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동(옛 신당2동, 신당2동과 3동 일대를 약수동이라 불렀음)과 장충동(奬忠洞) 경계에 자리한 성곽을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문화재청에서 그렇게 부름)라 부른다.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반 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뒷쪽까지 이어지는 약 1.1km의 성곽으로 왜정(倭政)과 6.25 를 거치면서 도성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무거운 상처를 입은데 반해 이 구간은 그 시련을 잘 극 복하여 옛 도성(都城)의 위엄과 고색의 내음을 짙게 선사한다. 허나 '장충체육관~광희문' 구간과 옛 타워호텔 남쪽 구간이 20세기 혼란기를 틈타 장대한 세월 의 의해 지워지면서 양쪽이 모두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장충동 지구 성곽길은 오랫동안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다가 도보길 유행에 따라 성 바깥에 탐 방로를 내고, 성곽길 또한 모두 해방되면서(신라호텔 구간도 포함) 성 안/바깥 산책이 모두 자 유로워졌다. 이 탐방로는 옛 타워호텔을 거쳐 국립극장, 남산까지 이어지며, 길 중간에 암문이 있어 성곽길 이나 성밖 길로 갈아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 한양도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 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 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전국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 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무척이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에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 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 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 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서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원성을 들 어가며 단단하게 지은 도성이었지만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 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던 도성, 허나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 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 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뽐내던 한양도성은 근대 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시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해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벽 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 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괴상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 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고, 1910년 이후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서대문<돈의문 (敦義門)>까지 헐값에 민간에 매각하여 없앴으며,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 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였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발 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문( 城門)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 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 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 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관 동쪽~ 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동>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 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 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곽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 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