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814
#요한계시록 #Revelation 19:7-10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榮光을 돌리세 어린 羊의 婚姻 期約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自身을 準備하였으므로
Let us rejoice and be glad and give him glory! For the wedding of the Lamb has come, and his bride has made herself ready.
Gaudeamus, et exsultemus : et demus gloriam ei : quia venerunt nuptiæ Agni, et uxor ejus præparavit se.
χαίρωμεν καὶ ἀγαλλιῶμεν, καὶ δώσομεν τὴν δόξαν αὐτῷ, ὅτι ἦλθεν ὁ γάμος τοῦ Ἀρνίου, καὶ ἡ γυνὴ αὐτοῦ ἡτοίμασεν ἑαυτήν,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는 1260일 동안 광야에서 양육을 받아온 참된 교회인 여인이다. 거짓 교회인 큰 음녀는 짐승에게서 돈과 권력이라는 권세를 받고 참된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술수와 음행을 저지른 반면에, 참된 교회인 광야의 여자는 비록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해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음녀의 훼방과 공격에 지지 않으려고 고군분투를 하였다. 이렇게 참된 교회인 여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어린 양의 신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細麻布 옷을 입도록 許諾하셨으니 이 細麻布 옷은 聖徒들의 옳은 行實이로다 하더라
Fine linen, bright and clean, was given her to wear." (Fine linen stands for the righteous acts of God's holy people.)
Et datum est illi ut cooperiat se byssino splendenti et candido. Byssinum enim justificationes sunt sanctorum.
καὶ ἐδόθη αὐτῇ ἵνα περιβάληται βύσσινον λαμπρὸν καθαρόν· τὸ γὰρ βύσσινον τὰ δικαιώματα τῶν ἁγίων ἐστίν.
사데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들었으나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의 몇몇 소수의 성도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당신과 함께 다니게 될 것이라 칭찬하셨다. 그 성도들은 비록 자신이 속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도 그 가운데서 옳은 행실로써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려 하였다. 사데 교회는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지라도 소수의 성도들이 열 명의 의인이 되어 교회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헐벗고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있으니 서둘러 가진 재물로 옷을 사라고 가열차게 책망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인 풍요에 만족한 나머지 굳이 힘들여 옳은 행실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저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육신의 편안함과 풍족함을 누릴 수만 있다면 복음의 어렵고 좁고 힘든 길은 기꺼이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였다. 모든 성도들은 각자 자신의 옳은 행실로써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참된 교회가 입을 세마포 옷을 짓는 재단사이다.
9 天使가 내게 말하기를 記錄하라 어린 羊의 婚姻 잔치에 請함을 받은 者들은 福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Then the angel said to me, "Write this: Blessed are those who are invited to the wedding supper of the Lamb!" And he added, "These are the true words of God."
Et dixit mihi : Scribe : Beati qui ad cœnam nuptiarum Agni vocati sunt ; et dixit mihi : Hæc verba Dei vera sunt.
Καὶ λέγει μοι Γράψον Μακάριοι οἱ εἰς τὸ δεῖπνον τοῦ γάμου τοῦ Ἀρνίου κεκλημένοι. καὶ λέγει μοι Οὗτοι οἱ λόγοι ἀληθινοὶ τοῦ Θεοῦ εἰσιν.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얼마나 크고 성대하며 화려한지 이 땅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천사가 기록하라 명한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므로 교회와 성도로서는 반드시 기대하고 소망해야 할만한 그런 잔치일 것이다.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敬拜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證言을 받은 네 兄弟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敬拜하라 예수의 證言은 豫言의 靈이라 하더라
At this I fell at his feet to worship him. But he said to me, "Don't do that! I am a fellow servant with you and with your brothers and sisters who hold to the testimony of Jesus. Worship God! For it is the Spirit of prophecy who bears testimony to Jesus."
Et cecidi ante pedes ejus, ut adorarem eum. Et dicit mihi : Vide ne feceris : conservus tuus sum, et fratrum tuorum habentium testimonium Jesu. Deum adora. Testimonium enim Jesu est spiritus prophetiæ.
καὶ ἔπεσα ἔμπροσθεν τῶν ποδῶν αὐτοῦ προσκυνῆσαι αὐτῷ. καὶ λέγει μοι Ὅρα μή· σύνδουλός σού εἰμι καὶ τῶν ἀδελφῶν σου τῶν ἐχόντων τὴν μαρτυρίαν Ἰησοῦ· τῷ Θεῷ προσκύνησον· ἡ γὰρ μαρτυρία Ἰησοῦ ἐστιν τὸ πνεῦμα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지 시험해보라 가르친 요한 사도와 같이 탁월한 인물도 하늘의 환상 앞에서는 육신의 감각과 인식과 판단력이 흐려져서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숭배하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실수로나 연약함으로라도 그런 우상숭배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천사를 통하여 막으신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성경과 성령으로 명백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언제든지 닥칠 수 있고 또 그 문제들에 걸려 넘어질 위험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성도로 삼으신 주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성도 된 우리가 범죄하지 못하도록 섭리하신다. 어떤 판단하기 불분명한 상황에 닥쳤을때는 섣불리 판단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잠잠히 숙고하고 간구하여야 한다.
남들보다 탁월한 사역 성과를 이루는 목사들이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교인들이 주님보다 그들 자신을 추종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여나 그런 낌새를 보이는 교인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절하는 것을 말린 천사처럼, 기적을 행한 자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원주민들을 힘을 다해 말린 바울과 바나바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질책해야 한다. 설령 그 교인과 인간적인 친분이나 사이가 멀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감수하고 그래야 한다. 주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면 헤롯처럼 천사의 일격을 받아 충이 먹혀 죽게 될 뿐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고 그분의 증언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간구하며 의지해야만 하며, 성경 해석에 탁월한 은사를 받은 이들의 가르침을 존중해야만 한다. 또한 예수님의 증언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므로 성도들이라면 예수님의 증언을 받고 무덤덤하게 가만히 있다거나 지적인 만족에 머무를 수 없다.
#20210814
#신명기 #Deuteronomy 28:63
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때에는 그들이 여호와께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않았어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것과 그들에게 거룩한 율법과 계명을 주시는 것과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나 이미 여호와께로부터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리고 여호와의 계명을 통해 그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 후에는 범죄를 일삼는 그들에게 더이상 복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저주를 내리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멸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원래부터 원수를 미워하는 그런 혐오가 아니라, 사랑했던 자가 배신을 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복수심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원수였던 자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죄책감이나 양심의 거리낌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배신한 연인의 파멸을 추구하는 마음의 한편에는 자기의 그러한 보복으로 인해서 연인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이켜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일말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 연인이 끝까지 배신한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바락바락 대든다면 그래 어디 갈때까지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 연인의 파멸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무너져가는 연인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희열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도 그만큼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의 파멸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그렇게 당신 스스로를 괴롭게 하시는 것과 연합된 그런 애증의 기쁨인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죽을뻔한 여아를 살려주고 애지중지 양육하며 왕후로까지 삼았으나 그런 생명의 은인이자 남편인 왕을 저버리고 외국의 청년들과 음행을 저지른 여인으로 비유하시며 한탄하셨고, 선지자 호세아에게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시고 혼인 후에도 다른 남자들과의 음행으로 제각기 아비가 다른 세 자녀를 낳고 수시로 집을 떠나 음행을 저지르는 아내를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범죄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절절하고 애끓는 심정을 겪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가룟 유다에게도 끝까지 돌이킬 것을 종용하셨으나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예수님도 마지막에는 가룟 유다에게 너 좋을대로 하라고 하시며 더이상 그를 설득하시지 않으셨다. 마귀 같은 가룟 유다더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뻔 하였다고 하신 것은 그가 멸망하게 될 것을 원수의 몰락처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사도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악에 팔려 멸망에 치닫는 유다의 영혼이 더할 나위없이 불쌍하고 안타까우셨기 때문이다.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도 회개하지도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예루살렘과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새다 같은 동네에 멸망의 저주를 선포하신 것은 그 도시들이 마치 적국의 성읍이라도 되듯이 파멸되는 것을 즐기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그 시민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참혹한 영육의 멸망을 받게 될 연민과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공의가 실현되는 그런 기쁨인 것이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방방곡곡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니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완악하게 거부하는 도시에서는 신발의 흙을 터는 것으로써 저주를 선포하였는데, 이 또한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에 저주를 내리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도시들이 멸망 당하는 것 자체로 사도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들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저주를 선포하였어도 실제 그의 속마음은 자기 자신의 구원과 맞바꾸어서라도 동족인 유대인들이 복음으로 회심하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오로지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예수님께 아무런 칭찬이나 위로나 격려도 듣지 못하고 심한 질책만 받았어도 에수님께서는 그 교회들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기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책망을 듣고 당신께로 다시 돌이키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굳이 호명하셔서 책망을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진리와 공의를 사수한다는 명목으로 신앙고백이나 교리에 반하는 것 전체를 끊어내야 할 멸망의 자식 취급해서는 안되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완전한 배교가 아닌 이상 그리스도의 심령으로 끝까지 권면하고 책망하며 이끌어가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원수처럼 배척하는 경향이 그 어느때보다도 깊이 박혀있는데,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성도들의 관계도 복음이 아닌 단지 이 땅의 정치경제체제나 이념 때문에 갈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20200814
#레위기 #Leviticus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규례에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라면 단연 보아스를 들 수가 있다. 그는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여느 부자들처럼 악착같이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과 낱알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심지어 이스라엘 입장에서 저주받은 민족이었던 모압 여인 룻에게조차도 이미 수레에 실은 짚단에서 적당히 이삭을 빼내어 줍게 할 정도로 마음이 넉넉하였다. 게다가 보아스는 그저 사람들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낱알을 남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는데, 이는 그의 일꾼들이 그가 등장하자 마음을 다해서 보아스를 축복한 것에서 드러난다. 즉 보아스는 자기에게 속한 일꾼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 넉넉히 품삯을 줄줄 알았던 것이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유다 지파 족장 중의 한 명인 살몬이었으나 어머니는 여리고에서 오랫동안 창녀 생활을 하다가 간신히 구원 받은 라합이었다. 그래서 보아스는 아버지 살몬으로부터는 여호와께 선택받고 높은 지위를 누리는 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배웠을 것이고 어머니 라합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의 비참한 형편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스라엘에서 유력자로서 큰 부를 누리면서도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해 넉넉히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갈 때 다윗 왕과 피난 일행들에게 먹을 것을 공궤한 거부 바르실래 또한 베풀기를 좋아하는 선한 부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누가 보더라도 대세는 다윗 왕이 아니라 반역에 성공한 압살롬이었다. 그래서 다윗의 몇몇 신하들 조차도 다윗을 저버리고 압살롬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을 돕는다는 것은 향후 압살롬에게 보복을 당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그런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윗을 공궤하였는데 이는 분명 다윗이야말로 여호와께서 불변하시는 언약으로 선택하신 왕임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규례는 주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부자나 권세가 등 남들보다 부귀한 자들이 행해야 할 의무에 해당한다. 부자는 자기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베풂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자기 소유의 일부를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위해 베푸는 것은 그 부와 권세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신자라 하면서 배풀기에 인색한 부자는 다윗에게 베풀기를 거절한 나발이나 자기의 넘치는 소유를 저장할 곳간을 지을 생각만 했던 어리석은 부자나 거지 나사로에게 음식 한조각 주지 않은 부자와 같은 멸망을 당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부자들은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삶으로는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믿음이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자들은 나사로를 품에 안은 아브라함의 말대로 자기들의 좋은 것을 살아있을때 넘치도록 받았으므로 죽어서는 비참함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신자라 하면서 직원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급여와 복지를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을 갈취하는 자들은 자기 행위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알지 못한다 하시며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신다 해도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규례가 부자가 아닌 다른 신자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편에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 베드로로부터 의인이라 인정받은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나그네들이 소돔 주민으로부터 해코지를 당하지 않도록 하려다가 무교병 밖에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산을 탕진하였다. 베냐민 지파의 한 노인은 노숙하려던 레위인과 첩을 자기 집에 들여 접대하였다. 심지어 여호와께서는 이방 족속인 사르밧의 과부가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떨어져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과 먹고 죽을 한움큼 곡식 가루로 선지자 엘리야를 먼저 접대하게 하셨다. 한 어린아이는 자기가 먹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드려 수만명을 배부르게 하였다. 도르가라는 여인은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이런저런 옷들을 만들어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힘쓰는 이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하늘의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유가 없어서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이 규례를 지킬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자기가 마땅히 취해야 할 소유를 부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먼저 자기 밭의 곡식을 거두고 난 후 모퉁이의 것을 놔두라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고 하면서 자기 생계가 위협을 받을 정도로 과하게 한다거나 자기 가족을 부양해야 할 것까지 떼어서 기부한다거나 빚을 내서 기부한다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와 가족을 부양할 의무를 저버린 죄가 있고 그런 기부에는 자기 자랑과 교만에서 기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대상을 돕는 것은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물질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였을 때 자기가 사역한 여러 이방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자발적 연보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들이 개척교회나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것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선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각 교회에서 사역하는 전도사들의 학비를 보조하고 강도사들에게 목사안수를 주며 개척하고자 하는 부목사들을 지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0190814
#매일성경 #에스겔 21:18-32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무시무시한 큰 칼은 다름아닌 바벨론 왕국이었다. 더이상 이스라엘은 자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외세의 힘을 이용하셔서 그들을 징치하신다. 바벨론이라는 하나님의 칼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최후의 심판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예언과 같이, 이스라엘 남유다는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을 배반했다가 멸망을 당한다. 이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모든 고관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으며 아주 비천하고 가난한 백성들 소수만 살려두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백성의 범죄를 징치하는 하나님의 칼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서 아무런 연관관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우리가 이를 듣고 믿음의 눈으로 그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선지자는 거의 없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여전히 무지한 상태에 있으므로 선지자의 말을 듣고 돌이키는 자들 또한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칼을 선포하셨고 회개를 촉구하셨으나 이를 듣지 않고 선지자를 핍박하고 조롱한 것은 백성들이다. 그들에게는 재앙을 회피할 핑계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비단 바벨론만을 당신의 칼로 삼으신 것은 아니시다. 4백여 년 동안 애굽을 칼로 삼으셔서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자손들을 박해하게 하섰다. 사사시대에는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블레셋 등의 주변 이방 족속들을 칼로 삼으셨다. 여로보암이 분열시킨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앗수르를 칼로 삼으셨고 남유다에 대해서는 바벨론을 칼로 삼으셨으며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를 칼로 삼으셨다.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감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한 섭리로써 당신의 복음과 교회를 보존하시고 죄를 없이 하신다. 택하신 백성들이 범죄한다거나 할 때에는 당대의 강대국을 하나님 자신의 칼로 삼으셔서 백성들을 징치하신다. 내 생각에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칼은 아마도 미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가 비록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여러가지로 크고작은 갈등이나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국가 위정자들은 물론 최대한의 정상적인 방안을 통해서 화합과 안정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마땅히 선지자적 심령을 가지고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국가와 사회에 그리스도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대체 교회의 정결함과 강대국의 영향을 받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겠지만, 바벨론을 칼로 삼으신 하나님의 원리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한다면 교회는 성경을 믿음으로 인과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회개가 너무 거창하거나 거시적이면 죄의식을 민감하게 느끼기 어렵고 깊은 회개보다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회개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강대국의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피상적인 거창한 회개보다는 각자 교회 단위의 회개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여야 한다. 그저 이벤트 성으로 하는 회개는 죄악의 요요현상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교회 단위의 참된 회개야말로 교인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며 나라를 살리는 참된 애국운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된 회개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행함 없는 회개 또한 죽은 회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도 받지도 않으시는 쓸모없는 회개이다. 따라서 교회는 무언가를 회개할 때에 그 잘못한 것을 할 수 있는 한 돌이키고 풀어내려는 행위를 수반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칼로 사용하신 나라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나라들이 하나 같이 하나님께 선택되지 못한 이방 족속들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의인을 징치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백성들의 범죄를 심판하시는데 의로운 국가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악하고 포학한 나라를 사용하신다. 그 나라들은 원래부터 자비함이 없고 야수와 같이 잔인하므로,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칼로써 쓰임 받았다고 해도 적당히 하지 않고 언제나 지나쳤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더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살륙을 저질렀다. 이는 재판관이 판결한 형벌의 수준을 넘어 집행관이 자기 멋대로 더 형량을 무겁게 한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등의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계를 침범하여 지나치게 백성들을 살륙한 그 강대국들을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들인데다 당대의 강대국들이었으므로 더욱 하나님과 그 예언을 멸시하였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저 한 나라의 흥망성쇠로 볼 수 있겠지만 그 나라들의 쇠락은 결국 자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구한말 극심한 부정부패에 찌들어 도저히 자정을 바랄 수 없는 말기 조선 시대를 징치하시기 위해 일본을 큰 칼로 삼으셨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일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알고 자중하며 식민지를 삼은 조선을 온건하게 대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구약시대의 여타 하나님께서 칼로 삼으신 강대국들과 같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자기가 하나님의 칼로 쓰임받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침략 야욕에 젖어 불타 올라서 스스로 악에 팔려 잡혀죽기 위한 이성 없는 짐승처럼 날뛰었다. 일제 시대에 그들이 우리 조상들에게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에게 내리신다고 하는 일곱배의 일곱배 되는 재앙보다 더 잔혹한 짓들이었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일본은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자기들의 죄악을 알지도 못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본을 우리에 대한 칼로 삼으시기를 마치셨는데 여전히 이를 알지 못히고 패역한대로 행한다면 그 나라의 결말은 어떠하겠는가. 지진과 태풍 등의 유난히 반복적인 자연재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여파 등이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
미국은 물론 전략적으로 대한민국의 아주 유용한 우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국가간 이익과 관련한 것이다. 소위 보수 우파 교인들 중에는 미국이 우리나라의 생명의 은인으로 지나치게 숭상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미국사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비록 처음에는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옴으로써 여러 과정을 거쳐 건국 된 것은 맞다. 그러나 미국 역사의 과정을 볼 때, 그리고 지금의 미국의 모습을 보면 과연 기독교적 사상이, 성경적 사상이 얼마나 기반이 되어 있는지는 의문을 가져볼만 하다. 미합중국 헌법에서 동성애 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수립된 것만 보아도 이미 미국은 성경적 국가관을 저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사대주의에 젖어있는 교인들은 동성애를 그렇게 반대하면서도 미국 헌법의 이 조항을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미국이 우리나라의 우방이며 기독교 기반에서 건국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우상적인 숭배사상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를 바벨론을 이용해서 멸망시키시고,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알렉산더를 이용해서 멸망시키섰다. 어느 국가건 지도자건 간에 지금의 강함만을 자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멸하실 수 있으시다. 따라서 미국이 국가적으로 우리나라에 부당한 조치를 할 때마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먼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께 이 나라를 보전해 달라고 간구하여야 한다.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자격미달의 먹튀 담임목사로 인해 거의 십 년 가까이 홍역을 치러왔으며, 작년부터 지금까지는 그 절정에 달해 있디. 그 담임목사는 사임하는 때까지 자기의 탐욕을 따라 유리하는 별과 같이,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같이,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자기에게 정해진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왜 우리에게 저런 자가 담임목사로서 허락된 것인지 성령의 일깨우심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짓 목사의 전횡과 횡포에 십 년 가까이 시달리면서도 교회가 풍비박산 나지 않은 것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거짓 목사를 이 교회에 허락하신 것이 우리로 회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고의 섭리는 아니었나 곰곰이 돌이켜 봐야 한다. 따라서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는 물론 하루빨리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온 교회가 마음의 옷을 찢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미성년자가 교역자에게 성범죄를 당하고, 담임목사가 이를 은폐하고, 그 성범죄 피해자가 자살하고, 무고한 부교역자들이 쫓겨나고, 급기야는 담임목사가 교회 몰래 다른 사역할 교회를 알아보다 들통나서 갑작스럽게 사임하게 되는 일이 교회에 결코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우선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하나 하나 되짚어가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교회의 만행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할 수 있는대로 용서를 구하여 화해하는 것이 급선무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의 치유도 회복도 없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지 이 교회를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으로 멸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20160814
#여호수아 #갈렙
[여호수아 14]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달라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45년간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떠돈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갈렙은 5년의 기간을 더 추가하였을까? 이는 추측하건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머문 기간은 40년이 맞을 것이고,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때로부터 가나안 정벌에 5년의 기간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5년의 기간 동안에 갈렙은 다른 지파들이 전부 자신의 기업을 차지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가장 마지막에서야 헤브론을 차지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헤브론 산지는 매우 험준하고 척박하고 점령하기 힘든 지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갈렙은 다른 지파가 가나안의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기까지 5년 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를 통해 갈렙이 섬김의 지도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갈렙은 유다 지파의 지도자였는데, 유다 지파는 야곱의 아들로서도 12명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아들이었고 장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물론 원래 장자는 르우벤이었으나, 그는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통간함으로써 그 장자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는 구세주가 유다의 자손으로부터 나실 것이라는 축복을 받았다. 또한 그 이후에도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으뜸 가는 지파로서 언제나 크고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가나안 땅의 기업을 차지할 때도, 유다 지파는 단연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할 권리를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갈렙은 그러지 않고 5년간 기다렸고, 마지막 남은 가장 안좋고 힘든 땅을 도리어 요구한다. 이는 비단 갈렙 혼자만의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갈렙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지파 내의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렙의 그 결정에 유다 지파가 모두(적어도 대다수가) 동의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갈렙이 지도자로 있는 유다 지파는 어떻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내려놓는 갈렙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을까? 이는 결코 단기간에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갈렙은 40세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이후부터 40년 간 유다 지파 내에서 조금씩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인정 받고 행사해 왔을 것인데, 갈렙은 그 40년 동안 좋은 것을 양보하고 내려 놓는 지도자의 성품으로 유다 지파의 사람들을 것이고, 유다 지파는 그렇게 40년 동안 갈렙의 섬김의 자세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갈렙이 지도자로 있는 유다 지파의 그 섬김과 양보의 자세는 결코 비굴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리어 장자의 지파로서의 자부심에 입각한, 넉넉한 섬김과 양보였을 것이고 이는 다른 지파들도 인정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비록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내가 스스로 유추하기로는, 아마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다른 지파들은 유다 지파가 먼저 차지할 것을 권하였을 것이나, 갈렙의 유다 지파는 그러지 않고 도리어 그 권리를 다른 지파에게 양보하고 5년 동안 기다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