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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 33, 34대 총회장 이자익 목사
제22, 23, 24, 25대 경남노회장 역임
이자익(李自益, 1882~1959)목사는 경남 남해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 갔지만 11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 말았다. 친척집에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며 끼니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17세 때 그는 바다 건너 육지를 가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육지로 가는 배에 무조건 승선하여 경남 하동 근방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행상 차림을 하고 하동과 전북 남원을 지나 전주에서 김제군 금산까지 오게됐다. 이때 이자익에게는 말을 할 만한 기력도 없었다. 그는 금산면 금산리에서 제일 부자집에 무조건 들어갔다. “저는 경상도 남해도 섬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김제는 평야가 넓다는 말을 듣고 이곳까지 방문하게 됐습니다.” 조덕삼이라는 지주 집에서 짐을 풀고 그 집 머슴으로 생활을 하게 됐다. 머슴으로 사는 삶이 너무나 기뻤다. 먹을 양식이 많아서 그 동안 먹어보지도 못했던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집에서 머슴으로 성실하게 일했다.
때마침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던 데이트(최의덕) 선교사가 1900년 금산에 도착해 조덕삼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를 했다. 이미 조덕삼 부부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음을 알았기에 선교사를 만나자 그 자리에서 이자익과 자신의 아들 조영호와 함께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다. 매년 농한기가 되면 전주 서문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말을 몰고 참석했다.
조덕삼은 남자 사경반에서 성경을 배웠고 이자익은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한글반에 편성되어 그 곳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게됐다.
조덕삼은 사경회에서 배웠던 성경공부에 은혜를 받고 매 주일이 되면 전주 서문교회를 마부 이자익과 함께 출석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조덕삼 지주가 은혜를 받고 자신의 사랑채에 가족과 이자익 마부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00년 10월,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등이 세례를 받고 금산교회를 설립했다. 금산교회는 최의덕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했다.
또한 매년 실시하는 사경회에 참가했던 조덕삼과 이자익은 신앙이 성장해 이 교회의 첫 영수로 금산교회를 이끌고 갔다. 1908년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마부인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먼저 피택됐다. 장로가 된 이자익은 주일이 되면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담당했고 조덕삼 영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10년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고 그가 비어 있는 사이 조덕삼 영수가 이끌고 갔다.
조덕삼 영수도 1910년에 장로 장립을 받는다. 신학을 이수했던 이자익은 1915년 졸업을 하자 전라노회에서 목사를 받고 금산교회 2대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1924년 9월, 제13회 총회장 선거에서 금산리교회에서 시무하는 이자익 목사가 선임됐다. 이때 총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총회장으로서 실수함이 없이 잘 회무를 잘 이끌고 갔으며, 이때 총회는 총회시 무단 조퇴자는 차기 총대에서 피선거권을 박탈하기로 결의했다.
총회장이 끝나자 잠시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호주 장로교 선교부 요청에 의해 1925년 이명서 없이 파견하는 형식으로 가족을 이끌고 경상남도 거창 선교부 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이자익 목사는 순회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27년 6월 제22회에 모이는 경남노회에서는 그를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됐다. 1927년 9월 함남 원산시 광석교회에서 모이는 제16회 총회 총대로 노회장 자격으로 이자익 목사와 서기인 최상림 목사, 총대 김길창 목사, 주기철 목사 이렇게 4명이 참석했다. 장로도 4명, 선교사는 2명이 참석했다.
이때 이자익 목사는 총회 신학교육부 부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총회에 적지 않는 영향을 행사했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사건은 총회적으로 이름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는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하여 거창 선교부에서는 순회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어려운 교회만 찾아다니는 일을 맡아 왔다. 그의 수고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음해에도 경남노회장을 연속적으로 맡았다.
이러한 관계로 경남노회 내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극심한 분규로 어지러웠던 마산 문창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총회장을 역임했던 함태영 목사가 부임해 잘 해결됐으며, 주기철 목사의 모 교회인 웅천교회는 6년 간이나 분규되어 따로 예배를 드렸던 사건이 이자익 목사의 중재로 잘 해결을 보게됐다. 이자익 목사는 함태영 목사의 지도력에 놀라 그를 1929년 6월 제26회 경남노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이자익 목사는 거창 선교부의 사역을 마감하고 1936년 9월에 전북노회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 금산교회와 원평교회에서는 대 환영을 하였다. 그 동안 금산교회와 원평교회는 곽진근 목사가 시무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자익 목사를 사랑해 주시어 신사참배 하는 총대로 나가지 않도록 해 준 일에 대해서 몇 번이고 감사를 하였다.
1946년 4월 30일 제2회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소집되었으며, 친일 행각에 앞장섰던 김관식 목사, 송창근 목사는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때 대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선출되었다. 배은회 목사는 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1946년 6월 1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재건 총회를 소집하였다.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장 배은희 목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이때 임원을 선거하는 데 그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물들지 않고 참신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모든 총대원들이 금산읍교회 동사 목사로 재작 중인 이자익 목사를 제33회 총회의 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조선신학교 51명 재학생들이 진정서를 총대원들에게 배포한 일이 있었다. 내용은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학이 문제였다. 이때 이 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하지 말고 7인위원회를 선임하여 진정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김재준 교수와의 면담을 요청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동안 남부 재건 총회를 32회로 회수를 고치고 역시 남부 총회는 33회로 회수를 바꾸기로 했다.
1947년 제33회 총회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요청한 대전 선교부 개설을 허가하자 금산읍교회에서 동사 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이자익 목사를 대전 선교부 기초를 잡기 위해서 부르게 된다. 이미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대전이 교통의 중심지이고 충남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만들려면 대전에 선교부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자 미군정 청 충남 도청 관제과에 교섭을 하여 대전시 삼성동 387번지에 있는 일본인 가옥 30평을 적산 가옥으로 인수를 받고 이곳에 이자익 목사가 자리를 잡았다. 이 일을 위해서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이열 선교사와 인돈 선교사가 이곳에 파송을 받고 삼성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전주를 오고가면서 대전 선교부 신설에 온갖 힘을 쏟았다.
충남노회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이자익 목사 사택에서 충남고등성경학교를 출발시켰다. 교장은 보이열 선교사였지만 여수 애양원 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자익 목사를 부교장으로 선출하고 학사업무를 맡겼다. 개학한지 얼마 안되어 6. 25 전쟁이 일어나 이자익 목사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전북 완주에 대흥사로 피난을 하였다. 때마침 인민군들이 이를 알고 이자익 목사를 체포하여 김제 내무서로 이첩을 시켰다.
이후에 다시 고등성경학교를 개강한 후 졸업생이 생겨나자 이들의 진로가 걱정이었다. 졸업할 무렵 이미 이자익 목사는 대전노회에서 지방신학교를 통해 교역자를 양성해야 한다면서 야간 대전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1954년 8월 25일 이사회에서 교장으로 임명된 이자익 목사는 즉시 교무처장, 사무처장, 여기에 강사를 각기 임명하고 역사적인 개교를 하게 됐다. 그렇다고 교사(校舍)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전중앙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고 개교를 했다.
이자익 목사의 요리문답시간은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비단 이자익 목사만 잘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모든 강사 목사들이 정성껏 강의했다. 그후 1954년 12월 7일자로 취임한지 얼마 안돼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낙향하여 김제 원평에 있는 셋째 아들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에서 그것도 제일 교단에서 총회장을 3번 했다면 그분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늦게 알았던 대전신학대학교 문성모 총장은 구관 건물 3층을 ‘이자익 기념관’으로 현판식을 거행했다. 2층은 이자익 목사가 사용했던 유품 특히 그가 소유했던 신학교 시절에 각종 교과서를 비롯해서 희귀본의 고서와 함께 진열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특별히 이자익 목사의 장손 이완규 장로는 할아버지의 그 활동을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대전신학대학교 문성모 총장과 함께 그 전기를 김수진 목사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2005년 1월에는 책으로 내려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지금까지 묻혀져 있던 이자익 목사의 모습이 활자화되면 그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공을 남겼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2004. 10. 23. 한국장로신문)
민중적 선구자 조덕삼(趙德三, 1867~1919) 장로
유광학교 세우고 교회 사랑, 나라 사랑
자는 德元, 漢陽 趙씨 良節公派 23대 손으로, 1867년 금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행정구역으로 김제군(金堤郡) 수류면(水流面) 금산리(金山里)에는 몇 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팥정리 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두정리(荳亭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금산리 마을에는 갑부로 알려진 조덕삼(趙德三, 1867~1919)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조정문(趙政文)은 평안도 평양(平壤)에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조종인(趙鍾仁)때 비로소 금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조덕삼의 5대 할아버지는 평양(平壤)을 근거로 해서 중국 동북부지방을 무대로 삼고 무역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아버지는 많은 유산을 안고 금광업을 해야 한다면서 아들 조덕삼을 이끌고 전라도 땅 김제군, 금광이 많고 사금(沙金)이 많이 나온다는 금산(金山)에 자리를 잡고 이 일대 토지를 매입하고 금광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국을 드나들면서 무역을 했던 집안답게 김제를 중심으로 완주(完州), 정읍(井邑), 태인(泰仁), 익산(益山), 부안(扶安), 고창(高敞), 전주(全州) 등을 무대로 사업을 하여 더 많은 돈을 모았던 집안이다.
그 많은 돈으로 김제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사로 기반을 내렸다. 김제 지역에서는 내노라 하고 큰 소리를 하고 지낸 집안이다.
조덕삼은 젊었을 적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붙임성이 좋아 지나가는 나그네도 하룻밤을 자고 가자하면, 사랑채에 재우며 배불리 얻어먹고 떠났던 나그네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김제는 원래부터 땅이 넓고, 금광으로 유명해서 전국에서는 내 노라하고 큰 소리 쳤던 사람들이 자연히 금산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여기에 래세지향적(來世指向的)인 미륵(彌勒) 불교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금산사(金山寺)가 있어서 자연히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더욱이 미륵의 화신으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이루기 위해서 왔다는 강일순이라는 고부(古阜) 사람이 이곳으로 와서, 천지개벽을 일으켜야 백성이 살수 있다면서 증산교(甑山敎)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강일순이 1909년 사망하자, 그를 따랐던 증산교 신도들이 제각기 여러 갈래로 나뉘어 졌다. 그 분파가, 지금도 금산교회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보천교를 비롯해서 태을교, 용화교, 삼성교, 태극도, 인천교, 무을교, 임무교, 선도교, 금강도 등 100여개가 넘는 신흥종교 단지를 이루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금산리 일대는 흡사 한국의 종교전시장(宗敎展示場) 같은 고장이 되었다.
이러한 때를 만났던 조덕삼은 원래 유교 집안이었지만 워낙 개성이 강하고 또 개혁적인 성품을 가졌던 사람인지라 이 고장을 지나다니던 서양선교사와 대담하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미국의 테이트 (Lewis B. Tate)선교사다.
그는 전도를 위해 전주(全州)에서 정읍(井邑)으로 말을 타고 왕래하다가 중간지점인 금산리에서 기식(寄食)도 하였는데, 그 때 그가 마방에 말을 맡기고 묵은 집이 바로 조덕삼 댁이다.
그러다가 1904년 어느 날, 자기 말 방에 말을 맡기기 위해 찾아온 이 서양 선교사를 멀리서 지켜보며 조덕삼은 좋은 기회가 왔다며 그의 앞에 다가서서 말을 건네었다.
“저는 팥정리에 사는 조덕삼이라는 사람입니다. 선교사님께서 이곳 마방에 드나들 때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왠지 자꾸만 선교사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너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사교의 고장에 교회의 씨를 뿌리고 싶었는데 다름 아닌 이 고장의 제일가는 유력자가 이렇게 스스로 다가오다니---
“아, 그 일은 하나님께서 조덕삼 선생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이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교회를 설립해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이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하던 중 하루는 테이트 선교사가 즉시 그 자리에서 조덕삼씨의 손목을 잡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었던지 조덕삼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백하였다.
기도를 받고 나서 조덕삼은 말하였다.
“선교사님, 이렇게 마음이 시원한 일은 없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저의 집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의덕 선교사는 조덕삼씨의 사랑채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날 예배에 참석했던 교인들은 조덕삼씨 부부를 비롯해서 그 집에서 일하고 있던 머슴 이자익,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사는 박희서 부부, 왕순칠, 왕창순, 강평국, 김재선, 곽동호, 박윤근, 김윤찬, 송은혜, 그리고 조덕삼 아들 조영호 등이었다.
얼마 동안 출석했던 이들에게 선교사는 학습을 실시하고, 다시 가을철을 맞이하여 1905년 10월 11일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이들 3인에게 최초로 세례를 주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금산교회가 공식적인 교회로 출발하게 되는 시초였다.
그 뒤 금산교회에는 날로 성장하였다.
신앙적으로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 불어나자 장로를 한분 피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로 피택에는 조덕삼옹과 그의 마부 이자익 청년이 함께 나서게 되었다.
반상(班常)을 가리던 그 때로서는 주인과 머슴이 장로 경쟁을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또 일어났다. 피택 결과를 헤어보니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마부인 이자익이 당선된 것이다. 교인들은 모두 놀라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이때 조덕삼 옹은 조용히 일어나 교인 앞에 섰다. 그리고 이렇게 말 하였다.
“교인 여러분---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마부의 관계가 되고, 교회에 가서는 장로와 평신도의관계가 되어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조덕삼 옹은 이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로 유학도 보내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 3대나 전 한국 단일교단의 총회장을 지내는 훌륭한 교계 지도자가 되게 한 것이다.
조덕삼 옹은 이자익 장로 보다 반년 뒤인 1908년 가을,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옹은 이해 지금의 ㄱ자 교회당을 짓기 시작한다.
그동안 임시 교당을 대신하여 조덕삼 옹이 일금 15환을 헌금, 교인들의 출연과 함께 새 교회당을 지은 것이다.
교회당을 상량하면서 조덕삼 장로의 의견으로 남자석에는 고린도 후서 5장의 말씀을 한문으로, 여자석에는 고린도 전서 3장의 말씀을 한글로 써서 상량문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윽고 나라를 빼앗기는 한일합방의 비운이 찾아온다.
1910년 8월29일 순종(純宗)황제는 퇴위를 당하고 나라를 일제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조덕삼 장로는 식음을 전패하고 며칠 동안 교회당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금산면에 알리어지자 금산에 살고 있던 대다수의 주민들이 금산교회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한다면서 금산교회로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이제는 민족교육의 길이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금산교회에 유광학교(?光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은 설립자인 조덕삼(趙德三)장로가 취임하였으며, 민족교육이 학교를 설립하게 된 이념이 되었다.
유광학교(후에 東光學校라 불렀음)는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쳤으며,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과 동시에 성경과목을 넣어 가르쳤다.
이 일로 금산리(金山里)에는 어린 청소년들이 모여들었고, 이 일로 금산교회는 이 지역의 어린이 낙원이 되기도 하였다.
1919년 조덕삼 장로가 별세한 뒤로는 그의 아들 조영호(趙永浩)장로가 이 유광학교를 책임지고 끌고 나갔다.
조덕삼 장로는 사업에서는 더욱더 성공을 거두어 나갔지만 교회 일에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호남지방을 다스리는 전라노회에도 매년 총대로 나가 이 지방의 복음화 사업에 열성을 내었다.
전라노회는 당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함께 책임지는 아주 큰 노회였다.
1911년 9월 18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 전라노회 (전남북과 제주) 창립노회가 열렸는데, 이때 조덕삼 장로는 총대의 한명으로 참석, 기독교 초창기의 지역 개척에 앞장섰다.
창립 전라노회는, 목사로는 이눌서, 최의덕 등 서양 선교사 등 13명, 장로로는 조덕삼 장로를 비롯하여 14인, 도합 27명의 총대로 이루어 졌는데, 이 중 자그마한 금산교회에서 조덕삼과 이자익 두 장로가 총대로 참석할 만큼 그 역할이 컸다.
이어 전라노회 제2회 노회가 1912년 8월 25일 전북 임피(臨陂)의 국말교회에서 열렸을 때에도 총 32인의 총대 중 금산교회에서 조덕삼 장로가 그 중 한명으로 총대 참석하였다.
1913년 6월 13일 전남 목포 양동교회에서 열린 제3회 노회에도 금산교회에서는 총 34인의 총대 중 조덕삼, 이자익 두 총대가 참석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1917년 노회와 1919년 노회에도 계속해서 총대로 참석, 왕성한 교계 활동을 해 나갔다.
믿음이 신실했던 조덕삼 옹은 교회에 나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정성을 모아 하나님계 기도하였다.
조덕삼 장로가 금산 교회에 가면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두 팔 벌리고 의연하 자세로, 붉은 방석 위에 가로 앉았다.
그러다가 앞에 나가 설교하거나 기도 할 때는 의자에서 일어나 강대상 가까이 가서 큰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
조덕삼 장로가 갑지기 신병으로 1919년 12월 17일 별세하였는데, 이것으로 보면 작고하기 직전 까지, 단순히 금사교회 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지역 발전을 위해 얼마나 정력적으로 발 벗고 나섰던가를 알 수 있다.
조덕삼 장로는 사회참여의 일익으로 안양동 용발골 등 금산 일대의 산에 품종 개량을 해야 한다며 삼나무를 대량으로 심는 운동을 일으켰다. 자기 산에만 심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에 심기를 권하였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 조덕삼 장로는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절대로 우상 섬기지 말고 제사 지내지 말라, 예수를 잘 믿어야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며 운명하였다.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 까지 찬송가 525장 (주 믿는 형제들)을 4절 마지막 까지 다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 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아멘 (금산교회 홈페이지 에서)
양반이 머슴 섬겼던 한국교회
허명섭 박사(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의 복음은 한국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통과 숙명이라는 철옹성 안에 꼭꼭 숨어 있던 한국사회가 기독교 복음에 노출되면서 조금씩 문을 열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밖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소수자에게 온갖 특혜를 집중시키는 기재(器材)였던 신분의 벽은 복음의 진수를 맛본 사람들에게 의해 허물어져 갔다.
전북 김제에 있는 ‘ㄱ’자 교회로 유명한 금산교회의 초기 역사에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있다. 불교의 오래된 사찰들이 많고 증산교와 같은 소위 민족종교들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김제에 기독교의 복음이 유입된 것은 1905년이다. 이는 남장로교 선교사 테이트(L. B. Tate, 최의덕)와 용화마을의 양반지주이자 마방(馬房)의 주인이던 조덕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조덕삼은 마방에 묵고 있던 테이트를 청하여 복음을 듣고,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처소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금산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조덕삼은 집안 식구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중에는 마부 이자익(1879-1957)도 있었다.
이후 예수에게 붙들린 조덕삼과 이자익은 힘을 모아 금산교회를 세우는데 진력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주인과 머슴이 합력했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두 사람은 1907년에 함께 금산교회의 영수로 임명되었고, 금산교회는 그해에 독노회 전라대리회의 허락을 얻어 장로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것이야말로 참된 성서적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이 없고, 그 자체로 함께 어울려 사는 신앙의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런 조덕삼 영수의 모습은 당시 한국교회에 신선하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사회의 많은 변화들을 주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교회 내에서는 반상의 문제로 진통을 겪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승동교회에는 무어(S. F. Moore)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 최하층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정 출신의 박성춘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 신자들이 이에 반발하고 떠나 안국동에 안동교회(홍문석골교회)를 세웠다.
또 서울 연동교회에도 갖바치들이 함께 모였는데,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그 교회의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종묘 근방에 묘동교회를 설립한 역사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가 ‘우리 모두의 종교’가 아니라 ‘양반의 종교’로 전락되는 것을 내한 선교사들이 막으려고 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례들이었다. 즉, 초기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어느 특권층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길 잃고 죽어가는 죄인들과 함께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과 비교할 때, 금산교회 교인들도 훌륭했고 조덕삼 영수는 더 훌륭했다. 이후 조덕삼은 자신의 약속대로 믿음 안에서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할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가 되어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을 다하였던 것이다.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특히 조덕삼 장로의 모습에 모두 놀랐다. 소작농이나 머슴은 비천한 사람이었다. 그들을 멸시한다고 내놓고 뭐하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덕삼 영수는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맛보았기에 성서의 가르침에 순종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비록 양민과 천민의 구별이 철저했던 때였지만 교회에는 그런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의 특별한 모습이었고, 그러했기에 시대의 선각자들은 ‘교회만이 우리민족의 유일한 희망’임을 크게 노래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평양 장로교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했으며, 1915년에는 금산교회 2대 담임목사로 청빙하기까지 했다. 이후 이자익 목사는 장로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는 큰 인물이 되었다. 비천한 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참된 믿음의 후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생명의 향기가 있는 아름다운 믿음은 위대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기 마련이다. 조덕삼도 이후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조영호도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손자 조세형(전, 국회의원)도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어 천국의 유산을 아름답게 이어가고 있다. (2006. 7. 1.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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