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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CNN 前 서울 특파원으로 활약…
아리랑TV 전성기 이끄는 사장
손지애
영어 하나 잘해 성공한 여자라뇨?
1년에 제사 7번 도맡는 맏며느리로 효부상도 받았어요
김윤덕 기자/조선일보 : 2012.10.06.
24년간 시부모 모시고 살아_
장 보고 제사 준비 '도사',
동네 할머니들이 장한 며느리 추천도 했어요
영어 잘하는 비결은…
내 삶에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훨씬 빨리 습득…
영어책 읽는 습관도 필수죠
기자시절 대통령 5명 인터뷰_
첫 리포트는 김일성 사망… 한국 세일즈에 공들인 DJ,
재임 중 5번 인터뷰 했어요
내 사전에 실패 많았다_
방송사 시험 1차서 떨어졌지
시댁에 손자 못 낳아드렸지…
인생은 바닥 쳐봐야 알게 돼
"인생, 바닥을 쳐봐야 안다"는 말이 손지애(49)의 입에서 나왔을 때 당혹감이 밀려왔다. 뉴욕타임스·CNN 특파원을 거쳐 G20 서울 정상회의 대변인, 청와대 홍보비서관을 지내며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으로 일찌감치 젊은 여성들의 '멘토'가 된 그의 사전에 '실패'란 단어는 없는 줄 알았다.
▲ 추석을 앞둔 지난달 24일 아리랑TV 사옥에서 손지애 사장을 만났다.“ 현장만 뛰다 관리자 역할을 하게 되니 어색하고 어렵지만, 새로운 도전이 즐겁다”고 했다. 뒤에 보이는 대형 지구본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1996년 아리랑TV 개국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전지구적 심포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
'영어 하나 잘해서 성공한 여자'라는 폄하도 '관악효부상(2008년)' 앞에서 무색해졌다. 1년에 제사 일곱 번을 주관하는 맏며느리로, 24년간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온 그를 이웃 할머니들이 '장한 며느리'에 '강추'했다.
사주 보는 친구가 "넌 일만 하고 살 팔자"라고 했다더니, 요즘 손지애는 일복이 터졌다. 지난해 7월 아리랑TV(국제방송교류재단) 사장에 임명되고 나서다. K팝 등 한류 열풍에 힘입어 아리랑TV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미국·유럽 등 전 세계에서 아리랑TV를 수신하는 가구가 1억을 돌파했다.
손지애는 "미디어 외교전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여론을 서방 미디어 몇 개가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지났지요. 자국의 목소리를 내는 미디어 외교 전쟁에서 영어로 한국을 알리는 아리랑TV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질 겁니다."
◇미디어 외교 전쟁 시대
―아리랑TV 수신 가구가 1억을 돌파했다.
"188개국에서 1억300만 가구가 본다. 시청자 수로 환산하면 3억3000만명이 넘는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효과도 보았을까.
"물론이다. 전 세계 10~20대 시청자가 급증했다. 하반기에 '강남' 특집 방송을 기획하고 있다. 음식, 패션, 성형외과 등 서울 강남 문화에 대해 시리즈로 엮어볼 생각이다."
―아리랑TV는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이나 보는 방송인 줄 알았다. 시청률은 높은지.
"우리에겐 '몇 명이 시청하느냐'보다 '누가 보느냐'가 중요하다. 한국 주재 외국 대사들의 80%가 아리랑TV를 시청한다. 내가 취임한 뒤 뉴스와 시사 프로를 강화했다. 문화·교양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뉴스를 통해 한국에 대한 폭넓은 그림을 그려갈 계획이다."
―미디어 외교전의 선두에 아리랑방송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싸우는 무대에 '러시아투데이' 'NHK월드' 'CCTVnews'가 있다. 불어만 고집하던 프랑스가 걸프전 직후 영어 방송 '프랑스24'를 만든 것도 국제사회에 자기들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알자지라 방송의 성공만 봐도 그렇다. 이제는 서방 언론이 우리 목소리를 대신 내줄 거란 기대를 버려야 한다. 서방 미디어가 절대 권력을 누리던 시대는 지났다. 아시아의 시각을 알기 위해 사람들은 이제 중국의 CCTV 영어 방송을 본다. 독도 문제, 한·중·일 FTA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만 봐도 우리가 결코 편안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최고경영자(CEO)로서 리더십 실험대에 서 있다. 할 만한가.
"CEO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자리인 것 같다. 전에는 CEO라고 하면 하는 일 없이 봉급만 많이 가져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CEO가 얼마나 열심히 뛰느냐에 따라 회사 운명이 왔다 갔다 하더라. 기자 시절이 최고로 편했다(웃음)."
◇CNN, 지루하지 않은 15년
▲ CNN 서울특파원 시절의 손지애. 김일성 사망부터 북한의 서해 포격까지 한반도의 긴장관계를 가장 많이 보도했다. / 조선일보DB |
―CNN 특파원, G20 서울 정상회의 대변인, 청와대 해외홍보비서관을 거쳐 아리랑TV 사장이 됐다. 정계로 진출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경력이다.
"내가 정치할 타입은 아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정계에 진출하더라.
"맡은 일에만 몰입하는 편이다. 이 일도 벅차다. 정치하는 걸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다."
―CNN 서울지국장 자리는 왜 그만뒀나. G20 대변인은 한시직이었다.
"그때도 정치하려고 CNN을 그만뒀다고 하더라(웃음). 9개월 임시직인 데다, 임기 얼마 안 남은 정권에 가서 뭐할 거냐며 말리더라.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다. 온통 갈등투성이인 한국 뉴스를 세계에 리포트하는 데도 한계와 싫증을 느꼈다. 다음 단계를 모색하던 중에 기회가 왔다. G20 다음에 뭘 할 것인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싶었다. 일에 많이 지쳐 있던 때라 (G20 끝나면) 가족한테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컸다."
―15년 몸담은 직장을 떠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CNN이 서울 지국을 만든 이유가 성수대교 붕괴 사건 때문이다. 정말 지루하지 않은 15년이었다. 나름대로 한국을 외국에 정확히 알리려고 노력했다. 미사일, 핵 개발 등 갈등과 분쟁을 다룬 뉴스가 대부분이었지만 한국인인 내가 보도하면 안심된다는 분이 많았다. 팩트(사실)를 바꿀 능력은 없지만 컨텍스트(맥락)를 읽어줄 수는 있으니까. 아쉬움은 없다. 15년을 출입처 한 곳만 다닌 셈이니 할 만큼 했다. 김정일 인터뷰를 못 해서 아쉬웠을까(웃음)."
―CNN 서울 특파원으로 처음 한 보도가 김일성 사망이었고, 마지막 리포트는 북한의 서해 포격이었다. 북한 전문가라고 하더라.
"전문가인 척했지. 하하! 지금도 북한 뉴스가 나오면 맥락은 읽을 수 있다. 거기엔 일종의 사이클이 있다. 김정은의 북한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지만, 난 비관적으로 본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사람들은 개방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북한의 권력층은 체제 유지에 유리하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개방하고, 체제 유지에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주민들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개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기자 시절 한국 대통령 5명을 인터뷰했다.
"대통령 인터뷰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인터뷰다. 준비된 질문과 답변만 있으니 가장 기억에 남지 않는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인터뷰는 퇴임 몇 달 전에 한 것이자, 내가 기자로서 마지막으로 한 것이라 가슴 짠하게 추억된다. 인터뷰 마치고 나오는데 '이분이 참 슬픈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가장 자주 뵌 분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다섯 번이나 했으니까. 한 번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전 세계 지도자들과 국제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는데 시차 때문에 밤 11시에 생방송을 하게 됐다. 늦은 시간에 한다고 청와대 분들이 엄청 구박을 하셨는데 대통령이 기꺼이 오케이하셨지. IMF 직후라 한국을 세일즈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셨던 대통령이었다."
◇곱창전골이 제일 좋아
손지애가 청와대 홍보비서관으로 일할 때 동료 한 명이 말했다. "당신은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같은데, 알고 보니 토종이네요." 영어를 본토박이처럼 잘하니 인생의 절반을 영어권에서 살았을 법한데, 외국 생활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4년을 미국에서 산 게 전부였다. 서울 토박이로 이화여고,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질리도록 듣는 '영어 잘하는 비결' 질문에 손지애는 평범한 답을 내놨다. "영어를 공부해야 할 과목으로 여기지 않고 내 생활에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훨씬 빨리 습득할 수 있지요."
―손지애를 비롯해 유엔인권최고대표부(OHCHR) 강경화 부대표, 나승연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대변인처럼 영어 잘하고 예쁘기까지 하면 성공하는 세상이다.
"부정하진 않는다. 내가 영어를 못했으면 이 업(業)을 할 수도 없고 외모도 그럭저럭 받쳐줬다고 생각한다. 씁쓸하지만 남자보다 여자에게 시각적인 부분을 더 요구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다만 영어 만능주의에는 반대한다. 필요한 부분이 있고 불필요한 것도 많은데 과잉이다."
―'영어 잘한다'의 기준은 뭔가.
"자기 의견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것. 한정된 어휘로도 소통을 아주 잘하는 분들이 있다. 확실히 언어는 귀가 좋으면 유리한 것 같다. 흉내 내는 것."
―학창 시절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
"영어 학원에는 안 다녔다. 영자 신문반, 영어 웅변반 같은 데서 활동했고 영어로 책 읽는 습관을 혼자서 들였을 뿐이다. 영어 잘해두면 통역을 하든 번역을 하든 먹고살 수는 있을 거란 생각이 있었다."
―소탈한 성격인 것 같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갔을 때, CNN 기자 출신이라니 밥도 이탈리아 식당이나 프랑스 식당에서 먹는 줄 알았다더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곱창전골인데. 영어도 별로 안 쓰고 한국말만 하니까 되게 좋아하시더라."
―첫 직장이 '비즈니스 코리아'라는 영어 잡지사였다. 어느 매체에 기고한 에세이를 보니, 대졸 직원과 고졸 직원에 대한 처우가 다른 것에 불편을 느꼈다는 얘기가 나오더라.
"제일 먼저 출근해 책상 닦았다는 얘기? 고졸이라고 상사들 책상을 닦고, 대졸이라고 그들과 다른 대접을 받는다는 게 싫었다. 내 나름대로 내린 해법이 막내인 내가 책상을 닦는 거였다. 지금도 언니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
◇제사 7번 지내는 맏며느리
손지애는 반지를 두 개 끼고 다닌다. 결혼반지와 배꽃 무늬의 이화여대 졸업 반지다. 결혼반지에는 보석이 박혀 있지 않다. "남편 이름 이니셜과 하트 문양만 그려져 있죠. 반대하는 결혼이어서 가난하게 결혼 생활 시작했어요." 그는 비즈니스 코리아에서 만난 동료 기자(이병종 뉴스위크 서울 특파원)와 결혼해 딸 셋을 낳았다. 시부모는 물론 시누이와 한집살이 한 지 24년이다. 손지애는 "결혼 생활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라면서도 "내 삶에 1순위는 언제나 가족"이라고 말했다.
―관악효부상은 뜻밖이다.
"동네 할머니들이 구청에 추천하셔서 할 수 없이(웃음). 시부모랑 사는 며느리가 별로 없으니 점수를 딴 거지, 내가 크게 잘한 일은 없다."
―시아버지도 장남, 남편도 장남이라더라.
"1년에 제사가 일곱 번이다. 장 보고 제수 음식 장만하는 데 도사가 됐다. 줄여볼 생각도 있는데 아직은 어머님이 섭섭해하시는 것 같아 그대로 한다. 돌아가시면 조정할 거다."
―일곱 번 제사라니, 일하는 여성에게 가능한 일인가.
"집안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사를 엄수하면 내가 회사 나가서 일하기가 훨씬 편해진다. 모든 걸 내 뜻대로, 편안하게 살 수는 없는 거다."
―남편이 무척 고마워하겠다.
"결혼 초에는 대견하게 여기더니 요즘은 당연시한다. 하하!"
―2002년 대통령 선거일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더라.
"대선 결과를 보도해야 하니 상중인데도 새벽에 옷을 갈아입고 마이크를 잡았다. 시어머님이 현실적이고 깨신 분이라 이해하셨다. 사실 내가 밖에서 일하는 게 어머님께도 편했을 거다. 둘 다 집에 있었다면 한 명은 뛰쳐나갔을 거다. 연세가 88세인데, 지금도 거리에 은행이 떨어지면 죄다 주워와 까서 말리실 만큼 한시도 가만 계시지 않는다."
―다 때려치우고 애들이나 잘 키우자고 생각한 적 없나.
"수없이 했지. 큰딸이 방황을 많이 한 뒤에 대학(고려대)에 가서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딸한테 언젠가 엄마랑 같이 교육에 대한 책을 한번 써보자고 했다. 100점을 맞아야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성공이 아니라는 주제로 써보자고 했다. 여자 후배들에게도 말한다. 엄마가 대범할수록 아이들은 잘 큰다고."
―어느 인터뷰를 보니 '결혼 꼭 하라, 아이도 많이 낳고, 가능하면 모유를 먹이라'고 했더라. 젊은 여성들에겐 비현실적이고 절망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황당하겠지(웃음). 그런데 나는 왜 여자들이 일과 가정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건도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육아를 짐으로만 생각하는 분위기가 싫다. 달리 보면 여자라서 누리는 권리이고 혜택일 수 있다. 찾아보면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남편을 적극 활용해라.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텔레비전일 뿐이다
―언론인으로 이번 대선을 어떻게 보나.
"기자로서 대선을 여러 번 겪었는데 내 예측은 한 번도 안 맞았다(웃음). 표를 다 세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게 대선이더라."
―여성 리더십은 존재할까.
"신문에서 읽은 기사다. 군대 여성 장교들이 보여주는 여러 유형 리더십 중에 어느 것이 효과를 발휘하나 봤더니 여성이기를 숨기지 않는 리더십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단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으니 차별하지 말라' 식의 리더십은 오히려 여성적인 리더로 평가받았고. 여성이라 더 잘할 수 있는 걸 자연스럽게 강화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손지애는 어떤 리더인가.
"직원들 다독이는 일은 잘해도, 혼내고 윽박지르는 건 못한다. 결국 나답게 하는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을 완성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고 믿고 노력한다.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더 이상 나아지지 않겠지만 그때까지는 매일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할 거다."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을 것 같다.
"그럴 리가 있나. MBC는 1차도 통과하지 못했다. 키가 너무 크다고. 아들 좋아하는 시어머님께 손자 못 낳아드린 것도 실패라면 실패지(웃음). 나름대로 인생에 굴곡이 많았다. 학창 시절은 물론, 아이들 키우면서도 가슴 태운 일 많았고. 인생, 바닥을 쳐봐야, 큰 슬픔 겪어봐야 안다."
―손지애의 다음 도전은 뭐가 될까.
"나는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만 본다. 너무 앞을 보면 오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할 것 같아서. CNN 있을 때도 그랬다. 갑자기 터진 사건 사고는 취재 불가능한 스케줄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래, 내가 죽지 말고 3~4일만 버텨보자. 밤을 새워서라도 하자' 하고 이를 악물면 불가능도 가능해진다."
―카메라 앞에서 당신의 대범함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츠 온리 어 텔레비전!(It's only a television!) TV에 나오는 걸 시시하게 생각하면 된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심장을 꺼내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