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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곡(春谷) 강동원(姜東元)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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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물을 긷고 빨래하는 아낙들로 항상 북적거렸던 마을 공동 우물. 동네마다 어김없이 있었던 우물이 사라진 지 오래다. 집집마다 수돗물이 보급되면서 우물은 자취를 감췄다.
불과 2~3십년 전만 해도 우물은 마을 사람들의 생명의 원천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나마 남아 있는 우물마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화순읍내에 유명한 우물이 많이 있지만 특히 남산 주변에 있는 샘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필자는 춘곡(春谷) 강동원(姜東元) 선생을 인터뷰, 남산 주변에 있는 10개의 샘의 위치를 확인한 뒤 선생의 진술을 토대로 주변 사람 등을 심층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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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정(十井) 위치도. 남산 주변에 있는 10개의 우물중 현재 보존중인 것과 흔적이 없는 것을 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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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 화순 남산을 중심으로 삼백보 내외에 십정(十井)이 있었는데 남산 입구에 있는 자치샘(화순읍 향청리)을 비롯해 화순읍사무소 후문의 한천(寒泉, 향청리), 성안 마을의 성내천(城內泉, 삼천리), 남화순역 주변에 있는 동네샘 동천(洞泉, 삼천리 4구) 화순고 뒤쪽에 '매화천'이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샘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덕촌에도 유명한 샘이 있었고 미나리강 주변의 광덕천(광덕리 2구), 남산 아래에 모 벼락 부자집 안에 옹달샘과 남산 대밭아래에 있는 죽림천(竹林泉, 광덕리 1구), 광덕리와 향청리 경계에 샘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명한 동네 샘 등 10개다.
이들 10개의 샘의 뿌리는 남산이다. 물줄기가 남산에서 발원해 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산 공원 입구에 십정원두(十井源頭)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10개의 샘의 머리는 남산'이라는 내용인데 대부분 '바가지 샘'으로 명천(名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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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정의 으뜸인 자치샘. 진각국사 탄생에 얽힌 전설이 서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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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 십정원두 비문은 한학자로 이름을 떨친 덕은(德隱) 조갑환(曺鉀換) 선생이 썼다.
"10개의 샘은 물맛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우물이 하나 둘씩 사라지면서 인심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화순문화원장을 지낸 방대식 선생은 이들 샘을 살리지 못한 데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십정(十井) 중의 으뜸은 적천(蹟泉) 즉 '자치샘'이다. 진각국사의 자취가 깃들인 샘이라 하여 '자취샘'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와전돼 '자치샘'이라 불리고 있다.
남산 공원 입구에 있는 석간천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마를 때가 없고 무더운 삼복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물맛으로 유명하다. 자치샘에는 화순 출신 고승으로 송광사의 2대 주지를 지낸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출생의 비밀에 얽힌 전설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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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공원 입구에 있는 자치샘은 원래 진각국사의 자취가 서려있다 해서 '자취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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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 고려 시대 중기 때의 이야기다. 자치샘에 가까운 마을에 말단 향리인 배씨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효심이 깊은 딸이 있었다. 딸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 배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 배씨 처녀는 새벽마다 자치샘에서 정화수를 떠다가 아버지의 석방을 기원했다.
엄동설한인 어느 날, 샘물에 참외 두 개가 떠 있어 이를 먹었는데 수태하여 옥동자를 낳았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양육할 수 없어 읍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진 숲 속의 큰 정자나무 밑에 몰래 버렸다.
배씨 처녀가 다음날 아이를 버린 곳에 가보니 놀랍게도 학들이 날아와 날개를 펴고 보호하고 있어 이를 기이히 여겨 다시 데려다 기르니 훗날 송광사 2대 주지를 지낸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혜심(慧心)이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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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읍 대리에 있는 학서정. 진각국사가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던 곳으로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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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 갓난아이를 내다 버린 곳에 학들이 날아들어 아이를 보호했다 해서 이곳을 학서도(鶴棲島)라 부르는데 이를 기념해 화순군은 1997년 5월, 화순읍 대리 들녘에 학서정(鶴棲亭)을 세웠다.
학서정에서 500여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서 있는 석상(石像)은 학서도 석상, 진각국사 석상, '벽라리 민불'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후세 사람들이 진각국사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m 50cm 높이의 화강암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은 순박한 기질의 순후지향(淳厚之鄕)적인 화순의 이미지와 걸맞아 '화순의 미소'로 상징화 돼있다.
이 석상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각 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와 민간신앙이 혼합된 유적일 가능성이 높은 데다 사료적, 유물적 가치가 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치샘 물맛은 철분과 염분이 없어 화순의 명물인 두부와 '기정떡'이 모두 이 샘물 때문에 유명했다고 한다. 물로 빨래를 하면 옷이 깨끗해지고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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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읍 벽라리에 있는 민불. 대각국사 석상, 학서도 석상이라고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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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 "자치샘의 원래 자리는 지금의 도로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화순~고흥 녹동간 도로 포장공사를 하면서 시장 안쪽으로 두 번에 걸쳐 밀려났지요. 30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주민들이 다 길어다 먹을 정도로 유명한 '바가지 샘'이었습니다"
자치샘 주변에서 40년째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유동순(69) 원장은 자치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다. 유 원장은 자치샘을 보호하기 위해 5년 전에 화순읍에서 보호각을 세우고 물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 화순소방파출소에 의뢰해, 매년 물을 퍼내고 있다고 한다.
자치샘은 25년 전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박스를 만들고 샘 앞에는 표지석을 세웠다. 옛날에는 샘 주변에 비스듬히 누운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물이 흘려 내려가는 큰 도랑, 빨래터가 있어 운치를 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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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박한 얼굴 모습이 순후지향적인 화순의 이미지와 비슷해 '화순의 미소'처럼 상징화 돼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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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종 |
| 자치샘 주변에 새로 난 도로와 연결하기 위해 올 3월부터 공사가 시작되면 그나마 남아 있는 자치샘의 흔적마저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10정의 두 번째 샘은 한천(寒泉)이다. 화순읍사무소 후문 자리에 있던 유명한 바가지 샘으로 옛날 연방죽으로 흘러드는 샘이다. 한천은 물줄기가 자치샘과 연결됐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읍사무소 후문 안쪽에 큰 당산나무가 있었고 나무 아래에 아담한 바가지 샘으로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춘곡 강동원 선생은 "한 여름에는 발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뜻한 명천이었다" 며 "여름에는 샘물이 차다고 해서 한천(寒泉)이라고도 하고 겨울에는 땀이 날 정도로 따뜻하다고 해서 '땀샘'이라고도 불렀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