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못하겠다고 핑계를 대지 맙시다.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신부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
-최혜영 수녀-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 곁에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난히도 세간의 이목을 받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막달레나)로 출신지가 갈릴래아 지방의 수도 티베리아스 북쪽의 막달라 마을이었나 봅니다. 성경에 따르면,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신 여자로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보았고 어느 누구보다 먼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달레나에 대해서는 온갖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그동안도 숱하게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의 관심이 되어 예수님의 애인으로 그려졌고, 최근에는 소설 <다빈치 코드>가 인기를 모으면서 예수님과 막달레나의 결혼설이 들먹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가지셨기에 성적 존재로서 성적 욕망을 경험했으리라는 가정은 가능하겠지만 인간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히려 남자들의 욕망을 멋대로 막달레나라는 인물 안에 투사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치유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해치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김덕진-
여권신장 시대’·‘페미니즘 시대’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는다. 물론 동남 아시아나 중동지역 여성들이 받는 정도의 핍박을 대한민국 여성들이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도 탄생했고, 얼마 전까지 제1야당의 대표도 여성이었다. 여성 CEO나 여성 대법관 등 흔히 말하는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사례를 기준으로 이 땅의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직도 기업에서 정리해고 대상 1순위는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이고, 여성은 집안일이나 하고 아이나 키우면서 남성들이 하는 일에는 관심을 꺼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남성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호주제가 폐지되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갓집에서 상주 노릇은 나이가 어려도 아들이 하는 것이고,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하는 것이 미풍양속처럼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여전히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희생과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두루 다니셨는데 마귀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자기 재산을 털어 시중을 들며 예수님 일행과 동행했다는, 너무나 평범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는 “시중을 들었다”는 구절이 상당히 불편하게 들려왔다. 이는 마치 여성들이 모두가 남성인 예수님 일행을 시중 드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구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양성평등의식’이 현저하게 낮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소수자이고, 차별받는 사람들이던 여성들을 일행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심지어 일곱 마귀가 들었다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와도 제자처럼 동행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하셨다. 2000년 전 예수님은 그렇게 소수자들,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하신 분이셨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처럼 우리 주변의 소수자들과 동행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 이회진신부-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교 여행에 12 제자들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여행의 동반자로 함께 초대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공동체의 구성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이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교 여행에 제자들과 여인들의 동반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에게는 기쁨이자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 곁에 둘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삶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듯,
당신 사랑의 세계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에,
우리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는 일을 혼자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것이 더 빠르고 맘에도 들뿐만 아니라 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을 다른 이에게 맡겨 두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맘에 들게 고치며 시간을 더 많이 허비해야 하는 것이 싫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치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노심초사하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일을 혼자서 처리합니다.
그런데 혼자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은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짜증과 미움은 마음속에 쌓여만 갑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제게 “독불장군”이니,
“혼자 다 지고 가느니”하며 불만스러워합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인들의 도움마저 받아들이시는데,
예수님처럼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는 제 마음 하나 편하자고
동료들을 멀리하고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자신도 무엇인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을 체험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예수님께 다시 감사와 자기 삶의 희망을 돌리게 되는 한편,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사랑의 나눔과 희망의 가치를 전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행위는 함께 사는 형제들 하나하나를 고립시키고 구별 짓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는 일을 위해 필요할지 모르나
그것은 일을 위해서지 공동체를 위해서도 사람을 위해서도
소중한 존재가 스스로 되지 못하고 맙니다.
다른 형제들도 역시 자신의 무력함 혹은 무료함 안에서 자기 존중감이 결여되는
우(愚)를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일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는 것에
비록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의 소중함과 삶의 기쁨에 대한 체험은
우리의 삶에 큰 기쁨이 되고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줌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도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협력을 기꺼이 받아주시며
당신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우리가 당신의 희망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이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희망 자체이며,
또한 당신의 구원 사업을 함께할 귀한 존재들임을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받아주시고 함께 하시기에,
우리 자신이 예수님 당신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늘 나의 형제들과 가족들과 함께 일과 시간과 삶을 나눈다는 것은
그들과 나 자신에게 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복음적 삶의 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이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의 아집과 독선을 꾸짖어주소서. 당신이 저에게 희망이요 기쁨이듯, 제가 형제들에게 희망이요 기쁨일수 있도록 당신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군밤 한알
- 예진광 신부-
김천에는 직지사가 유명합니다.
4월 어느 화창한 날. 벚꽃이 한창 필 무렵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직지사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지사 벚꽃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직지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니까 왼편에 군밤 리어카가 서 있었습니다.
그냥 그 앞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는데
그 군밤 사장님이 아무 말씀 없이 지나가고 있는 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손을 펴보니 군밤하나였습니다.
‘야! 이거 의외의 수확인데’하며 몇 걸음 걸어가서 입안에 톡 털어 넣었습니다.
어! 근데 밤이 맛이 있네요.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
갑자기 한참 가고 있던 길을 되돌아서 그 군밤 리어카로 가서 밤을 한봉지 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군밤이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미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껴지니 밤을 살 때 결코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장사는 이렇게 해야되!’라고 생각하며 군밤을 하나씩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군밤 한 알!’
‘가던 길을 돌아서게 했던 그 군밤 한 알’
사제는 그 군밤 한 알을 쥐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가 줄 수 있는 군밤 한 알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사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하느님 복음의 깊은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그 맛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낫게 된 여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열정적으로 돕습니다.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맛본 그녀들은
이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밤 하나를 쥐어주는 사람처럼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맛보여주는 사람이 지금 우리 세상에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한명 한명이 세상 사람들에게 군밤하나를 쥐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의 헌신적인 도움
-이기양 신부-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의 직업이 목수이셨고, 삼십 세가 되어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는 직업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하시기에도 바쁘셨지요. 그렇다면 이렇다할 일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고 사셨을까요? 더군다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명의 제자들은 항상 스승을 따라 다녔고 그들 외에도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할 때도 많았습니다. 수십 명이 먹고 자고 입고 쓰는 공동체 생활에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은 뻔한 일이지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재원을 감당할 수 있으셨을까요? 그 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 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1-3)
많은 여인들, 특히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의 여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입은 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에 헌신하실 수가 있었고 또 여인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힘썼던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켰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서도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돕지 않았다면 그 은총이 지속될 수도 없었을 터이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을 행하시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운신의 폭은 무척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은 베드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보내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실제로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없지 않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이 싫어서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번의 전도 여행과 여러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는 역시 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도움은 지금도 계속이 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는 쌓아놓은 재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것만을 취하도록 정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물심양면으로 돕는 사람들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를 위해 오지에 나가는 성직자나 수도자는 뜻있는 신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참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 신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자를 찾아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신부에게 돈이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신부들 주변에는 늘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정말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선뜻 도움을 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어렵고 힘이 들 때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런 은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처지가 또 신부들의 처지입니다. 신자들은 많은데 정작 아프고 힘이 들어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아무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부는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지 않지요. 신부에게 있어서 가족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신자들입니다. 신부나 수녀들은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어렵고 힘이 들 때 누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돕겠습니까? 불교 신자들이 돕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이 위하고 도와야지요.
그런데 가끔 이렇게 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부님께 너무 잘 해 드리면 세속화되셔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도 판단력이 없이 세상을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제는 없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 세상적인 작은 일로 본질을 흐리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기도하며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도움을 준다고 하여 ??우리 신부님, 내 신부님?‘하며 지나치게 속된 방법으로 자기만을 위한 관계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신자들의 올바른 뒷받침은 기도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됩니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 많은 신자들의 성직자에 대한 존경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부님?‘하면 ??하느님?‘보듯이 했었지요. 이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경이 크면 성직자에 대한 존경도 큽니다. 신심이 없으면 같이 갈 수가 없지요. 사람은 자기가 지닌 신심만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성직자를 하느님 보듯이 대하고, 또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모습,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가장 복음적인 모습이지요.
좋은 공동체, 복음적인 공동체는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헌신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하고 신자들은 존경과 믿음으로 성직자를 따르며 뒷받침하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의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뒷받침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많은 신자들의 뒷받침을 통해 발전이 이어져 나가고 있지요. 그런 면에 있어서 신자들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바람직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사제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로써 뒷받침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신자들은 사목자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존경하며 믿고 따르면서 뒷받침하고, 성직자들은 헌신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들의 많은 도움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었듯이 우리 신자들도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봉헌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체의 중심과 비전
-이수철신부-
가톨릭은 물론 베네딕도 수도회의 영성은 공동체 영성입니다.
어찌 보면 수도생활 자체가 공동생활이요,
공동생활 자체가 힘든 수행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공동체가 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중심과 비전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하나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공통의 비전인 하느님의 나라가 있어야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의 일행을 돕는 여자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을 바라보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너무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을 공동으로 지닐 때
비로소 가능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공동의 중심과 비전이 있어야 자기 초월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중심이나 비전이 희미할 때,
계속 이기적 자기에 걸려 넘어져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공동체의 비전인 하느님 나라를 확인하라고
매일의 공동미사와 일곱 번의 공동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공동체의 중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오로의 고백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희망도 헛됩니다.
공동체도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다음 바오로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비전이 되는 무아의 삶,
자기 초월의 삶들이 모여 비로소 가능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끊임없이 성숙, 성장해 가야하는 살아있는 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의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공동체의 비전인 하느님의 나라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아름다운 꽃
-강영구신부-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도 따라다녔는데 그들 중에는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그대에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일곱 마귀와 함께 살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창녀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말 그녀가 창녀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9,62)
과거에 발목 잡히고 과거 때문에 회한(悔恨)에 빠져 엎어진 사람은 하늘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지나간 날들의 상처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들풀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는 새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예수님께 귀의(歸依)한다면
당신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꽃이 될 수 있습니다.
자매 신자들께 감사
-박상대 신부 -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선교활동의 일상(日常)에 관하여 짧지만 종합적인 내용을 들려주면서, 활동에 함께 다니던 동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오늘 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열두 제자와 십수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이 거명 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 치유된 여인이며, 요안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자의 아내였다.
이 여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에까지 동행한 사람들이다.(루가 23,49) 참으로 진정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예수님의 동반자들이 어디 이들뿐이었겠는가?
예수께서는 선교활동의 시작부터 많은 동행자를 얻으셨다. 예수께서 직접 제자로 불러 곁에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친지와 고향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심금(心琴)을 울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치유와 구마기적에 마음을 뺏겨 그저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감사의 마음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감찰반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를 선별하셨던 내용이나(루가 6,13), 일흔 두 제자들을 뽑아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신 내용(루가 10,1)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동반자는 적어도 100명은 훨씬 넘어 2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 마태 8,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집도 절도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와 그 복음에 관하여 편력(遍歷)설교를 하셨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편력설교자에게 고정된 주거지란 있을 수 없다. 발 닿는 그 곳이 그 날 묵을 곳인 것이며, 거저 그 때 주어지는 음식이 그 날의 양식이다. 이는 예수님의 동반자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다.
특별히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가복음이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죄인들, 여인들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주제로 보도하는 고유의 특수사료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가복음은 특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언자 안나, 나인의 과부, 마르타와 마리아, 어떤 부인의 성모칭송, 곱사등이 부인, 잃은 은전과 부인, 재판관과 과부의 청,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길을 동행하는 부인들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의 비교적 낮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감안할 때, 예수님의 관심이 여인들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인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디를 가든 신학교만 빼고 항상 자매님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활동하며, 하느님 사업의 중심에 서있다.
이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제공하는 2003년 교세통계자료, 전체 신자수 4,481,490명중에서 자매들이 2,614,773명, 형제들이 1,866,717명인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도 같은 통계일 것이 뻔하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여인들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 형제 신자분들이 마냥 놀고만 계신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