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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연중 제5주일]
마르코 6,30-34
삶에 의미나 목적을 꼭 찾아야만 하는가?
저는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은퇴하고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 하는 일 없이 건강만 챙기고 놀거나 쉬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생을 즐기다 오라고 창조하셨다고도 하고 그런 삶의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인생은 그냥 소풍이고 즐기다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히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늦게서야 삶의 의미나 목적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창조자를 배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삶의 의미보다 앞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체입니다.
그렇더라도 삶의 의미는 찾고 싶었습니다. 이전에 신에 의해 규정된 삶이 감옥처럼 느껴져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적이 없는 삶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대부분 ‘소속감’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기 위해 타인의 시선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니체는 신에게 휘둘리나 사람에게 휘둘리나 같은 것이라 여겨 고독한 초인이 되라고 권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맞는다고 여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니체는 삶의 의미는 있는 게 좋지만, 결국 신은 부정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수영 회장은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나이가 87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는 전혀 자신의 그러한 결정에 후회가 없어보이고 당당해 보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기자였습니다.
1970년대에 일본산 카메라를 메고 이탈리아 소렌토 지방에 취재하러 갔을 때 일본 관광객들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능적으로 옷으로 자기 카메라를 가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니 우리나라 기업들의 광고판이 외국에도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신문사를 나와 소와 돼지를 키웠고 그 종잣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그러한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희대 한의과에 1,300억을 기부한 분도 있습니다. 이란 왕실 주치의로 있었던 이영림 한의사입니다.
이분은 당시 자신을 가르쳤던 신상주 교수님과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의학상이 나올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로 버는 돈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이란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왕실 한의사가 되었으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궁즉통이라 바라는 게 있으면 길이 뚫리는 법입니다.
물론 그 돈을 기부하기 전에 신상주 교수님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이분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다가 새벽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이십니다.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십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뤄야 할 사명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살던 부족이 있었습니다.
급격한 사막화로 더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사막을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길을 잃고 죽거나 되돌아왔습니다.
우연히 그곳을 여행하던 영국인 켄 리먼은 길을 찾지 말고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갈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원고를 다시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음은 창조자를 인정하는 행위이고 찾지 않는 것은 무신론과 같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그렇듯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창조자에 의해 의미와 목적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4일 [연중 제5주일]
마르코 1,29-39
<또 다시 길을 떠나며>
수도회 인사발령에 따라 최근 새로운 소임지로 옮겨오게 됐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나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솔직히 '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진하게 정을 주고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은 정말 큰 것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선생님들, 후원자들, 지인들과 이별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간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서 오는 부담감 역시 큰 것입니다.
그래도 '떠남'을 통해서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지난 6년간 사목을 정리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제 삶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결국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자주,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떠남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한 자리에 집착한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한 일상적 떠남에도 더욱 익숙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길 떠나는' 구도자이자 선교사로서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어제와 결별하고,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치유하셨고, 악령 들린 사람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갈릴래아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안식일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수많은 환자들, 악령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밤새 대대적인 치유활동이 이뤄졌습니다.
하느님 은혜가 풍성하게 내린 이 호숫가 작은 마을의 밤은 감사와 환희, 기쁨과 설렘과 함께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어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 모습이 안보이자 사람들은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다들 아우성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된 복음 선포자였다면, 덕이 덜 닦인 선교사였다면 우쭐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능력발휘를 해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단호하십니다.
일어나셔서 홀연히 앞장서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카파르나움 외에도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많은 고을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예수님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모습은 오늘날 우리 모든 선교사,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이십니다.
자신의 인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느님 일을 하실 뿐이지 자신은 조금도 챙기지 않으십니다.
오직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몸값을 치루려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일 강론>
(2024. 2. 4.)(마르 1,29-39)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여기서 ‘시몬과 그 일행’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이른 아침부터 병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병자들이 치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사람들이 아직 모르던 때의 모습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던 때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바란 대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 치료만 하셨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를
세우셨다면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처음에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2-5).”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당신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다녔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던 여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3-5)”
예수님을 찾아다닌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닌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로만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살아계시는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치유만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만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그런 일들은 모두 살아 계시는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나의 신앙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얻기만을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신앙, 즉 ‘죽은 신앙’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 치유를 거절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떠나시기 전에, 치유를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다른 이웃 고을들’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인데, 사실상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말에는, ‘이곳에서 한 것처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복음 선포의 한 방식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병자들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병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말씀의 은총’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당신의 활동의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병을 없애신 것은 아닙니다.
또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은 세 번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또 승천하신 뒤에도,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하느님 나라로,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영원한 생명만 있는 그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분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렸을 때, 병고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주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쪽 세상에서 얼마나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느냐?”입니다.
‘몸의 치유’와 건강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