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라고도 하며 1870년에 발발하여, 1871년 프로이센의 승전으로 끝난, 독일의 통일을 완수하려면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독일의 통일을 저지하려던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맞붙은 전쟁이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완전한 통일에는 오로지 강한 군사만이 주체가 되여야 한다는 철혈정책을 내세워 군사력을 증강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1870년 7월 13일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를 빌미로 나폴레옹 3세가 영향력을 행사하려하자,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국가로 프랑스를 지목했다. 그리고 프랑스대사 베네티티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를 헤센에 있는 온천장이 엠스를 방문하여 회담하였다. 이 회담의 내용이 베를린에 있던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대한 개전을 위하여 전보내용을 고묘히 고쳐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는 인상을 주는 내용으로 바꿔 이를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이였는데, 즉 엠스 전보사건을 교묘히 조작하여 외교문제로 비화시켜 프랑스를 전쟁판에 끌여 들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의도대로 프로이센 국민을 격양케 하여 프랑스에 대한 강경론으로 기울어지고, 이 때문에 프랑스 측도 프로이센에 대한 개전론이 강해짐으로써 당시 유럽의 중심국을 자처하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걸려들어 마침내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남독일 국가들이 프로이센 편에 서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멜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계획하고 지휘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공세는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병력동원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독일군은 4주 만에 바젠 장군 휘하의 프랑스 야전군을 메스 요새에 가두어 놓았다. 또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바젠 구출작전을 시도했으나 8월 31일 스당에서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포위당했다.전황은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9월 2일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1873)는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계속 다시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에서는 공화제 국방정부가 조직되어 프랑스 국민은 더욱 완강하게 독일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9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에는 메츠가 함락되어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을 열고 말았다.

[처형당하는 파리코뮌 대원]
2월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평화협정(armistice),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Treaty of Frankfurt)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의 대부분을 할양하였다. 또, 파리에 진격하기 직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Deutsches Reich, 1871-1918)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프랑스가 전쟁에 패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국가라 할 수 있다. 1871년 3월 파리시 수비대 중앙위원회의 '혁명파' 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시내 일부 지역을 일종의 해방구인 '코뮌' 으로 선포하고 코뮌 정부를 수립하고, 프랑스 대혁명(Revolution Francaise, 1789-1794) 정신에 충실한 각종 개혁 정책도 발표하였으나,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은 5월 21일 맥마흔(Marshall McMahon)의 지휘하에 파리로 진격하여, '피의 1주일' 이란 7일간의 시가전 끝에 두달만에 코뮌 정부는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하였다. 천재시인 랭보(Rimbaud, 1854-1891)도 파리코뮌에 가담하였다.
[Sedan, 2 September 1870]
프랑스의 패배는 2가지 중요한 효과를 가져왔다. 1876년 이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유지된 교황청의 세속권력이 붕괴되었고, 이탈리아 군대가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동시에 러시아 정부는 흑해 연안에서 자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한했던 파리조약(1856)의 해군 조항을 거부했으며 동부유럽에서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재개했다. 보불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40년간은 유럽의 주요 열강들 사이에 극도로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
[보불전쟁 승전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