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조선의 선비 황득보(黃得甫)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은 운대(運大, ?~1757)였고 득보는 자(字)였다. 황운대의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황집(黃㙫)의 아들이였고 경기도 남양(南陽)에 거주하였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가난하게 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스승 성호와 학문을 논한 편지들이 《성호전집》에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그가 쓴 유산시(遊山詩)에 대해 성호가 쓴 서문(序文)과 황덕보에 대한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황득보의 유산시 서문 [黃得甫遊山詩序] - 이익/성호전집52권
내 벗 황득보(黃得甫)는 마음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음이란 것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앞에서는 동으로 갔다가 뒤에서는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한 번 차갑다가 한 번 뜨거워져서 동정과 출입이 도무지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진실로 자신이 보존하지 못하면 비록 돌아가려 해도 할 수 없다. 황득보는 그렇지 않아서 나와 종유(從遊)한 수십 년 동안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초야(草野)에 살면서 가난하여 타고 다닐 말이 없으면 번번이 걸어서 왔으며, 이르면 반드시 2, 3일을 머물렀다. 성품이 독서를 좋아하여 쌀독이 자주 비어도 책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힘을 다해 어버이를 봉양하고 여가에 남들에게 책을 빌려 부지런히 읽으면서 반드시 작은 글자로 옮겨 써 놓기를 쉬지 않았다. 또 아름다운 산수를 너무도 좋아하여 명승처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시동(侍童)과 말을 갖추지 못해도 문득 홀로 찾아가 원류(源流)를 끝까지 가고야 말아서 피곤하거나 발에 굳은 살이 생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자못 그 마음을 보존한 자라 이를 만한데, 이는 배우기 좋아하는 한 단면을 증명하는 것이다.
옛날 주자의 훈계에 “사람이 길을 떠나고자 할 적에 말이 있으면 말을 타고 가고, 수레가 있으면 수레를 타고 가며, 수레가 없으면 걸어서 간다면 어찌 도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느냐.”라고 하였으니, 이는 학문(學問)을 비유한 것이다. 무릇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있을 적에 깊은 이치까지 궁구해 이르러서 지키고 잃지 않는다면 또한 이루지 못할 바가 없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의(仁義)가 실린 옛 전적(典籍)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배부르고 따뜻하며 편안히 지내면 꼼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말하기를 “나는 물외(物外)의 광경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몸이 언제 한 발짝이라도 떼어 본 적이 있던가. 이와 같은 자는 비록 말과 수레가 있더라도 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 득보(得甫)의 유람은 이유가 있다. 길이 험하고 어려워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아도 일단 가려고 맘먹으면 바로 가니, 뜻이 있는 곳에 기가 따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빽빽하게 그늘진 수풀이 처음에는 볼만한 것이 없지만 숲을 뚫고 끝까지 올라가서야 비로소 장관(壯觀)이 보이며, 고생을 겪어 봐야 반드시 멋진 참맛에 들어가는 줄을 알게 된다. 산덩이가 우뚝이 높이 솟았는데 꼭대기에 도달해 두루 조망해 보면, 하등(下等)은 고명(高明)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울이 쏟아져 흘러 바다를 기약하는 것을 보면, 큰일을 하는 자는 한 가지 선(善)으로 명성을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에 돌아가서 책을 읽으매 모든 것을 새로이 알게 되어 물(物)과 마음이 계합하고 일과 뜻이 발현하여 곧 정신이 책 속에서 유영(遊泳)하여서 천하의 높은 산과 큰 강이 모두 마음 안에 포용됨을 깨닫는다면, 그 진보가 어찌 한량(限量)이 있겠는가.
모월 모일에 동협(東峽)에서 돌아와 나에게 시를 내보이며 화답해 주기를 청하기에 운을 따라 짓고 서(序)를 쓴다.
황득보에 대한 제문 [祭黃得甫文] - 이익/성호전집57권
나는 고질병에 걸려 죽지도 않고 쓸모없이 버려진 채 일개 비부(鄙夫)로 지내다가 득보(得甫)를 만난 뒤로 삶이 외롭지 않게 되었다. 무릇 시세를 좇아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마음인데, 오직 군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적막하게 지내고 있는 나에게 와서 배웠으니, 마음으로 사귀는 관계[心交]가 아니겠는가. 가까이 있으면 친해지고 멀리 있으면 소원해지는 것 역시 사람의 일반적인 마음인데, 오직 군은 혹 오래 떨어져 지낸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더욱 나를 잊지 않았으니, 정신으로 사귀는 관계[神交]가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혹 시대에 따라 취향이 달라지거나 앞과 뒤가 서로 다른 모습을 띠는 경우가 있어 끝까지 똑같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는데, 군은 보잘것없는 나를 삼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따랐으니, 돌처럼 굳게 사귀는 관계[石交]가 아니겠는가.
군은 효성과 우애가 깊기로 이름이 났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날로 진보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구차하지 않고 그릇되거나 편벽(偏僻)된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도 가난은 나날이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는 몸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으니, 이른바 “가득 차면 재앙을 내리고 겸허하면 복을 내린다.”라는 말은 아마도 신의 섭리에 부합되지 않는 말인 듯하다.
생각건대, 군은 굶주림 속에서 정도(正道)를 지키다 죽었으니, 자신이 추구하던 편안함 속에서 편안해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죽은 이에 대한 위안을 삼는 바이다. 군의 큰아들이 먼저 죽고 부인도 따라 죽었다 하니, 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참혹한 일이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남아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어찌 그를 위해 크게 흐느끼고 애통해하지 않겠는가. 종손(從孫) 조환(祖煥)을 보내어 제사 음식과 술을 들고 가서 올리니, 부디 흠향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