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추와 처서까지 지났음에도 무더위는 여전히 이어지고 열대야는 기록을 매일 갱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다 싶습니다. 이 대단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까? ㅋㅋ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주말도 견디려고 합니다. 그래도 태풍 지나가고 남은 바람인지 어제 아침에는 아침 바람이 조금은 시원했습니다. 모처럼 그 바람 덕에 실내 기온이 30도를 벗어나 27도까지 내려온 것을 보았습니다. 잠깐이지만. 이제 8월도 마지막 한 주간이 남았는데 조금씩이라도 그렇게 내려가기를 바랍니다. 이 여름 정말 고생들 많았지요. 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말 못하는 가축들도 많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더위로 산행을 쉬고 있는 날도 한 달은 되었습니다. 어서 다시 나가고 싶은데 말입니다. 우선 머리가 늙어가는 듯해서 걱정입니다. 역시 걷는 것이 가장 좋은데 이 더위에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머리 늙기 전에 몸이 쓰러질까 두렵지요. ㅋㅋ 살아남는 게 먼저입니다. 안 그런가요? 그나저나 아이들도 개학하는데 이 더위에 다니려면 얼마나 힘들까요? 겨울에 줄이고 좀 연기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참! 아무튼 오는 한 주만 잘 버티면 나아지지 않을까요? ‘9월이 오면’ 그래도 나아지리라 믿어봅니다. 조금만 더 버티지요. 주말입니다. 건강하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기 바랍니다. ^)^
2024년 8월 24일 김종우 목사 드림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잠언 28 : 28)
<행복의 나라>
얼마 전 ‘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행복의 나라’를 보았는데 시간의 순서로 보면 ‘행복의 나라’가 먼저입니다. 이것이 바로 10.26 사태이고 서울의 봄은 달포 정도 지나 발생한 12.12 군사반란 사태입니다. 물론 그 핵심 인물은 나중에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 전 전대통령입니다. 이 한 사람을 놓고 본다면 역사적 평가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참으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대단한 야망을 품고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대단한 계획과 추진력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한 나라를 휘어잡으려는데 그만한 배짱과 도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리고 과감히 실행하여 쟁취한 인물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유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크게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위 히틀러나 무쏠리니 또는 우리나라 안에서 연산군 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나폴레옹이나 징기스칸 또는 우리나라 안에서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사람들입니다. 즉 역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만들었든지 아니면 반대로 악명 높은 인물들입니다. 우리의 이 전 전대통령은 어느 쪽에 속하겠습니까? 물론 개중에는 소수의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소위 ‘죄인 중의 괴수’ 정도로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전의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음과 양이 혼합되어 있기에 어느 쪽으로 기울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다를 것입니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공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지른 악이 너무 크기에 그 공은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볼 때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만한 야망과 그만한 배짱과 그만한 실행력을 쉽게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웅이라 칭할 수도 칭해주기도 싫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가는데 그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겠다 싶다는 말입니다. 그런 대단위 사업(?)을 하는데 혼자서 이룰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함께 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뒤집는 일인데 당연히 목숨까지도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작업에 기꺼이 합류할 수 있을까 싶지요.
‘서울의 봄’이 있기 위해 ‘행복의 나라’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10.26사태는 바로 이 한 사람의 인생길을 새롭게 열어준 기회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함에 이 기회를 그야말로 잘 잡았던 것이고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밀고 나갔던 것입니다. 사전에 그만한 동역자들, 자기 손발이 되어줄 휘하 장병들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엉뚱한 사람의 객기가 준비된(?) 한 사람의 길을 활짝 열어준 셈입니다. 혹시 10.26사태가 없었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야망을 어떻게 이루어갔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일단 품은 뜻이 확고하다면 분명 그 길을 찾아갔으리라 생각합니다. 박 전대통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어떤 일을 도모했을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이야기는 재판과정이 주로 이어집니다. 10.26사태 후 그 사건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겨우 소장인 주제에 총참모총장까지 휘어잡으려는 태도에 화가 나고 몸서리가 쳐집니다. 아무리 전권을 쥐고 있어도 역시 보직의 힘 또한 무섭다는 것을 느낍니다. 보안사령관이라는 이 직책은 과연 어떠한 자리였던가 싶습니다. 별 둘을 달고서도 별 다섯을 단 상관까지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자리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기는 아무리 하급직이라 하더라도 최고 상관의 사택에서 일하면 아무 사람이든지 함부로 대하기 어렵습니다. 행여 무슨 말이 들어갈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같은 계급이라도 하급부대에 근무하느냐 상급부대에 근무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다릅니다.
변호사 ‘정인후’는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박태주는 정보부장을 수행하면서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됩니다. 바로 그 날 수행하였고 총격사건 자리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가 직접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공범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할 때 옆을 지키던 사람들 그리고 시중들던 사람들, 음식을 대접하던 일꾼들까지 모두 사살됩니다. 이 살인사건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핵심은 대통령 시해사건이고 소위 반역사건입니다. 물론 그 후 자신이 권력을 잡았다든지 혹 자기쪽 사람이 권력을 쟁취하였다면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사건은 누구 좋은 대로 진행됩니다.
모두가 잡히고 반역자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박태주는 개인으로 본다면 청렴한 군인입니다. 정 변호사는 그를 살려내려 애씁니다. 군사재판을 피하고 일반 법정에 설 것을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군인의 신분으로써 편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미 판결은 정해져 있었고 재판은 단순히 요식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변호사의 자존심 팽개친 굴욕적 헌신도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과는 상식을 벗어난 일사천리 재판으로 끝나고 그는 사형을 당합니다. 일은 그렇게 끝납니다. 민주주의? 사실 총부리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묻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을 만든 것입니다. 영화 ‘행복의 나라’(Land of Happiness)를 보았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죽음, 이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습니까? 성경에서도 말합니다. 히 2 :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답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그렇지요?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이나 행복이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끝입니다. 죽으면 가장 두려운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떨어집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모든 인연이 끝장납니다. 볼 수도 만날 수도 서로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끝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죽은 다음 내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을 몰라서 더욱 두려워하는 겁니다. 세상에 죽어본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기는 하지요. 문제는 그들이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까? 죽어보니까 이렇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어있을 때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궁금하지요? 그런데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순수하게 맞이해줍니까? 아닙니다. 물론 일반 백성은 그래도 그 하시는 일을 보고 모여들기도 합니다. 사실 믿어서 따르기보다는 뭔가 얻는 것이 있어서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먹을 것 주지요, 병 고쳐주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다고 돈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거저주십니다. 그러니 따라다녀서 손해 볼 일 없지요. 문제는 그런 일로 말미암아 당시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더욱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저 별 것도 아닌 젊은 녀석이 나타나서 백성을 미혹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네한테 와야 할 백성이 자꾸 거지같은 젊은 녀석을 따라다니니 신경질 난다 이겁니다. 결국 나사렛 이단이라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핍박하고 쫓아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작당해서 죽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다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전할까요? 아닙니다. 같은 처지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미리 경고하십니다. 마 10 : 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자 예수님 따라다니는 일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채찍질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무슨 일까지 일어날까요? 21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세상에! 가족들까지도 들고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두렵고 걱정되겠습니까? 이거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수님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22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겠지요. 그런데 말씀하시기를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지금 편하자고 구원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괴롭고 힘들어도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참고 나갈 것인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편하자고 믿음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구원을 위해 이 고난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을 가시렵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일이 힘들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상황을 제자들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러니 나만큼만 되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4 - 25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집주인 곧 예수님을 바알세불 즉 귀신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아주 고상하게 표현해서 기록했을 뿐이지요. 말 그대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을 ‘마귀 새끼’라고 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했으니 그 제자들인 너희에게는 좋게 말해주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그렇게 모욕하고 핍박하고 협박해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한 대로,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십니다.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저들이 아무리 위협하고 설령 죽인다 할지라도 기껏해야 뭐만 죽일 수 있다? 몸이나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영혼을 담고 있는 몸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결정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아이고, 이왕이면 몸까지 지켜주시지요. 글쎄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이란 말입니다. 29 - 31절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맞습니다. 하나님은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막 갖다 써먹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머리털까지 세밀하게 알아서 지켜주시려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멸시와 천대, 위협을 감내하는 제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부르면서 도적질하는 사람을 지켜주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 팔아서 자기 배 불리는 목자를 지켜주지 않으십니다.
다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예수님을 맞이합니까? 아닙니다. 목자들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핍박하고 멸시하고 죽이려까지 합니다. 당시 성전을 맡고 있던 지도자들, 제사장 장로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 모두가 예수님을 헐뜯었습니다. 자기들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백성들도 그렇게 하도록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자기네 가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고 왜 백성들까지 가지 못하게 막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앞에 가서 변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목자들이 가지 못하게 해서 못 갔습니다. 핑계가 될까요?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변명이 되겠다. 안 되겠다? 정신 차립시다. 목사님 핑계 대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이 똑똑해져서 가타부타 결정해야 합니다.
천국복음 가지고 사는 일이 쉽다 어렵다? 우선 천국복음을 들으려고 가는 자체가 쉬운 일이겠다, 어려운 일이겠다? 당시 목자들이 예수님께 가라고 했습니까, 막았습니까? 못 가게 막았다고 하지요. 오늘날은 어떨까요? 성경 말씀 좀 배우려 다녀야 하겠습니다, 말하면 목사님들이 가라고 해요, 가지 말라고 해요? 저는 뭐라고 할까요? 예, 얼마든지 가서 배우십시오. 스스로 판단해보라 그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하며 주로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게 미심쩍으면 어디든 가서 배워보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막지 않았습니다. 가서 배워보십시오. 그리고 분별해보십시오.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해서 찾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책임질 일이 아니지요. 그것을 막았다가는 제가 더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너 왜 내 백성이 옳은 것 배우려 다니려는데 막았느냐? 하고 따지지 않으시겠습니까? 마 18 :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저도 벌 받기 싫습니다. 얼마든지 배우십시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바르게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참 진리를 발견하셨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저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룰루랄라 천국 가시렵니까? 안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우리를 괴롭히고 핍박하고 나아가 설령 죽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몸에 국한될 뿐입니다. 우리 영혼까지는 결코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다루시는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아니면 영원한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몸만 죽일 수 있는 자를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마 10 :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래서 많이 순교를 감내한 줄 믿습니다. 몸 하나 살려고 영원한 세계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어떤 일까지 당했는가 보겠습니다. 히 11 : 35 - 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옛날 시골에 살 때 서울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가끔 서울에 다녀온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 곁으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뭐 들으려고? 서울 이야기 들으려고. 듣고는 와 - 탄성을 발합니다. 와 - 그런 것도 있는겨? 보지 못하지만 마치 보는 것처럼 이야기를 듣습니다. 흥미진진하지요. 우리 하나님이 성경 왜 주셨습니까? 세상 이야기 들려주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 들려주려고 주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하셨습니까? 하늘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믿어줍니까, 안 믿습니까? 요 3 :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시 오셔도 어디 이야기하실까요? 당연히 하나님 나라 이야기하시겠지요. 그러면 하나님 백성이라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들읍시다.
예수님 말씀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듣는다고요? 우리는 다 들을 것 같지요? 그게 희망사항입니다. 그런데 다 듣는다고 말씀하시나요? 마지막 때, 주님 다시 오셨을 때의 이야기 어디 있습니까? 예, 계시록에 있습니다. 누가 듣는가 보겠습니다. 계 2 :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누가 들으랍니까? ‘귀 있는 자’입니다. 귀 없는 사람 있습니까? 아 예수님 다시 오실 때는 귀 없는 사람이 세상에 많은가보다, 그렇습니까? 이 말씀 반복해서 나옵니다. 2 : 11, 17, 29, 3 : 6, 13, 22절에 똑같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귀 있는 자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늘 이야기는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귀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 어떤 귀가 생기는가 보겠습니다. 딤후 4 : 3 - 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좋은 이야기만 들으려고 한답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나 들으려고 한단 말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시 예수님 따라다닌다고 말했다가는 자칫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예수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당당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마 10 : 32 -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아무도 알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자기 제자들만이라도 예수님을 알고 따라다닌다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 당당하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 로마인들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관심도 없습니다. 누구 앞에서 당당하라고요? 예수님을 거부하고 멸시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 장로들 앞에서 당당하라고 당부하시는 겁니다. 왜요?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모르는데. 알고 믿읍시다.
행여 조그만 교회 다닌다고 저 큰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말했다가는 괜히 세상 말로 쪽팔립니까? 나는 ‘사랑의교회’ 다닌다고, ‘금란교회’ 다닌다고, ‘연세중앙교회’ 다닌다고, ‘여의도순복음교회’ 다닌다고 말하는 친구들 보면 기죽습니까? 당당해집시다. 그들도 예수님 믿는다고 큰소리치겠지요. 그런데 성경을 우리만큼 알고 믿을까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느 자식들을 더 기쁘게 바라보아주실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은 제대로 모르는 자식들을 예뻐하실까요, 조그만 교회를 다녀도 아버지 말씀, 성경을 알려고 배우고 외우고 가르치려는 신자를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줄 믿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겨루어보아도 될 것입니다. 누가 성경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할 수 있는가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알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신앙하지 맙시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시 ‘공갈빵’이라는 것 아십니까? 겉모양은 빵인데 속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껍데기 빵입니다. 우리말에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정은 찹쌀을 기름에 튀긴 유과인데, 기름에 튀길 때 부풀면서 속이 비게 됩니다. 그래서 겉만 번듯하고 내실이 없는 사람을 속 빈 강정에 비유하게 됩니다. 그런 신앙인이 되지 맙시다. 큰 교회 다녀서 천국 가고 영생 얻는 것 아닙니다. 누가 천국 갑니까?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영생은 어떻게 얻습니까?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알기 위해 배워야 하겠지요. 주의 뜻을 알아야 그대로 행할 것이고 입으로 주여 주여 하지 말고 하나님을, 예수님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니 열심히 성실하게 배웁시다. 천국 가서 영생을 누리려면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결코 시간 낭비 아닙니다.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어디든 제대로 가르치는 곳을 찾아서 배워야 합니다. 다 어디 가자고 하는 겁니까? 천국 가자고 하는 겁니다. 영생을 누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우리는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는 것이 영생이다,’ 그 말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거짓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자칭 하나님’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잘 보십시오.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합니다. 스스로 높여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럽니까? ‘대적하는 자’ 곧 마귀입니다. 어디에 나타납니까? ‘하나님 성전’에. 그러니 오늘날 교회라고 번듯하게 세워놓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지 마귀가 있는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숙제가 하나 생깁니다. 하나님도 마귀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별합니까? 맞습니다. 모두 육신이 없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 영은 세상에서 육신에 들어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목자가 있고 마귀가 함께 하는 목자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목자들은 보입니다. 우리는 그 목자를 구분하면 됩니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목자는 하늘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함께 하는 목자는 땅을 이야기하겠지요.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목자는 하나님에게서 하늘 이야기를 받아 전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함께 하는 목자는 땅에 속하여 땅 이야기를 전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해주는 말씀 곧 설교를 잘 들어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하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지 세상 이야기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교회 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땅 곧 세상 이야기가 궁금해서 갑니까? 아니면 우리가 본 적이 없는 하늘이 궁금해서 하늘 이야기 듣고자 갑니까? 세상 이야기는 구태여 교회까지 가지 않아도 널려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이야 TV 인터넷 스마트폰까지 매일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교회까지 가서 또 듣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하늘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다 싶으면 어서 바꾸어야 합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내가 구원을 받느냐 못받느냐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생명이야 죽음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 다시 상기하며 마칩니다. 마 10 :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