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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수도회] 너와 나의 광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9,8-15
† 제2독서 1베드 3,18-22
† 복음 마르 1,12-15
◎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사순 시기를 연 지난 재의 수요일
예식에서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하는
권고를 들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진리의 길을 보여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에 함께하면서 예수님
제자의 삶을 새롭게 봉헌합시다.
★ 사악한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고 홍수를 통해 재창조를 이루신
주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고 새 창조의 세계와 노아와 그의
후손들까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 베드로 사도는 노아의 홍수를 세례의 원형으로 상기하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며 부활의 능력을 입게
할 것이라고 가르친다(제2독서).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며 단련하시고,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시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 운동을
계승하시고자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태초에 창조의 땅 에덴에서는 햇빛이 전등이었고 구름은 승용차였다.
흙은 살갗이었고 뼈는 바위였다. 강은 핏줄이었고 나무는 피부에 난
솜털이었다. 숲은 꽃과 열매가 가득한 슈퍼마켓이자 한약방이었다. 늦게야
아담이 태어났는데 의식주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땀 흘리는 수고도 없었고
죽음도 두려움도 없었다. 보고 들으면 그대로여서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늘과 땅과 동식물과 사람은 하느님의 가족이었고, ‘평화’와 ‘행복’은
동사(動詞)였다. 하느님께서도 할 일이 없으시어 자연과 사람은 생성,
변화, 소멸의 운동이 없었다.
다만 사악한 뱀이 속삭이는 유혹의 소리를 아담이 넘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태양은 빛을 잃고 강은 멈추었으며 사자에게는
이빨이 생겨났다. 사람에게는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노고가 시작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꽃이 다시 피게 하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감언이설로 아담을 유혹했던 사탄이 거기까지 따라왔지만
하느님의 참사람이 가진 말씀에 이겨 낼 수 없었다. 메마른 광야에 다시
강이 흐르고, 사자들은 어린양과 놀며, 어린이가 독사로 장난치고,
천사들은 호위 무사를 맡았다. 평화와 행복은 다시 ‘동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창조의 원형을 복구하신다.
창조성이란 자기다움이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자기다움의 회복을 하기 위한 수행의 시기다. 인간다움, 교회다움,
신앙인다움, 부모다움, 자식다움, 국민다움, 대통령다움 …….
나는 누구이고 나를 만든 분은 누구신가? 사람은 자신과 하느님을 알기
위해 종종 광야로 나가 자신을 담금질할 필요가 있다. 사순 시기의 수행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그리스도의 전사(戰士) -자기와의 싸움-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창세9,8-15 1베드3,18-22 마르1,12-15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그리스도의 전사(戰士) -자기와의 싸움-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전사'입니다.
전역이 없는 죽어야 제대인 평생 현역의 전사입니다. 사고사, 객사,
병사가 아닌 싸우다 죽어야 즉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입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뿐입니다.
지난 설날 83세로 선종하신 민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죽음도 제가 보기엔
거룩한 전사(戰死)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지난 월요일 돌아가시기 3일전, 편치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대구 사수동 베네딕도 수녀원에 들려 30여명의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셨다 합니다.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그 사명에 충실하셨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자기입니다.
하여 날마다 주님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니고 따르라 하십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새로웠습니다.
마치 내가 내 껍질 안에 들어가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순간 떠올랐습니다.
누가 나를 부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든 자기라는 틀 속에
들어가 스스로 부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영적전쟁의 핵심입니다.
누가 자유롭지 않게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에 들어가 안주하기에
자초한 부자유한 삶입니다.
'자기로부터의 탈출'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 감옥 안에 갇혀 수인(囚人)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자기로부터 탈출했는가하면 다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영적 전쟁 상황을 파악할 때 영적전쟁에 승리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영적전쟁입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 죽어야 끝나는 전쟁입니다.
첫째, 광야가 우리의 전장(戰場)입니다.
삶은 광야입니다. 광야인생입니다.
어디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 광야가 삶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수도원에서는 더 그러합니다.
때로는 보이는 것이 없는 막막한 광야인생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전쟁 상황을 상징합니다.
복음의 서두가 의미심장합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에 내보셨다.“
예수님을 광야에 내보내신 성령은 우리 모두 인생광야로 내보셨습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광야시기입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셨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기에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넘어가진 않으셨습니다. 바로 성령의 도움이심을 깨닫습니다.
둘째, 광야가 낙원(樂園)입니다.
여기 사탄의 유혹이 있는 광야가 바로 낙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전쟁 치열해 보이는 여기 삶의 자리가 바로 낙원입니다.
사막같이 보이는 수도원이 낙원인 이치와 똑같습니다.
바로 복음의 다음 대목이 광야가 낙원임을 보여줍니다. 영적전쟁의 승리를
통해 회복되는 낙원이요, 광야와 낙원은 삶의 양면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바로 피조물과 공존의 평화를 누리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혹하는 사탄만 있는게 아니라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이 함께 계시며
천사들이 우리를 시중들고 있습니다.
마치 평화로운 영적전쟁터 같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광야와 낙원이 역설적 일치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이라 하여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셋째, 참 좋은 계약의 표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1독서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에 대한 상황묘사가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 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이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하늘과 땅을 잇는 하늘길 같은 무지개가 계약의 표징, 구원의 표징입니다.
무지개에 대한 묘사중 이보다 아름답고 신비한, 심오한 묘사는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무지개가 계약의 표징이라면 신약의 완전한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늘 하늘 높이 솟아있는 성전의 십자가, 제대 중앙 뒷면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보다 더 좋은 계약의 표징은 없습니다. 간혹 교회 큰 행사시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난 사진을 보여주는 데, 바로 무지개를 대체한 계약의 표징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입증하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바로 오늘 2독서 베드로 1서가 이런 진리를 확증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르치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낙원이 완전히 실현된 장면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런 낙원의 예표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의 승리에 새로운 계약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순시기는 인생광야에서의 영적전쟁이라는 우리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사탄의 유혹중에도 성령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천사들은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시며 계약의 표징인 십자가는 늘 우리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사순시기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어 힘차게
살아갑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적전쟁에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끝으로 기도와 같은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 주님,
제 몸이 어디 있나요.
제 몸이자 당신 몸이 아니던가요.
당신의 손이,
당신의 귀가,
당신의 다리가 아니던가요.
당신의 뜻이라면
제몸이자 당신 몸의 불편함을
고쳐 주십시오.
제몸은 당신 몸이니까요.-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너와 나의 광야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1주일 마르 1,12-15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3)
너와 나의 광야
인생의 축소판인 사순절에 우리는 유혹의 광야에서 부활이라는 약속된
땅으로 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온 인류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광야로 내보내시어 유혹을 받게 하셨다(1,12). 이렇듯
성령께서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주신다.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으로부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는 기쁜 소식이 울려 나온다.
광야는 식물이 거의 자라지 못하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며, 사탄의
영토요 들짐승들의 땅이다. 허기짐과 목마름, 불편함과 적막함, 생명의
위협과 약육강식이 거친 광야의 상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비인간적인 상황 한복판으로 들어가셨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 내 마음과 세속의 정신에 물든 자신이 광야요,
빈곤과 불의와 인간적 비참함과 집단적 이기주의가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
바로 광야이다. 그래서 광야는 하느님께로 되돌아가 참 나를 발견해야
하는 자리이자, 인간존엄을 위한 사회정의와 사랑의 연대를 살아내야 할
선택과 결단에 직면하는 곳이다. 이렇듯 광야는 유혹의 장소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장소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있어야 할 곳이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유혹 곧 이집트 병사들에게 쫓김, 목마름,
배고픔의 유혹과 예수님의 유혹은 나의 유혹이요 이 사회의 유혹이다.
재물, 명예, 권력으로 표현되는 이 유혹은 결국 왜곡된 힘의 덩어리이다.
마귀는 교만, 소유욕과 명예욕, 식욕과 성욕, 집단적 이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마귀는 '나의 의지'라는 금송아지를 받들어 모시라고 부추긴다.
마귀는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여자나 남자로, 때로는 권력이나 육신의
안일함 등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의 끈질김과 교활함을 간파하였던
성 프란치스코는 “감춰진 유혹이나 드러난 유혹, 갑작스런 유혹이나
끈질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주님의 기도 묵상, 9절)라고
기도하였다.
내 인생의 광야,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받는 세상의 광야에서 찾아드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우리 존재의 중심을
하느님께로 이동해야 한다. 이 세상의 가치들과 사물들과 사고방식들을
하느님 위에 두려는 일체의 성향과 행위가 곧 죄이다. 회개란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며, 복음적 가치를
내 삶의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며, 하느님의 힘에 철저히 의탁하도록 하자.
우리는 자기애착과 편의주의 때문에 삶의 광야에서 은총을 체험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욕과 오해와 멸시와 매
맞으심과 죽으심이라는 삶 전체를 통째로 바친 희생에 뒤따른 것이었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들은 한마디로 하느님을 인간의
가치나 질서 아래 두려는 왜곡된 인간 삶의 질서 의식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뜻대로 하려는 태도가 문제다. 자기의지를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며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된다. 내가 가난한 영을 지닐 때 비로소 광야에서 참 나를
만나고 정의와 사랑이 꽃피는 세상을 이룰 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하느님께 친교의 예물을
봉헌하시자 광야가 성전으로 바뀐다. 이처럼 내 인생은 유혹이 많은
광야이지만 성전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는 점에 주목하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을 지니려는 노력이며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겸손한 자세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결의를 받아들여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깨어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단식 또한 온전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것으로서 온몸으로 기도하는
길이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이다. 자선으로
구체화하지 않는 단식이나 기도는 거짓일 뿐이다.
나아가 우리는 세상의 광야인 사회적 불의와 무관심,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온갖 차별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슴 절절한 참회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 경제 정의와 분배 정의의 실종, 인간존엄성을 짓밟는
자본의 권력화와 우상화, 사회 갈등 속에 삶의 자리를 잃고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히는 정치권력에 맞서는 연대 없는 회개는 거짓이다. 나아가
나의 참회와 사랑을 통해 한국사회의 광야가 사랑 가득하고 정의롭고
인간다운 은총의 바다가 되도록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정신적 사치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2.2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르 1,13)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우리의 식욕을 채우도록 유혹하고 온갖 화려한 불빛이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돈과 권력을 위해서는 양심도 저버리고
영혼을 팔도록 유혹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혹을 떨쳐버리기 가장 힘드나요?
유혹을 내 힘과 능력으로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하느님 중심적이어야 하고
하느님 말씀에 기초하는 삶을 꾸준히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유혹 당하셨으니 우리도 유혹 당하고 때론 그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빠져 즐기다보면 하느님 나라는 더 멀어질 뿐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어야겠지요.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식이 곧 기쁜 소식 아니겠습니까?
오늘 나에게 여러가지 가면을 쓰고 나타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물리쳐 봅시다.
그럴러면 늘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고 어떤 때에도 즉각적으로
말씀으로 답을 찾을 수 있어야겠지요.
오늘 그렇게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를 조금이라도 느껴보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훈련소로서의 광야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훈련소로서의 광야
언젠가 성지 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이런 광야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입니다.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 없이 40년간의 광야체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들이 걸어야 했던 광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황무지였습니다. 물이나 초목, 생물체라고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것, 텅 빈 곳, 그저 척박한 땅과 높은 하늘만 끝도 없이 계속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곳이 광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각자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광야를
걷게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하나의
광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세상,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찌
그리도 숱한 위험요소들과 다양한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지 모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 하나하나가 또 다른 의미의 광야가 분명합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고통스런 광야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40년간의
광야생활은 그들의 신앙을 한 단계 성숙시키고 쇄신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건설하신 ‘훈련소’였습니다. 훈련병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된 훈련을 이수함으로써 하루하루 자신들의
신앙을 업그레이드시켜나갔으며 그 지긋지긋한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고통의 바다 같은 이 세상 광야를 걷습니다. 40년, 80년,
100년...모든 것이 결핍된 이 광야를 걸어가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반면교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불평불만을 계속하다가 그길로 광야생활을
접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태도는 다양한 현실의 결핍 속에서도
불평불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떠나 여행하다보면 불편한 것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불편함과 부족함을 당연시여기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아주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 이런 노력들이 바로 광야를 걷는 우리에게 중요한
태도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늘 깨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신앙생활을 그만두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6개월 이상의 예비자 교리까지도 마쳤는데, 또한 그 동안 계속해서 미사에
참석하는 노력을 보이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원의가 그렇게 강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빠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보다 가장 큰 이유는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 존재에 대한 확실성도 없기에
약간의 변화라도 느낀다면 열심히 다니겠지만, 열심히 다니나 그렇지
않으나 다른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가톨릭 전례의
엄숙함이 하나의 구속으로 다가오고, 일주일에 한 번 미사 나가는 그
시간이 지루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연히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래전에 세례 받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왜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열심히 다니려고 했는데, 세례를 받자마자 안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쉬겠다는
마음으로 성당을 안 다니자 그제야 좋지 않은 일이 멈춰서 그 후로는 겁이
나서 성당에 못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
“세례 받으면 은총을 많이 받는다면서요? 저는 벌만 받아서 못
나가겠어요.”
글쎄요. 하느님의 뜻을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잘못 생각하는 하나가 있습니다. 세례 받으면 분명히
은총을 받지만,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등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들을 반드시 은총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세상의 성공만을 원하는 단편적인 면만을 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 곧바로 사십 일 동안 홀로 단식하셨습니다.
사실 세례라는 것은 성령을 받아 영적으로 새로 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이제는 광야로 나가실 것이 아니라, 곧바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나 광장으로 가서 당신의 일인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뒤에 스스로 광야로 선택해서
가셨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모든 것이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도
늘 깨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례를 받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은총으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를 받으면
더욱 더 성령의 열매를 자신 안에서 맺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따를 때,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늘 나라의 가치로 중요하고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근본이며 세상의 동력이다.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이 저절로 바뀌지 못한다. 마음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김훈).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유혹을 당한 유혹산입니다.
좋아하는 사탕(박광수,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중에서)
깡통 캔디 안에서는 보라색의 포도 맛, 붉은색의 딸기 맛, 노란색의 바나나
맛, 하얀색의 사과 맛 등의 사탕들이 섞여서 들어 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은 하얀색의 사과 맛 사탕입니다.
전 늘 하얀색의 사과 맛 사탕만을 먹고 싶지만, 깡통을 흔들어서 나오는
사탕은 번번이 다른 색 사탕입니다. 생각해보니, 깡통 캔디는 우리네
인생과 참 닮아 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삶이 존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색의 사탕이 나왔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낙담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들려진 사탕의 맛을 음미할 것입니다.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리다보면 제가 원하는 하얀색 사과 맛 사탕도 언젠가는 나올
것입니다. 제 인생도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갈 겁니다.
안 좋은 일이 내게 다가왔다고 낙담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안 좋다는
것은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희망을
가지면서 살아간다면 분명 내 삶 안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깡통캔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유혹은 은총의 시작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창세9,8-5;1베드3,18-22;마르1,12-15)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유혹은 은총의 시작이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용기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유혹에
관해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조 한 수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들려주면서 마음을 떠본 내용입니다. 칡덩굴처럼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정몽주가 시조 한 수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결국
정몽주는 이런 충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0여년의 박해 속에 만 여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온갖 유혹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청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온갖 허례허식과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서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주님보다 세상의 소유와 지배, 재물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온갖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신부가 된지 10여 년 만에 사회복지 공부를 했습니다. 조치원역에서
서울로 야간열차를 이용하며 대학원에 다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충남 조치원역에 새벽0시10분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 앞을
나오기가 무섭게 아가씨들이 달라붙어 말합니다. “오빠, 따뜻한 방 있어요,
쉬고 가세요!” 그러면 제가 “내 방도 따뜻한데요!”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로만 칼라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들은
여전히 달라붙었어요.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한번 가고 싶었을까요? 여러분 좋은 대로
생각하십시오.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지쳐서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따듯한 방 있어요!”
하고 아가씨가 달라붙는다면 한번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니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내에게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는 사람이야 어디다 한 눈을 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악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내가 약해 졌을 때를 이용하는
법입니다. 교묘하기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간교한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데 “여자가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다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다 주었다”(창세3,6).
고 했습니다.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게 문제 입니다.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밟고 올라서게 하는 죄로 이끕니다.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기심, 미움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식욕이 때로는
탐식하게 만들고 성적인 욕망이 음란의 죄로 이끌고, 휴식에 대한 욕망이
게으름에로 젖어들게 합니다.
잠언에 보면 “달콤한 말로 꾀고 꿀맛 같은 말로 유혹하자 젊은이가 따라
나서는데 마치 푸줏간에 끌려가는 소와도 같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사슴같이 제 발로 창애에 걸려드는 새 꼴이 되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결국 간에 화살이 박히고야 말리라”(잠언 7,21-23)
하고 말합니다.
결국 유혹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를 꼬이는 것을 의미하고,
올바른 생활 원칙에서 돌아서게 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첫째로 자만해서 입니다.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
(이사47,10).
둘째로 ‘남 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1역대28,9).
집회서를 보면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
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42,20). 잠언서에는“사람의 길은 주님 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잠언5,2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욕심에 끌려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정말이지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야고 1,14-15).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가정이 파탄되기도 하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속이고, 뇌물 받고 그러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뇌물 받아 망한 사람
많지만 요즘 대통령 주변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국회의장, 국회의원,
경찰청장 대기업 사장 등 모든 명예를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술과
도박, 권세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분도 많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카드 빚 쓰다가 감당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긍정적으로 볼 때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 자신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대의 유혹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6,11-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태26,40-41)한탄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 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에페6,10-17)하고 권고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히브2,18).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유혹은 더없이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대답하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어떤 유혹 앞에서도 분명히 대답하십시오. “좋은
일에는 ‘예’, 나쁜 일에는 ‘아니오’. 하느님의 뜻에는 ‘예’, 인간의 뜻에는
당연히 ‘아니오’”, 대답은 이렇게 하시면서도 속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열차를 타고 의자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할머니께서
앉으셨답니다. 할머니께서 피곤하신지 꼬박 꼬박 졸다가 젊은이에게
기대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복이 많은지 예쁜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앉는 겁니다. 여인도 피곤했는지 졸더니만 급기야 젊은이 어깨에
기대어 자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혹 우리의 마음이 아닌지요?
세례를 받은 후 더욱더 심하게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될 때, 왜 나에게는
이런 유혹이, 시련이 오느냐 투덜대지 말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았고 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루카복음을 4,1-1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1). 돌더러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악마의 경제적 유혹 앞에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셨습니다. 2). 내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정치적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떠받쳐
주리라고 하며 자신을 위해 기적을 남용하라는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시며 유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유혹을 극복할
수 있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바닷가에 가보면 벼랑
끝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가지를 튼튼하게 뻗었습니다.
우리도 유혹과 시련의 시험을 통해 더 강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곳에 구원해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온갖 유혹이 있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쉽게 유혹에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유혹 당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비쭉, 작심삼일입니다. 아무쪼록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은총으로 만드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누구인지 알면...끝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복음: 마르코 1,12-15
< 내가 누구인지 알면...끝 >
작년에 ‘제임스 대시너’라는 작가의 소설 원작을 영화화 한 ‘메이즈
러너’란 SF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이 영화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는 이야기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그대로 그려놓은 듯합니다.
설정은 이렇습니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져 세상은 황폐해지고 많은 이가
죽습니다. 그리고 뇌를 갉아먹는 ‘플레어’란 바이러스에 사람들이
감염되어갑니다. 감정이 사라져 좀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 이하의 아이들 중에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감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지
알아내서 백신을 만들려고
WICKED(World In Catastrophe : Killzone Experiment Department의
약자)란 단체가 생겨납니다. 그런 아이들의 특징을 찾아내서 그런 믿음과
행동양식 등의 패턴을 일반 사람들에게 적용시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다른 실험 세트를 만들어놓고 아이들의 기억을 지운 다음 매달
한 명씩 그 세트 안으로 아이들을 집어넣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미로로
격리된 공간 안에서 나름대로 규칙을 정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미로는 낮에만 문이 열리는데 밤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그 미로 안에 있는
괴물들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탈출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3년이 흐른 뒤 조금은 특별한 한 아이가 올라옵니다. 그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들이 왜 여기 갇혀있어야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미로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낮에 그 안을 뛰어다니는 ‘메이즈 러너(미로를
달리는 사람)’들 외에는 미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 아이가 올라온 이후로 미로에만 있어야 하는 괴물
그루버가 낮에도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토마스라는
마지막 아이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안정된 사회에 불안과 공포를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호기심과 용기는 규칙을 깨고 미로에 뛰어들게 했으며, 마침내
그루버와 싸워 한 마리를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몸속에서 이상한
장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 장치가 어떤 문을 여는 열쇠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를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 트리사라고 하는 한 여자아이가 올라오는데 그녀에겐 이상한 약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약입니다. 토마스는 그 약을
투입하고 기억을 되찾습니다. 자신이 이 미로를 만드는데 협력했던
사람인데 그 미로 안에 갇혀있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원했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실험에 불과하고 이 실험을 통과 해야만
진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실험실 안에서만 사느니
차라리 탈출하려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탈출을 포기하고 미로 안에서만 살기를 원했던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혼자만 기억을 되찾아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그
세상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아는 토마스를 믿고 목숨을 걸고 미로를
통과하려고 시도해 볼 것인가, 아니면 미로 안에 머물며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남을 사람들은 남고, 토마스의 말을 믿는 아이들은 미로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그루버와 싸우며 결국 처음 죽였던 그루버의
몸에서 빼낸 열쇠로 지하 문을 열고 살아남은 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결말입니다.
인간 역시 이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태어나기 이전의 기억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그냥 이 세상에 적응하며 규칙 안에서 살아가라
말합니다.
이번 설 명절 때 저희 형이 조카가 공부를 잘 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그 ‘방법’이 아닌 ‘왜’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공부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러리스트들 중에 공부 잘하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왜’ 공부를 하고 일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부터 명확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목숨을 잃는 것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신념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토마스란 아이가 많은 아이들을 설득하여 데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겐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들을 구원해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잡혀 죽음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신 이유, 즉 당신이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셨는지를 알게
된 계기는 바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반드시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려줄 어떤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배에
올라탈 때 오빠는 동생의 옷소매만 지니고 있고, 동생은 옷소매가 없는
오래된 옷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입양되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삶이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 동생은 오빠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지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미국에서의 삶에
만족했다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가게를 팔지 않는 이유는 동생을 잃었을 그 때 함께 잃었던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교회를 통해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강이 ‘두려움’의
강입니다. 이 ‘두려움’의 강은 ‘믿음’으로서만 건널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관계는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시고 왜 세상에 오셨는지 명확히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특히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의 음성을
직접 들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시니 그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두려움의 강을 넘어
믿음으로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실 줄 아셨기에, 우리 또한 그분 믿음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 수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목숨을 걸지
않는 것엔 어떤 누구도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곧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40일 간의 광야생활은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이겼으니 우리보고 믿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는 이는 모두가 그리스도를 잇는 구원자가
됩니다.
2013년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오블리비언’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블리비언은 ‘(기억의) 망각’이란 뜻입니다. 블레이즈 러너와 같이
‘기억의 망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잭 하퍼란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지구에 남아있는 외계인들을 없애는 일입니다.
외계인들에게 잡혀 정보를 빼앗기면 안 되기에 그 사람의 기억을 일부러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의 아내를 만나게 되어 기억을 되찾습니다. 아내는
잭 하퍼가 외계인들에게 잡혀가서 기억이 지워져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결국 그가 죽이고 있었던 것인 지구상에
남아있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인지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확신을 가지기 전엔 어떤 일도 하지
마십시오. 빈 라덴을 위해 일하고 있는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명확히 아셨기 때문에, 40일 간의
세상의 유혹을 견뎌내셨고, 그 길을 우리 또한 믿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물 위를 걸으시며 우리보고 함께 걷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길은 이렇게 물 위를 걷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두렵다면, 그래서 아직도 세상과 세상이 주는 것들을 버리기를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영원한 심연으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은 대 탕녀 바빌론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은 단순이 극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내가 잃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입니다. 굶는 것이 두렵지 않고, 입지 못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세상에서 멸시받는 것이 두렵지 않고,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사순절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믿음으로
두려움을 밟고 물 위를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유혹을 받으실 때 천사들은 묵묵히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유혹을 받으실 때 천사들은 묵묵히
천사들은 워낙 착해서 마귀들과 싸우려들지 않나 봅니다.
마귀들이 우리에게 점근해서 못된 걸 알려줘도 천사는 안 싸웁니다.
천사들은 마귀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어도 우리대신 대적하지 않나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돌봐주지 않고 재앙을 내리셨다고 곧잘 대들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되면 제 자랑 하느라 바쁘고 잘못되면 하느님 탓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실 때 천사들은 묵묵히 시중만 들었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코 1,1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선 -
2015년 나해 2월22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8-15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3,18-22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사순 제1주일(2015년 02월 22일) 선
봄비가 오늘도 내리고 있네요. 거칠게 내리는 여름 소낙비와 달리 봄비는
참 차분합니다. 조용합니다. 내리는 것을 애써 감추듯 고요히 대지를
적셔주고 있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사순절에 맞는 첫 주일 아침입니다.
사순절은 라틴어로는 ‘콰드라제씨마’(quadragessim)인데, 40이라는
숫자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참 하느님 백성으로 탄생하는 시기이고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직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 중에 유혹을 받으신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는 주님을
만납니다. 마르코 복음은 마태오나 루카에 비해 매우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특징은 광야에서 유혹도 받지만 들짐승과 함께
지내고 천사의 시중을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특별히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위험이나 두려움도 없...이 들짐승과 더불어 지냄은 선의
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들짐승들과 교류할 수 있고
또한 선한 천사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계약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홍수가 끝난 후 노아와 그 자손들, 그리고 모든 생물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계약의 표지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평화의 계약을 맺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인 무기를 내려놓고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입니다.
우리 안에 동물적인 공격성과 적대성이 있음은 악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짐승이 되는 것은 악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의 유혹과 공격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더욱 강한 선의 힘을
통해서입니다. 악의 공격을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악마를 동물적
폭력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선이 존재할 때 평화의 기운이
우리 주위를 감쌉니다. 평화의 기운이 있는 곳에 악마의 유혹과 공격은
더 강렬할지라도 선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사순시기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선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천사들은 악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내적 힘을 내도록
도와줍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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