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본문 : 수7:26
제목 : 예수님이 우리의 진노를 친히 담당하사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찍이 여호수아를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히브리어인 ‘여호수아’를 아람어로 번역한 ‘예슈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주님의 종 여호수아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현재진행형으로 그들의 옛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언약의 성취를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적인 의미를 잘 파악해보면 여호수아서는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유대 땅에서도, 이방 땅에서도, 어느 민족이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지는 제물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의 중요한 주제는 ‘죄에 빠진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죄와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멸절되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옛사람도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진짜로 끝나야 합니다. 진짜로 끝내고 예수로 거듭나 새롭게 성령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큰 진리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행하시며, 이루십니다.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서를 정복의 이야기, 폭력적 전쟁과 영토에 대한 분배 이야기로만 해석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무지한 생각이며 사람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영적 해석을 하면 여호수아가 내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는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한 죄의 종결, 그리고 종결을 통한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들은 성경에 차고 넘칩니다. 그 예로 롬6:3 ‘죄의 아담인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본질은 나의 옛 사람을 끝내시고 내 안에 새 생명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말씀이지만 제목이 여호수아, 즉 ‘예수님 이야기’라는 책은 없습니다. 여호수아서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앞서 말했듯 여호수아서는 한마디로 ‘예수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약에서의 사역과 신약에 오실 예수님의 표지(標識)로써 우리에게 귀한 진리와 깊은 영적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 이름 자체가 ‘예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에 나오는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오셔서 하실 일을 소개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죽은 후, 즉 율법이 죽은 후에 실질적인 율법의 완성이신 복음의 지도자가 되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성을 통한 거룩한 사랑이 내 안에서 나의 실재가 되어 이제는 예수님께서 나를 이끌고 가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서, 즉 여호수아서의 영적 핵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7장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은 이전 6장과 너무나 대조되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에는 승리가 충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과 감사와 함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한 장만 넘겨보면 이 모습들이 정반대로 달라졌습니다. 승리는 없고 패배만 있습니다. 아이성 전투의 실패로 36명의 백성이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6장의 여리고 전쟁에서는 승리했습니다. 그때는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여리고성을 돌았으며, 그 중심에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침묵의 기도, 나팔 소리, 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6장 아이성 전투에는 여호수아도 없었고, 언약궤도 없었으며, 지휘관들도 여호수아에게 믿음의 전략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정탐군 2명의 말만 듣고 고작 3천명만 보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순간에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항상 주님께 아뢰고,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께서 나의 일을 기뻐하실까 확인하고 나의 삶의 행태를 돌아보면서 구별되게 사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죄를 지어도 숨거나 피하지 않고, 더욱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따르며 그 은혜를 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참 믿음 안에 거하며 죄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7장에서는 예수님의 표지인 여호수아를 의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리고성에서 이겨본 경험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진멸하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지만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죄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6장에서는 여리고, 즉 이방 백성이 무너졌고 7장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무너졌습니다. 7장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못 박혀 죽은 것이 없는 우리의 모습을 7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바로 아간이라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속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병사로 영적 전투를 수행하며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 속에 감춘 비밀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전쟁의 패배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패배의 아픔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우리의 상태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멸절하는 믿음의 용기가 늘 우리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크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서 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여호수아의 중보자 사역입니다. 우리의 영원하시고 참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수아가 직접 나서서 중보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수7:6-7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러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라고 눈물로 토로하며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욕심과 탐심이 가득한 아간과 같은 우리는 멸절의 대상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종결되고 라합과 같이 주님의 신부로서 새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소에서 날마다 우리를 아브라함으로 여기시고 두 손을 펴서 우리의 심령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는 은혜를 받도록 늘 권면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참패하여 고통을 당하게 된 원인에 대해 7장 1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장의 여리고 전쟁에서 얻은 것들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첫째, 남녀노소, 소, 양, 나귀는 칼날로 치고, 둘째, 불사르고, 셋째, 금, 은, 동, 철은 여호와의 성전으로 옮기는 것이 진멸인데 이 말씀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전쟁을 불순종으로 더렵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칼날로 우리의 죄를 다 진멸하고, 하나님의 불이 임하여 우리의 삶을 온전히 충만하고 순전하게 만들어주심에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쓰이기 위해 나를 드리는 제물을 통해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사들 중 한명인 아간이 몰래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여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롬14:23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이제 우리는 믿음을 적용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행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선행은 자기의 의를 쌓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싸우거나, 도둑질하거나, 무시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속에 담겨 있다면 그것이 곧 의입니다.
우리는 아간처럼 도둑질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흔하게 짓는 죄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아이성 전투의 직접적인 참패 요인인 아간의 죄와 그의 지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찬송’이라는 뜻이고, ‘세라’는 ‘자라나다’라는 뜻입니다. 세라의 아들 ‘삽디’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의 히브리어 이름이지만, 구약의 삽디는 저주받고 죽은 인물입니다. 삽디의 아들 ‘갈미’는 ‘포도원의 일군’이란 뜻이며, 그의 아들 아간은 ‘고난’이란 뜻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성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욕심으로 인해 외투와 은 이백 세겔 과 금덩이 하나를 훔쳐 자신이 묵고 있던 천막 아래 땅속에 묻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자신의 마음속에 꼭꼭 숨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한 후 허둥지둥하며 하나님을 피해 자신들을 숨겼던 것처럼 아간 역시 자신의 죄의 증거물들을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여과 없이 드러나게 하셨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영적 실체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호수아 7장 6절처럼 범죄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방편을 받아내셔서 그분의 뜻과 공의를 이루어드리는 예수님께서 아간과 같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하셨기에 예수의 이름 외에는 다 헛된 것이고, 가증한 것이며, 비진리인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기에 요약하여 다시 말씀드리면 죄인 아간 한 명의 죽음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멸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 더 이상 함께하지 않으시며, 전쟁에서 패배하고 땅을 얻지도 못하게 하시며, 사실상 그분과의 단절에 가까운 형벌의 삶으로 내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간이 범죄한 그때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원대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은 바로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아간은 돌에 맞아 죽었으며, 그의 가족들과 짐승들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무서운 벌을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의 대가가 이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죄를 나와 내 가족 모두가 짊어지고 영원한 무덤인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백성을 위해 탄원하고 대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로를 면하게 한 것처럼(수7:6)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저주 가운데서 죽으심으로 죄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장이자 주님이 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신부, 자녀로서 성결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우리 삶의 방향이 되고, 그분의 원하시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은혜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은 이 당연함의 은혜를 더럽히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군대, 백성, 성도로 살게 하신 그분의 은혜를 바로 알고, 오늘부터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는 신자의 삶,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