습하셨는데, 뭔가 벽에 부딪혔을 때는 며칠을 고민해 답을 찾는 모습을 보았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나 조성진의 연주를 보면 굵은 선 안에 굉장한 섬세함이 깃들어 있다. 거장의 연주에는 그런 모순된 것들이 함께 들어있다. 그것을 모두 가져야 진정 음악인이라 할 수 있겠다.”
참으로 각자 분야에서 삶의 달인이 될 수 있도록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살아야 좌파도 우파도 아닌 공존의 지혜와 통합, 평화의 그리스도파가 되어 살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시편 (84,6과 8ㄱ.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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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회개의 가능성!>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13,24)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은, 제목이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 가운데에서 함께 자란 가라지는 원수가 뿌려놓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입니다.
우리와 세상이 생각하는 것은 밀 가운데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아내는 것인데, 예수님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의아한 마음마저 갖게 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사도 바오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1코린 11,19)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등장하는 '밀'은 '의인'을, 그리고 '가라지'는 '악인'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공존하도록 내버려 두시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가 '회개의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다음의 예수님 말씀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31)
이는 밀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밀이 될 가능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늘 깨어 끝까지 밀의 모습인 의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가라지의 모습인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절기(節氣)로 대서(大暑)입니다. 장마와 함께 더위가 극에 달하는 시기입니다. 이 대서(大暑)가 이 대서(大恕)였으면, 곧 서로가 크게 용서함으로써 더위도 이겨내고, 그리고 지금 첫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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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M9apGyRU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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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마태 13, 29)
다른 곳이 아닌
같은 곳에서
밀과 가라지가
자라난다.
애써 가꾼
밀도 드러나고
그 틈에 끼어
자라나는
가라지도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뽑아 없애는 것에
너무 익숙한
우리들 삶이다.
우리 힘으로
다 뽑을 수도
없는 우리 내면의
가라지들이다.
가라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가라지는
가라지의 임무에
언제나 충실하다.
가라지가 있기에
밀은 더욱 겸손하다.
밀의 기도는
서로를
잡아당기는
생명의 공존이다.
가라지의 무게가
십자가의 무게만큼
우리의 삶을
봉헌으로 이끈다.
가라지를 키운
장본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가라지를
기다려주시고
밀을 품어주시는
주님이시다.
밀과 가라지
모두를 주님께
의탁한다.
봉헌이란
나의 가라지를
인정하고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멈출 수 없는
봉헌의 삶이다.
밀과 가라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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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 안에 있는 밀과 가라지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가라지가 있기에 밀이 있고 밀이 있기에 가라지가 있습니다. 가라지의 고향도 우리의 하느님이고 밀의 고향도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먹기에 따라 가라지도 밀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밀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 밀입니다. 가라지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 가라지입니다.
가라지라고 치부한 내 역사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가라지라고 치부한 이웃에게도 좋은 점은 분명 있습니다.
밀을 얻으려하지만 가라지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밀이 있는 곳에는 가라지가 늘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밀이 될 수도 가라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밀과 가라지라는 현상이 아니라 흔들리는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흔들릴 때마다 다 뽑아버린다면 남아있을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밀만 바라는 우리 욕심을 비워야합니다. 때론 가라지도 은총의 밀알이 됩니다.
밀과 가라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가라지를 밀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가라지와 밀을 창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함부로 가라지와 밀을 뽑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끄심 속에 맡겨야합니다.
우리가 밀이라 부른 것이 실상은 가라지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라지라 버린 것이 실상은 밀이 될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하느님 안에 있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우리를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밀도 가라지도 거두어들이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둘 수 없다고 반드시 뽑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가야 할 시간은 지나가야 합니다. 있어야 할 가라지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밀도 가라지도 감출 수 없다면 기쁘게 함께 가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함께 가는 법이란 다름 아닌 평화로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뽑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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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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