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장 추웠던 겨울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다
장진호 서쪽에 있는 유담리는 미 1해병사단이 진출한 전선이었다. 이곳에서 후방으로 차례대로 있는 곳이 하갈우리, 그로부터 다시 후방으로 내려오면 고토리가 있다. 미 해병대는 원산으로 상륙한 뒤 장진호 방면으로 병력을 전개하면서 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 선을 이으면서 진출했다. 미 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나아가면서도 물러설 때를 상정해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을 보전할 줄 알았던 지휘관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안목, 경륜은 탁월했다. 그는 특히 병력 집결지로서 후방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하갈우리를 꼽았다.
원산으로 상륙하면서 이끌고 온 사단 중장비를 동원해 스미스 소장은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우선 만들었다. 지나오는 길의 주요 경로에는 일부 병력을 잔류시켰다. 모두 물러설 때를 대비한 노련한 포석(布石)이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은 분명했다. 비록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군총사령부가 중공군 1차 공세를 본격적인 참전이 아닌 탐색전 정도의 참전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에도, 전선 곳곳에서 드러난 징후는 달랐다.
-
-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 길에 들어선 미 해병대원들이 중공군을 향해 반격을 하고 있다.
낙엽 하나에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 온 산의 수많은 잎사귀가 물기를 잃어 시들어갈 때도 가을이 왔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전선의 지휘관은 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천 번 만 번을 경계해도 조그만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위기의 칼끝은 사람을 늘 겨누기 마련이다. 막대한 병력과 화력, 장비를 이끌고 죽느냐 사느냐를 다투는 전선의 지휘관은 따라서 그런 위기의 조짐에 늘 대비하면서 절치부심해야 하는 법이다. 스미스 소장은 그런 점에서 탁월한 전선 지휘관이라고 해도 좋을 장군이었다. 그는 용의주도했고 면밀했다.
이른 강설(降雪),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 길을 이끌고 온 중장비를 동원해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닦은 스미스 소장의 판단은 탁월했다. 그는 낯선 곳으로 진출하는 군대의 지휘관답게 혹시 몰아닥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을 미리 염두에 뒀던 것이다. 그로써 미군이 느닷없는 적군의 출현, 예상치 못한 상대의 공세, 거스를 수 없는 지형과 추위에 시달려 후퇴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물러날 방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울러 지나왔던 요로(要路) 곳곳에 아군의 병력 일부를 잔류시킴으로써 퇴로(退路)의 줄기를 세울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다.
혹독한 추위길은 미끄러웠고 야전삽으로 파는 땅은 꽁꽁 얼어붙었던 상태였다. 낯선 땅으로 행군하는 미 해병대에게는 아주 불리한 환경이었다. 진출한 곳에 진지(陣地)를 만드는 일 자체가 아주 곤란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장진호 일대의 땅은 지표로부터 35㎝가 얼어 있었다고 했다. 강설로 인한 적설량은 많게는 60㎝에 달했다고 했다. 강한 서북풍이 불면 눈이 날렸고, 시선을 가로막는 눈보라도 심했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에는 시계(視界)가 15m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길을 오가는 미군 차량이 원활한 운행을 할 수 없었고, 사병들은 진출한 곳에 진지를 파기 위해 폭약으로 언 땅을 깨뜨렸지만 몸을 가릴 만큼의 참호 구축에는 실패했다.
그 점에서 중공군도 예외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 수적으로 미 해병사단을 압도했다. 아울러 모진 추위를 참아가며 부지런히 길을 걸어 장진호의 유담리는 물론, 미군의 후방지역인 하갈우리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에게 더 겹쳤다. 탄약의 폭발이 불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강력한 무기체계와 막대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개념의 군대였다. 장비도 탁월했지만, 우선은 강력한 화력이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장진호에서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지나칠 정도의 추위 속에서 탄약의 불발이 잦아지면서 강력한 화력으로 버텼던 전술상의 우위가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미 해병대 후퇴의 행렬이 장진호 일대 좁고 험한 길에 길게 늘어서 있다.
쇠붙이에 한 번 손을 잘못 대면 그곳에 손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였다. 식량도 문제였다고 한다. 꽁꽁 얼어붙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야 했던 전투 환경에서 장병은 배탈을 계속 앓아야 했기 때문이다. 싸움도 환경이 받쳐줘야 하는 법이다. 이런저런 점을 다 따져볼 때 1950년 11월 말 장진호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최악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11월 27일 아침 하갈우리에서 공격을 펼쳐갔던 미 해병대의 초반 전투는 순조로웠다. 유담리까지 진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반격이 점차 강도를 더 해갔다. 중공군은 79사단, 89사단, 59사단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북쪽과 서쪽, 그리고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잇는 후방의 능선에서 공격을 펼쳤다.
이튿날인 11월 28일 미 1해병사단의 스미스 소장은 진격을 포기했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지시한 강계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심했던 것이다. 전면에 등장하는 중공군의 숫자가 워낙 압도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도 적절했다. 우선 하늘이 내리는 때, 천시(天時)는 강추위와 적지 않은 강설로 인해 불리했다. 지형에서의 이점, 지리(地利)도 미군에게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의 후퇴는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길이 미끄러워 기동이 쉽지 않은데다가 중공군의 공격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상(波狀)의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11월 30일에는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로부터 공식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서부전선을 비롯한 전선 모두에서 대규모의 중공이 출현하고 있었고, 전선의 대부분이 밀리는 형국을 보였던 까닭이다.
미 해병대의 전우애그에 따라 유담리에 진출했던 미 1해병사단 5연대와 7연대가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첩첩산중이었다. 중공군은 이미 병력을 우회해 유담리의 후방인 하갈우리와 고토리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병력은 우선 함흥과 흥남으로 후퇴해 집결하는 게 목표였다. 후퇴로는 험악하기만 했다. 중공군은 곳곳에 매복해 있다가 미 해병대를 노리면서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정식으로 사단장에게 철수 명령을 받은 뒤 미 1해병사단의 5, 7연대가 유담리 남쪽으로부터 후방인 덕동 고개라는 곳까지 이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거쳐야 했다.
육군본부의 기록에 따르면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미 해병대가 이동했던 시간은 77시간이었다.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거리를 3일이 넘는 시간 동안 움직여야 했던 셈이다. 사방팔방에서 다가서는 중공군과 싸우고 또 싸워야 했던 까닭이다. 1㎞를 가는 데 3시간 반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전사자는 164명, 실종은 55명, 부상자 921명 등 모두 1140명의 전투력 상실이 생겨났다. 이 싸움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다. 미 해병대는 제 몸조차 가누기 어렵고 어려웠던 환경 속에서 들것에 실린 부상자 600여 명의 전우를 모두 옮겼다는 점이다.
-
- 전투 중에 숨진 동료들을 트럭에 싣고 후퇴 길에 오른 미 해병대원들./라이프 제공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줄곧 벌어지는 가혹한 추위와 동상(凍傷)의 전쟁터 속에서 움직이기가 불가능한 부상 전우를 옮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적 앞에서 한 몸으로 뭉치는 부대의 전우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부상자만 옮긴 것도 아니라고 한다. 미 해병대는 전쟁터에서 숨진 전우들의 시신도 옮겼다. 군화의 발목 부위를 잡고 끌고 오거나, 차량에 싣지 못할 경우에는 자주포의 포신(砲身)에 전우의 시신을 매달아 옮길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갈우리에는 미 1해병사단의 사단본부가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공격을 펼쳤다. 가까스로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지켜냈지만 문제는 그곳으로부터 후방으로 철수하는 일이었다. 가장 심각했던 점은 이미 해병대의 전상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2월 6일 하갈우리를 떠나 흥남으로 향하는 철수작전이 벌어졌다. 병력은 약 1만 명, 피난민은 1000명 정도, 아울러 길에는 1000대 정도의 트럭 등 차량이 움직여야 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4300명에 달하는 부상자 운반이 심각한 문제의 하나였다. 결코 두고 갈 수는 없는 전우들이었다. 미리 닦기 시작했던 하갈우리의 비행장 활주로가 어떻게 보면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법보(法寶)였다. 그러나 공정이 40%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미 해병사단은 공군과 연락해 부상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수송기 C-47을 착륙시켜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