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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여행9 -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고딕지구에서 왕의광장을 보다!
2018년 5월 17일 타라고나 에서 기차로 바르셀로나 산츠역 에 도착해서 L3 호선 지하철을
타고는 파랄렐역 Paral-Lel 에 내려 푸니쿨라와 케이블카를 타고 몬주익성 과 올림픽
공원 및 까탈루냐 미술관을 보았는데..... 오늘 5월 18일 오후에 프랑스로 넘어 가기
전에 바르셀로나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리세우역 Metro Liceu 에 내립니다.
보행자 전용 람블라스 거리 Ramblas 를 구경하고는 골목길에 피 광장 Plaça del Pl. 을 지나
산 펠리페 네리광장 Plaça de Sant Felip Neri 을 거쳐 사람들이 모여 민속춤 사르다나
를 춘다는 새광장 Plaça Nova 을 보고 바르셀로나 대성당 카테뜨랄 Catedral 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한블록을 돌아가서는 아주 오래된 건축물이 보이니...... 바로 "왕의 광장"
Plaça del Rei 인데.... 여기 산타 클라라 거리에 3면이 벽으로
둘러쌓인 광장으로 정면 건물은 바르셀로나 백작겸 아라곤 왕의 왕궁 이라고 합니다.
정면인 파사드를 빠져 나가서 처음 만나는 방이 티넬의 방 Salo de Tinell 이며
이곳에서 첫번째 신대륙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콜럼버스 를 카스티야왕국
의 이사벨 여왕 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 두 가톨릭 부부 왕이
접견 했다고 하는데..... "카스티야 와 아라곤" 두 나라의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이베리아반도에 원주민들이 세운 나라가 무너진후 BC 900년경 켈트인 들이 피레네산맥
을 넘어 침입해 왔으며, BC 600년경에는 그리스인 들이 스페인 동부 해안지대
에 식민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BC 227년에는 카르타고인 들이 해안에
상륙했으며 BC 218년 로마 는 이베리아반도 동부 해안 타라코(타라고나) 를 점령합니다.
로마 점령시 이베리아 반도는 히스파니아(에스파냐) 라고 불렸는데... 로마는 루시타니아와
바이티카 및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3개의 주로 나뉘어 총독을 파견해서 다스리니
600년간 평화로운 로마제국 통치가 이어지다가 훈족과 게르만민족의 침입 으로 혼란에
빠지니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던 서고트족 이 AD 507년에 점령해 서고트 왕국 을 세웁니다.
게르만 서고트족 알라리크는 415년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에서 나라를 세운후 프랑스 남부
툴루즈 에 도읍했는데, 에우리크왕 때 에스파냐를 정복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507년
알라리크 2세가 프랑크왕 클로비스와 싸워 패사 하니 후계자들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를 통일하고 톨레도에 도읍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로마계 국민과의 융화를 합니다.
이후 아라비아에서 마호멧의 후예들이 일어나 다마스커스에 옴미아드왕국 을 세운후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제리와 모로코를 거쳐 서기 712년에 지중해 지브롤터 를
건너 서고트왕국을 멸망 시키고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링스 까지 칩입하는데 스페인은 이슬람 사라센의 지배가 700년간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슬람 왕국 알안달루스 도 영속한 것은 아니고 서로 분열하고 망하고 다시 왕국을
세웠으니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 - 후우마이야 왕조 - 무라비트 왕조 - 무와히드
왕조 - 나스르 왕조가 명멸을 거듭하며 영토는 기독교 왕국에 톨레도를 뺏기는
등 조금씩 남쪽으로 후퇴해서는 1492 년 망할 때는 남쪽 끝 그라나다 로 쪼그라 듭니다.
북쪽 피레네 산맥 아래에서는 험준한 산악지형 덕분에 기독교 소국 들이 몇개 일어났으니
그중에 첫 나라를 아스투리아스 왕국 이라고 부르는데 점차 힘을 길러 무어인들의
이슬람 왕국을 쳐서 조금씩 남쪽으로 밀어내니 국토 회복운동 레콩키스타 라고 불리웁니다.
가장 먼저 국가를 이룬 아스투리아스 왕국 은 게르만족 서고트 왕국의 장군이었던 펠라요가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 군대를 물리치고 스페인 북부에 왕국을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니...
왕위 계승은 선출제였고 가톨릭을 신봉하여 이베리아 반도 유일한 가톨릭 왕국 이었습니다.
이들이 추진한 것이 레콩키스타 라고 불리는 국토 회복운동으로..... 무슬림의 손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구해내어 가톨릭 통일왕국 을 세우는 것이 목표였으니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특성상 산지가 많기 때문에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라 계속적인 무슬림의 공격에도 점령당하지 않고 레온 왕국 으로 이어집니다.
이베리아반도 북서부에 레온 왕국 은 아스투이라스 왕국을 계승 했으며
910년 부터 1230년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는데 카스티야 레온,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지역의 일부를 지배 했습니다.
카스티야 왕국 은 1065년부터 1230년까지 유럽 중세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카스티야(Castilla) 라는 이름은 성채 (Castillo) 에서
유래 하였다는데...... 처음에는 9세기에 레온 왕국 동쪽의 카스티야
백작령 으로 탄생하였지만 서기 1065년에 카스티야 왕국 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그리고 나바라 왕국은 생략하고 카탈루냐와 관계가 있는 아라곤 왕국
을 보자면... 프랑크 왕국 이 피레네 산맥을 이슬람 무슬림 들에게서 탈환한후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변경백령 을 설치한 것이 아라곤 왕국의 시초 이니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쇠락한 후에 변경백(아라곤) 은 나바라 왕국 의 통치 아래로 들어갑니다.
1035년 나바라 왕국의 막내 왕자 라미로 1세가 국왕 을 자처했으며 1076년 나바라 국왕 산초
4세가 동생들에게 암살당하자 카스티야 국왕과 나바라 왕국의 영토를 분할 하였는데
아라곤 왕국 은 언어적으로는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바르셀로나등 카탈루냐 지방과
그 방언을 사용하는 발렌시아 지방과는 달리 아라곤어 라는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라곤 왕국 은 12세기에 카탈루냐공국(바르셀로나) 과 연합하여 지중해로 진출을 시도해
이슬람 무어인들이 다스리던 마요르카섬 을 손에 넣었고, 13세기에는 프랑크왕국
지배권에 속한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를 복속하면서 왕국의 번성기를 누렸습니다.
14세기 아라곤 왕국 은 바르셀로나 백작령(카탈루냐) 과 통합한후 아라곤 연합왕국이
되어 지중해 깊숙히 진출하여 그리스 아테네 공국을 점령 하였고, 15세기 남부
이탈리아를 관할하는 나폴리 왕국의 계승권 을 차지하였으며 이때 이탈리아 반도
피렌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르네상스 문화 를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469년 아라곤 왕자 페르디난도 는 카스티야 공주 이사벨라 와 결혼한후 왕위에 올라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며 레콩키스타를 완수 하고 1492년에는 남부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 왕국 까지 멸망시키고는 통합 에스파냐왕국의 탄생 으로 이어집니다.
그전에 레콩키스타를 통해 1118년 사라고사 를 함락시키고 수도를 옮겼으며 1151년에는
바르셀로나 백작령과 혼인 을 통한 국가통합을 이뤄내며 카탈루냐 지방을 통한
해양출구를 확보했고 1238년 이슬람 발렌시아 왕국을 멸망 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동부
지역을 석권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한때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을 획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혼인으로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를 병합한 아라곤 왕국도 이후 결혼 을 통해
카스티야국과 합쳐졌는데 그 주도권이 카스티야국의 마드리드 로 넘어가자
원래부터 해앙 세력 으로 부유한 바르셀로나와 타라고나등 카탈루냐인
들은 대륙의 마드리드가 주도하는 중앙정부에서 분리해 독립 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아라곤 왕궁 왼쪽에는 6층의 마르티왕의 망루 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산타 아가타
예배당이 그리고 왼쪽에는 아라곤 왕국의 고문서 보관소인 요크티넨궁이
있다고 하지만 여긴 관광객 출입을 허용하지 않으니 외관만 보는데 여러
무리 중에서도 학생들이 가이드나 선생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봅니다.
왕의 광장 바로 옆에 오래된 건물이 있으니 바르셀로나 역사박물관 Museu d'Historia
de Barcelona 인데 입장료가 아까운 울 마눌은 나 혼자 들어가라며 뒤로
물러나기로 들어가니 입장료가 없다기에 다시 나와서 마늘을 불러 함께 들어갑니다.
역사박물관은 15세기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건물로 1층에는 로마 시대의 성벽 과
도시 흔적이 남아 있으며.... 내부에는 지중해에서 흔히 보는 각종 도자기
들과 조각상에다가 그외에 카탈루냐 영토 확장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유물들을 둘러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열린 것이니 동아일보 조성하 기자가 이퀴토스(페루) 에서 쓴 “계피계곡은 없었다”
용맹한 여전사만 존재할뿐 위대한 오해로 빚어진 이름 ‘아마존’ 이란 기사가 떠오릅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당도했을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는 남미의 잉카
제국이었다. 그때 아메리카 대륙의 주민 수는 줄잡아 1억 명, 그중 잉카는
900만명 을 헤아렸다. 그 수는 이반 대제의 러시아, 오스만터키, 중국(명나라),
유카탄반도(멕시코) 아스테카 제국(500만 명) 보다 컸으니 그 잉카가 지금의 페루 다. ”
“그런데 아뿔싸, 제국 인구는 100년만에 900만에서 60만명 으로 격감했다. 잉카를
무너뜨린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1476∼1541) 등 유럽인이
가져온 천연두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 최대 잉카제국 정복의 필살기는
‘총 · 균 · 쇠’ 중에 ‘균(菌)’ 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아메리카엔 없던 말(馬) 과 철제무기로 무장한 기병, 대포와 총에 잉카가 굴복했다고?
아니다. 1532년 피사로 가 타완틴수유(잉카) 제국 수도 쿠스코 (1438∼1533) 에서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을 당시 제국은 이미 11년전 아스테카 제국을 몰락시킨
또 다른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 와 수하들에 묻어온 천연두의 창궐로 비실대고 있었다. ”
“잉카의 멸망은 1533년. 제국의 반격 까지 포함하면 엘도라도(황금의 땅) 를 찾아 안데스
고원을 헤집던 피사로의 쿠스코 무혈입성 6년만인 1539년이다. 1532년 잉카황제를
사로잡을 때 피사로의 병력은 168명. 반면 제국의 군대는 수만명 을 헤아렸다. 반격은
단 세번뿐. 그나마 무위에 그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는 제국의 분열 이다. ”
“붙들린 황제 는 금은보화를 내주며 목숨을 구걸하다 참수됐다. 황족은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하고 꼭두각시 황제 노릇하며 몰락을 앞당겼다. 부족도 정복자와 제국 양편 으로
갈려 이전투구를 벌였다. 7년간의 수탈과 분열. 그로인해 제국은 거덜났고 피사로는
손쉽게 정복자 가 됐다. 이후 피사로는 리마에서 식민지 건설에 매진하다 1541년 죽었다.”
“아마존강 이 세상에 드러난 건 피사로가 죽던 그해, 주역은 형 대신 쿠스코를 통치하던
피사로의 막내동생 곤살로 피사로 (1510∼1548)다. 또 다른 엘도라도 ‘계피계곡’을
찾아 떠난 그는 수로 탐험 도중 우연히 아마존강에 들어섰다. 키토(에콰도르) 에서
시작된 탐험은 나포 강을 따라 아마존 강과 합류하는 이키토스 (Iquitos) 로 이어졌다. ”
“그 즈음 식량이 바닥났고 부사령관 오르레야는 먹을 것을 찾아 정글을 헤매다가 한
원시부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여자 였고
강력하게 활 을 쏴댔다. 이게 이 물길을 ‘아마존(Amazon)’ 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이다. 아마존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용맹한 여인 부족 으로 활을 잘 쐈다. “
“하지만 오르레야의 ‘위대한 오해’, 이들은 아마존 유역 68개 부족중 하나인 야구아족
남자전사 였다. 오해는 이들이 맨몸에 걸친 옷 에서 왔다. 잘 말려 잘게 쪼갠 야자수
이파리를 치마 처럼 걸치고 얼굴에 빨간 칠을 한게 영락없이 여전사 로 비쳤던 모양이다"
"야구아족 은 아마존분지의 강변 정글에 20∼30가구 단위로 살고 있다. 그 수는
6만명. 지금도 긴 대롱에 넣은 독화살을 불어 사냥하는가 하면
채취와 농경 을 하는데 곤살로 피사로의 탐험대는 계피 를 찾아
아마존 강을 따랐고....... 이듬해 대서양에 흘러드는 강 하구에 도달했다.
아마존강은 이렇게 탐험에서 완벽하게 탐사됐다. 그러나 소득은 별무. 소문난 계피계곡은
없었고 잔뜩 기대했던 스페인 왕의 실망도 컸다. 탐험대의 보고는 이랬다. 찾긴
찾았는데 계피 맛의 다른 열매 라고. 계피는 애초부터 없었다. 계피는 인도가 원산지 다.”
“곤살로 피사로 는 아마존 탐사의 주역임에도 역사에 ‘잉카몰락의 원흉’ 으로 지목된다.
왜냐면 쿠스코를 곤살로 에게 맡기고 리마 건설에 매진하던 피사로에게 ‘제국붕괴’
는 계획한 목표가 아니어서다. 제국의 몰락은 곤살로의 망나니짓으로 앞당겨졌다.
꼭두각시 황제 망코 잉카에게 오줌 을 뿌리고... 왕비를 겁간하자 민중봉기 가 일었다."
"그 틈을 타 망코 잉카가 탈출 했고 그는 군대를 수습해 쿠스코에 이어 리마 까지 진격해
피사로를 위협 했다. 그리고 결과는 잉카제국의 몰락 (1539년). 그리고 그 2년과
4년후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망코 잉카도 각각 부하에게 암살된다. 반면 곤살로 는
형을 대신해서 페루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데 아마존 탐험은 그해 (1541년) 시작됐다. ”
“내친김에 좀더 밝히면 잉카를 몰락시킨 피사로 형제는.....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킨
코르테스 와 7촌 형제 다(코르테스의 외할아버지가 피사로의 증조할아버지),
결국 잉카와 아스테카 두 남미 제국은 가난한 시골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신대륙에서 황금에 눈이 멀어 날뛰던 7촌 형제 에 의해 세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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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쾌락도 지혜도 학문도,
그리고 미덕도,
건강이 없으면
그 빛을 잃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몽테뉴]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요? 건강.....
만사에 앞서 건강이지요!
즐거운 시간입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지내세요
어느새 겨울이 왔으니......
이제 봅도 멀지 않은 듯 합니다.
바르셀로나도 가보고싶은도시면서 유서깊은곳입니다 마드리드하고 같이 가고싶은곳이 바르셀로나입니다
피사로의 잉카제국 점령과정, 들어볼때 마다 기가 찹니다. 잉카제국과 고대문명,
잉카의 유물을 가지고 만든 머리에 쓰고 있는 스페인왕의 왕관, 그 왕관은 또한 대중을 심리조종하는 용도라는것,
세계사가 오늘날까지 흘러오게 된, 에너지의 한 부분 흐름 요약을 잘 읽었습니다.
스페인여행갔을때는 세계사 공부도 좀하고 갔어야 되었는데, 싶더군요.
그러나 여행은 여행이고, 올리브밭 나무 구경한것만으로도 대만족하고 요즈음도 가끔 꾸불텅 굽은 올리브 나무와 맑은 하늘 생각하면서 그때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