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그리 멀잖은 남한산성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벼운 산행을 하고플 때,
또 심경이 착잡할 때, 무언가 떠오르는 글이 생각날 때, 남한산성을 찾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성 주차장에 주차하고 어수장대에 올라 저 멀리 서울시내와
한강을 바라보기도 하며 성곽을 따라 걸어본다. 또 어떤 때는 자주 찾는 ‘아라비카’
라는 분위기 꽤 좋은 커피숍의 야외벤치에 앉아, 즐기는 블루마운틴을 마시며
한 두어 시간, 멍하니 저 서산 너머로 사라져가는 하늘의 뭉게구름과 바람 등을 타고
흘러가는 세월의 소리를 들으며 또한 온갖 꽃과 풀, 나무, 그리고 새소리 벌레소리에
머리를 쉬다가 잠깐 졸기도 한다.
지난 주말 느지막한 오후, 얼마 있지 않으면 5월의 등을 타고 떠나 보내야 할 봄이
아쉬워, 드라이브 겸 남한산성으로 차를 몰았다. 봄을 즐기는 등산객이 붐비는 사이로
등산로 벤치에 앉아 저 멀리 청와대쪽을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나라의 뒤범벅된
정치현실과 갈길 찾지 못하는 외교상황, 각박한 사회상을 생각하니, 답답한 가슴에
그 옛날 남한산성이 지닌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가 오버랩 되어 시야를 흐린다.
남한산성---해발 500m에 쌓아 올린,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성(城).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은 해발 500m에 달하는 남한산에 쌓은 성이다.
산성 전체의 길이는 11.76km, 면적은 2.3km제곱이다. 남한산성에 오르면 지금처럼
건설장비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성을 쌓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남한산성에 들어서면 올라온 꼬불꼬불한 산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은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음식점이 즐비하지만, 옛날에는 임금님이 머물렀던 행궁과
군사시설, 도시기능을 갖춘 곳이었다. 이곳은 넓고 평탄한데다 우물 80여 개와 연못
45개가 있어 식량만 있으면 수만 병력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올라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이 안에 들어오면 안심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이곳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한산성은 이런 입지적 조건에 오랜 세월 지은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건축술 등으로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남한산성에 이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이다.
남한산성이 지금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인조 2년 때였는데, 광해군 13년에
후금의 침입을 막느라 돌로 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됐다.
그러다 인조 때 들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2년 후인 1626년에 남한산성의
본성이 완성되자, 광주목(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성 안으로 옮겨오고 행궁도 지었다.
성을 쌓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적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인조 14년에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왕자 등 가족을 강화도로 피란시키고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군사들과 이곳에서 45일간 청나라와 대항해서 싸웠다. 그러나 식량은 떨어지고
막강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까지 점령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청나라 요구에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항복 의식을 치렀다.
청나라는 죄인이 용포, 즉 왕의 옷을 입을 수 없다 해서 인조에게 청색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명령하고, 또 죄인은 정문으로 통과할 수 없다 해서 남한산성의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해야만
했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이 항복한 것을 기념해 비석을 세우라고까지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 비석이다. 남한산성에 오르면 인조대왕과
병자호란의 치욕의 역사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한산성에는 인조가 세자와 함께 내려간 서문을 비롯해 동문, 남문, 북문 등 네 문이
있다. 성문 밖은 험하고 거친 산길이, 성문 안쪽으로는 잘 닦이고 정돈된 길이 대비를
이루고 있어 묘한 느낌이 난다. 능선과 산세를 활용해 아름답게 지은 산성 밖으로
멀리 서울시내도 보이는데, 그 아픈 치욕의 역사 때문인지 그 아름다움이 때로는
슬프게 보이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남한산성을 찾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회는 그때그때 기분과 상념 따라 달라진다. 참으로 묘하다.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궁(宮)을 말한다.
조선시대 때 사용한 행군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등 20여가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었다. 인조 외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임금도 여주나 이천에 있는 능에 갈 때, 남한산성 행궁에 머물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