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란 무엇인가
하워드 플로리의 자세와 성공의 의미에 대해서
1. 선정대상과 선정이유
페니실린 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은 플레밍(Alexander Fleming)을 떠올릴 것이다. 휴가 동안 연구실에 방치했던 페트리접시에 핀 푸른곰팡이를 보고 세균을 억제하는 항생제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으로 1945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했다. 누군가는 플레밍의 행운에 대해 얘기하고 누군가는 흔히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관찰한 플레밍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항생제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플레밍 혼자가 아니었다. 공동수상자인 하워드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68~1968)는 진정한 페니실린의 아버지로서 1943년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병사들과 환자들의 목숨을 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플레밍은 기억하지만 플로리라는 의학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전쟁이 한창일 당시 페니실린은 아직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았고 플로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연구에만 매진하였다. 결국 대량생산된 항생제가 많은 사람을 구했을 때는 이미 플레밍의 기적 같은 일화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힌 후 였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좇기보다 연구에 매진했던 플로리의 마음가짐을 통해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2. 성공사례
플레밍은 1928년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 이를 인체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페니실린을 추출하고 정제하여 농축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지만 결과를 얻지 못했고 염증 치료에 페니실린을 적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 후 거듭된 연구에도 페니실린의 효능에 대해 검증하지 못하고 1932년 페니실린에 관한 연구를 중지하게 된다. 이렇게 수면 속으로 묻힐 뻔했던 연구는 항균물질을 연구하던 호주의 병리학자인 하워드 플로리에 의해 재조명되는데 그는 끈기있는 자세로 연구에 매진하여 1940년 순수한 페니실린을 정제하는데 성공하고 페니실린의 치료제로서의 효능을 입증해낸다. 많은 사람들이 감염에 의해 사망하던 시대에 항생제의 발견은 대중의 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플로리에게 많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정제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사람만이 항생제의 효능을 누릴 수 있었기에 플로리는 자신의 발견에 대해 인터뷰하기 보다는 대량 생산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량 생산 연구에 필요한 자금과 지원을 받기 위해 미국의 록펠러재단에 찾아간 플로리는 항생제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결국 록펠러재단의 지원아래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은 성공하고 수술 후 환자의 생존율을 30%에서 80%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플로리가 대량생산을 위해 연구하고 있는 동안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발견자로서 많은 인터뷰를 해왔고 페니실린의 발견에 관한 놀라운 신화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공신화가 되어있었다. 비록 페니실린을 정제하고 치료제로서 사용하고 대량생산법까지 완성했지만 플로리는 자신의 성과에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3. 자신의 의견
플로리는 이미 페니실린의 정제와 치료법의 발견만으로도 많은 주목과 인기를 얻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노력한 과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면 누구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룩한 성과를 보며 만족하고 성공을 즐기는 일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플로리는 플레밍이 자신의 연구까지 뺏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을 위해 연구를 이어나갔다. 심지어 임상실험 과정에서는 페니실린을 투약한 사람이 죽는 상황까지 발생했지만 연구를 이어나갔다. 후에 페니실린의 투약이 문제가 아니라 투약한 페니실린의 양이 적어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과 타인을 위해 연구한다는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연구를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플로리에게 성공은 개인의 뛰어난 성취, 타인의 인정 혹은 인기가 아니었다. 항생제를 통해 구할 수 있는 수많은 생명이 플로리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플로리의 자세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