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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 공회의 사도 바울
사도행전 22:30~23:11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최고 종교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회부되어 심문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성전에서 극렬한 유대인들의 손에 붙잡혀 죽을 위기를 만났을 때에 예루살렘에 머물던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그를 건져내었으나 왜 유대인들이 너무 흥분하여 이 말 저 말을 하므로 사도 바울을 그들이 죽이려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을 채찍질하여 그 이유를 밝히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또 다시 그를 심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사도 바울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소요 사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이번에는 유대인 장로들의 최고 회의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체포된 그 다음날 긴급 소집된 산헤드린 공회에 제사장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모여서 천부장이 군인들을 시켜서 사도 바울의 결박을 풀고서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공회에서 사도 바울의 해명은 또 다시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결국은 사도 바울이 군인들에 의하여 급하게 보호하여 다시 안토니오 요새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 가운데 일어난 일련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의 영적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존중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공회의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 서자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과거 사도 바울은 공회에 참석하여 스데반 집사의 변론을 듣고 유대인들이 분노하여 사형 선고를 내릴 때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맡아서 앞장서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적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나와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한 일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자리에 서 있으니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회를 주목하고서 첫 마디에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말함으로써 그의 변론의 첫 마디를 떼었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앉아있던 공회 의원 중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입을 열어 바울 곁에 있던 사람 곧 성전 경비대에 속한 군인이거나 종에게 대뜸 명하기를
“그 입을 치라”
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사람에게 더 듣지도 않고 입을 치라고 하는 것은 공회의 재판 절차상 합당치 못한 행위입니다. 심문을 받는 사람의 입을 치라는 것은 재판을 강압적으로 행하는 행위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도 제사장 안나스의 뜰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대답하시자, 그 집 종이 곁에 있다가 손으로 예수님을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반문하신 바 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 포악하니 그 종들도 포악하여 함부로 폭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지금 사도 바울 앞에 있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어서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심지어 제사장에게 돌아가야 하는 십일조 곡식도 그의 사악한 종들을 통하여 마구 탈취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나이 든 제사장들은 굶어죽어갔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회의 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지금 사도 바울의 첫마디만 들어도 그의 교만한 마음에 심통이 사나워져서 그처럼 사도 바울의 입을 치라고 폭력적인 말을 내뱉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바울의 입에서 매우 날카로운 저주의 말이 나왔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심문을 이제 시작하는 마당인데 말을 시작하자마자 죄인으로 취급하고 입을 치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긴 범죄행위로 보았던 것입니다. ‘회칠한 담이여’라고 선포한 말의 뜻은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서 13장에 보면,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하얗게 회칠을 해놓은 담처럼 겉으로는 깨끗하지만 결국 폭풍과 폭우와 우박을 쏟아서 무너뜨리게 되면 그 회칠한 것이 다 없어지고 지저분해지고 담도 무너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심판하사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때에 아나니아를 향하여 던진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 대제사장의 속내를 다 아시는 성령께서 그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하여 회칠한 담처럼 장차는 무너지고 그 더러운 것이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요세푸스의 전쟁사에 보면 아나니아가 이 공회를 주재한 8년 후인 주후 66년에는 유대인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강도떼들이 예루살렘을 점거하고 그의 집을 불태우고 그 집에 있던 노예문서들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 반란 가운데 아나니아도 역시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노예들을 많이 두고 탐욕과 권세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대제사장이 아니었고 타락한 목자요 회칠한 담과 같은 거짓 종교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폭풍과 폭우와 우박이 밀어닥쳐 그 담을 헐어버리고 그 흰 칠을 다 벗겨내고 그와 그 집안은 비참한 폐허지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8년만에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줄 몰랐던 아나니아는 로마권력에 아첨을 하면서 연약한 동족에게 불의한 세도를 부리면서 끝없는 자기의 탐욕을 만족케 하려고 탈취하기를 급급했다가 결국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지나친 욕심에 잡히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을 듣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날카롭게 대제사장에게 비판의 말을 쏟았던 사도 바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사도 바울은 즉시로 사과의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입을 치라는 불법적인 명령을 내린 자가 아나니아 대제사장인 줄 몰랐던 이유는 아마도 그 모임이 갑작스러운 비공식 소집이었기에 대제사장이 대제사장 복장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눈이 몹시 안 좋아져서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라야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중에 대제사장의 발언인 줄 모르고 그처럼 날카로운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로 자기에게 말한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점을 알게 되자마자 사도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노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인용한 율법 말씀 곧 출애굽기 22:28 말씀에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고 한 말씀을 그가 항상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비록 불의한 대제사장이었을망정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기가 그를 저주한 것을 사과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들을 함부로 모욕하거나 저주하거나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권위자나 세속의 권세자들에게 우리가 내 정치적 견해나 이념적 성향에 맞지 않다고 합리적 비판을 넘어 저주를 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겠습니다. 과거 모세의 시체를 두고서 미가엘 천사장이 마귀와 대치를 벌일 때에도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주께서 저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다서 1:9)
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권위로 저주하거나 비방하지 아니하고 만주의 주가 되신 주님의 권세를 힘입어서 그가 너를 책망하기를 원하노라고만 말했던 것입니다. 과거 다윗이 전임자 사울 왕의 불의하고 포악한 살해 위협을 계속 받는 중인데도 사울 왕을 죽일 기회에 친히 죽이지 않고 모욕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곤 하였습니다. 사울 왕이나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그의 부하나 종들이 칼로 해치고 목을 가져왔을 때에도 주권자를 해친 일로 그 죽인 자를 도리어 처벌했던 이유도 권위를 거슬러 행하는 것을 악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훗날 다윗의 왕권을 거슬러 반역을 도모했던 그 아들 압살롬과 반란 주모자 세바 등을 심판하사 다윗의 권위를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방하거나 저주하거나 대적하지 맙시다. 건전한 비판은 하되 저주와 비방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하나님께서 선하게 변화시켜주시기를 위하여 축복하며 기도하도록 합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과 태도를 가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사도 바울이 공회 앞에서 뗀 첫마디의 말부터 날카로운 시비거리가 되었던 것처럼 그 공회 분위기는 바울에게 몹시 비판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의 마음에 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지혜로운 묘책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그 공회에 모인 사람들 간에 교리적인 차이점이 서로 다른 두 파당이 있음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당시 율법을 엄숙하게 준수하는 바리새파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정파인 사두개파가 그 산헤드린 공회의 장로들의 두 가지 주류 정파였던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부활도 믿고 천사의 존재도 믿고 성령도 믿고 악령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사후 세계의 존재, 곧 천국과 지옥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뿐 아니라 시편과 선지자들의 글들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제사장들이 속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고 내세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세상의 축복이 전부고 죽은 후에 심판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중에서도 오직 모세의 오경만이 전부고 시편이나 선지자들의 글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할뿐더러 지나치게 엄격한 세부적인 지침까지 만들어서 율법과 지침들을 다 지켜야 한다면서 너무 무거운 짐들을 사람들에게 지워놓았습니다. 반면에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세상적이어서 돈과 권력을 유지하며 종교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세상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로마 당국에 아첨하곤 하였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로마 권력과 자주 맞서 싸우곤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민중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사두개파 사람들보다 더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이질적인 두 종교적 파당의 차이점을 착안하여 지혜롭게 이렇게 그들 가운데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파의 거두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 부모도 바리새파에 속했고 율법에 열심이 있었기에 그의 아들을 일찍이 예루살렘에 유학을 보내어 율법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을 거쳐서 열정적인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고 성경의 연구에 진력하여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목격한 다음에 그 동안 굳건하게 믿었던 바리새파의 신앙을 뛰어넘어 기독교의 진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모세 오경과 시편과 선지자들의 글들에서 약속된 구원자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 이 메시야 신앙과 부활의 진리를 목숨 걸고 전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분명히 자기의 진실을 얘기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자 곧장 사도 바울이 의도했던 바 공회 내부의 두 교파간에 엄청난 교리적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편에서 몇 명의 서기관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공감하면서 큰 소리로 우호적인 발언을 하기를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격렬한 토론이 양 진영에서 터져나와서 그 공회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여 온 기독교 복음의 핵심 곧 나사렛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없는 구원론 곧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론, 이로 인하여 할례나 율법 준수 없는 이방인들의 구원과 유대인들과의 자유로운 교제에 대하여 연합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진 기본적인 신앙이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관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말하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해묵은 종교논쟁으로 그 논점이 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집중된 공격이 사라지고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사람들간의 논쟁으로 바뀌어져서 그 공회는 더 이상 사도 바울을 심문하고 정죄하려던 본래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지혜로운 말로 인하여 공회의 회집 목적이 무력화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공회장이 소란스러워지자 천부장은 사도 바울을 보호하고자 무리 한 가운데서 서둘러서 그를 빼내어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볼 일이 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 중에 이렇게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종파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사회였던 유대 사회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열심당파가 있었고 에세네파라는 종파도 있었습니다. 이 종파들은 서로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아주 달랐습니다. 현실에 대한 대응책도 달랐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에 대하여 바리새파는 반대하는 편이었고 사두개파는 아첨하며 동조하였고 열심당파는 무력을 가지고 과거 다윗 시대의 영광을 도모하고자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겠다는 정파였습니다. 또한 에세네파는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세상자체를 악으로 보고 세상을 떠나 광야의 동굴에 들어가서 금욕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재산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재산을 공유하면서 가난을 미덕으로 삼고 명상을 중시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하는 유다 사회 내에서 이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회가 등장함으로써 또 다른 차원의 유다 사회 내의 혼돈이 더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회는 이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유대인으로서는 천지 개벽할 새로운 주장을 전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전하는 것이니 유대인들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회를 공통의 적으로 삼고 연합하여 가혹한 핍박을 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성경 해석과 현실 해석 등이 있어온 것은 그 이후 기독교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 진행하면서 성경의 진리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하여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생겨나면서 이단과 사이비가 나타났습니다. 2천년 역사를 거치면서 성경의 삼위일체 사상을 인정하는 여부, 교회 안에 성상 곧 예수님의 동상이나 마리아 상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놓는 것을 인정하는 여부,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매번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것을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는 미사 문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죄가 전혀 없이 태어나고 승천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문제, 죽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문제, 성경의 외경 문제, 연옥의 존재 문제, 로마 교회의 지도자 교황의 절대 무오설의 문제 등을 가지고 계속하여 이견이 있어왔습니다.
20세기에만 해도, 일제 시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요한 신사참배가 국가의례인가 아니면 제 1계명을 범하는 죄악인가에 대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저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독일의 아리안 혈통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유대인들을 학살 대상으로, 그리고 기타의 민족들을 하등 민족으로 분류하면서 히틀러를 메시야적인 존재로 부각시킬 때에 그에 교회가 찬동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20세기 말과 21세기에도 지금 전 세계 교회 간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이름의 종교통합 운동이 벌어져 다원적인 구원론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종파들이 각기 방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종교다원주의가 퍼지면서 교회들이 종파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서 하나가 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다양한 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동성애를 받아들이자면서 동성애 반대자들을 교단 내에서 추방하는 일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이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오늘날 중동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데도 구약적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도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해주는 세대주의 신앙이 미국 교회 안에 강력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등장하여 기독교라는 이름, 교회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교단과 교파들이 있는데, 그러한 교단 교파들에는 성경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이단과 사이비들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유광수파는 귀신들이 신경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귀신을 들먹이면서 해석합니다. 구원파는 한번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물몬교는 성경 외에 주님께서 미국의 조상 인디언에게 계시하신 몰몬경이 있다고 믿고 성경 외에 몰몬경을 함께 믿습니다. 여호와 증인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지옥을 만들 리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신천지 이단은 이만희가 완전한 계시자, 종말의 목자로 보고 그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얼마전 칠단지에서 어떤 중년의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정안의 어떤 교회를 다니는데 그 교회 목사가 감옥에 있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몇 년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서 아동학대 감금 실종 건으로 취재했던 교회였습니다. 현재 그 교회의 목회자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그 칠단지 신자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교회를 계속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만나면 말씀드리려고 기회를 찾고 있는데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저 사랑제일교회의 전광훈 목사님과 같은 지나친 정치적 이념적 목회자도 있어서 거기에 사로잡혀서 균형을 잃은 채 신앙 생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도 수많은 해석이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 강조점이 달라짐으로 인하여 균형을 잃은 수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길들 중에서 성경적이고 영적으로 안전하고 바르고 균형 있는 길을 잘 찾아서 천국의 길을 걸어야 하는 지난한 부담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근본적인 것이 일치하면 사소한 것은 내려놓고 연합하여 현제의 우애를 지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악한 자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파들이 차이를 무릅쓰고 연합하여 주님을 죽이고 또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던 것처럼, 악한 자들은 연합하여 바른 길을 걷는 자들을 삼키려고 덤비는 일들이 늘 있어오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기에 로마 천주교회가 유럽의 세속 정치 세력과 연합하여 바르고 개혁된 기독교회를 박해하여 전멸시키려 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랑스의 칼빈,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찌빙글리가 만나서 함께 공동전선을 펴서 천주교와 대항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들 가운데 성찬론에 대한 이견이 생겼습니다. 천주교는 성찬이 그 자체가 주님의 살과 피라고 보았고 칼빈은 영적으로 주님이 임재한다고 보았으며 쯔빙글리는 단지 상징일뿐이라고 보았으나 루터는 공재설 곧 주님께서 그 성찬 곁에 함께 계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찬론이 서로 좀 다르다고 해서 개혁 세력은 연합하지 못한 채 천주교와 싸움에서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보면 그러한 성찬론의 논란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는데 사소한 차이 때문에 연합을 놓친 것은 큰 아쉬움입니다.
우리는 천주교는 수많은 이질적인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독교회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연합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의 교단적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인 기초적 교리에서 일치성을 보이기 때문에 한 형제 자매로서 인정을 하고 연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 진리를 굳게 붙들고 역사의 교훈들을 잘 살펴서 새롭게 일어나는 문제들의 본질을 잘 헤아리고 분별하여서 성경 진리의 길에 끝까지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걸어가야 하겠다는 점을 항상 명심합시다. 우리 모두 비둘기같이 순결하지만 또한 뱀같이 지혜로운 자들이 됩시다. 역사를 통하여 지혜를 배우고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상식의 거울을 통하여 잘 판단하고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는지 여부를 잘 분별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다 몰려가고 대세를 이룬다고 해서 따라가지도 말고 성경의 진리와 상식과 양심과 역사의 교훈을 잘 살펴서 끝까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서 주님 만나는 저희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자기의 충성스러운 종에게 장래에 대한 소망의 약속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아마 산헤드린 공회에 갔다가 소동이 일어나서 군인들이 그를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들추어서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왔던 날 밤 사도 바울의 마음은 몹시 눌려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자기가 살아서 이 예루살렘을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앞날에 품었던 비전 곧 로마를 보고 서바나까지 가서 전도하고자 한 그의 원대한 꿈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회의감이 들고 앞날이 캄캄해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바울의 마음을 아시고 그 날 밤에 바울이 생각에 잠기고, 기도할 때에 바울 곁에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의 앞날에 밝은 빛이 되고 그가 품은 꿈이 이루어질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확고한 소망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은 답답하고 한치 앞을 못 보는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그 약속의 말씀을 들은 순간부터 그는 마음에 담대함과 평안과 소망이 충만해진 줄 믿습니다. 이 약속은 즉각 이루어지지 않고 약 삼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주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의 안전을 책임져주시고 그 앞날에 소망을 품고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를 신뢰하고 충성하는 종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의 주님은 우리의 신실한 주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기를 가집시다. 캄캄한 현실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하시고 우리를 반드시 붙들어주시고 복된 날을 주실 것을 믿읍시다. “담대하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너를 이끌어 네 소망을 이루게 하리라”, 우리도 이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힘을 냅시다. 우리 모두 답답한 현실 가운데 처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소망 가지고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