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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르코 12,38-44
+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우리 형제자매님들, 저 믿습니까? 신뢰합니까?
그런데 제가 하는 어떤 말에 대해 믿지 않으시는 분이 있어요.
첫째, 제가 아무라 아프다고 해도 건강해 보인다면서 믿지 않아요.
둘째, 돈이 없다 해도 신부님은 부자일 것이라면서 믿지 않아요.
셋째, 내가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60이 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믿지 않아요.
제가 38년간 1년에 100회 이상 피정 강사를 하고, 책, CD 강론 테이프 등
내 수입이 될 수 있는 물품이 있으니 부자라 생각할 수 있죠.
정말 어느 신부님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돈의 축복도 받았죠.
그런데 저는 어릴 때 돈 걱정을 하고 자란 집이 아니어서인지,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지금 제 통장에는 몇백뿐인데, 그 돈이 어디로 갔다 생각해보니, 부임지마다 일이 있어 모두 집어넣은 거예요.
또, 진천, 감곡에서는 성서 필사해오면 금반지를 해드렸는데, 8년간 7억 5천 6백 정도가 나갔어요.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어요? 본당에서 나왔겠어요?
또 감곡은 빚만 30억, 이자가 매달 2800 여 만원이 나왔어요.
벌어온 족족 이자로 나갔죠.
그런데 처음에는 이것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좀 서운하고 왜 이해 못 하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그 말을 듣는 것이 축복이에요.
늘 건강해 보이고, 늘 부자처럼 보이고, 늘 젊어 보이니 이런 축복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누가 신부님 건강하시냐 물으면 ‘응, 난 건강밖에 없어. 최고야.’하고,
신부님 돈 많으시냐 물으면, ‘응, 가진 것 돈밖에 없어.’ 이렇게 대답하기로 작정했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가, 며칠 전 강론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났어요.
제가 살 집을 지어야 하잖아요?
나중 공지 사항에 이야기하겠지만,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과수원 하나 동생이 산 것이고 동생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인데 그것도 안 믿어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것, 궁상맞아 보이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물론 차원은 다르지만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을 하죠.
예수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받으실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이 로마군인들 싹 부수시고 다윗의 영광을 보리라고 생각했잖아요?
제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묵상이 되더군요.
혹시 돈이 필요하신 분, 제가 은행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웃음)
오늘 독서에는 사렙타 과부의 이야기와 복음에는 과부의 봉헌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렙타 과부는 그날 먹을 양식을 모두 손님에게 접대하고, 과부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하죠.
이렇게 독서와 복음이 연결되어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에 숨어있고, 신약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이 오시어서 하신 말씀이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 조금씩 요구하시나요, 확실하게 주기를 원하시나요?
확실하게 주기를 원하시죠.
‘네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고’ 모두 달라시는 거죠.
8대 독자 외아들 잡아다 신학교에 넣으시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 수녀원으로 끌고 가시잖아요.
또 어떨 때는 헤어지기 싫은 사람과 사별도 합니다.
하느님은 무엇인가 요구하실 때 남기지 않고 다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이 확실해요.
하느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독한 분이세요.
그러나, 하느님의 이런 철저한 요구가 나중에 보면 우리에게 축복으로 바뀌어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분이 달라고 하시면, 주기 싫고, 조금만 주고 싶고, 찬장에 숨겨두고, 다락에 숨겨둔 후
‘이것이 내가 가진 것이 전부입니다.’ 하죠.
‘마지못해서 하지만, 그래 이판사판이다.’ 하며 숨겨놓은 다 꺼내서 봉헌하고, ‘주님, 저 알거지 되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생각지도 못한 축복이, 또 내가 못 받더라도 자손들한테까지 축복이 가죠.
제가 피정 중 수도 없이 말한 아브라함 이야기 기억하시죠?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은 때가 70대, 80대도 아닌 100살이었어요.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데, 하느님이 번제물로 바치라 하시죠
처음부터 주지나 마시지, 어떻게 아들을 죽여 창자를 꺼내 놓고 불에 태워요.
이 끔찍스러운 요구에 아브라함은 순명하지요.
칼을 빼서 들었어요.
칼을 빼서 만지작만지작하며 하느님이 됐다고 하시길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만지작거리면서 하느님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철회하시길 기다리는 사람을 우리는 종교인이라 부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잔머리 굴리지 않고, 대차대조표 만들어 손익계산하지 않아요.
‘그래, 내가 피눈물은 나지만, 그분이 주신 자식, 그분이 달래니 드려야지’ 하며 칼을 빼든 순간,
천사가 ‘멈춰라.’ 하죠. 그러면서 ‘이제야 내가 너의 믿음을 알았다.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만큼 많을 것이다.’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내가 미쳤어?’ 하면서 이사악을 데리고 도망쳤다고 합시다.
그리고 며느리를 보았다고 합시다.
하지만, 만일 하느님이 그 며느리의 태를 막으시면, 후손은 이사악에서 끝나는 거죠.
그러나 엄청난 순명을 했기에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지 않습니까?
노벨상부터 경제,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탑입니다.
실제 유대인 평균 아이큐는 94로 120인 우리나라보다 낮아요.
나 혼자 살다 죽으면 그 뿐이지가 아니고,
내가 보지도 못할 200년 300년 후의 자손들한테까지 내가 하느님 앞에 어떻게 하고 살았는가가 영향을 준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계산과 인간의 계산은 다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하나 있는 아들 봉헌하면 무자식이 되는 것이지만,
하느님 계산으로는 하나 있는 아들 봉헌해도 그 후손이 백만이 되고 수천만 명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만 따지면, 절대 봉헌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사렙타 과부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아까운 그 귀한 음식을 엘리야 예언자에게 드리고,
이 때문에 그 후부터 그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아 대흉년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나옵니다.
만일 사렙타 과부가 엘리야가 하느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지만 주린 자기 배부터 채웠다면,
자기가 먼저 먹고 엘리야가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00프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시죠.
부자들은 으스대며 큰돈을 헌금함에 넣었지만,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죠.
렙톤 두 닢, 지금 돈으로 하면 1000원 조금 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과부가 자기의 전부를 마친 것을 알아채시죠.
그럼, 저녁 먹을 양식 살 돈을 바친 그 과부는 그날 저녁밥 굶었을까요?
아니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어느 때보다 배불리 먹이셨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실 때 제대로 봉헌하지 않으면 대개 마귀에 놀아납니다.
그놈이 우리를 백배 천배 뺏어가요.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지 않을 때는 결국 자기 것도 안 되고 마귀 것이 되어버려요.
엉뚱한 놈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뺏기고 사기당하죠.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한다 해서 손해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고,
오히려 봉헌을 통해 내 인생과 재산이 지켜진다는 축복의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땅의 십 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또 말라키서 3장 10절에는 ‘십일조를 바치고 나를 시험해 봐라. 내가 복을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풍성히 주겠다.’
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십일조의 은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쓰고 남은 것을 바치려 하니 결국은 바칠 것이 없어요.
먼저 다 쓰고 나니, 바칠 것이 없고 또 바치면서 아까워합니다.
바칠 때는 내 심장이나 허파를 떼어 하느님께 바친다는 마음이 봉헌의 오염되지 않은 정신입니다.
또 그렇게 바치면 신이 나고 재미있어요
찌꺼기를 바치니 신앙이 부담될 뿐입니다.
제가 피정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어요.
헌금할 때 신자들을 보면 지갑에서 돈 찾느냐 바빠요.
그런데 오만 원짜리만 자꾸 손에 잡히면, 옆에 사람에게 오천 원만 빌려달래요.
저 그런 사람 보았어요.
올바르고 제대로 봉헌을 하지 못하면 신앙은 부담이 되고 기쁨이 없어요,
내가 시골 본당에 있을 때예요.
부임하고 주일 미사를 드리는데, 참석하신 분들의 얼굴이 첫째 주에도 둘째 주에도 늘 죽어 있었어요.
강론 때 그분들에게 맞춰 재미난 이야기를 해도, 슬픈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어요.
제 강론이 졸리는 강론은 아니잖아요?
또 본당 일을 시켜도 눈치만 보고, 마지못해서 하는 어두운 표정이었어요.
넋 나간 사람의 표정, 이상해서 원인을 한참 찾았어요.
처음에는 시골 생활이 고달프고 힘들어 기쁨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원인이 아니었어요.
그분들이 봉헌을 안 하고 사시는 거예요.
30년 전 이야기지만, 헌금을 보면 제일 큰돈이 천 원이에요.
그리고 일년내내 교무금을 안 내다가 추수하고 수매하고 나면 내시는데, 일 년 치 교무금을 만원, 많이 내야 이만 원예요.
자기 머릿속에는 한 달에 교무금 천 원씩으로 계산되어 있던 거죠.
그곳은 가난한 동네가 아니에요.
추수 끝나면 관광차 대절해 여행 다니시는 분들이죠.
제가 그때 깨달았어요.
아, 이분들이 기쁘지 않고 마지못해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구나!
제가 신자분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이 죽어 있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성당을 외상으로 다니기 때문입니다.’ 했어요.
외상으로 다니니 늘 불편하고 얼굴이 빚쟁이같이 떳떳하지 못하죠.
그러니 강론이 뭐가 재미있겠어요?
그래서 제가 신자들에게 ‘내년부터는 맞돈 내고 성당 다닙시다.’ 했어요.
맞돈 이란 외상의 반대말로 상품을 거래할 때 즉시 계산하는 것을 말해요.
신자들이 막 웃어요.
그러더니 교무금으로 한 달에 만 원 적던 사람들이 오만 원 적기 시작하고,
추수 후가 아닌 매달 봉헌하면서 본당 재정도 원활히 돌아가고, 또 주변에 본당 이름으로 자선도 베풀 수 있었고,
시골 공소를 위해 봉고차도 살 수 있었고, 또 철수했던 수녀님까지 모실 수 있었어요.
십일조가 뭔지 깨닫기 시작했고, 철저히 십일조를 봉헌하는 신자들이 35프로를 넘어서기 시작했죠.
바로 옆에는 개신교회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주보가 나가면 그전에는 창피했죠.
우리 신자수는 이천 명이 넘고, 그쪽은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120명 정도였지만,
봉헌금은 우리보다 10배 15배가 넘었거든요.
나중에 그 교회 목사가 차 한잔 마시러 와서 우리 주보를 보고 ‘천주교 신자분들 회개하셨나 봐요.’ 해서,
‘아니, 그분들이 얼마나 착한 분들인데, 내가 불씨를 지펴드렸더니 제대로 봉헌하는 거지,
우리가 하면 개신교와 비교될 것 같아?’하면서 으스댄 적이 있었어요.
아무튼 그때 가장 큰 변화는 신자들의 죽은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고 웃음과 평화가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신앙이 즐거우니 지나가다 성당만 봐도 그냥 즐겁고, 주일이 기다려지는 거죠.
왜? 빚쟁이가 빚을 청산했기 때문에.
외상으로만 다니다가 외상값을 다 갚아서예요.
여러분들 냉담한 분들의 45프로가 교무금, 건축금 약속한 것을 못 내는 것이 시작이래요.
신부님을 포함, 아무도 뭐라 이야기하지 않는데 자격지심인 거죠.
교무금도 몇 달 밀리면 목돈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성당에 자꾸 외상값 쌓아놓지 말고 맞돈 내고 사셔야 합니다.
외상 신자, 맞돈 신자, 표현이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여러분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위선이요, 떳떳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속이고 있기에 기도에도 힘이 없어요.
아니, 기도를 놓쳐버리고 말아요.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은총의 맛도 체험할 수 없지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축복은 그 출발점이 봉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어도 십일조가 어려우면, 이십 분의 일조라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성이나 성의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당에 나와도 여전히 기쁨이 없을 겁니다.
봉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했죠?
시간의 봉헌, 물질의 봉헌, 육신의 봉헌.
내가 물질로 십일조 못하면, 성당 화장실 청소하면 육신의 봉헌 하셔야지요.
빗자루 들고 성당 마당이라도 쓸어야지요.
또 물질의 봉헌도 육신의 봉헌도 어려우면, 잠자는 시간 줄여서 어려운 사람 위해 묵주기도라도 해야지요.
오늘 과부의 헌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늘 아름다운 봉헌을 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봉헌을 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 원동력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왜 봉헌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 등 대중매체로 훌륭한 신부님들 강론 들으면서 교리도 새로 배우고 깨우칩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애씁시다.
여러분들, 영원에 하루를 더 붙여서 사랑합니다.
아멘
♣2021년 연중 제32주일 (11/0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름다운 봉헌을 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 원동력은 기도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