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가는 노래 /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 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이 모든 것 / 진 은 영
비눗방울 하나가 투명한 기쁨으로 무한히 부풀어 오를 것 같다 장미색의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활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종을 달고서 부드러운 날개 하나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 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 천사들이 처방해 준 약을 한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 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안녕, 안녕,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린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져 내리는 것 같다
아름답다 / 진은영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