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감사하게도 김선우 PD님의 초청으로 현지 방송코디로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촬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이번 회차(945회)가 정식으로 방영되었는데, 완성본을 다시 마주하니 촬영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현지 촬영은 PD님과 저 단둘이 함께했는데, 평소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시청하는 TV 프로그램 한 편 한 편에 제작진의 깊은 심혈과 수많은 노고가 깃들어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화면에 비치는 한 장면조차 수많은 이동, 준비, 현장에서의 고민을 거쳐 탄생한 결과였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선사해 주신 김선우 PD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방송 시간은 정해져 있다 보니, 하루 종일 발로 뛰며 정성껏 담았던 풍경들과 섬세한 인문 이야기들이 전부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방송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아름다움과 이 특별한 촬영 여정을 이곳에 기록해 보려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여름의 숨겨진 보물 같은 비경, 산시성(山西省) 운구산(雲丘山)으로 시작합니다.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샹닝현(鄉寧縣)에 자리 잡은 운구산은 시안으로부터 315km 거리, 뤼량산(呂梁山)과 분웨이지엔(汾渭地塹)이 만나는 곳에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광지 전체 면적은 210㎢, 핵심 개발 구역은 35㎢이며 최고봉 옥황정(玉皇頂)은 해발 1,629m에 달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명산을 넘어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숨은 요람이자 천년 민속이 살아 숨 쉬는 땅입니다. 삼림 피복률이 89%에 이를 만큼 온 산이 푸른 나무로 울창하고 음이온이 풍부합니다. 한여름 산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더위가 사라지는 진난(晉南) 지방의 천연 산소 쉼터이자 최고의 피서 비경입니다.
중국 향토문화의 중요한 거점인 운구산에는 열한 곳의 천년 고촌락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희귀한 진난 요동(窯洞) 마을 군락으로 수천 년의 인문적 깊이를 품고 있습니다. 복희(伏羲)와 여와(女媧)가 만물을 창조하고, 요순우(堯舜禹)가 천지를 살폈다는 성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가 탄생하고 중원 농경문명이 발원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전진교(全眞教) 용문파(龍門派)의 개산조정(開山祖庭)으로, ‘북쪽에는 운구, 남쪽에는 무당’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명성이 높습니다. 도교, 유교, 불교 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고, 당나라시대부터 이어진 중화절(中和節)은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명절마다 수백 리 밖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복을 기원했습니다. 자연 풍광과 긴 세월의 문화적 흔적이 어우러져 산 전체에 부드럽고 무게 있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촬영 당일 정오 운구산 관광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핵심 명소인 300만 년 전 형성된 얼음동굴군(冰洞群)을 찾았습니다. 세계 3대 얼음동굴 기이경관 중 하나이자 중국 최대 규모의 천연 얼음동굴군으로, 오랜 세월 빚어진 자연 작품이며 2018년 말에야 세상에 공개된 운구산 최고의 보물입니다.
동굴 안은 연중 영하 10여 도로 온도가 유지되어 바깥의 무더위와 극명한 온도 차를 느끼게 합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장관 같은 얼음 결정 풍경이 펼쳐집니다. 겹겹이 형성된 고드름과 얼음 석순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투명한 얼음 표면이 오색 조명에 반짝이며 마치 동화 속 얼음 궁전에 들어선 듯한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합니다. 걸을 때마다 자연스러운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얼음동굴에서 비교적 긴 시간 촬영하며 구석구석 빙설 풍경을 꼼꼼히 담았고, 현지 한 관광객과 짧은 인터뷰도 진행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단순 여행객이 아닌 영상 크리에이터 팀으로, 촬영을 목적으로 일부러 운구산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한국 촬영팀임을 알자 그들은 놀라면서도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 유명 관광지와 달리 아직 운구산을 찾는 한국 여행객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이후 관광지 곳곳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따뜻하게 인사를 나눴고, 이 뜻밖의 만남이 촬영 여정에 아름다운 인연으로 남았습니다.
얼음동굴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서둘러 타얼퍼(塔爾坡) 고촌락으로 향했습니다. 2,5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이 마을은 본래 탑이파(榻耳坡)라고 불렸으며, 노자 이이(李耳)가 이곳에 유숙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고 《중국 전통 촌락 보호 명록》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산비탈을 따라 만들어진 요동 주택, 낡은 돌담과 나무 처마는 진난 지역 민가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민가 건축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립니다. 마을 안에는 선조들의 혼례, 출산, 제사, 기복 등 오랜 향토 풍습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일상의 생동감과 고풍스러운 정취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얼음동굴 촬영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 탓에 고촌 촬영 일정은 매우 촉박했습니다. 서둘러 마을 풍경을 담고 다양한 민속 공연, 몰입형 향토 체험 현장을 촬영했는데 모든 장면에서 진난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소중한 순간들은 방송 시간의 제약으로 최종 영상에 담기지 못했습니다.
고촌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십이화신(十二花神) 테마 공연 전체를 촬영했습니다. 그중 하늘에서 내려 꽃을 흩뿌리는 선녀의 춤이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휘날리는 옷자락과 우아한 춤사위에 고전적인 운치가 어우러져 현장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촬영 일정이 빠듯하고 제가 관리해야 할 장비도 많다 보니, 떠나는 길에 부주의로 삼각대를 공연장에 두고 왔습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화신 선녀께서 물건을 발견하고 보관해 주신 뒤 연락까지 전해주셨습니다. 낯선 사람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 깊이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하루 촬영을 마치고 관광지를 떠날 때, 아름다운 석양이 온 산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낙조가 푸른 산과 오래된 마을을 감싸고 부드러운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 이날의 모든 분주함과 아름다움을 한 폭의 풍경으로 완성해 주었습니다.
긴 시간 이어진 고강도 촬영 속에는 아쉬움, 신선한 놀라움, 따뜻한 정과 예상치 못한 인연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렌즈에 담았던 수많은 절경과 섬세한 인문 이야기가 방송에 전부 실리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덕분에 오직 저만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생겼습니다.
운구산의 300만 년 빙설 비경, 이천 년 고촌에 깃든 사람의 온기, 그리고 뜻밖에 받은 따뜻한 선의까지 모두 이번 촬영 여정의 가장 큰 수확입니다. 앞으로 촬영 비하인드 이야기를 천천히 연재하며, 본방송에서 놓치고 지나간 중국 서북 땅의 부드러운 정서와 낭만을 차례로 풀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