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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전 휴거설에 대한 비판
‘휴거론’에 관하여
휴거를 소재로 한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의 발행 부수가 6천 5백만부를 넘었다 한다. 그 전에 나온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의 판매부수가5천7백만부가 넘었으므로 바야흐로 성경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나오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왜 성경을 소재로 하는 소설에 이토록 탐닉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이런 책, 댄 브라운의 책이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 류의 책은 과연 어떤 독자 층,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사 보는지도 자못 궁금해 진다.
전세계 기독교 교인이 다들 사보아서 6천만부 이상이 팔리는 것인지 아니면 반 기독교적 정서를 가진 안티 크리스천들이 기독교를 폄하하는 내용에 짜릿한 흥분을 맛볼 수 있어서 사 보는 것인지 전체 구독자를 일일이 인터뷰 하지 않는 한 나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 길 없다.
좌우간, 이런 성경 소재 소설이 잘팔리는 현상이 기독교계로 보아 반드시 반가운 현상인지 아닌지도 아리송하다. 서설은 이만하고 본론으로 접어 들어 –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는 왕년에 나온 휴거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을 시리즈로 엮어 낸 인기 소설인데 내가 이 글에서 의문을 제기코자 하는 것은 그 소설의 줄거리에 있어 휴거의 시기 문제이다.
이번의 ‘레프트 비하인드’도 그 전의 ‘휴거’ – 책명; 지상최대의 사건 휴거 – 원작명; Raptured - A novel on the second coming of the lord 저자:어네스트 W. 앵글리 – 와 마찬가지로 어느날 수 백만의 사람들이 홀연히 그리고 이유없이 사라져 버리는 휴거 사건으로부터 스토리가 전개된다.
현대 시점 어느날 수 백만 수 천만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기장이 비행 중 갑자기 사라져 비행기가 추락하고 자동차 운전자들이 사라져 도로가 아비규환이 되고, 잠자던 사람들이 잠옷만 남겨 두고 없어지고, 갓난 아기와 유아들이 자다가 없어지고, 그 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걷다가 달리다가 전화 받는 도중에 식사하던 와중에 그야말로 일상 생활 중에 홀연히 – 입었던 옷과 장신구만 남겨둔 채 –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두 소설 – 책명 레프트 비하인드와 휴거 – 은 이 시작 부분에 있어서는 묘사 분량의 다과 차이만 있을 뿐 그 스토리의 전개 부분이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 남겨진 자 들 사이에는 당연히 대 혼란이 일어난다. 외계인의 습격일 수 있다는 언론 보도의 묘사도 나오고 – 불 타고 있는 자동차, 정체중인 도로 모습의 배경 화면과 함께 – 남편, 아내, 사랑하는 아들 딸을 잃어 버리고 애타게 찾는 배우자, 부모의 모습도 나오고 또 한편, “기어이 주님이 오시고야 말았구나” 하고, 즉각 이것이 성경에 예언된 휴거인데 자신만 구원받지 못했구나 하고 각성하는, ‘남겨진’ 신자와 목회자의 모습도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즉, ‘휴거’ 가 일어 난 것이다.
이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휴거 사건을 스토리 전개의 맨 앞부분으로 설정하였으므로 당연히 그 다음의 이야기는 살아 남은 자 – 남겨둠을 당한자 - 들의 이야기이자 이 휴거 이후 사건의 전개 이다.
먼저 가족의 일원을 잃어 버린 주인공들의 모습이 두가지 형태로 묘사된다. 가족의 상실을 성경적 예언의 성취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하고 너무도 비상식적인 이런 사건에 대한 불가능한 해석에 절망하는 불신자 그룹이 그 한편이라면, 사라져 없어진 가족 구성원의 생전의 경건한 신앙 생활 ( 사라진 자들은 갓난 아기와 유아 그리고 모두 다 경건한,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만 구성되어 있다 ) 로부터 힌트를 받아 어렴풋이나마 이것이 저 성경에 나오는 휴거이리라 생각하고 이제라도 믿음 생활을 시작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는 회심자 그룹이 그 두 번째 부류이다. 물론 , 그 와중에 향후 영적 리더로 활동하게 되는 휴거 되지 못한 목회자 - 본인만 휴거 되지 못하였다는 회한과 상실감, 그리고 절망과 수치감을 겨우 극복하고 새로운 영적 리더로써 남아 있는 신도들을 추스리고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순교에 몸바치려 하는 거듭난 목회자 - 주인공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 이제 휴거는 일어 나고야 말았다. 소설에서의 그 다음 사건은 무엇일까? 바로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 레프트 비하인드에서는 루마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어느날 순식간에 루마니아 대통령으로 자리 바꿈하고 그리고 또 며칠이 못 가 단 한번의 유엔 연설로 일약 매스컴의 주인공이 되며 유엔 사무총장으로 전격취임, 세계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카르파티아가 적그리스도로 나온다. 앵글리의 ‘휴거’에서도 비슷한 인격을 가진 적 그리스도가 출현한다.
이 적그리스도는 처음의 단기간의 유화정책을 거쳐 곧바로 마수를 드러내는데 짐승의 표, 즉, 인식표를 이마에 받지 아니하면 매매을 금하게 한다거나 또 교회의 성도와 두 선지자를 핍박 한다거나 하는 소위 대 환란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 환란을 견뎌 내며 핍박하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는 거듭난 성도들과, 환란과 핍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적그리스도의 회유에 무너 지고 마는 두 성도 그룹의 환란 하의 생활상을 주로 묘사하는 이후의 스토리는 - 이스라엘과의 언약과 성전 재건 등등의 장면을 포함하여 - 두 소설 모두 대동소이하다. 이 두 소설의 휴거 이후 줄거리를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는 다르므로 이 두 소설의 공통된 스토리 개요만 다시 한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어느날 휴거가 일어 난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느날 홀연히 다 사라진다.
2)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고 권세를 잡아 대환란의 시대가 시작된다.
3) 적 그리스도의 통치에 항거하고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부하는 남겨진 이후 거듭난 성도 들이 겪는 핍박이 계속된다.
4) 한편 남겨진 자 중 환란을 이겨 내지 못하는 믿음이 약한자와 불신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최후의 멸망에 이르게 된다.
5)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마지막 심판을 베푸신다.
나는 이 글에서 두 소설의 줄거리상의 헛점이나 성경 예언과의 상이점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서 말한 바, 휴거는 이 두 소설에서와 같이 환란 전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시기에 있는 것이냐 하는 명제를 두고 휴거는 환란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휴거가 먼저 있고 그 후에 환란이 온다는 환란 전 휴거설에 관해 반박하고자 하는 내 나름의 주장과 그 논거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인 것이다.
내 주장의 요점을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휴거는 환란 이후에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일어 나는 부수적 사건이다.” 라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즉, 나는 환란전에 휴거가 별개의 사건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대신에 휴거는 – 이 ‘휴거’라는, 온갖 잘못된 편견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또 미혹케하는 이 요상한 명칭 조차도 나는 숫제 마음에 들어 하지 않거니와 - 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 때에 청함을 받은 자, 즉, 세마포 옷을 입은 우리 성도들이, 정말 정말 마지막 때에 -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각각의 사건, 환란이 모두 다 이 지상에 구현 된 이후에 – 예수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재림) 하실 때에 – 그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첫째 부활) 그 후에 (거의 동시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는 마지막 순서이지, 지상에 어떤 환란도 오기 전에, 잘 믿는 우리 성도를 구제하고 그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여 주기 위하여 “이리로 올라 오라 하며”, ‘끌어 올려 주는 별개의 사건’이 절대로 아니며 또 주님의 재림과는 무관하게 어느날 갑자기 발생할 ‘별단의 특정 사건’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한 논거를 제시하기 전에 먼저 휴거라는 단어가 우리 사이에 회자 되기 시작한 성경의 근거 즉, 말씀을 살펴 보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7 절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사실 ‘휴거’란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7절의 본문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 에서 ’끌어 올려’ 지는 것을 한자말인 휴거 (携擧) 라는 단어로 표현 한 것이다. 영어 성경에는 이러한 ‘끌어 올려’ 가 will be caught up together 로 표현되어 있고 (NIV), 일본어 성경에는引き 上げられ (히끼 아게라레;’ 끌어 올려져의 뜻) 라고 표현되어 있다. 영어권에서는 물론, 끌어 내어진다는 의미의 raptured 나 명사형 Rapture가 사용되기도 한다.- rapture[r?pt???] 1. 큰 기쁨, 황홀(경); 광희, 환희; (종종 raptures) 환희의 표현[말]. ▷ ECSTASY ? be in ~s over[or about, at, with] …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2. 《고어》 (사람을 다른 곳, 특히 천국으로) 보내기, 옮겨가기. 3. (the R-) 〈신학〉 (그리스도 재림시에) 그리스도와 공중에서 만나는 체험.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 전서 외에도 주님의 재림 장면을 묘사한 성경 구절로는 마태복음 24장이 있다. 그러나 휴거라고 번역된 “끌어올려”가 등장하는 구절이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7절이므로 이 구절을 먼저 소개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24:30-31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한편,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1-17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언급이나 마태 복음 24장 30-31절에서 예수님이 재림의 날 모습에 대해 설명 하신 것은 일종의 예고편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구절들은 재림이라는 사건 전체를 조망하거나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전하기보다는 그 일면에 대해 부분적으로 설명한 것이라 할 수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 즉 재림에 대해 가장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 최종적 완결판으로 서술되어 있는 성경 말씀은 역시 요한 계시록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17절의 휴거(?) 장면이나 마태복음 24장의 재림의 날 상황묘사에 관련한 내용은 계시록 몇 장 몇 절의 상황과 가장 잘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하에서 계속 부연하여 설명할 예정이지만 계시록을 제외한 성경 각 권에서 여러 모습으로 단편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주님 재림의 모습, 특히 살전 4:16-17의 상황과 가장 잘 부합하는 계시록 구절은 계시록 19장 6절 이하 20장 6절까지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천년 왕국의 도래이다.
아래에서 이 구절들을 모아 대비하여 보았다.
마태복음 24장 29절-31절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 4장 16절-17절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0장4 - 6절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휴거’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사건이 요한 계시록 어느 구절에 나오느냐 하는 문제 즉, 데살로니가 전서 4:16-17에서 말하는 휴거와 가장 근사한 (동일한) 사건으로 볼 수있는 것은 계시록 몇 장에서 설명되고 있느냐 하고 살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 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의 상황은 정확히 계시록 20장 4-6절과 부합한다고 확신한다.
어떻게, 왜, ‘확신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 4장16절에서 말 하는 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는 ‘첫째 부활’ 이며 이 ‘첫째 부활’이 나오는 대목이 바로 계시록 20장 4-6절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16-17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라 하며 소위 휴거는 역사 속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당한 자들의 부활 – 이를 첫째 부활이라 한다 – 이 이루어진 다음에 일어날 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첫째 부활이 있을 때에 휴거가 있다는 말이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일’ 즉, 첫째 부활이 일어 나지 않으면 휴거도 없다는 말이다.
이 점, 요한 계시록 전체 기록 22장을 1장부터 끝장까지 샅샅이 뒤져 보라. 10번, 20번, 아니 300번, 400번, 1,000번이라도 새로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찾아 보라. 그리하여 위에서 내가 제시한 요한 계시록 20장 4절 - 6절보다 더 분명히 첫째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 즉,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17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사건과 더 잘 부합하고 있는 다른 계시록 구절을 발견하면 나에게 좀 알려 주기 바란다.
그러면 살전 4:16-17 의 ‘휴거’가 계시록 20:4-6 의 장면과 일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계시록 전체의 기록이 시간 순서 즉, 사건이 일어 날 순서로 기록되어 본다면 – 이 첫째 부활의 사건은 (삼류 휴거 소재 소설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오늘 날 하시라도 일어 날 수 있는 우발성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계시하시고 예언하신 그 정확 무비한 하나님의 시간 계획에 따라 그야말로 마지막 중의 마지막 순서로 이루어 질 것이므로--- )
- 일곱 인이 차례로 떼어져 네 마리 말들이 먼저 출현하고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나타나는 즉,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자신들의 피를 갚아 주실 것을 신원하고
- 하나님께서는 “아직 잠시동안 쉬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말씀 하시고
-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 날 일들이 일어 나고, 즉,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게 되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달은 피같이 되며 하늘은 말려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옮겨 지매 땅의 임금들과 장군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이심을 깨닫게 되고 난 후에,
- 인치심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나오고
- 일곱째 인을 떼시고 난 다음,
-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와 여섯 나팔을 불고
- 여섯 나팔의 재앙이 모두 끝 난 후에
- 두 증인이 이미 출현했다가 하늘로 올라 가고,
- 일곱째 나팔 이후에 짐승 두마리가 출현하고
- 또 이 짐승이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짐승의 통치하에 사로잡힐자는 사로잡혀 가고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고,
- 성도들이 이 짐승의 권세 기간 중에 늘 인내와 믿음을 지켜 살아야 하고,
- 또 짐승은 자신의 우상에 경배하게 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뒤에)
-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고,
-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고
- 드디어 마지막 일곱재앙을 천사가 진노의 일곱 대접을 이 땅에 쏟아 낸 다음,
- 아마겟돈에는 이 지상 왕들의 전쟁준비가 완료되고,
- 큰 음녀와 큰 바벨론이 패망한 다음
- 그 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세마포 입은 우리 성도 (환란에서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가 초청되고
- 드디어 마침내 주님께서 천군천사와 함께 백마를 타시고 재림함으로
- 만국을 치시고 철장으로 다스리려 싸우러 나오실 그 때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 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용, 즉,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는 자를 잡아 천년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으실 그 때에, 비로소 첫째 부활과 공중영접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요한 계시록의 기록은 시간 순서인가
한편, 우리가 이 대목에서 동시에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는 마태복음 24장과 계시록이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시간적 순서 순으로 쓰여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일’ 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때 있을 징조를 설명하는 대목에 있어 사건이 실제 일어 나는 순서에 입각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서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이 모든 내용은 그 근거를 잃고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이 점, 나는 마태복음 24장과 계시록은 공히 시계열 상 시간의 전. 후 즉,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의 흐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공관복음인 사복음서가 실제 사건의 발생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가 역사적 사건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 등 역사서가 또한 시간의 흐름을 좇아 쓰여지고 있는 것처럼 계시록은 ‘장차 될 일’을 - 주님께서 요한에게 - 그 시간과 벌어 질 일의 순서대로 보여 주시고, 사도 요한은 또한 자신이 본 일을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또 “ 이 일후에 내가 보니” 라며 시간 – 적어도 자신이 본 사건의 -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사이에는 소위 말하는 삽경 즉, 삽입 장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삽경조차도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사건이 일어 날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각각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 중간에 일어 날 사건으로 보고 있다. )
존 트라볼타와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영화 Pulp Fiction 이라는 영화를 보면, 개별의 사건들이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로, 전혀 연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진행되다가 맨 마지막 장면에 가서 그 모든 사건들이 절묘하게 서로 얽혀 들어 가면서 결국은 전체가 다 하나로 연결되는 스토리로 반전한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보다가 ---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아 -- !! 하고 알아 차리게 되는 식이다. 이 영화 펄프 픽션은 이런 독특한 편집으로 발표 당시 신선한 반응을 던지며 제법 성공한 영화로 자리 잡게 되는데 --- 웬만한 영화광이 아니면, 또 영화 보는 센스가 상당한 수준이 아니면 한번 보아서는 잘 알아 차리지 못할 만큼 교묘한 편집의 트릭이 숨어 있는 영화인 것이다.
나는 이 점,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런 고도의 그리고 난해한 기법으로 - 말세에 일어 날 일들을 – 사건을 헷갈리게 좋게 일부러 뒤죽박죽 편집하셔서 - 사도 요한에게 계시하고 보여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셔야 할 하등의 이유와 동기가 없었기 때문에!!
환란전 휴거의 주장 근거는 무엇인가?
환란전에 휴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측의 논거와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을 살펴 보자. 먼저 그들이 금과옥조로 내 세우는 성경 구절은 딱 두 가지인데 ---
계 4:1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계 3: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위와 같이 계시록 4:1 의 “이리로 올라 오라” 하는 구절과 3:10의 “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의 두 구절이다.
먼저 “이리로 올라 오라”하는 구절을 환란 전 휴거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이유는 ‘이리로 올라 오라’라는 구절은 요한 개인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믿는 성도 전체를 대상으로 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리로 올라 오라’는 것은 환란 전에 주님이 우리 믿는 성도 전체를 보호하시기 위해 휴거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주님께서는 그리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환란으로부터 ‘믿는 성도’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 성경을 통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한편, 교회는 – 오늘날 신약시대 교회- 는 계시록 3:10절 말씀 ‘이리로 올라 오라’는 구절 이후 휴거 되어 올라가 버리고 지상에는 교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계시록의 모든 구절 즉, 3:10 이후의 환란은 휴거 되지 못하고 이 지상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대상으로 주신 예언의 말씀이라는 괴상망칙한 이단적 해석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하고자 한다.)
위와 같은 환란전 휴거설의 주장 근거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공박하고자 한다.
1. 계 4:1 ‘이리로 올라 오라’는 말씀이 사도 요한 개인에게만 한 이야기가 아니고 신약 교회와 성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주장에 대해;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비유로 보아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전형적 오류에 빠져 있는 사례로 사실 너무도 비약적이고도 유아적인 발상이라 논박할 가치 조차 없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특히 4:1절 본문 전체를 찬찬히 음미하여 보면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요한에게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셨으므로
1) ’올라 오라’고 하신 목적은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며
2) 올라오라는 명령 내지 말씀의 대상은 사도 요한 개인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이런 분명한 문자적 해석을 굳이 무시하고 다른 해석을 가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무단히 변개하는’ 이단적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계3:10의 “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가 환란전에 성도를 피신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주장에 관해;
도대체 오늘날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그 무엇이 대단하기에 전체 성도를 환란에서 구제하고, ‘휴거’ 시키셔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또 주후 2012년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성도의 믿음이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를 통하여 목베이고 순교한 그 많은 믿음의 선진들에 비하여 얼마나 뛰어난 믿음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의 ‘믿음’이 2,000년 전 네로 황제 당시의 초대 교회 교인보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이빨과 발톱 아래 죽어 갈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초대 교회의 믿음 보다, 춥고 음습한 지하 묘지에서 체포와 사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씀을 붙들고 살던 그 시대 초대 교회 교인들의 믿음보다, 로마 카톨릭의 박해로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 당해 육신이 불길에 의해 녹아 들던 때까지 믿음을 놓지 않았던 500년 전 우리의 신앙 선배들보다, 근대 역사를 통하여 공산 국가와 로마 카톨릭 지배 국가와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들에서 모진 핍박을 받다 죽어 간 – 그리고 지금도 핍박당하고, 박해 당하고, 고문당하고, 살해 당하고 있는 - 수 많은 그리스도인과 회심자들의 믿음보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돌아 가시기까지 결코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죽음으로 순교하신 한국 교회의 주기철, 길선주, 이기선, 손양원, 최권능 목사, 박관준 장로의 당시 신앙 보다 , 중국 및 북한 공산독재정권의 그 모진 박해와 고문하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사는 오늘날 중국 가정교회,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믿음보다 더, 월등히 더 높은 경지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그 오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묻고 싶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하여 순교 직전에, 핍박 받기 직전에 주님께서 개개인 별로 또는 단체로 “성도 보호 차원” 에서 ‘휴거’ 해 가신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순교 직전에 이 성도들이 주님께 ‘고통 없이 데려가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들을 했겠나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또 생각해 보자. 일 주일 내내 세상속에서 세상사람들과 똑 같이 살다가 – 주위의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본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릴 도리 없이 돈과 명예를 좇아 그렇게 살다가 – 주일 예배 1시간을 나와 ‘복 더 주실 것’ 만을 바라고 돌아 가는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에 비추어 볼 때 도대체 오늘날 우리 교인이 초대 교회 성도들, 또 위에서 열거한 고난 당한 믿음의 선진들보다 더 우선하여 시험의 때를 면하고 ‘휴거’ 되어 올라 가야 할 이유와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반문하고 싶다.
믿음의 여부에 관계 없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여부는 차치하고, 주일날 예배 빠짐 없이 나오고, 십일조 내고, 각종 교회 일 봉사에 참여하면, 그러면 이 모든 환란 전에 우리 주님이 약속한대로 우리 모두는 ‘휴거’ 되어 공중에서 예수님과 7년간을 혼인 잔치 한 후 지상에 재림하여 천년 왕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복음이라 믿고 있는 내용이라면 오늘 이런 우리의 믿음은 500년전 저 가증한 로마 카톨릭이 면죄부를 팔던 당시의 신앙보다 결코 더 나을 것이 없다. 1517년 종교 개혁 직전의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도의 연보 돈이 돈 궤에 ‘땡그랑’ 하고 떨어 지는 그 순간 연옥에 있는 일가 친척의 영혼이 구원 받는다고 가르쳤다.
1) 환란은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계획하신 일이다.
또 한편,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그리고 ‘믿는 성도들’은 내가 마지막 환란 전에 반드시 공중으로 먼저 대피시켜 주리라하는 내용과 비슷한 구절이 성경 도처에 수 십 수 백번 반복되어 나온다면 또 혹시 모르겠다. 그러나 환란 전 휴거의 논거로 제시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이 계3:10이 유일한 반면,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와 비슷한 구절 즉, 우리 성도는 환란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나 또는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경 구절은 수 십 수 백 구절 이상을 제시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태복음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가복음 13: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단 7:25
---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계시록 13: 9-10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데살로니가전서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전서 3: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다니엘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데살로니가전서 3: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요한계시록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린도후서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베드로전서 4: 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2) 하나님은 환난속에서 성도를 보호하신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는 방법이 꼭 ‘휴거’ 여야만 하는가 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허락을 하시는 한편, 또한 그 환난 속에서 우리를 보호 하시고 피할 길을 마련해 두고 계신다.
시편 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욥기 5: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시편 120: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의 삶 속에 환난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 평생 잘 먹고 잘 지내다가 고통 없이 죽고, 죽는 그 순간 천국으로 가는 복된 삶은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편함’을 구하라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던 그 상황을 다시 한번 상기 하여 보자. 예수님은 감람산 (겟세마네)에서의 마지막 밤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기 직전에 기도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어”,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워 주실 것” 을 원하셨다.
다음날 온종일, 돌아 가시기 전까지 당할 그 육체적 고통보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창조주 그 분께서 무지한 인간의 손에 수모 당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할 그 사실이 더욱 더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들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심한 모욕과 함께 뺨을 한대 얻어 맞았다 하자. 뺨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아픔은 금방 사라지지만 그 모욕감은 오래 오래 원한과 고통이 되어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를 것이다. 예컨대 한국의 어떤 국회의원, 또는 장관이 일개 일선 경찰관에게 뺨을 맞고 모욕을 당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가정하자. 이 국회의원 또는 장관은 뺨을 맞은 그 아픔보다 그 모욕감에 그리고 수치와 분노에 평생동안 치를 떨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예정된 수순 즉, 독생자의 십자가 처형 사건을 계획대로 진행시키신다. 고통과 저주의 십자가를 은혜와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고난을 받으시는 순서가 반드시 필요하셨던 것이다. 성경에서 무수히 예언 된 바로 그 사건이 반드시 역사 속에서 예언대로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형통한 길을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을 통하여 연단시키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내시며, 순교자의 영혼이 그 수가 찰 때까지 오늘도 예언의 역사속 성취를 위하여 길이 참고 계시는 중이다. 즉, 환난이라는 시련기를 통하여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이 ‘키질’은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내야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또 한편으로 시험을 당할 때에 그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시다. 즉,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는 방법이 꼭 ‘휴거’ 여야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는 이런 환난을 피하게 하는 내용 즉, 피할 길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장면을 도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 환난 시기에 성도에게 담대함과 또 지혜를 주심
마태복음 10:18-20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나) 때로 성도를 안전한 곳으로 피난 시키심
계시록12:5-6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시록12:13-16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다) 성도를 해하는 세력을 직접 응징하기도 하심
계시록 11: 3-5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라) 환난 가운데 천사를 보내어 직접 보호하심
다니엘 3장 26 - 27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다니엘 6장 22 - 23
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3)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기 위하여 - 환란 전에 성도를 모두 휴거해 가신다면 예언의 다른 부분과 서로 맞지 않게 된다.
환란전 휴거설에서 말하는대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기 위하여 - 환란 전에 성도를 모두 휴거해 가신다면 다니엘서, 계시록, 마태 복음 24장 등 성경 속 예언의 다른 부분과 서로 맞지 않게 된다.
예컨대 성도가 다 휴거 되어 올라 가 버리고 나면, 다니엘서 7장 25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즉,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 지지 않게 된다.
단 7:25 ---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4) 계 4장의 천상의 예배에 성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일 계시록 4장 1절의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말씀이 성도들의 휴거를 뜻하고 있다면, 또 하나님께서 성도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하시고 모든 성도를 다 휴거해 올리워 가셨다면, 계시록 4장 전체에서 요한에게 보여 주신 천상의 예배 장면에 성도들의 모습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장 전체의 내용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성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휴거 된 성도들이 분명히 주님과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며 또 이 예배에서 가장 감격스럽게 예배 드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이 휴거된 성도들은 어디로 갔을까? 성도들을 이 하늘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성도들의 모습은 6장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비로소 나온다. 또 이 성도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휴거 된 모습이 아니고 “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 이다. 또 계시록 7장 3절에서 10절까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 십 사만 사천명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이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지 온전한 상태에서 휴거 되어 올라 간 모습들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기 위하여’ 어느날 성도를 ‘끌어 올려’ 가는 ‘휴거’는 없다. 대신 우리 모두는, - 당연히 우리 성도를 포함하여 – 믿는 자이든 불신자이든, 왕이든, 대통령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상인이든 학자이든, 부자이든 가난하든지 간에 환란의 시대를 통과한다. 이 환난 시에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면’ , 그 때 비로소 여러분은 ‘마지막 심판’ 없이 하늘에서 주님을 우선 만나 볼 수 있고, 그리고 주님 재림 하실 때에 있을 천년왕국의 주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환난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환난 중에”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 ‘환난 전 휴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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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환란은 신자를 통과하라고 주신게 아닙니다.
지옥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게 아니라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하신 곳이듯이,
대환란은 예수를 믿고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대환란때 구원받는 것은 겨우 구원받는 것입니다. 지금하고 다릅니다. 뭘 알고 거기 들어간다고 말해야 됩니다. 지금이사 별거 아닌거 같고 그냥 좀 숨어살거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답답한 사람 여기또 계셨네......
할렐루야!
휴거는 크리스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와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 환난 전에 들림받는 것입니다.
미국도 환난 후를 주장하는 신학과 교단이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를 띄어내고 무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
후천년설로 미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흔들리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합시다.
마라나타.
할렐루야!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휴거를 준비하는 성도는 martyrdom(순교)도 각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깨어있는 성도들이 Persecuted(핍박)과 순교를 각오하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마라나타.
감사함으로 한표
퍼갑니다...감사합니다.
위 글내용의 환란전휴거를 비판제목으로 올리셨네요.. 그럼 어려서부터 배운 이경이든 삼경이든 도적같이 오신다는 성경 말씀은 환란이후에나 해당되는건가요? 이건....아니죠!! 환란전이든 환란후든 지금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시간을 기준으로 주님께서 내일새벽에 오실수있으니 근신하여 깨어 정신차리고 있으라.. 이말씀이 진리아닌가요.. 환란후라면 이미 언제 오시겠다고 친절하게대놓고 답을 주셨네요.. 윗글 올리신님..제발 환란후라고 전도하지마시고 내일 당장오시겠구나 라고 하루하루 회개하며 주님오심을 간절히 사모하시는 성도들이 되십시요 라고 전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후따지지 말고 지금 이세상이 바로 마지막시대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곳곳의 재앙들을 보면서 정말 이제 도적같이 오시겠구나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처녀가 되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