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64/고도古都 공주公州]백제의 숨결을 찾아
매주 토요일 밤 7시부터 하는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중견 배우의 구수한 목소리도 좋지만, 부부들의 휴먼스토리나 맛집 기행 그리고 장인匠人들의 공방 순례도 볼만하다. 지난주에는 백제의 고도古都‘공주’를 더트더니, 어제는 ‘동해시’이야기가 펼쳐졌다. 대한민국 방방곡곡 고샅고샅이 어디 스토리텔링 없는 데가 있을까만, 설연휴에 공주편을 아내와 같이 보면서 다음주 무조건 가보자고 약속했다. 아내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지만, 나는 딱 한번 46년 전 가본 적이 있다. 지명地名만 기억할 따름이지만, 공주 하면 아버지와 추억이 있는 곳이다.
당시 사범대학으로는 공주사범대학이 명문으로 꼽혔다. 그곳을 지망한 까닭은 고교 선생님들 중 실력있는 분들이 모두 그 대학 출신이었고 ‘자식 가운데 한 명이라도 선생이 됐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려면 그래도 그 대학을 나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전날 아버지와 나는 공주의 여관에서 하루밤 잠을 잤다. 아마도 아버지와 둘이 한 방에서 잠을 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기념으로 구두를 사주셔 처음 신어봤는데, 발이 맞지 않았는지 덜거덕거렸던 느낌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 대목에서 쪽팔리지만 여담 한 쪼가리를 기록해놓아야겠다. 공주사대 입학시험을 볼 때 과락科落(과목별 낙제점)제도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중고교 6년 동안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이었다. 수학 빵점으로 보기 좋게 낙방했다. 예비고사(현 수학능력고사-수능) 볼 때에도 수학시간(2점씩 25개 문항)에 ‘나,가,라, 나,가,라, 다,나,가,라,)라고 OMR카드에 표기했더니 5개 맞았다. 눈깜땡깜 그냥 가나다라 중 하나로만 표기했어도 최소 7개는 맞는다던가. 만사가 다 귀찮아 예비고사 끝나자마자 전주천 한벽루 옆 오모가지집을 찾아 막걸리를 기울였었다. 흐흐. 그 공주사대가 지금도 있냐고 해설사에게 물으니 공주대학교로 확장 발전되었다고 한다. >
아무튼, 웅진熊津백제百濟(475-538년) 왕궁터 공산산성 한 바퀴(2.6km)를 비단강(금강錦江)을 끼고 1시간여 돌면서 처음으로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다. 최인호의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처럼 백제같은 비운의 왕국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 왔다. 몇 년 전 부여扶餘의 부소산성을 걸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낙화암의 전설이 가짜뉴스든 뭐든 의자왕, 계백장군, 흑지상지, 풍왕자 등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은가. 부여, 익산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등재한 세계유산의 도시인 공주는 ‘오래된 미래’의 도시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경주와 부여, 공주, 한양, 개성 등 이런 유적지구가 한반도 7000년 역사를 생생히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아내와 함께 와보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는데, 문화해설사를 대동하고 산성을 한바퀴 도는 젊은 연인들을 만났다. 서울에서 왔다는 이런 역사유적지를 찾아 걷거나 사실史實들을 귀동냥하는 그들이 참 많이 예뼈보였다. 공주의 옛지명이 ‘고마’이고, 진남루가 ‘삼남三南의 관문’이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 다음의 찌질이임금 인조가 이괄의 난때 공주로 피난을 와 5박6일 머무르며 임씨네가 만든 떡을 먹는데 맛있다(절미絶味)고 말한 것이 ‘인(임)절미’의 유래가 됐고, 산성 내의 큰 나무 두 그루를 어루만지며 시름을 달랬다며 쌍수(雙樹)에게 정삼품 벼슬을 내린 것을 기념해 ‘쌍수정’을 세웠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백범 선생이 해방이후 산성에 올라 한 누각의 이름을 ‘광복루光復樓’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부여여행 때도 그랬지만, 유유히 흐르는 이 비단결같은 강물을 바라보며, 어찌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의 <금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1962년 총 26장 4800행의 장시 금강을 썼다. 그 시로 인하여 내가 백제의 사람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대학시절 판매금지된 금강 시집을 어렵게 구해 읽으며 고구려 유민 진아와 백제의 유민 신하늬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가슴 아파했다. 그는 4․19혁명의 염원과 좌절을 온몸으로 겪으며 이 서사시를 썼다고 한다. 그때 어느 가을날 백마강변의 신동엽시비를 찾아 어루만지며 울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백제권역의 출신이어서 그러한지, 나는 애초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 중 백제가\ 가장 좋았다. ‘민족의 맏아들’ 고구려도 좋지만 너무 거친 듯하고, 서정주가 읊어댄 신라 천년도 그리 맘에 와닿지 않았지만, 어쩐지 온유하고(온조가 세워서인지) 서산의 마애삼존불의 미소처럼 은근한 백제, 조용히 문화의 속살을 키웠던 백제가 좋았다. 백제 문화의 핵심단어라고 할까?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가 특히 마음에 든다. 일본의 국보라고 자랑하는 것들이 모두 백제에서 만들거나 건너간 것들이지 않은가. 한문조차 왕인박사가 가르쳤다지 않는가. 당나라에도 당당했건만, 교묘한 신라의 왜곡되고 위축된 통일정책으로 백제라는 나라가 역사에서 지워졌지 않는가. 나는 그것이 못내 가슴이 아프다. 언젠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에 대한 이야기를 칼럼 대필해 언론에 실린 한 것도 생각난다. 읽어보시면 좋겠다. https://cafe.daum.net/jrsix/h8dk/501
공산산성을 한바퀴 도는데 겨울바람만 휭휭, 스산하기 짝이 없지만, 금강이 있어 나는 좋았다. 산성 입구 사거리에 서있는 동상이 ‘무령왕’이라는데, 크기만 하고 눈에 너무 설어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둘러볼 마음이 없어진다. 산성시장 안에서 인절미를 사먹으며 재위 동안 쫓겨만 다니던, 삼전도 굴욕의 이름 인조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명색이 주권국가의 임금이 고두구배叩頭九拜(머리를 세 번 찧으며 아홉 번 절을 함)라니? 피가 벌겋게 흘렀다고 한다. 이 무슨 치욕이란 말인가? 이런 역사가 지나고 흘러, 이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건만, 도대체 ‘정치政治’는 왜 이러는 것이고,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심히 걱정된다.
논산의 동생집에 가는 중, 은진면 관촉사에 들러, 우리가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알고 있는 거대한 석조입상(18.2m)을 보았다. 고려초 작품이라는데, 이제껏 나는 일제강점기 시멘트로 떡을 칠해 만든 것인 줄 알았다. 아무리 예쁘게 보려해도 균형미는 빵점인 듯하다. 마침 절 앞에 왕년에 <맹꽁이서당>으로 유명한 윤승운 선생의 만화 두 컷이 붙여 있었다. 그것을 읽고 비로소 반야산 관촉사에 대해 알았다. 윤선생님은 여전히 수십 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며 잘 계실까, 전화를 드리며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 입상을 다듬었던 투박한 세공細工들의 불심에 뒤늦게마나 경의를 표한다.
다음에는 이틀정도 시간을 내어 무령왕릉, 우금치전투 기념비, 계룡산에 올라 동학사와 갑사도 보리라. 부여의 신동엽문학관에도 반드시 들러야 하리라. 고향 오는 길, 익산의 미륵사지와 복원한 서탑과 동탑 등도 바라보리라, 다짐한 정초의 짧은 공주여행도 좋았다. 고향산천에 함박눈이 펑펑 내려쌓이면 좋겠다.
첫댓글 수포자가 소확행의 달인이 되다.
일상생활중 소소한 즐거움을 공감넘치도록 글 적는 달인 우천!
이젠, 이렇게 사는것이 모범답안일세.
나는 소소한 즐거움이 뭘까? 화두를 던져본다.
근데, 우천은 왜 오타가 없는기여.. 항상 이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하지만 오늘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