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소에 들다 / 곽경효
오랫동안 내 안에서 떠돌던 것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득한 언어의 그림자
나무 한 그루가 한 나라와 같다면
수많은 나무가 뿌리내린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 요새인가
대숲에 가서 보았다
침묵과 절정 사이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수천수만의 칼
저 곧고 푸른 것이 정신이라니
잘 벼린 문장 하나 붙잡고
가슴을 스윽 베이고 싶다
피 흐르는,
내 몸이 꽃으로 피는 독 毒
천 년 후에도
벚꽃, 지다 / 곽경효
당신은 내게로 흐른다
먼 데서 온 새벽처럼 내 상처를 채우고
몸속 깊은 곳에서 강물이 된다
한낮의 햇살에 가슴을 덴 날
굳은 밤을 베고 잠 못 이루면
달빛은 물 위를 서늘히 건너가겠지
들숨 날숨 쉬는 동안 주름살도 파이겠지
물이 있던 자리에 가끔 마른 꽃잎이 떨어지고
나는 또 헛기침 몇 번 해보고
한사코 흐르는
가슴 한복판을 지나가는 당신
- 곽경효 시집 < 달의 정원 >
떨어지는 것은 눈부시다 / 곽경효
1
떨어지는 것이 눈부신 까닭은
쓸쓸한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화들짝 피었던 영산홍 꽃잎이
그림자를 지우며 지상으로 곤두박질 칠 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햇빛 속으로 사라질 때
가을걷이를 끝낸 논바닥에 한 움큼의 이삭이
노을 속에서 혼자 젖고 있을 때
2
구겨진 손수건 같은 나뭇잎 한 장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심히 스쳐간 네 눈빛이 보일 듯 말 듯
너는 이따금씩 가물가물 다가와
움켜쥔 손을 그만 놓으라 한다
제 손을 놓아버린 나무들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내 몸 속의 푸른 상처,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마저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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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효 시집 <달의 정원>, 시인의 말
허공을 만지고 있는 연초록 잎사귀들
나무는 슬픔이 마르도록 둥근 제 그림자를 따라 다녔나 보다.
반점처럼 번져 가는 푸른 상처를 저토록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열어주지 않으면 늘 갇혀 있는
이파리 하나 매달지 못하는 불모의 시간이 길다.
마음이 저리도록 오래 기다리면 내 몸에도 꽃이 필까.
봄이다. 천지가 환하다.
꽃나무의 맨살을 만져 본다.
내 몸 속 실핏줄이 하나 툭 끊어진다.
눈물 같은 꽃잎이 눈썹 끝에 매달린다.
가지 끝 햇빛이 반짝인다.
적요의 그늘 속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