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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792年, 성시전도(城市全圖)속의 한성(漢城)은? [4편]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한성(漢城)?
2024년 02월 19일
○ 과연(果然), 〈『장안성(長安城)이 평양성(平壤城)』이고, 또 『평양성(平壤城)이 장안성(長安城)』이며, 『서도(西都)이고, 서경(西京)이며, 유경(柳京)이고, 낙랑군(樂浪郡)의 땅이었다』〉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성(漢城)과 장안성(長安城)과 유경(柳京), 호경(鎬京)”은, 또 무엇이고, AD 1,792年 임자년(壬子年) 4월에 지었다』라는 “성시전도(城市全圖)”속에서는 도성(都城)인 한성(漢城)의 물이 「東 流 直 瀉 鐵 窓 急 : 동(東)으로 흐르는 물 곧게 철창(鐵窓)에 쏟아지고」 라고 한 것은 또 무엇이라는 말일까?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를 이해(理解)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성(漢城)이 한양(漢陽) 땅에 있으며, 그곳이 “한성부(漢城府)”였으며, 한수(漢水)의 북안(北岸)에 있어 “한양(漢陽)”으로 한 것이 과연(果然)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한수(漢水)는 서(西)쪽으로 흘러가는 하천(河川)인가? 동(東)쪽으로 흘러가는 하천(河川)인가?〉
도대체 한수(漢水)는 어디에 있는 어느 하천(河川)을 말하는 건가? ‘18세기(世紀) 기록(記錄)을 근거(根據)’로 당시(當時)의 도성(都城)은 어디에 있었을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의 “조선국(朝鮮國) 왕성도(王城圖)”는, 〈“blog.naver.com : 우리역사의 진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떤 연유(緣由)로 궁궐도(宮闕圖)가 ‘일본(日本)의 와카야마 박물관(博物館)’에 있게 된 것인지를 모르겠으나, 참고(參考)할 만한 가치(價値)가 충분(充分)하다.
위의 궁궐도(宮闕圖)를 보면 :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대로 “산등성”에 축조(築造)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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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20권 / 아정유고12(雅亭遺稿十二), 응지각체(應旨各體) : 성시전도(城市全圖) 칠언고시(七言古詩) 1백운(韻) [출처(出處) : 한국고전번역원 DB]
• 조선(朝鮮) 후기(後期)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AD 1,741(英祖17) ~ 1793(正祖17)】의 문집(文集)이다. 《壬子四月命禁直諸臣製進。兵曹佐郞申光河,檢書官朴齊家,檢校直閣李晩秀,右副承旨尹鼎秉及公,兼檢書官柳得恭,同副承旨金孝建,前奉敎洪樂游,行左承旨李集斗,檢校直閣徐榮輔,前奉敎李重蓮,左副承旨李百亨,兵曹佐郞鄭觀輝,右承旨申耆,注書徐有聞,兵曹正郞鄭東幹,前檢書官李藎模。被選優等。六人之券。各有御評。公之券。書雅字。命六人。再試金剛一萬二千峰五十韻排律。: 임자년 4월에 금중에 번드는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했는데, 「병조좌랑신광하(申光河)ㆍ검서관박제가(朴齊家)ㆍ검교직각(檢校直閣)이만수(李晩秀)ㆍ우부승지윤필병(尹弼秉) 및 공과겸검서관(兼檢書官)유득공(柳得恭)ㆍ동부승지김효건(金孝建)ㆍ전봉교(奉敎)홍득유(洪得游)ㆍ행좌승지(行左承旨)이집두(李集斗)ㆍ검교직각서영보(徐榮輔)ㆍ전봉교이중련(李重蓮)ㆍ좌부승지이백형(李百亨)ㆍ병조좌랑정관휘(鄭觀輝)ㆍ우승지신기(申耆)ㆍ주서(注書)서유문(徐有聞)ㆍ병조정랑정동간(鄭東幹)ㆍ전검서관이신모(李藎模)」가 뽑혔다. 우등인 여섯 사람의 시권에는 각각 어평(御評)이 있는데, 공의 시권에는 아(雅)자를 썼다. 여섯 사람에게 명하여 두 번 금강일만이천봉(金剛一萬ニ千峯) 50운(韻) 배율(排律)을 시험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 「임자년(壬子年)」이라면 : 「정조(正祖) 14년 “AD 1,792年”이요, 4월이라고 했으니 4월 23일」을 말하는 것이다. 【壬子年은 : 1,792, 正祖 16年이다. 4월은 : 4月 23日】
이 “城市全啚。七言古詩。百韻”속에 “한경(漢京)인 한성(漢城), 한성부(漢城府)”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詩) 구절(句節)’로 표현(表現)되어 있는데, 한반도(韓半島)와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들을 살펴보면서 비교(比較)해 보면 의미(意味)있는, 재미있는 결과(結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서력(西曆) 「1,792년 4월 23일의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아래의 내용(內容)을 이해(理解)하려 한다면 좋은 결과(結果)가 나오지 않을까 사료(思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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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금척(金尺)의 산하(山河) 일만(一萬) 리가 / 金 尺 山 河 一 萬 里
➊ 「금척(金尺)」 : 금척무(金尺舞]) [출처(出處) : 한국무용사전] : 《조선 태조 2년인 1,393년에 정도전이 만든 춤이다. 조선의 제1대 임금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꾸었던 꿈에서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는데, 그것이 머지않아 국왕이 될 것이라는 계시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악정재(唐樂呈才)로,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다. 몽금척(夢金尺) 또는 금척(金尺)이라고도 한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➋ 「일만리(一萬里) 산하(山河)」 :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1 만리(萬里)”를 “한반도 주위(周圍) 곧 둘레를 모두 합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식(式)으로 계산(計算)한다’라면 :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몇 만리(幾於萬里)” 또는 “수만리(數萬里 : 幾於萬里)”는, “열도(列島)와 대륙(大陸)”의 땅까지를 포함(包含)하는 건가?
【惟我海東三面阻海一隅連陸輻員之廣幾於萬里.中略.其十道一曰關內二曰中原三曰河南四曰江南五曰嶺南六曰嶺東七曰山南八曰海陽九曰朔方十曰浿西其所管州郡共五百八十餘.】【幾 : 몇 幾】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그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에게 물어보자!
1. 관내도(關內道)란 : 관(關)과 관(關) 사이의 땅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이 동서(東西) 1천여(千餘) 리(里)에 달하는 ‘관중(關中), 곧 관내(關內)의 땅’이라고 하였다. 이곳이 어딘가?
2. 중원도(中原道)란 : ‘넓은 들판의 가운데 땅’이라는 얘기다. 그곳이 충주(忠州) 땅인가? 충주(忠州) 땅이 넓고 넓은 들판(野)의 가운데 땅인가?
3. 하남도(河南道)는 : 하(河)의 남(南)쪽 땅을 말하는 것이냐? 하(河)란 황하(黃河)를 일컫는 말이 아니었던가?
4. 강남도(江南道)는 : 강(江)이란 “장강(長江)”을 말하는 것이고, 그 남(南)쪽 땅을 강남(江南)이라고 하지 않나?
5. 영남도(嶺南道)란 : 차령(車嶺) 이남(以南)인가? 죽령(竹嶺) 이남(以南)인가? 추풍령(秋風嶺)인가? 아니면 대관령(大關嶺) 이남(以南)인가?
6. 영동도(嶺東道)는 또 무엇이냐? 영(嶺)이 남북(南北)으로 뻗어있으니 그 동(東)쪽을 칭하는 말이다. 그럼 손바닥만 한 땅 ‘대관령(大關嶺) 이동(以東)’을 말하는 건가?
7. 산남도(山南道)란 어떤 산(山)의 남(南)쪽 땅을 말하는 건가? 지리산(智異山) 남(南)쪽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땅이자, 그 당시의 ‘도(道)’라는 거대(巨大) 조직(組織)이 들어설 수 없는 조그마한 땅이다. 이곳이 광활(廣闊)한 땅이라서 옥토(沃土)의 땅이었다는 말인가?
8. 해양도(海陽道)는 또 어디냐? 말 그대로 바다를 등지고 있는 바다의 북(北)쪽, 산(山)의 남(南)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그곳이 어딘가? 전라남도(全羅南道) 땅을 말하나? 경상남도(慶尙南道) 땅을 말하나? 도대체 어디가 해양도(海陽道)란 말인가?
9. 삭방도(朔方道)란 또 어디냐? 삭방(朔方)이란 북방(北方)을 뜻하는 말이니, 그럼 평안도(平安道)를 말하나? 함경도(咸鏡道)를 말하는 것인가? 두리뭉실 삭방도(朔方道)인가?
10. 패서도(浿西道)란 패수(浿水)의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이니, 대동강(大同江) 서(西)쪽 땅이냐? 압록강(鴨綠江) 서(西)쪽 땅인가? 또 아니면 한강(漢江) 서(西)쪽 땅인가? ‘압록강(鴨綠江)·대동강(大同江)·한강(漢江)’ 등은 서(西)쪽의 서해(西海)로 들어가는 하천(河川)이다. 그럼 “패서도(浿西道)”는 “서해(西海) 심해(深海)에 있는 용궁(龍宮)을 말하는 것이냐?”
•〈한반도(韓半島) 곳곳에 ‘지’들 맘대로 심어 놓고, 이걸 말하고, 해설(解說)하는 자(者)들이 ‘사가(史家)’라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고, ‘역사학자(歷史學者)’라는 말은 “선조(先祖)들과 민족(民族)을 능멸(陵蔑)”하는 말이다. 이 시간(時間) 이후(以後)로는, 감히 사가(史家)니, 역사학자(歷史學者)니 하는 말을 ‘자칭(自稱)’하지 마라!〉
➌ 작몽록(昨夢錄)【昨夢錄,南宋·康與之】에서 말하기를 : 〈맹화유(猛火油)는, 고려(高麗)의 동(東)쪽 수천(數千) 리(里)에서 산출(産出)된다【猛火油者,聞出於高麗之東數千裏】고 알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➍ 해어(海語) 卷中【明,黄衷,撰] 物産 猛火油】: 〈맹화유(猛火油)는 고려(高麗)의 동(東)쪽에서 나온다. 【一云出髙麗之東盛夏日初出時烘日極熱則液出他物遇之即為火此未必然恐出樹津者是也】〉라고 하였고,
➎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宋,程大昌撰]】演繁露續集, 卷一, 髙麗境望 : 〈고려(高麗)에 속해 있는 고을(郡)로 강주(康州)가 있다. 고려(高麗) 남(南)쪽 5 천리(千里)에 있는데, 명주(明州)와 서로 마주하는 강주(康州)의 인접(隣接) 고을(郡)이 무주(武州)인데 이곳에서 귤(橘)과 유자(柚)가 산출(産出)된다【而高麗之屬郡有康州者又在麗南五千里乃與明州相對康之鄰郡曰武州自産橘柚】〉라고 하였다.
• 해동역사(海東繹史) 25권 食貨志 債貸 : 〈신라(新羅)의 재상(宰相)집에는 노비(奴婢)가 3천(千) 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소, 말, 돼지 등도 이와 맞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신라(新羅)를 왜 ‘진한(秦韓)’이라고 했는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說明)하고【➌+➍+➎】있는 정도(定度)의 “땅 크기”라면 「1 만리(萬里)∼수만리(數萬里) 산하(山河)를 가진 거대(巨大)한 제국(帝國)이었다」라고 당당(堂堂)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가 “거대(巨大) 제국(帝國)의 당사자(當事者)였다”라는 것이다.
•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 두만강(豆滿江) 이남(以南) 땅”이 고려(高麗) 때는 ‘몇 만리(萬里)’가 되고, 조선(朝鮮) 때는 ‘1 만리(萬里)’로 바꾸고, 만들 재주가 있다면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은, 미확인비행물체(UFO)를 마음대로 조종(操縱)하고 다니는 외계(外界)에서 온 외계인(外界人) 종족(種族)임이 분명한 것이다〉이게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➏ 삼봉집(三峯集) 1권 / 六言絶句 : 《進新都八景詩 : 기전산하(畿甸山河) 편을 보면 : 沃 饒 畿 甸 千 里 : 땅이 기름지니 산물이 많은 천리(千里)의 기전(畿甸)》이라고 노래하였다.
곧 “한양도성(漢陽都城)이 곧 기전(畿甸)의 땅에 있으니, 이곳이 천리(千里)이다.”라는 뜻이다. 또한 “이곳이 관중(關中)의 땅으로 기내(畿內) 천리(千里)”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곳은, 임금이 직접(直接) 다스리던 말 그대로 직할구역(直轄區域)을 말하는 것인데, 옛 제도(制度)에서 말하기를 : 도성(都城)을 중심(中心)으로 각각 5 백리(百里)라고 하였으니, ‘동서(東西) 1 천리(千里), 남북(南北) 1 천리(千里)’의 넓은 땅을 말하는 것이다.
반도(半島) “남한(南韓) 102,762㎢”라고 하는데, “북한(北韓) 120,540㎢”라고 하였으니, 합(合)은, 겨우 223,302㎢일 뿐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기전(畿甸)”의 옛 제도(制度)에서, “동서(東西) 1천리(千里), 남북(南北) 1천리(千里)”는, 곧 160,000㎢다. 그렇다면 나머지 팔도(八道)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일까? 서해(西海), 동해(東海), 남해(南海)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일까?
➠ 〈한반도(韓半島)에서, 한양도성(漢陽都城)의 ‘기전천리(畿甸千里)=기내천리(畿內千里)’를 제외(除外)하면 : 관찰사(觀察使)가 나가 다스리던 팔도(八道)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이건 끔찍한 악몽(惡夢)이다.
『“고황제(高皇帝)의 조선(朝鮮) 땅”은, ‘관중(關中)의 땅=중원(中原)의 땅’과 ‘반도(半島) 땅’을 함께 가슴에 품을 수 있으나, “반도(半島) 땅은, 너무나 비좁아, 고황제(高皇帝)의 조선(朝鮮) 땅을 ‘십분의 일’도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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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한양(漢陽) 서울 황도 속에 번성하네. / 漢 京 翼 翼 黃 圖 裏
• ‘한경(漢京)’이라는 말은, ‘한양(漢陽)이 도성(都城)’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의 한강(漢江)이 한수(漢水)였다”는 확실(確實)한 논거(論據)있는, 고증(考證)이 될 만한 기록(記錄)이 없다. 그저 그렇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고, 추정(推定)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냐!
• 한반도(韓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동서(東西)의 폭이 매우 좁아 흐르는 하천(河川)이 시대(時代)에 따라 다르게 호칭(呼稱)하기 어려운 구조(構造)다. 왜냐하면 그 백성(百姓)들이 그 백성(百姓)들이기 때문이다. 군주(君主)는 역성(易姓)이 될 수 있으나, 그 땅의 백성(百姓)들은 똑같은 백성(百姓)들이었기 때문에 구전(口傳)으로, 구전(口傳)으로 전(傳)해져 와도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한수(漢水)나 한강(漢江)으로 추정(推定)한다”라는 설명(說明)은 너무 궁색(窮色)한 변명(辨明)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산(漢山)은 무엇이고, 북한산(北漢山)은? 남한산(南漢山)은? 한수(漢水) 때문에 만들어진 산(山)의 이름인가?
➊ 한산(漢山) : [출처 : 나무위키]에서는 말하기를 : 《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및 서울특별시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일대로 “여겨진다.” 온조왕 14년에 한산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는 기록과, 근초고왕 26년에 수도를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 역시(亦是) 추정(推定)이다.
➋ 한산(漢山) : 북한산(北漢山) [出處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 《서울특별시의 성북구 · 종로구 · 은평구 ·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835.6m). 본래 한산(漢山)이라 불렸는데 '큰 산'이라는 뜻의 ‘( )산'을 한자로 차음하여 표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그렇다면 본시 “한산(漢山)”이었는데, 이름을 바꿔 북한산(北漢山)이라고 하였다는 것인가? 그러면 본래 “큰 산”이라는 뜻에서 한자(漢字)로 차음을 했다면 그것이 “漢 : 은하수 한(漢)”자로 차음이 되는 건가? “큰 산(山)”이라면 “태산(泰山), 태산(太山), 대산(大山)”등의 이름을 차용(借用)하지 않고, 대륙(大陸)의 것을 가져다 붙였을까?
•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 “한(漢)”자를 검색해보면 : 형성문자
➠ 《“漢”자는 ‘한나라’를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나 “漢”자는 본래 ‘물 이름 한’이라는 뜻으로 먼저 쓰였었다. 漢자에 쓰인 “( )”자는 진흙을 뜻하는 堇(진흙 근)자가 변형된 것으로 여기에 ‘水’자가 더해진 ‘漢’자는 「진흙이 섞여 평야를 이루던 지역의 강을 뜻했었다. 이곳이 바로 양쯔강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한수(漢水)라는 곳이다.」 중국 한나라는 이 지역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국호를 ‘漢’으로 하였다. 이후 ‘漢’자는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한족(漢族)을 대표하는 글자로 쓰이고 있다.》라고 하였다.
‘홍자옥편(弘字玉篇)’에서는 : 「天 河 雲 : 은하수 漢」, 「嶓冢水名 : 파총수(嶓冢水) 이름 漢」이라고 설명(說明)한다.
• 결국(結局), “한산(漢山)이라는 산(山)은 없었다”라는 뜻이다. 그럼 “한수(漢水)”는? 대륙(大陸)의 강(江) 이름을 차용(借用)했다는 뜻이다.
➌ 한산기(漢山記) : [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통일신라시대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성덕왕대에 지은 지리지. 현존하지 않는다. 그 서명으로 보아 저자가 704년(성덕왕 3)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이 되었던 인연으로, 한산 지방의 풍물이나 사정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산주는 신라 9주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철원군(김화 포함)·평강군·이천군, 충청북도 동북부(남한강 유역)을 포함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산(漢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山)을 말하는 건가? 경기도(京畿道)에도 있고, 황해도(黃海道)에도 있고, 충청도(忠淸道)에도 있고, 강원도(江原道)에도 있어, 두리뭉실 “한산(漢山)”이라는 건가? 이건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거조해망(擧措駭妄)한 민망(憫惘)하기 짝이 없는 설명(說明)이다. 사가(史家)들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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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한 문안에 큰 도회지 / 黃 圖 一 案 大 都 會
역력히 펼쳐있어 손금을 보는 듯 / 歷 歷 鋪 敍 掌 紋 視
글 맡은 신하 그림에 쓰는 시 지을 줄 알아 / 詞 臣 解 撰 題 畫 詩
성한 일에 왕명을 받았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 盛 事 何 幸 承 恩 旨
동월이 부를 지은 것 조금 뜻에 맞고 / 董 越 作 賦 差 强 意
서긍이 그림을 만든 것 어찌 혼자 아름다우랴 / 徐 兢 爲 圖 豈 專 美
조선 만세의 꺾이지 않는 기초 / 朝 鮮 萬 世 不 拔 基
문물 번화한 것이 모두 여기에 있네. / 文 物 繁 華 盡 在 此
귀신이 아끼어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 鬼 祕 神 慳 若 有 待
홍황(鴻荒) 시대부터 원위를 말하리라 / 請 從 鴻 荒 說 源 委
오간(烏干)이 멀리 부아악에 올랐으니 / 烏 干 遠 上 負 兒 嶽
터 잡기는 온조(溫祚)로 부터 시작되었네. / 龜 食 粤 自 溫 祚 始
연(燕)나라의 석목은 천문(天文)을 응하고 / 燕 天 析 木 應 乾 文
한(漢) 나라 낙랑에도 지리를 상고하였다 / 漢 界 樂 浪 稽 地 理
➥ [3] 들으니 충숙왕(忠肅王)이 남경(南京)을 설치하였다니 / 聞 道 肅 王 設 南 京
➊ 옳은 말이다. ‘개성(開城)=송경(松京)’에서 볼 때, 한양(漢陽)은 분명 남(南)쪽에 있다. 그래서 충숙왕(忠肅王)이 남(南)쪽에 있는 한양(漢陽)을 남경(南京)으로 승격(昇格)시켰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충숙왕(忠肅王)은 남경(南京)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했나?
‘하심심’해서 남(南)쪽에 있으니 남경(南京)이라고 이름만 붙였다는 것인가? 남경(南京)으로 명명(命名)했다면 성(城)을 쌓고 궁궐(宮闕)도 건립(建立)했다는 말이 된다. 가끔 순행(巡幸)했다고 전해진다. 그 흔적(痕迹)이 있나?
➋ 좋다! 남(南)쪽에 있으니 “남경(南京)”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남(南)쪽, 남녁 땅에 있는, 남방(南方)에 있는 「경주(慶州)」는 어째서 「남경(南京)이나 남도(南都)」가 아니고, 「“동경(東京)”이 되고 “동도(東都)”」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說明)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개나 돼지’같은 백성(百姓)들은, 그저 알려주는 대로 외우고, 무작정(無酌定) 따르면 된다는 이야긴가? 따르지 못한다면 어쩔건가! 참 답답한 이야기다.
➌ 이러한 역사서(歷史書), 지리지(地理志), 문집(文集) 등에서 말해주는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동(東)쪽과 서(西)쪽이 수천(數千) 리에 이어져 있는 땅에서 있었던 옛 사실(史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맹화유(猛火油)는 고려(高麗)의 동(東)쪽 수천(數千) 리 밖에서 나는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液體)이다.』라고 설명(說明)하며 산출지(産出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땅이 한반도(韓半島) 땅이냐? 사가(史家)들도 이제는 정신(精神)을 좀 차려야 한다. 언제까지 헤맬 건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성부(漢城府) : 『팔영(八詠) 기전산하(畿甸山河)』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기름지고 풍요한 기전(畿甸) 천리(千里) 땅에, 안팎의 산하(山河)는 백두 겹일세” 하였다. 『기전(畿甸) 천리(千里) 땅이 어디에 있느뇨?』 참 답답한 이야기다.
옛일을 고려사에 증거할 수 있네 / 舊 事 堪 徵 高 麗 史
오행의 덕갖춘 언덕에 용루봉 궐을 짓고 / 龍 樓 鳳 闕 五 德 丘
왕이 때로 순행하였으나 미처 옮기지 못하였네. / 翠 華 時 巡 不 遑 徙
예전부터 좋은 터는 따로 주인이 있어 / 終 古 神 區 自 有 主
우리 선리의 잎과 뿌리가 번성하였네. / 奕 葉 蟠 根 我 仙 李
황제가 조선에 봉하는 것을 허락하여 / 靑 茅 帝 許 鰈 域 封
왕업을 정하고 금새를 주었네. / 奠 厥 鴻 基 錫 金 璽
화산 세 봉우리는 북진(北鎭)이 되고 / 華 山 三 朶 作 北 鎭
한수(漢水) 한 줄기는 남쪽에 둘렀도다. / 漢 水 一 帶 爲 南 紀
산천의 향배는 토규로 정하고 / 山 川 向 背 定 土 圭
도로의 원근에 수레의 제도도 같이하였네. / 道 里 遠 近 同 車 軌
주관 육익은 창업하던 처음에 / 周 官 六 翼 創 業 初
나라 일 경영하는 성인이 그것을 따랐다 / 建 國 經 邦 聖 人 以
➥ [04] 형세(形勢)는 주(周)나라 동도(東都)와 같고 / 形 勢 周 家 東 都 如
• 주(周)나라의 동도(東都)는, 낙양(洛陽)을 말하는 것이며, 한양(漢陽)의 형세(形勢)가 낙양(洛陽)과 같다는 말이다.
➥ [05] 수려(秀麗)하기는 한(漢) 서경(西京)에 비길 만하네. / 佳 麗 漢 代 西 京 擬
• 아름답고 수려(秀麗)한 것은 한(漢) 대의 서경(西京) 곧 장안(長安)에 견줄 만하다.
면악 남쪽에 위치를 경영하니 / 經 營 位 置 面 岳 南
왕자사는 곳이 웅장함이 저와 같구나. / 王 者 之 居 壯 如 彼
인물과 누대 세 가지 장관은 / 人 物 樓 臺 三 壯 觀
구양 사자가 적 궤에 놀랐네. / 球 陽 使 者 驚 弔 詭
좌편에 종묘, 우편에 사직 예전 제도를 따라서 / 左 廟 古 社 遵 古 制
➥ [06] 삼(杉)나무와 잣(柏)나무 빽빽하게 들어섰네. / 高 杉 老 柏 森 相 依
➊ 『삼(杉)나무와 잣(柏)나무가 한양(漢陽) 땅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라는 말이 정말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 있을까?
〈“삼(杉)나무” [출처 : 다음백과사전] 삼(杉)나무 : (식물) [Japanese cedar] 출처: 브리태니커 : 식물, 겉씨식물 ; Japanese redwood, peacock pine이라고도 함. 낙우송과(落羽松科 TaxodIaceae) 삼나무 속(―屬 Cryptomeria)에 속하는 하나뿐인 상록 침엽교목. 목재용으로 쓰이며 아시아 동부가 원산지이다. 키는 45m 이상 자라고 둘레는 4.5~7.5m이다. 나무는 피라미드 같은 모양인데, 가지가 줄기를 빙 둘러 빽빽하게 나고 옆으로 뻗는다. 삼나무는 흔히 동아시아에서 재 조림용이나 정원, 길가의 식수용으로 사용한다. 목재는 향기가 나고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며 배, 집, 다리, 가구, 큰 통, 장식용 조각품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잎으로는 향(香)을 만든다〉라고 하였다.
➡ 즉(卽), “Japanese redwood”라고 했잖은가! 곧 “왜(倭)”에서 나는 “붉은 나무”란 뜻이 아니던가! 한반도(韓半島)보다는 “열도(列島)에 많은 삼(杉)나무가 자라고 있다”라는 것이다. 반도(半島) 땅에도 자리기는 하지만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빽빽하게 늘어선 것은 소(松)나무일 뿐이다”라는 것이 옳은 설명(說明)이다. 아래를 보자.
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京都, 上” 篇을 보면 : 《是爲王京,屹立東鄙。奠以三角之嵯峨 : 왕경(王京)으로 동쪽에 우뚝 솟아 있으니, 높고 높은 삼각산(三角山)으로 자리를 정하였는데, 【➡ 三角山卽王京之鎭山, 勢最高, 王宮在其山腰。: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허리에 있다.】 山巓睥睨望之,㠍嶪如鉅齒。 蔭以萬松之蒼翠。: 그 산마루를 바라보매 여러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푸르고 푸른(싱싱하고 푸르른) 소나무(松)들로 뒤덮여 있다(蔭). 北聯千仞,勢豈止壓千軍;西望一關,路止可容一騎。: 북으로는 천 길이나 되는 형세가 연이어 있으니, 어찌 천 명의 군사만을 누를 뿐이랴? 서쪽으로 한 관문을 바라보면 그 길은 한 기마(騎馬)만이 다닐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곳 어디에 「삼(杉)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다」라는 설명(說明)이 있는가? 오직 「푸르고 푸르른 소나무(松)로 뒤덮여 있었다」라는 것이다. 또한,
➠ 〈三角山卽王京之鎭山, 勢最高, 王宮在其山腰 : 삼각산(三角山)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 산세(山勢)가 가장 높은데, 왕궁(王宮)은 그 산허리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산허리”는 어디를 말하는 건가? 【서두(序頭)의 조선국(朝鮮國) 왕성도(王城圖) 참조(參照)】
➠ ➊ 산허리 : 산(山)을 높이에 따라 3 등분하였을 때 중간(中間) 위치에 해당하는 부분(部分)을 말하는 것이다. ➋ 산허리(山허리) [국어사전] : 「1. 산 둘레의 중턱 2. 산등성이의 잘록하게 들어간 곳」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당시(當時)의 “한양(漢陽) 도성(都城) 궁궐(宮闕)”은, “산허리에 만들어져 있었다”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서울에 있는 “옛 왕조(王朝)의 궁궐(宮闕)”이 「산허리에 상존(尙存)하는가」라고 했을 때, “전혀 아니올시다”라는 답변(答辯)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전혀 다른 땅에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서울에 있는 궁궐(宮闕)은, 급조(急造)된 짝퉁이기 때문이다”
➡ 이런 설명(說明)은, 위에서 말하는 『“한도(漢都)=한경(漢京)”은,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 ‘한양(漢陽)=한성(漢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고증(考證)해 주는 자료(資料)다.
이 말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또한 반도(韓半島) 땅의 지리지(地理志)가 아니다」라는 증거(證據)다.
사직(社稷)에는 항상 단과 담을 깨끗이 하고. / 太 社 常 時 潔 壇 壝
청묘는 오랜 세월에 기지를 단단히 하셨도다. / 淸 廟 多 年 鞏 基 址
환하고 시원한 성 동쪽 모퉁이엔 / 高 明 爽 塏 城 東 隅
유궁을 짓고 공부자를 경건하게 제사하니 / 虔 祀 儒 宮 孔 夫 子
많은 선비들 공부를 익히고 / 濟 濟 靑 衿 肄 絃 誦
질서 있는 검은 장막에 제기(祭器)를 벌여 놓았네. /秩 (秩) 緇 帷 列 簠 簋
육조와 백사는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 六 曹 百 司 領 大 小
팔문과 사교는 멀고 가까운 곳을 통하네. / 八 門 四 郊 通 遐 邇
➥ [07] 팔만(八萬)여 민가는 오부(五部)가 통할하고 / 八 萬 餘 家 統 五 部.
➊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의한 도성(都城)의 호구(戶口) :
• 세종(世宗) 10년[AD 1428年] : 五部 : 호수(戶數) 16,921, 구(口) 103,328, 성하(城下) 10리 : 호수(戶數) 1,601, 구(口) 6,044
• 선조(宣祖) 39년 [AD 1,606 ] : 5부 호수(戶數) 12,965
• 인조(仁祖) 26년 [AD 1,648] : 5부 호수(戶數) 10,066, 구(口) 95,569
• 효종(孝宗) 08년 [AD 1,657] : 5부 호수(戶數) 15,760, 구(口) 80,572
• 현종(顯宗) 10년 [AD 1,669] : 5부 호수(戶數) 23,899, 구(口) 194,030
• 숙종(肅宗) 04년 [AD 1,678] : 5부 호수(戶數) 22,740, 구(口) 167,406
• 경종(景宗) 04년 [AD 1,724] : 5부 호수(戶數) 25,844, 구(口) 147,772
• 영종(英宗) 02년 [AD 1,726] : 5부 호수(戶數) 32,747, 구(口) 188,597 : 영조(英祖)
• 정종(正宗) 원년 [AD 1,776] : 5부 호수(戶數) 38,593, 구(口) 197,957 : 정조(正祖)
➋ 명치(明治) 33년[AD 1,931년] 초(初)의 한성부(漢城府) 호구(戶口) : 42,454호(戶) : 196,898구(口)라고 하는데, ➠ 위의 기록(記錄)은 壬子年【1,792, 正祖 16年】 4月 23日의 것이다. 도대체 뭔 말인가?
위에서 말하는 『팔만(八萬)여 민가는 오부(五部)가 통할하고 : 八 萬 餘 家 統 五 部』라는 구절(句節)의 “팔만(八萬)여 민가(民家)”는 어디에서 나온 숫잔가? 도무지 답(答)이 없는 이야기다.
1,726년의 도성(都城) : 호수(戶數) : 3만여(萬餘) 호(戶)
1,776년의 도성(都城) : 호수(戶數) : 3만9천여(千餘) 호(戶)
1,792년의 도성(都城) : 호수(戶數) : 8만여(萬餘) 호(戶)
1,931년의 한성부(漢城府) 호구(戶口) : 42,454호(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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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구방(49坊)은 세 저자를 끼고 있네. / 四 十 九 坊 控 三 市
빙 둘러 돌로 쌓은 성 금구와 같으니 / 週 遭 石 城 似 金 甌
이것이 왕경의 대략이로다. / 此 是 王 京 大 略 耳
➥ [8] 오백 년의 허다한 연혁들은 / 許 多 沿 革 五 百 年
➊ 『오백년(五百年)』 : 이때가 1,792년이라면 :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역성(易姓)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것이 “AD 1,392”년(年)이다. 따라서 이때는 조선(朝鮮) 개국(開國) 후(後) 딱 “400”년(年)이다. 무슨 얼어 죽을 “500”년(年)이라는 말이 나올까?
➋ 『許 多 沿 革 五 百 年 : 오백(五百) 년(年)의 허다(許多)한 연혁(沿革)들은』, 라고 노래할 수 있으려면 : “개국(開國) 후(後) ‘4백여(百餘) 년(年)’이 지난 후(後)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가능성(可能性)은 있다.
”주원장(朱元璋)의 명(明)나라가 AD 1,368년(年)”에 개국(開國)했다“하였으니, “424”년(年)이다. 이에 따라 임금(君主) 앞에서 호들갑을 떨며, ‘500’년(年)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00”년(年)을, “500”년이라고 노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結局) 이런 이야기는, “조선(朝鮮) 개국시조(開國始祖) 고황제(高皇帝)”는, “이성계(李成桂) 혹은 주원장(朱元璋)이냐? 같은 사람(同人) 하나를 두 사람으로 조작(造作)한 것인가?” 하는 원점(原點)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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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여기서만 볼 것이 아니네. / 未 必 於 斯 觀 止 矣
거듭 밝히고 흡족하여 성스런 임금이 서로 잇고 / 重 熙 累 洽 聖 繼 神
하는 일마다 새롭고 새로워 마지않았네. / 制 作 新 (新) 殊 未 已
다시 그림을 보고 자세하게 논하니 / 復 向 圖 中 論 仔 細
번화한 모든 물건 눈앞에 보이네. / 萬 品 紛 然 歸 點 指
옛날에 청명상하도를 보았는데 / 昔 見 淸 明 上 河 圖
눈 비비며 호연히 변수(汴水)인가 의심하였네. / 拭 眼 渾 疑 臨 汴 水
천문 만호(萬戶) 한(漢) 나라 궁궐의 그림을 / 千 門 萬 戶 漢 宮 畫
협제씨가 사모하고 부러워했다 들었는데 / 艶 羨 曾 聞 夾 漈 氏
한성 가운데 태어나고 자랐으니 / 生 於 長 於 漢 城 中
직접 보고 어찌 기쁘지 않으랴 / 目 擊 犁 然 寧 不 喜
보고 펼칠 때마다 한 잔씩 마시어 / 一 覽 一 披 進 一 觴
하늘 청명하고 해 길면 다시 반복한다. / 天 晴 日 永 聊 復 爾
➥ [09] 구천구백칠십 보(步)의 / 九 千 九 百 七 十 步
흰 성벽 띠와 같이 둘러 있네 / 粉 堞 如 帶 明 千 雉
➊ 『粉堞』이란 뜻이 뭔가? “분첩(粉堞)”이란 “석회(石灰)를 바른 성가퀴(城--) 즉(卽) 성첩(城堞)”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흰 성벽(城壁) 띠와 같이 둘러 있네.”라고 한 것이다. 곧 ‘성(城)가퀴’란 성벽(城壁)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하는 것인데, “치첩(雉堞), 분첩(粉堞), 성첩(城堞), 타첩(垜堞), 여첩(女牒)”이라고 한다.
곧 ‘성(城)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하는 것인데, ‘이 담에 석회(石灰)를 발랐으니, 흰 성벽과 같이 보인다’라는 뜻이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벽(城壁)에도 이렇게 성(城)가퀴에 석회(石灰)를 발라 흰 성벽(城壁)이 띠처럼 보이고 있는가?
“1보(步)”는 ‘1.386’m이니, 「9,970보(步) : ‘13.818’km」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한성(漢城) 도성(都城)의 길이(周)를 말하는 것인데, 이때가 「AD 1,792 年度」라고 하였다.
• 9,970보(步)는, 13.818㎞, 약 33리(里)다.
➋ 新增東國輿地勝覽 京城 : 京城。我太祖五年,用石築之。世宗四年改修。周九千九百七十五步,高四十尺二寸。: 중종(中宗) 25년(AD 1,530년) 완성(完城) : 역시(亦是) 주(周) : 9,975보(步)라고 하였다.
• 9,975보(步)는, 13.825㎞, 약 33리(里)다. 높이(高)는, 주척(周尺)으로는 9.70m 고려(高麗), 조선(朝鮮)의 ‘척(尺)’으로는 ‘13m’를 나타낸다.
➌ 世宗實錄地理志 : 都城周回九千九百七十五步。: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라고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AD 1,432年’에 완성되었다.
• 9,975보(步)는, 13.825㎞, 약 33리(里)다.
➍ 東國輿地志 : 我太祖康獻王五年,用石築之。世宗四年改修。周三十三里七十五步,高四丈。라고 하였으니, “33리 75보라면 : 약 13.8∼14.0km”를 말하는 것이다. 유형원(柳馨遠)에 의하여 “AD 1,656”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 주(周) ‘33里75步’라는 것은 곧 13∼14㎞, 약 33리(里)를 말하는 것이다.
➠➠➠ 위의 글 “➊+➋+➌+➍”에서 말하는 것은, 태조(太祖) 5년에 쌓고, 또 세종(世宗) 4년에 개수(改修)를 했는데, 이때 성(城) 주위가 “9,970∼9,975보(步)”라고 하였으니 약(約) 13.7 ∼ 14㎞를 말하는 것이고, 약 “33”리(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가까워질수록 도성(都城)의 길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특히 1,800년도 이후(以後)의 일로, 『쌓지도 않은 도성(都城)의 길이가 늘어난다』라는 것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 촌(寸)·척(尺)·보(步)·장(丈)·리(里)·식(息) : 촌(寸) = 10촌(寸) : 1척(尺) = 23.1cm / 고려(高麗)·조선(朝鮮) = 1척(尺) : 32.21cm / 보(步) = 6척(1.386m) / 1장(丈) = 10척(2.310m) / 180장(丈) = 1리(415,8m) / 30리 = 1식(息) (12.474km)】
❺ 大東地志 : 都城 : 太祖五年築都城, 周圍九千九百七十五步。 世宗三年改築都城。 周圍一萬四千九百三十五步。 以周尺量之, 爲八萬九千六百十尺 ; 以里作之, 爲四十一里一百七十五步。 高四十尺二寸。 : 김정호(金正浩)에 의해 “AD 1,866年”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은 : 《위의 글 “➊+➋+➌+➍”에서 말하는 것은 : 태조(太祖) 5년에 쌓은 도성(都城)의 길이는 기록(記錄)이 되어있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세종(世宗) 때에 개수(改修)한 것까지 도성(都城) 모두가 “9,975보(步)”」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말하는 것은, 본래(本來) 태조(太祖) 5년에 쌓은 것과 세종(世宗) 때에 개수(改修)한 것까지 모두가 “14,935보(步)”라고 큰 차이(差異)를 나타내고 있다.
• 14,935보(步)는, 본시 9,975보(步)에서 이곳저곳이 무너져내렸으므로 개수(改修)한 것이다. “4,960보(步)”를 누군가가 증축(增築)했다는 것이다. 누가 언제, 증축(增築)을 했다는 것일까?
• 한편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자세(仔細)하게 보면 : 『영종(英宗) 45년【AD 1,769年】에 『북변(北邊) 4,850보(步), 남변(南邊) 5,042보(步), 동변(東邊) 5,042보(步) 합(合) 14,935보(步)』를 무너져 내렸으므로 수축(修築)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대로라면 증축(增築)한 것이 아니라 수축(修築) 즉 ‘고쳐 쌓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영종(英宗) 47년【AD 1,771】에 성을 나누어 세 군영(軍營)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즉(卽) 《英宗四十五年, 尺量都城, 管于各軍門, 隨圮修築。 自肅靖門東邊至敦義門北邊四千八百五十步, 女堞一千五百十四, 城廊二十四。 管訓鍊都監. ○ 自敦義門北邊至光煕門南邊五千四十二步三尺, 女堞一千五百四十二, 城廊二十四。 管禁衛營。 ○自光煕門南邊至肅靖門東邊五千四十二步三尺, 女堞一千五百九十八, 城廊二十七, 雉城六。 管御營廳。 》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14,935보(步)라는 기록(記錄)은 잘못된 것이고 본다. 합산(合算) 과정(過程)에서의 오류(誤謬)로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증축(增築)한 것이 아니라, 도성(都城) 대부분(大部分)이 무너져 내렸으므로 수축(修築) 곧 “고쳐서 다시 쌓았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이가 14,935보(步)라고 때문이다.
➏ 輿圖備志 都城 : 太祖五年築都城。 世宗三年改築。 周四十一里一百七十五步, 高四十尺二寸 : 최성환(崔瑆煥) 등에 의해 “AD 1,853年”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 이곳에서도 세종(世宗) 때에 개축(改築)한 것이 「41리 175 步」라고 하였다.
➐ 東國輿地備考 : 경성(京城) : 성곽(城廓) :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다. 세종 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4천9백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 고종(高宗) 초의 저자(著者) 미상(未詳)이다.
이곳에서도 세종(世宗) 때에 고친 것【개수(改修)】이 「14,935보(步)」라고 하였다.
➠ 위의 글 “❺+➏+➐”은 AD 1,800년(年) 이후(以後)의 것으로 「14,935보(步)」라는 것이 어디에 나온 숫자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혹(或)은 내성(內城)인 황성(皇城)까지를 포함한 것일까? 14,935보(步)는, 약 20.700㎞, 약 49리(里)에 해당(該當)되는데, 여도비지(輿圖備志 都城) 편에서는 “41리(里)”라고 하여 같은 것이 없고 제각각이다.
➠ 도성(都城) 주위(周圍) 1,800년도 이전(以前) : 약(約) 13.7 ∼ 14㎞를 말하는 것이고, 약 “33”리(里)를 말하고 있다. ➡ 높이(高) : 40척(尺) - 12.884m, , 4장(丈)으로 - 9.24m
➠ 도성(都城) 주위(周圍) 1,800년도 이후(以後) : 14,935보(步)는, 약 20.700㎞, 약 “49리(里)”이다. 여도비지(輿圖備志 都城) “41리(里)”라고 하였다. ➠ 높이(高)는 똑같은 숫자로 기록(記錄)되었다.
➑ 그렇다면 오늘날의 설명(說明)은 어떨까? 《오늘날의 설명(說明)은 이와는 또 전혀 다르다. 즉(卽)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로 말하고 있다. [출처 : 서울특별시 한양도성(漢陽都城)]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땅에서는 :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라고 하는데, 둘레 길이도, 높이도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다. 물론(勿論) 그들도 어디에선가 기록(記錄)을 보고 그렇게 말하고, 설명(說明)해 놓고 있을 것이지만 :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지리지(地理志)의 내용(內容)보다 더 중요한 기록이 있다는 것일까? 그게 무엇이란 말일까? 진짜 그 속을 알 수 없는 국가(國家)다.
도량형(度量衡) 단위(單位)를 잘못 적용(適用)한 오류(誤謬)일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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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처럼 벌여 놓고 바둑처럼 늘어놓아 공고히 다졌으니 / 星 羅 棋 置 鞏 如 許
범이 쭈그린 듯 용이 서린 듯 수려하기 비할 데 없네. / 虎 踞 龍 蟠 秀 無 比
북쪽 산은 백악처럼 좋은 것 없고 / 北 山 無 如 白 岳 好
우(右)편으로 인왕산을 끼었으니 백중과 같네. / 右 把 仁 王 伯 仲 似
영특한 기운 모여 돌 빛이 푸르니. / 英 靈 所 鍾 石 氣 靑
그 아래 기이한 선비가 많이 난다네. / 其 下 往 往 生 奇 士
남쪽 산은 자각처럼 수려한 것 없어 / 南 山 無 如 紫 閣 秀
푸른 기운 하늘에 솟았으니 하늘도 지척이라 / 翠 眉 浮 天 天 尺 咫
이것이 달아나는 말이 안장을 벗는 형국인데 / 云 是 奔 馬 脫 鞍 形
평안도의 봉화불을 남쪽 변방에 알린다. / 平 安 火 擧 通 南 鄙
동쪽 산은 낙봉처럼 묘한 것이 없어 / 東 山 無 如 駱 峯 妙
공자의 사당이 그 기슭에 자리하고 있네. / 玄 聖 門 墻 枕 其 趾
뜬 남기(嵐氣)와 따스한 취미(翠微)는 탁월한 필법이었으니 / 浮 嵐 暖 翠 卓 筆 高
학사 살던 터의 집 이름 기재(企齋)로다 / 學 士 遺 居 齋 名 企
서쪽 산은 기봉처럼 험한 것이 없어 / 西 山 無 如 岐 峯 險
구부러진 성과 둥근 봉우리가 서로 대치하였네. / 曲 城 圓 嶠 相 角 掎
➥ [10] 봉우리 서(西)쪽에 한 길은 기성(箕城)으로 달리고 / 峯 西 一 路 走 箕 城
➊ 「봉우리의 한쪽 즉(卽) ‘북(北)’쪽의 길이 평안도(平安道)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지, 어찌 서(西)쪽으로 갈 수 있겠는가?」 반도(半島)의 지형도(地形圖)를 놓고 보자. “고양, 파주, 장단을 거쳐 개성(開成)”으로 올라가는 길이 곧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요, 북행(北行)이다. 이것이 어떻게 서행(西行)이 될 수 있겠는가?
➋ 명(明)의 장녕(張寧)의 시에, 《높은 다락 아득하게 푸른 공중에 솟았는데, 서(西)쪽으로 장안(長安)을 바라보니 내 마음 이미 통하였다. 하늘과 땅이 은혜 있어 같이 덮고 실었는데, 중국과 오랑캐들 모두 다 한곳으로 모이네.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3 천리(千里)”를 내려오니, 화악(華岳)이 서쪽으로 백이(百二) 겹이나 잇닿았네. 금 궁궐 옥대문엔 수위(守衛)도 엄하고, 흰 깃발 누런 부월(斧鉞)로 장군들 정해졌네. 국경 남쪽 먼 길엔 봉화 연기 끊어졌고, 북쪽 지역 여러 진영엔 방위도 웅장하도다.》라고 하였다.
➠ 요양(遼陽)에서 동(東)쪽으로 ‘3 천리(千里)’를 갔다면 : ”장녕(張寧)“은 함경도(咸鏡道) 동(東)쪽 동해(東海)에 수장(水葬)되지 않았을까!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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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자취 아득하여 옛 진터만 남았네. / 戰 跡 蒼 茫 餘 古 壘
옛 궁궐 연기 낀 버들에 봄빛 그림 같은데 / 舊 宮 煙 柳 春 似 畫
태평한 지금 임신ㆍ계유의 창업을 이야기한다. / 太 平 如 今 說 壬 癸
궁궐 옆에 흐르는 물이끼보다 푸르고 / 御 溝 流 水 碧 於 苔
벽사와 천록은 서로 대해 꿇어앉았네. / 辟 邪 天 祿 相 對 跪
동서(東西) 쪽에 위치한 두 궁궐 조망에 들어오니 / 東 西 兩 闕 入 憑 眺
오색구름 속에 봉황이 서 있는 듯 / 五 色 雲 中 金 爵 峙
➥ [11] 높은 용마루 단청한 처마 끝 공중에 찬란하여 / 觚 稜 金 碧 炫 晴 空。
• 위의 글 서두(序頭)에 있는 『조선국(朝鮮國) 왕성도(王城圖)』를 보면, 높은 용마루와 단청(丹靑)한 처마를 엿볼 수 있다.
고릉(觚稜) [한국고전용어사전] : 전각(殿閣)의 가장 높고 뾰족한 모서리. 금벽(金璧) : 금빛과 푸른 빛으로 찬란하게 빛을 낸다는 의미(意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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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기운 언제나 울창하네. / 佳 氣 三 時 鬱 鬱 紫
증광루 우뚝한데 푸른 나무 둘러 있고 / 澄 光 樓 聳 碧 樹 圓
비늘처럼 가지런한 기왓골 구름 모양 펼친 듯 / 翠 瓦 鱗 (鱗) 盪 旖 旎
구자평은 푸르러 연한 잎 펴오르고 / 九 子 萍 綠 展 嫩 葉
사철나무는 붉게 새 꽃술을 터뜨렸네. / 萬 年 枝 紅 綻 新 蘂
그중에서 금전이 울창하게 높으니 / 就 中 金 殿 鬱 岧 嶢
좌개청양이 곧 여기일세. / 左 介 靑 陽 卽 此 是
용도의 높은 누각 태액지가에 있으니 / 龍 圖 高 閣 太 液 畔
위로 규성을 응하여 별 모양 신과 같구나. / 上 應 奎 星 星 似 履
북쪽 동산에 검은 구름 은은하게 가리어 / 玄 雲 翳 翳 北 苑 北
삼황이 삼치에 내리는 것을 보는 것 같네 / 如 見 三 皇 降 三 畤
홍문은 어진(御眞) 모신 궁전임을 멀리서도 알겠으니 / 紅 門 遙 辨 是 眞 殿
초연하여 선왕이 옥궤에 기댄 것 같네 / 愀 若 先 王 憑 玉 几
월근문이 연하고 성장을 끼었으니 / 月 覲 門 連 夾 城 仗
임금께서 사모함 어찌 하루라도 해이하랴 / 聖 慕 何 嘗 一 日 弛
동쪽과 남쪽에 있는 관왕묘를 멀리 바라보니 / 東 南 關 廟 遙 相 望
영혼을 봉안하여 천추에 제사하네. / 妥 靈 千 秋 芬 苾 祀
푸른 느티 그늘진 언덕에 누른 사립 열렸으니 / 綠 槐 陰 畔 黃 扉 開
정사를 돕는 삼공이 백관을 거느린다. / 佐 理 三 公 摠 百 揆
연무장도 넓은 푸른 문 안엔 / 演 武 場 闊 靑 門 內
하얀 과녁에 쏘는 화살, 별같이 나네. / 粉 帿 星 奔 破 的 矢
금잔디 깎은 듯, 한 모화관 / 金 莎 如 剪 慕 華 館
연조문 길도 숫돌같이 평평하네. / 延 詔 門 路 平 於 砥
청계천 한 줄기 북영을 관통하고 / 淸 溪 一 道 貫 北 營
➥ [12] 응암(鷹巖)의 산봉우리 다복솔 푸르러 시들지 않네. / 鷹 岫 倭 松 靑 不 死
• 연행기사(燕行記事)【정유년(1777, 정조 1) 7월 吏曹判書 이갑(李𡊠)】 문견잡기(聞見雜記), 잡기(雜記) : 《東八站之家材。椴木居多。以西至北京。盡是白楊木。而椴及松間或有之。: 동팔참(東八站)의 집 재목은 피나무[椵木]가 대부분이고, 여기에서부터 서쪽으로 북경(北京)까지는 모두가 백양목(白楊木)인데 간혹 피나무와 소나무가 있다. 松則木理軟脆。殆類倭松。皆自太行來。故其體長大。: 소나무는 결이 연하고 약하여 왜송(倭松)과 비슷한데, 모두 태항산(太行山)에서 오기 때문에 그 덩지가 길고 크다. 大抵廣野無際。木物與柴炭絶柴則無。非糖竹及柳木。必稱其斤兩而用之。雖大必不斧而鉅之。: 이곳은 넓은 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목물(木物)과 시탄(柴炭)이 무척 귀하다. 나무는 모두 수수깡과 버드나무인데, 반드시 그 근량(斤兩)을 달아서 쓴다. 큰 나무라도 도끼로 쪼개지 않고 반드시 톱으로 자른다. 是以北京柴道極難。館中入給者。專用柳木。而每患難繼。私賣亦是糖竹。其呼價甚高。: 그래서 북경(北京)에는 나무[柴]가 무척 귀하다. 관사에 들여오는 것도 버드나무뿐인데 이것으로는 매양 잇대기가 어렵다. 사사로 파는 것도 수수깡으로 값을 대단히 비싸게 부른다. 沿路村落。多植柳。不翦取其條肄。故大小樹枝。叢生甚鬱茂。: 길가 촌락에는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가지를 잘라 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나뭇가지가 무더기로 나서 매우 울창하다.》라고 하였다.
➡ 위의 예(例)를 보면 : 즉(卽) 『왜송(倭松)은, 다복솔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즉 왜송(倭松)이란, ”누워있는 소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증거(證據)다. 『왜(倭)가 아닌 왜송(矮松)이 바로 다복솔』이라는 뜻이다. 글자의 오류(誤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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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은 “세검천”을 둘렀으니 / 紅 亭 繞 以 洗 劍 川
백추지 다듬는 방망이 소리 빈 골짝 울리고 / 空 谷 砧 鳴 白 硾 紙
차자천(丫字泉) 제각기 빗방울 소리 내는데 / 丫 字 泉 分 作 雨 聲
앉았노라면 졸졸거리는 소리 골수를 씻는 듯 / 坐 久 泠 (泠) 欲 洗 髓
삼청동문은 돌에 주홍으로 새기고 / 三 淸 洞 門 石 鐫 紅
초제단에는 무성하게 흰 구름 인다. / 醮 壇 蓊 然 白 雲 起
우뚝한 정자 홀로 대명 하늘을 이고 / 孤 亭 獨 戴 大 明 天
백대의 맑은 유풍 깨 끗 도 해라 / 百 代 淸 風 皎 不 滓
세심대 꽃이 필운에 비치니 / 洗 心 臺 花 弼 雲 映
영광의 빛 천 송이 만송이로다. / 寵 光 千 葩 與 萬 蘤
이영의 젊은 장수 홍옥처럼 고운데 / 梨 營 小 將 如 紅 玉
한가하게 구정에서 십팔기를 관람하네. / 閑 看 毬 庭 十 八 技
처처에 있는 붉은 문의 갑제 을제는 / 朱 門 處 (處) 甲 乙 第
교목 우거지고 머루덩굴 얽히었네. / 喬 木 陰 森 纏 碧 藟
아담한 모임 뉘 집 청동이 노래하고 / 雅 集 誰 家 謳 靑 童
좋은 잔치 몇 곳에 예쁜 기생 춤추는지 / 良 讌 幾 處 舞 紅 妓
➥ [13] 원각사에 우뚝한 백탑은 / 亭 亭 白 塔 大 圓 覺
열네 층을 공중에 포개었네. / 層 給 遙 空 十 四 累.
➊ 원각사(圓覺寺) [출처(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서울특별시 종로구 파고다공원터에 있었던 고려시대 조계종의 본사가 된 사찰이다. 고려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라고 불리던 절 자리에 1464년(세조 10) 5월 세조가 원각사의 창건을 결정하고, 서력(西曆) 1,467년 사월 초파일에 “10층 석탑”의 완공과 함께 낙성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➋ ‘원각사(圓覺寺)에 “14층”으로 된 백탑(白塔)이 있었다’라는 것인데, 한반도(韓半島) 한양(漢陽) 도성(都城)의 원각사(圓覺寺) 백탑(白塔)은 “10층(層), 또는 13층(層)”이란다. 기막힌 이야기다.
• 대동지지(大東地志) : 圓覺寺。 舊名興福寺。 在寬仁坊大寺洞。 世祖七年刱建。 寺有安平大君所造白塔, 雕鏤奇巧, 未及成而安平敗。 有金守溫所撰碑。 中宗七年撤之。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圓覺寺。舊在中部慶幸坊。古名興福。太祖時爲曹溪宗本社,後廢爲公廨。世祖時,改創號圓覺,以楹計者三百有餘,觚楞金碧無與爲比,庭中建十三層石塔,又使金守溫撰碑。今寺廢,其址爲閭閻所居,塔、碑猶存。: 원각사(圓覺寺) 예전에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었다. 옛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가 되었는데 뒤에 폐지되어 관청이 되었다. 세조 때에 다시 창건하여 원각사라고 불렀는데, 기둥을 헤아려 보면 300여 개나 되고 금빛 찬란한 전각이 비할 데가 없었으며, 뜰 가운데 13층 석탑을 세우고 또 김수온(金守溫)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지금은 절이 없어지고 그 터는 민가가 되었는데 탑과 비는 아직도 남아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圓覺寺。在中部慶幸坊。舊名興福。太祖時爲曹溪宗本社,後廢爲公廨,世祖十年改創,號圓覺。有金守溫所撰碑銘。: 언급(言及)조차 없다.
• 열성어제(列聖御製) 제9권 / 숙종대왕(肅宗大王)○시(詩) / 사직의 기곡제에 친림하러 궁궐을 나가는 날에 일곱 수를 읊다〔社稷親臨祈穀祭, 出宮之日七詠.〕[주-D007] 부도(浮屠) : 원각사지(圓覺寺址) 10층 석탑을 가리킨다. 원각사는 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1465년(세조11)에 창건하였다. 원각사 10층 석탑도 이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세조 10년 갑신(1464) 6월 12일(갑오) : 와요제조(瓦窯提調)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을 불러 원각사(圓覺寺) 법당(法堂)에 덮청기와[靑瓦]를 의논하니, 모두 8만 장(張)이라 구워서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컸었다.
• 세조 13년 정해(1467) 4월 8일(계묘) : 원각사(圓覺寺)의 탑(塔)이 이루어지니, 연등회(燃燈會)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 입재집 제42권 / 묘표(墓表) / 한성 우윤 대봉 양공 묘지명 병서〔漢城右尹大峯楊公墓誌銘 並序〕: [주-D005] 원각사(圓覺寺)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자리에 있었던 사찰이다.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고찰(古刹)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1464년(세조 10)에 중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이때 대종(大鐘)도 함께 만들었다. 1465년(세조 11)에 원각사를 세운 내력을 기록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뒤 폐사되었는데, 터는 현재 ‘파고다공원’으로 되어있으며,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➌ “성시전도(城市全圖)에서는 14층(層)”이라고 하였는데, 지리지(地理志)마다 제각각으로 13층(層), 10층(層) 등으로 기록(記錄)되어 있고, 다른 지리지에서는 아예 백탑(白塔)은 있는데 층수(層數)는 빠져 있다.
“14층(層)을 공중(空中)에 띄웠다”라고 하였으니 “14층(層)”이 분명(分明)한 것이다.
➥ ‘성시전도(城市全圖)’가 AD 1,792年이니, 겨우 231년 전(前)의 이야기다. 허나 묘하게도 이 “백탑(白塔)”만큼은 왜란(倭亂)에도, 호란(胡亂)에도, 6. 25동란(動亂)에도 불에 타지 않고 견뎌낸 모양이다. 허나 이게 14층(層)도 아니요, 13층(層)도 아닌 10층(層)짜리가 현존(現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조작(造作)되었을 가능성이 ‘100%’다. “도무지 신뢰(信賴)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왜 이 백탑(白塔)은 왜란(倭亂)이나 호란(胡亂) 때에 불타 없어졌다고 하지 않았을까? 참 알 수 없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는 대표적(代表的)인 사례(事例)가 분명(分明)하다. 14층(層)인 탑(塔)이 어떻게 13층(層)이 되고, 시간(時間)이 지날수록 낮아져 10층(層)이 될 수 있겠는가? 답답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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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종가에 있는 흥천사의 큰 종은 / 興 天 大 鐘 雲 從 街
커다란 집 가운데에 날 듯 하여라. / 傑 閣 堂 中 翼 斯 跂
➥ [14]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갔다 또 오는 사람들 / 來 來 去 去 去 又 來
인해(人海)가 망망(茫茫)하여 끝이 보이지 않네. / 人 海 茫 茫 不 見 涘.
➊ 위의 글 ➥“[08]”을 보면 도성(都城) 호수(好手)가 ‘8만(萬)여’라고 하였다. “8 만여(萬餘) 호(戶)”라면 “5인 가족(家族)”으로 봐도 겨우 “40만(萬) 명”정도의 백성(百姓)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몽땅 나와서 돌아다닐 일도 없거니와, 설사(設使)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해(人海)가 망망(茫茫)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➋ 그렇다면 :
㊀ AD 660年 이전(以前) 고구려(高駒驪) “도성(都城)은, 210,508호(戶)”라고 하였으니, 1백만(百萬)이 넘는 백성(百姓)들이 있었다는 것이요,
㊁ 같은 시기(時期) 백제(百濟) “도성(都城)은 152,300호를 넘었다”라고 했으니 75만(萬)이 넘는 백성(百姓)들이 살았다는 것이고,
㊂ AD 700년경 신라(新羅)의 “도성(都城)은 18 만호(萬戶) 정도가 되었다”라고 하니, 90만 이상(以上)의 백성(百姓)들이 살았다는 것이고,
㊃ 고려(高麗) 도성(都城) 또한 15만(萬) 호(戶)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75만 백성(百姓)들이 살았다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➌ 이럴 때 성시전도(城市全圖)는 AD 1,792년이라고 하였으니, 위의 예(例)로 든 시대(時代)는 : 「무려(無慮) “1,000”년(年)이 지난 뒤의 이야기다.」
무려(無慮) 1,000年이 지난 뒤의 조선반도(朝鮮半島)의 유일(唯一) 왕조(王朝)였던 “조선(朝鮮) 도성(都城) 호수(戶數)가 8만여(萬餘)”라고 했다면 : 이건 “아주 조그만 제후(諸侯)의 땅이었다”라는 이야기다.
➡➡➡ 즉(卽),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황성(皇城)에 있고, 외방(外方)에 있었던 반도(半島) 땅에는 중조(中朝)로부터 파견(派遣)된 관리(官吏)가 다스리던 “아주 작은 제후국(諸侯國)이었다”」라는 것으로 밖에 설명(說明)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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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마음 내 알겠으니. / 萬 人 心 事 吾 自 知
가난한 자는 돈을 구하고 천한 자는 벼슬을 구하리라 / 貧 者 求 錢 賤 求 仕
어진이든 어리석은 이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날마다 / 賢 愚 老 少 日 復 日
오극 삼조로 개미처럼 모여든다. / 五 劇 三 條 撲 如 蟻
가벼운 초헌 지나는 곳에 여러 종복이 갈도하고 / 輕 軺 過 處 喝 衆 隸
작은 가마 돌아갈 때 여러 비자가 옹위하네. / 小 轎 歸 時 擁 群 婢
한가하게 노는 공자들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 遊 閑 公 子 一 何 都
안장과 말 휘황하여 화려함을 다투네. / 鞍 馬 輝 煌 競 華 侈
궁중에 흐르는 하천 원래 명당의 물 / 御 河 元 知 明 堂 水
맑은 흐름을 소통하고 세척한 것이 사년(巳年)에 있었네. / 疏 瀹 淸 流 歲 在 巳
오가는 수레와 말들 우레소리 일으키고 / 車 車 馬 馬 起 晴 雷
몇 자리의 홍교가 안치를 벌였는가. / 幾 坐 虹 橋 列 雁 齒
경진처럼 물을 평온케 하는 백옥주 서 있으니 / 庚 辰 水 平 白 玉 柱
한 떼의 오리 맑은 물을 희롱하네. / 一 群 花 鴨 弄 淸 泚
양(兩) 언덕에 높은 누대 피리소리 흩어지니 / 高 樓 兩 岸 咽 笙 歌
동성(東城)에 해 기우는 것도 잊어버렸네. / 不 覺 東 城 昃 花 晷
➥ [15] 동(東)으로 흐르는 물 곧게 철창에 쏟아지고 / 東 流 直 瀉 鐵 窓 急.
➊ 〈동(東)으로 흐르는 물 곧게 철창에 쏟아지고 / 東 流 直 瀉 鐵 窓 急〉하였는데, 여러 각도(角度)로 생각해 봐도 도무지 그 답(答)을 찾을 수가 없다. “동(東)쪽으로 흐르는 물이 곧바로 철창(鐵窓)으로 쏟아지고”라는 뜻을 이해(理解)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려면 : 아이들이 미역을 감는 조그마한 실개천을 두고 “동(東)쪽으로 흐르는 물이 철창(鐵窓)으로 곧바로 쏟아지고”라는 표현(表現)은 한 것이 아닐 터이다.
또 ‘철창(鐵窓)’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설마하니 “감옥(監獄)”을 말하는 것은 분명(分明) 아닐 터이다. “동(東)쪽으로 흐르는 물이 철창(鐵窓)으로 곧바로 쏟아지고”… … 그 뜻이 무엇일까?
이 구절(句節)의 전후(前後) 맥락(脈絡)을 보면 : “한수(漢水)=한강(漢江)”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특히 뒤 구절(句節)을 보면 : 「일만 그루의 버드나무 푸른빛 연하여 조는 듯하네 / 萬 柳 如 眠 綠 迆 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韓半島) ‘한성(漢城)=한양(漢陽)=한성부(漢城府)’에 동(東)쪽으로 흐르는 상징적(象徵的)인 하천(河川)이 있나? 지류(支流) 또한 모두 ‘한수(漢水)=한강(漢江)’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니었나?
수차(數次)에 걸쳐서 설명(說明)한 내용(內容)이다. “고려(高麗)의 황도(皇都)를 흐르는 물도 동(東)쪽으로 흐르고”, “한성(漢城)=한양(漢陽)=한성부(漢城府)를 흐르는 물도 동(東)쪽으로 흐른다”라면 :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다는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다.
이때가 “AD 1,792년 4월”이다. 곧 궁(宮) 안에서 숙직근무(宿直勤務)를 하고 있던 신하(臣下)들에게 “임금”이 시(詩)를 지어보도록 한 것이다. 자신(自身)과 가문(家門)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는 임금(君主) 앞에서 ‘한성(漢城)과 평양성(平壤城)’도 구분(區分)하지 못한다는 헛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후세(後世)들인 우리가 이것인지, 저것인지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군중(群衆)들이라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태(形態)를 가지고 있어, 이런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특징(特徵) 때문에 우리나라 평야(平野)는 주로 서(西)쪽에 많다. 동(東)쪽엔 산(山)이 많고 높아서 큰 하천(河川)이 낮은 서(西)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건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를 설명(說明)하는 백과사전(百科辭典)에서 말하는 있는 내용(內容)이다.
➋ “한성(漢城)=한양(漢陽)=한성부(漢城府)”를 흐르는 물이 “동(東)쪽으로 흘러간다”라는 것도 ‘대륙(大陸) 중원(中原)’의 것을 차용(借用)하여 비교법(比較法)을 사용(使用)한 것인가?
그러나 위의 “➥” 구절(句節)을 보면 “동류(東流)”하여 곧바로 철창(鐵窓)에 쏟아진다고 하였을 뿐이다.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반대로 설명(說明)하고 있다. 곧 위에서 말하는 “한양(漢陽) 도성(都城)=한성부(漢城府)”는 반도(半島)의 것이 아닌 물이 “동(東)”쪽으로 흐르는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반도(半島) 땅의 “한성(漢城)과 한수(漢水)”는 곧 “짝퉁”이라는 말이 된다.」
➌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혹시(或是)나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환장(換腸)한 사대부(士大夫)들이 「천자국(天子國)의 하(河)【황하(黃河)】와 강(江)【장강(長江)】을 가져다 비유(比喩)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위의 구절(句節)을 보면 : 비교(比較), 비유(比喩), 은유법(隱喩法)을 쓸 아무런 이유(理由)도, 명분(名分)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직설화법(直說話法)을 써 “동(東)쪽으로 물이 흘러 철창(鐵窓)으로 쏟아진다”라고 표현(表現)한 것일 뿐이다.
도성(都城)의 남(南)쪽을 흐르는 물이 동(東)쪽으로 흘러가는 곳을 찾으면 당시(當時)의 「한성(漢城)=한양(漢陽)」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갖춘 곳은 “몇 개소(個所)”에 불과(不過)할 뿐이기 때문에 금방(今方) 찾을 수 있다. 이게 답(答)이지 않겠나!
➍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보게 되면 : 패수(浿水) 또한 “동(東)”쪽으로 물이 흐른다【동류(東流)】고 하였다. 다만 대한민국(大韓民國)과 북한(北韓)에 사는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들이 그걸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問題)가 되는 것일 뿐이다.
• 「최자(崔滋)의 부(賦) 삼도부(三都賦)」 : 《“뭇 물줄기 모였으니 이름이 대동강(大同江)이라, 해맑고 넘실넘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을 안고 풍수(灃水)를 모아온 듯, 깨끗하긴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靑銅 거울) 같은데, 비단 닻줄을 풀고 목란(木蘭) 배를 띄워 중류(中流)에서 머리를 돌리니 황홀하여 병풍 속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라고 하였고,
• 「패서(浿西) 13진(鎭)」 : 「패(浿)」는 “한국(韓國)의 물 이름 패(浿)”자(字)라고 하였는데, 대동강(大同江) 주위에 한국(韓國)이란 나라가 존재(存在)한 적이 있었는가?
한국(韓國)이 고조선(古朝鮮)인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인가? ‘위만조선(衛滿朝鮮)=위만조선(魏滿朝鮮)’인가? 아니면 삼한(三韓)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마한(馬韓)’을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에 있었다’라고 하는가? 그럼 ‘진한(辰韓)=진한(秦韓)’과 ‘변한(卞韓)=변한(弁韓)’은, 손가락만 한 땅 경상도(慶尙道) 땅에서 “24개(個) 나라와 왜(倭)가 올망졸망 부대끼며 살았다”라는 이야기긴가?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 『경상도(慶尙道)는, 왜(倭) 즉(卽) 왜구(倭寇)들의 고향(故鄕)이 되어야 한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또 ‘패서(浿西)’란 말은 “대동강(大同江)의 서쪽”이란 말과 같은 것인데, 대동강(大同江)의 서(西)쪽은 서해(西海)에 닿으므로, 13개의 진(鎭)이 존재(存在)할 땅이 없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3개의 패수설(浿水說)」: ➠《사기(史記)에, 「한(漢)이 일어나 요동(遼東)의 옛 변방을 정비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으며,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동(東)으로 달아나 패수(浿水)를 건너 왕검(王儉)에 도읍(都邑)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위만(衛滿)’이 패수(浿水)를 건너려면 : 북(北)쪽에서 패수(浿水)를 건너 남(南)쪽으로 내려올 수는 있지만, 동(東)쪽으로 가서 패수(浿水)를 건너 왕검(王儉)에 도읍(都邑)할 수 없는 지세(地勢)를 가진 곳이 “반도(半島) 평양(平壤)과 대동강(大同江)의 형편(形便)”이다. 이제 무엇이 문제(問題)인지를 이해(理解)할 수 있겠나!
【전회(前回)에 이곳은,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서(西)쪽 땅이다”라는 필자(筆者)의 게재(揭載) 글이 있다.】
➠《일통지(一統志)에, “패수(浿水)는, 조선국(朝鮮國) 평양성(平壤城)의 동(東)쪽에 있는데 일명 대통하(大通河)”라고도 하며 가운데에 조천석(朝天石)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위만(衛滿)=위만(魏滿)”이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달아나 패수(浿水)를 건너 왕검(王儉)에 도읍(都邑)했다.」라는 말이 성립(成立)될 수 있으며, 옛 사가(史家)들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성(平壤城) 남(南)쪽으로 패수(浿水)가 흐르고, 대동강(大同江)이라고 하였지, 대통하(大通河)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설문(說文)에는, “물이 누방(鏤方)에서 나와 동(東)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또 패수현(浿水縣)은 강(江) 이름을 취(取)해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당(唐)의 이적(李勣)이 패강도대총관(浿江道大總管)”이 되었다. [증보자휘(增補字彙)]》라고 하였으니,
“패수(浿水)”는, 「동(東)쪽으로 흘러 동해(東海)로 들어간다.」라는 것이다.
허신(許愼)의 말에 따르면 : 「패수(浿水)는, 낙랑(樂浪) 루방현(鏤方縣)에서 나오는 물로, 동남(東南)으로 와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東)쪽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것이고,
십삼주지(十三州志)에 따르면 : 「패수(浿水)의 물은 루방(鏤方)에서 시작된다. 연인(燕人) 위만(衛滿)은 패수(浿水)의 서(西)쪽에 이르는 곳이 조선(朝鮮)이라 했다.」라는 말에 따르면 :
➡➡➡ “조선(朝鮮)”은, 「오늘의 대륙(大陸) 산동성(山東省)과 한반도(韓半島) 사이의 “서해(西海) 심해(深海)의 용궁(龍宮)에 있었다”」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이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는 헛소리다.
➡➡ 즉(卽)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땅을 흐르는 주요(主要) 하천(河川)은 동(東)쪽으로 흘러갔다【동류(東流)】〉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 “믿고, 믿지 않는 것은 개인(個人)의 자유(自由)다” 다만, 사실(史實)을 사실(史實)로 보지 않는 것은, “사고(思考)의 불안정(不安定)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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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일만 그루의 버드나무 푸른빛 연하여 조는 듯하네. / 萬 柳 如 眠 綠 迆 邐 》
➊ 조선(朝鮮) 곧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말하기를 : 『“평양(平壤) 곧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서경(西京), 서도(西都)이며, “유경(柳京)”이라고도 부르며, “호경(鎬京)”이다』라고 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을 덧붙여주고 있다.
➋ 즉(卽), 〈이곳 도성(都城)의 남(南)쪽을 흐르는 한수(漢水) 변(邊)에 수만(數萬)의 버드나무(柳=楡)가 자라고 있어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유경(柳京)”이라는 별칭(別稱)까지도 얻었다는 것인데, 이곳은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을 말하는 것이지 “한성부(漢城府)=한양(漢陽)=한성(漢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설명(說明)으로는 : “위수(渭水)=한수(漢水)=대동강(大同江)=패수(浿水)”는 동(東)쪽으로 흐르며, ‘한성(漢城)=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의 남(南)쪽을 흐르는 강(江)가에는 기자(箕子)가 백성(百姓)들을 독려(督勵)하여 심어 놓은 수만(數萬) 그루의 버드나무(柳=楡)가 십여(十餘) 리에 걸쳐 늘어져 있어 그 장관(壯觀)을 일컬어 “유경(柳京)”이라고도 했다는 말이고,
이 버드나무(柳=楡)의 성질이 아주 유연(柔軟)한 까닭에 “가지를 구부렸다가 다시 놓으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특히 서(西)쪽 먼 곳으로 출정(出征)하는 병사(兵士)들과 임지(任地)로 떠나는 관리(官吏)들의 가족(家族)이나 연인(戀人)들의 애달프고, 애틋한 이별(離別)의 장소(場所), 눈물의 장소(場所)로 널리 알려졌었다는 고사(古事)가 탄생(誕生)되었다.
오죽하면 임금께서도 지방(地方)의 수령(守令)이나 관리(官吏)들이 임지(任地)로 떠나기 전에, 궁성(宮城)에 있는 버드나무(柳=楡) 가지를 꺾어주며, 무사(無事)하게 건강(健康)하게 돌아와 다시 보기를 바랐다고 하였을까!
➠➠➠ 그러나 “한반도(韓半島) 평양성(平壤城)의 서(西)쪽 땅”은, 곧바로 서해(西海)에 닿기 때문에 “서(西)” 쪽으로 출정(出征)하는 병사(兵士)도 없고, 관리(官吏)래야 일년(一年)에 소수(小數)기 때문에, 이곳이 이별(離別)의 장소(場所)나, 애틋한 눈물의 상봉장소(相逢場所)도 될 수 없는 지세(地勢)를 보여주고 있다.
➌ 결과적(結果的)인 말이지만 : 당시(當時)의 한성(漢城)은 곧 장안(長安)이었다는 말과 같다. “한성(漢城)”이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도읍(都邑)했다는 장안성(長安城)의 옛 이름 곧 본시(本是) 성(城)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반도(半島) 한양(漢陽)을 흐르는 ‘한강(漢江)=(漢水)’가에 일만(一萬) 그루의 버드나무(柳)가 푸른빛을 발했다는 이 말은, 과연(果然)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 있을까? 어느 문헌(文獻)에도 이런 기록(記錄)은 찾아볼 수 없다. 반도(半島) 땅, ‘한양(漢陽)=한성(漢城)’을 “유경(柳京)”이라는 별칭(別稱)으로도 불렸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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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 沿 街 左 右 千 步 廊
➥ [17]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 百 貨 山 積 計 倍 蓰
➠ “천보낭(天步廊)”이란 아마도 “천보(天步) 곧 1,386m”에 달하는 엄청나게 크고 긴 ‘낭(廊)=행랑(行廊)’이 만들어져 있어 이곳에서 장사치들이 온갖 물화(物貨)를 산처럼 쌓아놓고 장사를 했다는 것을 묘사(描寫)한 것이라 보는데,
문제(問題)는 1,386m라면 1km 386m에 걸쳐 만들어진 시장(市場) 행랑(行廊)이 어디에 있었으며 그 흔적(痕迹)이라고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규모(規模)라면 당시(當時)의 ‘한성(漢城)’에는 ‘5십만(十萬) 이상(以上)∼1백만(百萬) 이상(以上)’을 헤아리는 백성(百姓)들이 살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아쉽게도 겨우 ‘십여(十餘)만’의 백성(百姓)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곧 “반도(半島) 한성(漢城)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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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가게에 울긋불긋 벌여 있는 건 / 錦 肆 紅 綠 班 陸 離
모두 능라(綾羅)와 금수(綿繡)요 / 紗 羅 練 絹 綾 縠 綺
어물 가게에 싱싱한 생선 도탑게 살쪘으니 / 魚 肆 新 鱗 足 珍 腴
갈치ㆍ노어ㆍ준치ㆍ쏘가리ㆍ숭어ㆍ붕어ㆍ잉어이네 / 鮆 鱸 鰣 鱖 鯔 鮒 鯉
➥ [18]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 같으니 / 米 肆 隣 近 飯 顆 山
• 역사통설 논자들은, 「대륙 장안(長安)에 반과산(飯顆山)이 있는데, 이를 비유(比喩)한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건 100%다.
「사대사상(事大思想)에 푹 빠진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인 조정(朝廷)의 관리(官吏)들이 천조(天朝)의 것을 차용(借用)한 것이다」라고… …꼭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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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 같은 흰밥에 기름이 흐른다 / 白 粲 雲 子 滑 流 匕
주점은 본래 인간 세상이나 / 酒 肆 本 自 人 間 世
웅백성홍의 술 빛 잔에 가득하네. / 熊 白 猩 紅 滿 (滿) 匜
행상과 좌고 헬 수없이 많아 / 行 商 坐 賈 指 難 僂
자질구레한 물건도 갖추지 않은 것 없네. / 細 瑣 幺 麽 無 不 庀
서울 안의 물건과 경치 이미 다 썼으니 / 京 中 物 華 已 題 了
다시 교외로 좇아 한번 비평하여 보자 / 復 從 郊 坰 一 評 批
숭례문 밖에는 무엇을 보겠는가. / 崇 禮 門 外 何 所 見
십리 강가의 창고에는 곡식이 억만 섬인데 / 十 里 江 廠 粟 億 秭.
연파에 끝이 없는 삼남의 선박 / 煙 波 極 望 三 南 舶.
돈의문 밖에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 敦 義 門 外 何 所 見
봄 교외에서 창 춤추는 것 원기(猿騎)같이 빠르네. / 舞 槍 春 郊 猿 騎 駛
반송지(蟠松池)의 물은 푸르러 물들일 것만 같고 / 蟠 松 池 水 綠 可 染
푸른 연잎 물에 흔들리며 백지도 섞여 있네. / 演 漾 靑 荷 涵 白 芷
흥인문 밖에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 興 仁 門 外 何 所 見
적묘의 농부가 푸른 따비를 잡았고 / 籍 畝 農 人 秉 靑 耟
화양정은 높고 석책(石柵)은 오래되었는데 / 華 陽 亭 逈 石 柵 古
푸르른 풀빛 하늘에 접했고 준마(駿馬)가 뛰논다. / 碧 草 粘 天 騰 騄 駬.
혜화문 밖에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 惠 化 門 外 何 所 見
푸른 숲이 흰 모래밭에 연하였네. / 點 綴 靑 林 白 沙 嘴
북둔의 복사꽃 천하에서 가장 붉고 / 北 屯 桃 花 天 下 紅
푸른 시냇가엔 울타리 짧은 집들 / 短 籬 家 (家) 碧 溪 沚
➥ [19] 금성천부(金城天府)라 참으로 아름답고 / 金 城 天 府 儘 美 哉
➊ “금성천부(金城天府)” : ‘천부(天府)란 천부지토(天府之土)’를 말하는 것이다. 천부지토(天府之土)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자.
• 「악(嶽)」은,
남악(南岳)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남원(南原)에 있고,
동악(東嶽)은, 금강산(金剛山)이고,
중악(中嶽)은, 삼각산(三角山)이고,
서악(西嶽)은, 송악(松嶽)으로 개성(開城)에 있고,
북악(北嶽)은, 비백산(鼻白山)으로 정평(定平)에 있다.
➠ 송악(松岳)은 서(西)쪽에 있다? 그래서 서악(西嶽)은 ‘송악산(松岳山)=송악산(松嶽山)’이라는 말은, 사가(史家)들이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소설(小說) 같은 이야기다. 개성(開城)이 서울【한양(漢陽)-한성(漢城)】의 북(北)쪽에 있다는 것은 유치원(幼稚園) 꼬맹이들도 다 아는 지리(地理) 상식(常識)이다. 이런 예(例)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는 행위(行爲)다.
북악(北嶽)은 또 뭔가? 비백산(鼻白山)이 백두산(白頭山)인가? 백두산(白頭山)은 한민족(韓民族)의 영(靈)이 서린 영산(靈山)이라고 하면서 북악(北嶽)을 백두산(白頭山)이 아닌 비백산(鼻白山)이라는 이야기는 뭔가?
➠ “국조보감(國朝寶鑑)”【英祖 10, 43년(정해, 1767)】을 보면 : 《「비백산(鼻白山)은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남(南)쪽으로 900리나 떨어져 있는 정평(定平)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백두산(白頭山)은 아국(我國)의 조종산(祖宗山)인데, 왜 북악(北嶽)으로 하지 않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理解)핳 수 없다》라고 당시(當時)의 대신(大臣)들이 임금께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秋七月。命秩祀白頭山於北嶽。初國朝五嶽之祀。以定平之鼻白山爲北嶽。至是。左議政韓翼謩言。白頭山乃是我國之祖宗山。而北道又爲國朝發祥之地。北嶽祀秩。今宜移設於白頭山也。上下詢大臣。奉朝賀兪拓基曰。我國諸山。皆發脉於白頭山。而山之傍近又是列聖發祥之地。立國近四百年。尙未崇祀。恐是闕典。且長白大山。旣在鏡吉之界。則不以是爲北嶽。而乃以自長白南去九百里之鼻白山。定爲北嶽者。誠未敢知。白山之祀。臣無容別議。上從之。命咸鏡道臣。擇地於甲山府八十里雲寵堡北望德坪建閣。望祀於白頭山。鼻白之祭亦不罷.》
즉 한반도(韓半島) 조선사(朝鮮史)는 없었다는 말과 같다. 한민족(韓民族)의 혼(魂)이 깃든 영산(靈山)보다 더 중요(重要)한 산이 있을까? 이는 곧 “한민족(韓民族)”은 어리석고,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종족(種族)이었다는 말과 같다. 그럼 누가 이렇게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과 친일사대주의자(親日事大主義者)들이다.
➋ 「바다(海)」는,
동해(東海)는 양양(襄陽)에 있고 : 반도(半島) 동(東)은, 끝에서 끝까지 동해(東海)다.
서해(西海)는 풍천(豊川)에 있고 : 반도(半島) 서(西)는, 끝에서 끝까지 서해(西海)다.
남해(南海)는 나주(羅州)에 있다 : 반도(半島) 남(南)은, 끝에서 끝까지 남해(南海)다.
그럼 경상도(慶尙道) 남(南)쪽 바다는 남해(南海)가 아니고 동해(東海)란 뜻인가? 무슨 얼어 죽을 “양양(襄陽)이요, 풍천(豐川)이요, 나주(羅州)”일까? 특히 나주(羅州)는 바다에서 강(江)을 타고 들어와야 하는 내륙(內陸) 땅이다.
특히 ‘나주(羅州)’는 : 도성(都城)으로부터 남(南)쪽으로 5 천리(千里)쯤 먼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남해(南海)」는, 도성(都城)으로부터 남(南)쪽으로 최소한(最小限) ‘5 천리(千里)’는 떨어져 있었다는 말과 같다. 아래의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보자.
➌ 작몽록(昨夢錄)【昨夢錄南宋·康與之】에서 말하기를 : 〈맹화유(猛火油)는, 고려(高麗)의 동(東)쪽 수천(數千) 리(里)에서 산출(産出)된다【猛火油者,聞出於高麗之東數千裏】고 알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해어(海語) 卷中【明,黄衷,撰] 物産 猛火油】: 〈맹화유(猛火油)는 고려(高麗)의 동(東)쪽에서 나온다. 【一云出髙麗之東盛夏日初出時烘日極熱則液出他物遇之即為火此未必然恐出樹津者是也】〉라고 하였고,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宋,程大昌撰]】卷一, 髙麗境望 : 〈고려(高麗)에 속해 있는 고을(郡)로 강주(康州)가 있다. 고려(高麗) 남(南)쪽 5 천리(千里)에 있는 명주(明州)와 서로 마주하는 강주(康州)의 인접(隣接) 고을(郡)이 무주(武州)인데 이곳에서 귤(橘)과 유자(柚)가 산출(産出)된다【而高麗之屬郡有康州者又在麗南五千里乃與明州相對康之鄰郡曰武州自産橘柚】〉라고 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25권 食貨志 債貸 : 〈신라(新羅)의 재상(宰相)집에는 노비(奴婢)가 3천(千) 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소, 말, 돼지 등도 이와 맞먹는다〉라고 하였고,
신라(新羅)를 왜 ‘진한(秦韓)’이라고 했는지도 알아야 하며, 왜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는, “왜(倭)”는 “삼한(三韓)의 남토(南土)와 연이어져 있었다【接】”라고 했는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왜 “천부지토(天府之土)”라고 했을까? “천부지토(天府之土)”는, 흔하디흔한 땅에 대한 찬사(讚辭)가 아니다.
➠ 이러한 땅이 “한반도(韓半島) 땅”이라고 한다면 : “제2차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있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자(科學者)들도 이를 인정(認定)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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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 또한 즐겁도다. / 壽 域 春 臺 亦 樂 只
소신이 북두 술잔을 절하고 올리노니 / 小 臣 拜 獻 北 斗 杯
전하는 천세 만세를 누리소서. / 殿 下 千 千 萬 萬 祀
글을 짓는 여기에 남은 뜻있으니 / 執 藝 於 今 有 餘 意
그 뜻 구구하지만 감히 그만두지 못하네. / 餘 意 區 區 未 敢 止
원컨대 이 그림으로 무일을 대신하여 / 願 將 此 圖 替 無 逸
승평을 항상 믿지 못할 것같이 하소서 / 昇 平 恒 若 不 足 恃
우리 임금 밝으시어 위태한 것 잊지 않으시니 / 吾 王 聖 明 不 忌 危
어찌 신의 말을 기다려 조심하리까. / 惕 慮 詎 必 臣 言 俟
선왕의 덕을 이어 자손에게 좋은 법을 물려주면 / 肯 堂 丕 責 在 貽 燕
영원히 복 내리는 것을 지켜보겠네. / 佇 看 綿 綿 垂 福 祉
제경(帝京)의 경물을 묘사한 급취편 / 帝 京 景 物 急 就 篇
그 글을 본받았으나 저속할까 부끄럽네. / 竊 效 斯 文 愧 下 俚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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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시전도(城市全圖)』에서 당시(當時)의 많은 ‘관리(官吏)’들이 ‘한양(漢陽) 도성(都城)’에 대한 찬사(讚辭)를 토해냈다. 아무리 많은 찬사(讚辭)를 쏟아냈더라고 하더라도 : 〈그것이 ‘이 땅의 것’이 아니라면 헛빨짓한 것이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환장(換腸)한 얼빠진 관리(官吏)들의 아첨(阿諂)으로밖에 들릴 수 없는 얘기다.〉
• 그러나 당시(當時)의 관리(官吏)들은 결코 얼빠진 관리(官吏)도,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환장(換腸)한 정신(精神) 나간 분들이 아니었다. 한양(漢陽) 도성(都城)에 대한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 주군(主君) 앞에서 찬사(讚辭)를 쏟아냈을 뿐이다.
〈한반도(韓半島) 한양(漢陽), 한경(漢京)이었다던 “한성부(漢城府)”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바로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다. 이걸 무시(無視)한 인간(人間)의 삶은 없다.
➠➠➠ 『한경(漢京)이라는 한양(漢陽)』, 『한성(漢城)이라는 도성(都城)과 한성부(漢城府)』는, 오늘의 “서울” 땅이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事實)임을 어찌하나!
누굴 탓할 일도 없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24년 02월 19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디음 [5편]에서는,
낙랑군 속현으로 요동 땅에 있었다는 "장잠현"과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의 '장잠도',
'당고종'의 철륵 침공로인 '장잠도'에 대해서,
고전 원문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러한 고전원문을 연구하다보면 : 고대의 고조선으로부터 기자조산, 위만조선, 삼한등의 선조국과 그후대의 삼국과 고려, 고황제의 조선 영토는 늘 변함없는 '수만리의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족=한민족'으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