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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드리는, 김세윤교수의 “올바른 칭의란 무엇인가?” 라는 글은
http://kdmin.fuller.edu/a/news/659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라는 제목의 김세윤교수님 인터뷰 기사 중 일부입니다.
(강조와 밑줄은 제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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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와 성화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칭의란 근본적으로 ‘죄 용서’, ‘무죄선언’, ‘의인이라 칭함 받음’ 이라는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주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에서 얻게 될 것의 선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칭의’의 완성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 개신교가 대체로 그랬듯이, 한국교회도 칭의론의 관계론적 의미를 간과하고 그것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무죄선언’ 받고 ‘의인이라 칭함’ 받는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만 강조하고, 그것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면서, 복음을, 칭의론을 아주 단순화시켜 가르쳐온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더 단순화 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구호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온 사람들이 ‘아 그래? 그럼 나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지금 교회 다니고 있으니, 나의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이구만.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뭐 문제될 것 없겠네?’ 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니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 교회는 의인의 삶이 없으면서 ‘의인’으로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칭의론에 대한 부분적 (즉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윤리 없는 구원론을 설파하는 많은 한국의 목사들은 사실상 그들이 이단이라고 규정한 구원파의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꽤 많은 진지한 목사들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 론에 입각하여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얻는 ‘칭의’는 ‘성화’로 이어져야 우리가 ‘영화’, 즉 구원의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롬 8:30), 오늘 여기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성화론’이라는 개념이 꽤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즉 믿음으로 의인 된 자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름이 잘 못 붙여졌고, 그것을 칭의론과 구분하여 생각하게 하므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화’라는 개념을 ‘칭의’ 뒤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로 사용하지 않고, 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 받을 때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짐, 하나님의 소유물이 됨, 하나님의 백성이 됨, 곧 ‘성도’가 됨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또 그의 편지들 중 서너 번 이렇게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성화’ 된 사람들은 계속 그 ‘성화’의 삶을 살아서 (즉 계속 세상의 가치나, 정신, 도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후의 심판에서 ‘성화’ 에 있어 흠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살전 3:13-14; 4:1-8; 5:23; 롬 6:19-23).
그러니까 ‘성화’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종말에 ‘완성될’ 것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둘 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음, 곧 그의 백성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금 현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와 ‘성화’는 같은 실재를 말하는 병행어들 또는 동의어들로서 (고전 6:11), 그 실재 (곧 하나님의 백성 됨)을 서로 다른 그림언어로 표현하는 것들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이제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의로운’ (즉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성화’는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어 ‘거룩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보고 율법과 관계하여 구원론을 펼칠 때는 ‘칭의’의 개념을 사용하나, 그것을 세상의 오염으로 보면서 율법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으며 구원론을 펼칠 때는 ‘성화’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의 시작점에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 ‘성도’가 된 것은 여러 서신들에서 언급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현재적 삶을 순결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오염될 위험이 컸던 이방세계의 그리스도인들, 즉 고린도인들과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쓴 편지들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롬 6:19-23 도 참조).
‘성화’라는 개념을 이렇게 사도 바울이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대로 쓰지 않고,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이해하여, ‘칭의’ 다음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 즉 현재적 단계를 지칭하기 위해서 쓰면, 그 언어 사용으로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구원의 서정’의 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도, 우리 개신교의 전통에 따라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칭의’를 강조하는 것만큼은 하지 않으며 (아니, 하지 못하며 – 혹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오류를 범할까봐), 게다가 선취된 ‘칭의’를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견고히 뒷받침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니, ‘칭의’ 다음에 있다는 ‘성화’의 단계가 항상 부차적인 것, ‘이루면 좋지만 못 이루어도 뭐 나의 구원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 뒤에 ‘성화’의 단계가 있다는 식으로 구원론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칭의’나 ‘성화’ 둘 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삶으로써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며 (‘칭의’), 세상의 오염을 피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성화’)를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각각 그 자체 내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에서 얻을 ‘무죄선언/의인이라 칭함 받음’을 지레 받음이라는 법정적 뜻과 그것이 함축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뜻을 둘 다 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주심을 덕입어 사는 그의 ‘자녀’들이 되었다는 ‘가족’의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더 포괄적으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로 이전되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통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칭의’는 ‘주권의 전이’ (Lordship-transfer) 인 것입니다 (골 1:13-14).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속’ 받아 만유 위에 대행하는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 (통치)’는 현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의 나라 (통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심장으로 고백하고 ‘예수가 주이시다’고 입으로 부르짖음으로써,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롬 10:9-10). 이것이 ‘칭의’입니다.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꺾은 주 예수의 도움을 청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권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된 자는, 즉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된 자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들어간 자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즉 더 이상 세상을 좇지 않고 (즉 이 세상(대)를 통치하는 사단에 순종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은 이렇게 구조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윤리적 요구를 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칭의론’을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으로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 않는, 아니 윤리적 삶을 방해하는 거짓 ‘칭의론’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싸구려 은혜’ 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구원파의 ‘복음’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두란노를 통하여 출판한 책, ‘칭의와 성화’에서 칭의론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의 부패의 가장 근본 원인은 그들이 바울의 칭의론의 복음을 의로운 삶이 없는 구원파적 구원론으로 왜곡하여 선포하여 온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여러 목사들의 왜곡된 ‘복음’이 결국 기독교로 하여금 ‘개독교’로 욕먹게 하고 전도의 문을 닫는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김 세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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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봤던 것은 예전에 새관점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후 칭의론 논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김세윤교수의 인터뷰 기사에 세례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세례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다시 보니
세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 왔고
김세윤교수께서 세례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세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서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이해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은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는 위 글에서
" 바울은 ‘성화’라는 개념을 ‘칭의’ 뒤에 오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로 사용하지 않고, 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 받을 때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짐,
하나님의 소유물이 됨, 하나님의 백성이 됨, 곧 ‘성도’가 됨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심장으로
고백하고 ‘예수가 주이시다’고 입으로 부르짖음으로써,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롬 10:9-10). 이것이 ‘칭의’입니다.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꺾은 주 예수의 도움을 청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권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행위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간단하게 영어로 쓰면,
We are baptized into the Kingdom of God 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We are baptized into Jesus Christ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된다는 말씀으로
김세윤 교수는 세례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이해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씀은 갈 3:27절에 있습니다.
갈 3:27절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NKJV]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NIV]
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라고
번역하였는데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라고
곧,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한글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옷 입었느니라 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옷 입었느니라 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옷 입었느니라 라고 오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세례에 대해 오역한 개역한글 성경이 오랫동안 세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 것입니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몇 세대에 걸쳐서 세례에 대해 오역한 개역한글성경으로 세례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 오역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이런 오역된 구절을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말씀의 순서를 바꿔 놓으니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박영돈 교수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얻는 유익에 대해서는 잘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지 모르시는 것입니다.
박영돈 교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는 중생[성령의내주하심], 칭의, 성화, 그리고 양자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으면
중생[성령의내주하심], 칭의, 성화, 그리고 양자됨은 없는 것입니다.
중생[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으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기독교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세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세윤교수께서는
"세례때, . . . .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함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의 나라로 이전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칼빈(A)은
세례로 죄사함을 받고
세례로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고
세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례로 중생한다고 하였는데
세례로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는다는 칼빈의 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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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이신칭의)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 (갈 3:23 - 27절)
https://cafe.daum.net/1107/Y4PX/1357
박영돈 교수의 글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에 있는 모순
https://cafe.daum.net/1107/Y4PX/1121
박영돈 교수의 글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에 있는 모순
박영돈 교수의 글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에 있는 모순
caf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