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말씀을 그리 예쁘게 하세요>
(1)
‘만고의 효자 친구’ 만택이가 오겠다고 전화를 한다. 탕수육이 먹고 싶은데 잘하는 중국집이 있는지 묻는다. 나는 생각 끝에 몇 년 전에 내 큰아들이 나의 칠순을 기념하여 코스 요리를 사준 중국집 ‘천외천(天外天)’이 생각나서 등촌역 6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날은 만택이의 요청으로 연신내에 사는 수의사 ‘쫑콩’ 총장도 미리 불렀다.
조선족 출신인 ‘천외천(天外天)’의 안주인은 3년 전에 왔었던 나를 기억한다. 그냥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앉았던 자리의 위치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이는 식당 주인으로서의 노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주인이 지닌 미덕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안주인의 모습이 나의 관심을 끈다. 3년 전보다 훨씬 더 산뜻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보인다. 그녀의 한국말 실력도 달라졌다. 표준 서울말로 완벽하게 세련되었다. 50 전후의 나이로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 보니 40 전후의 나이로 보일 만큼 젊어 보인다. 나의 근거 있는 말 보시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세월을 거꾸로 사시는가 봐요. 더욱더 새댁 같네요!”
“아유! 전에는 더 늙어 보였나 봐요? 하하하!”
나의 애어행(愛語行)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밝고 기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도 자기 모습에 자부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의 활력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탕수육과 유산슬과 짜장면을 시켰다. 탕수육 맛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나의 ‘탁월한 장소 선택’을 포함해서 두 친구의 찬사가 음식 품평으로 이어진다. 안주인에게는 찬사와 함께 양이 좀 적다는 친구의 고단수 투정이 추가된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나의 말 보시로 이미 선한 마음이 되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음식에 대한 친구들의 투정 섞인 찬사로 한껏 고무되었으리라. 우리 일행에게 보상하는 보너스로 탕수육 한 접시를 추가로 더 내어온다.
우리는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주인도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수의사 친구는 다른 날 또 그 집을 찾아와서 나를 불러냈다. 좋은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다. 경전의 말씀 한 구절이 떠오른다.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나누나.
(2)
공군 시절의 짝꿍 친구, ‘만고의 효자’ 정만택이 또 찾아왔다. 대구에서 올라와 사업 관련 손님을 만나 점심을 먹은 후이니, 다섯 시에 염창역 ‘옛날빈대떡’ 집에서 보잔다. 그러지 않아도 아내와 시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날씨 탓인지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났었는데 참으로 귀신같이 텔레파시가 통하는 친구이다.
등촌역 부근에 있는 우리 집에서 출발해서 중간쯤 걸어가고 있는데,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고 전화질이다. 도착해 보니 가운데쯤에 앉아 미리 나온 빈대떡의 갈라진 한쪽을 먹고 있다. 식으면 맛이 떨어지니 당연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 집 빈대떡은 특별하다. 종로나 강남이나 사당동에서 만나는 빈대떡에 비교하면, 두께는 두 배이고 가격은 절반 수준이다. 그러니 초저녁부터 손님이 붐빈다. 다섯 시가 넘으면 자리가 없다. 항상 가게 바깥으로 줄을 서야 하는 집이다. 그런데 코로나 덕분(?)에 오늘은 아직도 빈자리가 남아 있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살짝 낮잠을 잔 터라 배가 부른 상태이다. 빈대떡은 거의 손대지 않고 된장이 묻은 풋고추에 막걸리만 마셨는데 술술 잘 넘어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만나면 하는 같은 화제를 안주 삼아 두 번째 주전자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기분도 얼큰해져서 주변도 돌아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바로 옆자리에 인형같이 예쁜 아가씨 두 사람이 앉아 있음을 인지하고는, 친구의 얘기는 건성으로 듣고 자꾸만 그쪽으로 눈길이 간다. 내 옆자리 아가씨는 얼굴을 완전히 돌리지 않고는 볼 수 없으므로 감히 대놓고 돌아보지는 못하고, 맞은 편 만택이 옆자리의 아가씨는 내가 얼굴을 돌리지 않고도 사선으로 보이는, 시야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 마침 아가씨들은 해야 할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지, 빈대떡 안주가 진즉에 사라지고 없는데도 술 주전자를 흔들어 보면서 혹시 술이 더 남아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이때다 싶어 용기를 내어 말을 걸기로 작정하고, 만택에게 우리가 반 주전자만 더 사주자고 동의를 구했다. 그는 주저하면서 나보고 이야기하란다. 나는 아가씨들 쪽으로 완전히 상체를 돌리고서,
“술을 반 주전자만 더 사드릴까요?”
그녀들은 반갑고 즐거운 웃음으로 사양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완강한 거절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한 번 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나서 바로 행동에 옮겼다. 술 반 주전자를 주문하여 전달하고 나니, 내 앞에 고스란히 남은 빈대떡 두 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이 빈대떡은 제가 건드리지도 않은 건데, 한쪽만이라도 안주로 드시겠어요?”
하고 쟁반을 통째로 들고 공중에 띄우니 맞은 편 아가씨가 기꺼이 한쪽을 집어 간다.
내 앞의 빈대떡을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나의 말을 딸 같은 아가씨가 신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각자의 대화를 좀 더 이은 뒤, 시차를 두고 자리를 파하였다. 오늘의 보시행과 애어행(愛語行)에 대한 기록은 여기까지가 아니고, 후반부의 일을 기술함이 목적이다.
만택이와 나는 술이 얼큰하면 발동이 걸려 2차를 가는 일이 종종 있다. 오늘 빈대떡을 만택이가 샀으니, 2차로는 소주방 ‘비바리’로 가고 싶어졌다. 그 집은 약 십오 년간 참 많이도 갔었다. 지금은 일 년 이상을 가지 않았으므로 예고 없이 들러 보자고 하며, 우리는 의기투합하였다.
도착하니 입구의 구석 자리는 잡동사니가 널려 있고, 손님은 두 팀뿐이다. 그런데도 가게 안은 꽉 찬 느낌이다. 주방 쪽 TV 앞자리는 비어 있지만, 안쪽자리는 역시 잡동사니로 너절하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비어 있는 반쪽의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만택이는 언제나처럼 나보다 더 주인과 친한 것처럼 너스레를 떤다. 오늘의 술 메뉴는 전작이 막걸리였으니 여기서는 소맥이 제격이다. 안주는 무얼 시켰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주인 할매가 준비하기에 가장 간단한 것, 그래서 선호하는 오징어 사촌, ‘한치’였을 것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도는 동안, 청년 팀은 돌아가고 중년 팀 중에서 부부 두 사람이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와 합석하여 새로운 한 팀이 되었다. 어떤 경위로 합석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기억이 없지만 대강 짐작은 간다.
평소에도 그런 편이어서 술이 약간 취하기 시작하면, 나는 기억의 창고에서 보통 사람들이 흉내 내기 쉽지 않은 맛깔스러운 말들을 끄집어내어 푸짐하게 사용한다. 아마 그러한 말 풍년에 목소리까지 커지고 보니 옆자리에서 듣고 그들이 관심을 표했을 것이고 나의 맞장구와 화답이 이어지다가 합석으로 발전한 게 분명하다.
술이 좀 취하여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한 내용은 전혀 기억을 재생할 수 없다. 다만 부인의 입을 통하여 들은 한마디는 분명 기억이 난다. 이전에도 다른 사람한테서 종종 듣던 예의 그 말이었다.
“어쩌면 말씀을 그리 예쁘게 하세요?”
이틀 후 그들 부부가 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고, 그날 나의 언행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 문자 메시지가 워낙 정중하고 예절 바른 칭찬의 메시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SNS 메시지임에도 보낸 문장에 한 치의 오류가 없다.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지난 토요일 주점 ‘비바리’에서 선생님을 뵌 것은 저로서는 크나큰 행운입니다. 말씀을 참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마술사님 같았습니다. 제 아내와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참 좋은 인생 선배님들을 만났다고요. 요즘 만나기 힘든 귀하신 선생님들과 종종 대화할 기회가 오기를 소원합니다. 조만간 비바리에서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 하용영 권춘란 올림”
이 메시지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냈다.
“귀한 분들과의 귀한 만남은 저에게도 귀한 기회였습니다. 좋게 보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인연을 좋게 이어감은 참으로 설레는 일이지요, 다시 뵐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첫댓글 유고(遺稿)로 수모씨의 진면목을 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나누나!
참 귀한 말씀 얻어갑니다.
인형같은 아가씨 징하다. 수모를 넘 몰라서 미안해. 우리 그때도 됴았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