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96
7월24일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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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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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OFr0iO1v0Y (류성태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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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클리닉>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루카복음 11장 9~10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기도생활에 대해 한 번 성찰해보았습니다.
사실 기도란 것은 굉장히 포괄적이고 다양한 것인데 저 역시 기도에 대해서 너무 소극적이고 제한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때로 청원기도가 기도의 전부인양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조상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독대 위에 물 한 사발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싹싹 비는 것 같은 기도 말입니다.
이것 해주십시오, 저것 해주십시오, 우리 아들 잘 되게, 우리 딸 건강하게, 우리 며느리 장사 잘 되게, 만사형통하게, 가화만사성하게, 승승장구하게... 때로 우리가 바치는 많은 기도들이 하느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내용이 아닌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 클리닉’입니다. 지나치게 기복적인 기도는 가장 우선적으로 성찰해봐야 될 측면입니다. 물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녀다운 마음으로 이런 저런 필요한 것들을 부탁드리는 기도, 참으로 순수하고 또 필요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합니다. 어떤 분들이 바치는 청원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기도 아닌 기도도 많습니다. 어떤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강요요 협박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를 연결시키는 모든 행위입니다. 깊은 묵상에 잠기면서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킬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성체를 영하면서 하느님과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염경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깊은 침묵과 묵상기도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킬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을 잘 정화시키고,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 쪽으로 잘 방향 짓기만 한다면 소음 가득한 곳에서 일하면서도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 대하듯이 이웃들을 만난다면 그들과의 맺는 관계 전체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매순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숨을 내쉰다면 우리의 호흡조차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매 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엮어간다면 우리의 삶 전체를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자판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위험스런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때로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때로 한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사고방식, 논리,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마다 우리는 청하는 바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 작업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 기도의 질, 기도의 순수성이 진정 그분 마음에 드시는 것들인지 아닌지 성찰하고 식별해가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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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epq1PhCB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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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과 선물 구분법>
영화 ‘선생 김봉두’(2003)의 내용입니다. 김봉두 선생은 촌지를 밝히는 못된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을 차별합니다. 그러다 봉변을 당합니다. 이런 사실이 공공연하게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과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사정을 하여 아무도 가기 꺼리는 폐교 직전의 강원도 산골 학교에서 몇 년동안 지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 촌지를 받던 것과는 사뭇 다른 시골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다섯 아이의 부모가 차려주는 술자리도 고급 주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담배 살 곳도 없습니다. 그러다 어떤 할아버지에게 담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지만 양담배만 찾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다섯 아이 중 양소석이란 아이는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먹던 라면을 그 아이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에게 급식을 주게 됩니다. 이에 아이들은 자습만 시키는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김봉두 선생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봉투 하나씩을 주며 편지와 감사의 마음을 채워오라고 합니다. 부모님과 꼭 상의해서! 그런데 받은 봉투 안에 든 것은 아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과 더덕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김 선생은 산골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아이들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발견하여 아이들을 다 도시로 전학시키면 학교가 폐교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찾아 발전시켜 주는 선생님에게 감동합니다. 부모들도 감사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듣고 도시에서 부잣집 아이가 이사를 옵니다. 그 부모는 선생님에게 촌지를 줍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물들어버렸는지 그 촌지가 썩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자 김봉두 선생은 자신을 짜증 나게 하는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립니다. 서울에서 이사 온 아이가 시골 아이들을 깔보며 그들 탓을 하자 싸움이 붙습니다. 서울 아이의 엄마는 이게 알아서 해 주는 것이냐며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탓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유 없이 선생님에게 맞았음에도 선생님 편을 들어줍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봉투에 써 왔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봅니다. 순수하게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각성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 물들어갑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것들을 선생님에게 가져다 바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소석이는 자신이 일해서 번 3만 원을 선생님 집 문에 꽂아둡니다. 김봉두 선생은 소석이를 찾아가서 종아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안아줍니다. 자신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타락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폐교 결정이 내려집니다. 눈물의 졸업식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진정으로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안 받으려고 했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환에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도시에서 촌지를 주었던 부모나 학생들은 선생님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강원도 시골에서 있던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만이 선생님에게 조문을 옵니다. 김봉두 선생은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받는 선물에는 선물을 주는 이의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누구다”라는 말이 쓰여있는 것입니다. 촌지를 주는 사람들은 “당신은 쓰레기야. 돈을 줘야 내 자녀 잘 봐줄 거 아냐?”라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선물을 받으면 정말 쓰레기가 됩니다. 이런 선물을 ‘뇌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뇌물을 줄 수도 있고 뇌물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김봉두 선생처럼 타락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주기 위해 주는 선물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고 그저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란 믿음이 들어있고 이것을 받으면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재로 믿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 있는데 이것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심이고, 둘째 부분은 벗이 왔다고 빵 세 덩이를 잠자는 친구에게 귀찮게 청하는 내용이며, 세 번째 부분은 성령을 청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 부분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정받았습니다. 에덴동산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덜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교만해졌고, 더 육욕에 빠졌으며, 더 소유하려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 은총을 거저 주지 않으시고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밥을 안 주면 주인을 무는 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물리는 것이 두려워서 개에게 음식을 준다면 이는 그 개를 겸손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더 소유욕-식욕-지배욕에 빠지게 만듭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간절히 청하기 전까지는 주인이 주면 안 됩니다. 갑과 을이 바뀌면 개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성령의 선물을 청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러하셨듯이 청빈-정결-순명의 세 빵을 갖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이 세 개의 빵을 갖지 못하면 친구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꾸준히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을 청해 복음삼덕을 키워야 합니다.
기도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성령으로 삼구가 죽고 복음삼덕이 피어난 에덴동산과 같은 마음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러려면 내 동산을 망치는 세속-육신-마귀를 죽여야 하는 데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기도를 끈질기게 바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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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오늘의 주제는 기도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주님을 올바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기도도 잘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된 기도자는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 하느님 야훼와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도시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악을 편들어 변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도시에 있을 수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의 선으로 그 악을 상쇄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더는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 한 사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예레 5,1). 에제키엘 예언서에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단 한 명을 요구하고 있다.(에제 22,30) 만일에 아브라함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제시하였다고 해도 하느님은 허락하셨겠지만, 아브라함은 한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죄 없는 사람의 역할은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몇 가지 가르침을 한데 모아놓고 있다. 루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신 것을 보고 어떤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1절). 이렇게 하여 주님의 기도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부성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는 아빠라고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태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 즉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출 것을 가르쳐주신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권위주의와 엄격함으로 변모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아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다운 태도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해설해주고 계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자기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마태 18,3) 하는 의지를 간직해야 한다. 이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내용에 관해 가르쳐주신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 즉 매일의 양식, 죄에 대한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다. 이처럼 인간의 여러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으신다. 영적이면서 육적인 인간이 충만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기도가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도는 자기 소외와 같은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이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베풀어주시는 항상 새로운 은총과 힘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매일 실현해야 할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한다.
비록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실현하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데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며,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도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생활을 자유로운 마음과 자녀다운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변모시켜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이루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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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듣는 기도>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잘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잘 알아야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는 항상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잘 듣는 비결은 무엇인가? 내 말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멈추면 기도 자체를 할 수 없으니, 우선 내 말을 잠시 멈추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고, 묵상 중에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일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은 성경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2ㄴ-4)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바치는 기도’이지만, 내용을 보면, 사실은 ‘듣는 기도’입니다. 전반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부탁’이고, 그리고 후반부는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당부’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당부이기도 하고,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들을 요약해서 ‘주님의 기도’로 만들어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온 세상에 거룩히 드러나기를, 또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셨고, 그것을 우리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당신과 함께 일하자고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의 부탁을 들어 드리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이웃과 나누고, 서로 용서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일은, 구원받으려면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구원받으려면 그 일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내가 바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기도한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5ㄴ-8)
이 말씀은,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읽으면 끊임없이,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탁하는 사람과 부탁받는 사람을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빵을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그 처지를 바꿔서 우리를 부탁받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벗이 찾아와서 빵을 꾸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 벗이 바로 ‘주님’일 수도 있습니다. “한밤중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빵 세 개만 꾸어 달라고 부탁하신다면, 기꺼이 일어나서 그 부탁을 들어 드릴 수 있는가? 귀찮다고 거절하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그런 부탁을 하실 리가 없다.”라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나를 찾아온 ‘작은 이’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주시는 그것을 청해서 받아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도 사랑 실천을 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청하는 이에게 주어라.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어 주어라. 그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어라.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이미 너희에게 주셨으니.” 신앙인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주는 사람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께, 또 이웃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실천해서 행복을 얻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우리가 무슨 보상을 받기를 바라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도, 주님은 우리가 실천한 ‘아주 작은 선행’도 모두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기억하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은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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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창세기에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때가 되어 비가 40일 동안 내리고 물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면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몇 번을 청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있다면, 45명만 있다면, 30명만 있다면, 20명만 있다면, 10명만 있다면 심판을 하지 않도록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단 한명의 의로운 사람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지만 외면했습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이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배가 12척 있습니다.’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우리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이 있을지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IMF’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국가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문들 닫아야 했고, 실직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금모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2007년 태안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로 기름을 닦아 냈습니다. 20년이 넘어도 오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년 만에 청정한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위기는 파도처럼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본당이나, 시설에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사목적인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결실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통합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듯이, 무한 경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열정, 신념, 헌신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야기한대로, 열정적인 사목자가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교회에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실 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세상은 좀 더 환하고,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냉담하는 신자들은 다시금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활력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다시금 교회의 그늘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름이 지나면 입시철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에는 많은 분들이 치성과 정성과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청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입시철이 끝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볼일 다본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사찰과 교회 그리고 성당은 피서 끝난 바닷가처럼 썰렁함을 봅니다. 매달림과 청원의 기도가 있다면,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무엇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인가! 저는 아브라함 링컨의 다음 말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두 팀 모두 성호경을 그으며 게임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기도는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리라, 내가 하느님 편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때로 외롭고 힘든 골고타 언덕길이라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기쁨으로 따라나서는 것이 참다운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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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윤호 요셉 신부님]
<엄마 귀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우리는 언젠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100세 시대에 노인의 역할이 중요해 졌습니다. 고 2때 40대 초반의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보낸,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된 박경철 시골의사가 전해주는 체험담을 통해 조부모의 신앙과 역할이 얼마나 거룩한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어머니는 40대 초반에 위암에 걸렸습니다. 25년 전 3cm 단위로 촬영되는 CT로는 암의 전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주임과장은 배를 열어보고 전이가 되어 있으면 닫고, 아니면 수술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아버지 친척들과도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였습니다. 의사는 어린 자녀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어머니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어떡합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중1 여동생과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하느님,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데려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수술실 앞에서 여동생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네 시간 이상 걸린다는 수술이 한 시간만에 끝났습니다. 배를 열어 보니 가슴부터 배까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손을 쓸 수가 없는 의사는 바로 닫고 수술실을 나왔습니다. 의사는 급속도로 나빠질 것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고민하며 병실로 왔습니다.
초조하게 의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창밖에는 함박눈이 소복소복 위로 하듯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검정 교복을 입고 엄마 손 하나를, 셋이서 잡고 서 있었습니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손 하나를 둘이서 잡고 있는, 세 사람의 풍경을 보더니, 울컥하며 잠시 멈추었다가 어머니에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의사와 눈이 마주친 엄마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사인을 보냈습니다. 수술을 했더라면 중환자실에 있었을 텐데, 다시 병실로 왔으니 말입니다. 엄마는 암이 전이 되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엄마는 어린 우리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옆에 애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얘기하지 말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인을 보냈습니다.
엄마는 예상대로 급속하게 나빠져서 퇴원도 못하고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께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는 우리에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아빠가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이제 엄마도 천국에 가서 아빠와 함께 너희들을 위해 기도할거야. 아빠와 엄마가 신앙 안에서 잘 살았다는 것, 너희들이 잘 보았지. 우리 아들딸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잘 살아야 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성서를 보시고 묵주기도를 하시고 시간이 나는 대로 성당봉사를 하셨던 어머니, 온몸으로 퍼진 암 때문에 뼈만 남아 묵주알을 돌릴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없으실 때도 어머니는 묵주를 놓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가시는 날, 창밖에는 목련이 피어 있었어요. 우리는 평소처럼 묵주를 들고 있는, 뼈만 남은 엄마 손을 여동생과 둘이서 잡고, 셋이서 함께 있었어요. 담당의사와 간호사도 함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심전도가 두 세 차례 사인곡선을 그리다가 뚜뚜 하고 멈췄는데.... 엉엉 소리를 내서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겠다고 엄마와 손가락 걸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습니다. 여동생도 미세하게 손과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서 울 수 없는, 우리 둘은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손과 어깨를 파르르 떨며 울음을 삼키는데, 두 눈에서 봇물 터진 듯한 눈물이 두 볼로 흘러내려 상의를 흠뻑 적시고 있었습니다. 점점 식어가는, 묵주가 들린 엄마 손을 평소처럼 동생과 잡고, 셋이서 함께 그렇게 한 참을 서 있었습니다.......침묵
임종 직후. 아이들은 울부짖고, 간호사들이 떼어내고, 영안실 팀에서 와서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상황을 생각했던 담당의사는 울지 않고 엄마 손을 잡고, 셋이 함께 있는 광경을 보고 ‘아이들이 엄마의 임종을 아직 모르나 보다’하며 잠시 기다렸다고 합니다.
한참 후 의사가 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차가워진 엄마 손을 놓고 엄마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살을 갉아 먹는 암의 고통을 우리 둘을 위해 바친 어머니, 왼팔로 엄마 목을 끌어안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았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사랑을 다 준 엄마는 벼만 남아 아이처럼 가벼웠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멈추어도 귀는 마지막까지 살아있다는 생각이 났어요. 엄마 귀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뭐라고 인사했을까요...,
"엄마 사랑해요"
담당의사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처음 봤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라는 그 마지막 고백에는 이승을 떠나는 엄마에 대한 사별의 마음이고, 마지막 위로와 사랑이고, 남겨진 자의 각오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자식 둘을 남기고 떠나는 어머니와 그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고 3때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막둥이 5살 때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고,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대장암에 걸리신 8남매 홀어머니, 고3이었지만 밤마다 어머니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온몸으로 퍼진 암덩어리 통증이 밤마다 찾아왔지만 진통제 한 알 못 드셨습니다. 자식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머리맡에 두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끙끙 앓으신, 뼈만 남으신 어머니는 천국으로 가시면서도 중2인 막둥이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돈? 직위? 집과 땅? 그가 무엇을 했었던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졌던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사랑고백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 ‘손’이고 마지막 말이 ‘사랑해요.’라는 겁니다.
그 후로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의사는 안동에서 항문외과의사로 경상도 지역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간호사가 신부님이 오셨다고 했을 때, “거시기에서 피 흘리는 신부님이 또 오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의사가 문을 열고 나가니 얼굴이 환한 신부님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빛깔이 있습니다. 피부가 검거나 흰 것은 때깔입니다. 때깔은 돼지처럼 잘 먹고, 색조 화장품으로 치장하면 좋아집니다. 그러나 빛깔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말과 행동, 나눔과 사랑, 습관과 삶의 방식들이 얼굴에 쌓여서 우러나오는 빛깔입니다. 그 사람의 빛깔, 선한 아우라는 사실상 그 사람의 나눔과 사랑, 고난을 잘 이겨낸 그 사람의 연륜과 평화의 크기의 빛깔입니다, 나쁜 말과 행동, 나쁜 습관과 생활방식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저는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대답했습니다. 잠시 간단한 인사와 말을 주고받은 뒤, “그때 그 고등학생이 저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의사는 혹시나 잘못한 게 있나 뜨끔한 눈치였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왕래가 없었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찾아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희망이었고, 다시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사제가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었고 여동생은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었다는 그동안 삶의 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 사별은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봐, ‘남겨진 아이들이 혹시나 잘못 되면 어떡할까’하는, 엄마의 그 마음을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그 말씀이 저희 둘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큰 버팀목이 되는 중요한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신 “우리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느님 보시기에 잘 살아야 한다.”는 유언에는, 엄마가 염려하는 그 마음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의사는 ‘내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구나.’라는 생각보다,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의사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쁨과 향기를 삶 속에서 신앙 속에서 잘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무심코 던진 말,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말로 어떤 사람은 희망을, 어떤 사람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말의 파장이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그래서 애정과 사랑을 담은 유익한 말을 해야 합니다.
누가 그 두 아이들을 바르게 자라게 했을까요? 우리가 믿는 성인의 통공, 하늘에서 두 자녀를 위해 밤낮없이 빌어준 엄마와 아빠의 기도, 지상에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와 극진한 사랑, 가족처럼 보살핀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과 신자들의 보살핌이 두 오누이를 곱게 자라 사제가 되고 교사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다보면 뜻밖의 일이 발생합니다. 모두가 건강하게 살고 싶지만 병고가 찾아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죠. 뒤돌아보는 발걸음 대부분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저 역시 잠시 뒤돌아보는 은총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손자와 자녀에게 보여주듯이 사제는 신자들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일주일 동안 사제관에서 코로나 자가격리 중에 감사할 사람들과 일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무와 꽃들, 강과 산들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많은 분들. 지속가능한 지구별, 함께 사는 세상, 남북평화공존, 공평한 나라를 위해 투신으로 동행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얼마나 귀하신 분들이신지, 또한 저희 신자들이 얼마나 기도하고 관심과 사랑을 주시는지 더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일용할 양식은 먹는 것을 넘어 우리가 나누는 따뜻한 말과 작은 나눔까지 포함합니다. 우리의 양식은 농부가 땀과 정성을 나눈 것이고, 우리가 노력과 땀으로 그 양식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하다는 제 말에, 오히려 감사드려요. 신부님에게 예방주사보다 열 배나 강력한 천연항체가 생겼잖아요. 한 번 걸린 사람은 다시 잘 안 걸린 데요.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자가격리 중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옥수수, 소고기, 미역, 영양탕, 부산 누님이 보냈다는 장어탕까지 챙겨주시고, 해방되는 날 삼계탕, 염소탕 먹자고 전화를 하시고, 수박과 전을 쟁반에 챙겨오신 수녀님, 병원처방전을 받아 오시고, 약국에서는 비타민C와 D, 쌍화탕까지 챙겨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또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감사도 받아주시고 채워주세요. 아멘!”
점심 식사 중 시장에 갈 수 없는 어머니와 텃밭 꽈리고추 볶아 먹을 중간 멸치가 없다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 후 군산에서 한 아버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생선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택배상자를 열어보니, 수녀원에 나눈 맛있는 박대, 고등어와 조기, 어머니가 좋아하는 갑오징어에 중간멸치가 들어있었습니다. “중간 멸치가 없다는 말을 언제 들으셨어요, 하느님은 참 귀도 밝으셔요.”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영의 양식인 사랑의 말과 육의 양식인 물질의 나눔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도록 사랑과 나눔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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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신학생 시절, 성체 조배를 할 때 자주 분심이 들었던 저는 주위의 동료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해 부러움과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참으로 부끄러워했어야 하는 점은, 그 당시 누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 내용과 함께 그 자세까지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부르실 때 사용한 이 호칭은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이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라 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라고 말씀하시며 성모님을 어머니로 소개하신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께서 하느님과 맺고 있는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초대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누는 친밀함은 기도의 핵심이며 목표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 하나만으로 ‘다른 민족 사람들의 빈말’(마태 6,7 참조)이 필요 없습니다.
아울러 ‘아버지’라는 호칭은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자녀라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서로서로 형제로 대하는 것이 ‘아버지’라는 호칭의 진정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기도가 더 단순해지고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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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님]
<사명 그리고 기도와 청원>
오늘은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노인들이 고립된 채 홈로 외로이 고통을 쥐는 일이 없도록 교회 공동체가 곁에서 노인들을 돌볼 수 있기를 바라며 작년(2021년)에 이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어울려 노인들이 이날을 봉해 주님께 받은 사명을 교회와 사회 안에서 펼쳐 나아가는 이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교황님은 노인들이 "하느님의 신실한 사랑의 특별한 증인이자 복음화 사업의 핵심 인물들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조부모들은 "신앙 안에서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데 꼭 필요한 연결고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인들은 세월을 견뎌낸 이들이며.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마음속에 간직해 온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손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격려할 수 있으며 그것이 노인들, 특히 조부모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그 사명을 일깨우시고자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예수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일(7월 26일)에 가까운 주일에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씀에는 손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데, 이는 삶의 누룩으로 자신의 신앙을 빚어온 그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손자녀 세대에게 전달된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도 당신의 할머니 로사가 사제 서품식 날 적어 주신 말씀을 통해 이를 경험하셨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항상 성무일도서 안에 끼워 넣고 다니시면서 자주 읽고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월의 지혜》 참고)
교황님의 말씀과 교황님의 할머니 로사를 통해 생각해봅니다. 무엇이 노인과 조부모를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증인과 손자녀들을 위한 신앙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오기를. 육신을 위한 음식과 더불어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말씀과 성체를 베풀어 주시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단죄와 복수 대신에 삶으로 이끄는 용서를 구하고 받을 수 있기를. 참 생명이신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에서 건져 줄 것을 온 마음으로 드린 주님의 기도(루가 11,2-4)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바친 '주님의 기도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좋은 것. 즉 '성령을 받고자 청하고, 얻고자 찾으며. 열리도록 문을 두드리며(루가 11,9-13) 바친 끊임없는 청원입니다.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아 우리 자신도 개인의 성화와 신앙의 성숙을 이루며 손자녀들에게 신앙을 전달해주는 거룩하고 소중한 사명을 수행해 나같 수 있는 노인과 조부모가 될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말씀에 따라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성령을 청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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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천정철 세례자요한 신부님]
<아빠, 기도의 영혼>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부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기도 안에 예수님의 존재 전체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빠' 체험)
그런데 예수님의 존재 전체는 아버지와 맺는 관계를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관계의 핵심은 예수님의 '아빠' 체험입니다. 바로 그것 이 예수님의 지혜와 근원적 자유의 원천입니다. 이것 말고는 예수님이 왜 그처럼 가르치고 살고 돌아가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빠'라는 그 한 마디 안에 예수님의 무한한 신뢰, 사랑, 찬양, 봉헌, 순종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의 하느님 호칭 '아빠‘를 평생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장구한 유대교 역사상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고, 그 영향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하느님을 '아빠' 하고 부를 수 있었음을 밝혔습니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혁명, 기도의 혁명입니다.
(하느님의 '아이'인 우리)
예수님은 '아빠'이신 하느님 앞에서 '아이'라는 의식을 지니셨습니다. 그러기에 늘 어린이 영성을 강조하십니다.(마르 10.13-16)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회의를 열어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을 충만케 하신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 8.15).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그렇게 성령 안에서 한없이 깊은 친밀한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영혼 이자 원형,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이입니다.
(하느님 아이'의 청원)
이제 우리는 무한한 신뢰로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일용할 양식을 용서를, 악에서 구하시길 청원합니다. 이때에 주님의 기도'는 영혼이 살아있는 참된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의 혀 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너무나 귀한 사랑받는 아이라는 것을. 하느님은 우리의 '아빠'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분의 품에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가는 하느님 아이의 기쁨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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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최의정 바오로 신부님]
<기도하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길을 찾으려고 지도를 들여다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위치한 곳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으며, 누구인가?"와 같은 자기 인식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삶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라 불리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어서 기도를 드리는 자세로써 항구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이 누리는 내밀한 관계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며, 저는 우리가 기도의 방법·비법을 배우기보다 왜 우리가 기도하는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하느님께 졸라대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애걸하는 의존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기대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라' 하심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지속해서 머무르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서나 활용하기 쉬운 기도의 매뉴얼 하나를 제시하셨다기보다 우리가 누구이고 왜 여기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인지, 기도로써 하느님과 내밀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합시다. 기도는 그 끈을 잡아주는 버팀목입니다. 순간순간 하느님 아버지라고 불러 봅시다. 자리 잡고 앉아 시간과 공을 들여서 한다기보다는 어디서든 언제든 그냥 '아버지'라고 불러 봅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해 봅시다. 감히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시도록 합시다.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보상을 떠올리도록, 그리하여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우리 또한 그분의 다스림 안에 머물 수 있기를 청합시다. 사랑의 내밀한 관계를 돈독히 하고, 그 관계 안에서 성장·발전하는 영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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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하느님 세상 속으로
[수원교구 유재훈 솔로몬 신부님]
<’기도하는 것‘을 넘어, ’아빠, 아버지‘를 알려주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죠. 그 기도 는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특히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기도와 미사 전례 안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정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기도에 임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길 정했던 제자들에게 그 방법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그분과의 관계까지 다음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듯합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정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방법'을 넘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아빠,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깨달아 알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볼 수 있듯이,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싶었던 어떤 제자의 단순한 정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까지 인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깊은 사랑의 마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우리가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또한 묵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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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김용덕 야고보 신부님]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오늘 복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묻 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 히 기도는 나의 소원을 말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기도는 흐름을 바 꾸기 위한 시도이다. 나 를 내려놓고 선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진인사대천명이 기도의 자세이다. 기도는 깨어 있으려는 방법이자 수단이다. 항상 우리는 잠들어 살고 취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과의 끈이 끊겨있다는 말이다. 기도는 다 내려놓고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 내려놓았을 때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웃음이다. 웃음은 비운 만큼 나온다.
두 아이의 엄마로 36세에 이혼녀가 된 노사카란 일본 여성의 책에 웃음은 빙산도 녹인다."라는 내용이 있다. 매일같이 힘들다. 괴롭다. 싫다는 말을 달고 살던 그녀가 세일즈맨으로 나선 뒤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아주 재밌다.
삶은 긴장의 연속이다. 어느 누가 해를 끼칠지도 모르고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그 원인이다. 이런 긴장은 성공하기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웃음은 성공했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그러므로 긴장의 반대가 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 노사카 여사도 성공한 사람들의 표정인 웃음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 그 성과를 본 것이다.
어떤 이유로 감사하거나 웃는다면 이는 참되다고 할 수 없다. 일어나는 모든 사신을 감사하며 언제든지 옷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야말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결국, 감사와 웃음이란 "성령이 주인이 되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있을 때" 비롯된다. 웃음은 삶의 활력소이자 제대로 살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웃음이란 머리를 굴리고 사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심각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나는 웃음을 잃고 살거나 잊고 사는 사람이 제일 안쓰럽다.
오늘 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흥정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그만큼 지복의 삶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밖에서 모든 것을 추구하고 노예적인 만족을 사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묻는다.
일흔이 넘도록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맑은 눈과 잔잔한 미소로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한 할머니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고 여쭈니,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버지 오늘도 당신 뜻대로 하 소서!' 하고요.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는 아버지 오늘 제가 아버지 마음에 들었나요? 내일은 더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아멘!' 하고 자는 것이 전부요."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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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엄기영 안드레아 신부님]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찬미 예수님. 한국 교회는 7월 넷째 주인인 오늘을 2021년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냅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마음에 되새기며, 공동체 안에서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고 그분들의 신앙의 지혜를 전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기도 생활에 있어 우리가 칭해야 할 기도의 내용과 기도할 때 마음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내용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내용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기도 내용을 스스로 성찰해 봅니다. 정말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으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담은 기도라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면, 청하여도 얻지 못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채우려는 이기심으로 기도하며, 우리를 봉하여 이루시는 주님의 뜻은 관심이 없거나 외면할 때가 많은 우리입니다.
"너희가 약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칭하는 이들에게 성명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는 말씀처럼, 참된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인내심을 갖고 항구하게 기도해야 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데살 5,17)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립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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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말씀의 향기
[원주교구 최재도 바오로 신부님]
<”들으시는 하느님“>
오늘 1독서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협상을 합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마흔다섯.. 마흔.. 서른.. 스무 명.. 열 명"(창세 18장 참조)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청합니다. 하느님이 화내시진 않을까 오히려 제가 걱정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끝까지 인내로 그 청을 들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이 모습은 모세의 호소를 연상케 합니다.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은 진노하시어 그들을 쓸어버리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느님께 간절히 애원하여 재앙을 거두게 합니다.(탈출 32.7-14 참조) 사람들의 청을 진지하게 듣고, 마음을 돌리시는 분 그분이 우리 주 하느님이심을 독서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청할 것을 알려줍니다. 기도하는 것을 알려달라는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할 것과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예수님이 알려주고자 하신 참 하느님. 그 하느님은 명령하는 주인이 아닌, 우리 곁에 쪼그리고 앉아 들으시며 우리의 부탁에 머리를 끄덕여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청원을 다 들어주실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루카 11.11) 자녀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청을 헤아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수한 청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 말씀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다시 가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을 위한 청원을 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이 안타까워 두렵지만, 하느님께 애써 청원했던 것입니다. 복음 말씀의 빵을 얻으러 온 친구도 자신이 빵을 먹기 위해서가 아닌,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려는 순수한 의도로 친구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청원이 이루어질 때 주님께서는 기쁘게, 기꺼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즐겨 들으실 청원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라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저 순수한 영혼, 성령을 내 안에 부어달라는 청원 그것으로 우리의 청원은 충분할 것입니다. 유경환 시인의 '호수'라는 시는 하느님께 맑은 영혼을 청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맑은 영혼, 성령을 청할 수 있는 맑은 한 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호수>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유리가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이다
오 주님
내 영혼 맑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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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제주⟫말씀
[제원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용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용서에 관한 공통된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독서 마지막에 보면, 아브라함이 주께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 소돔 성읍에서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두 번째 독서인 콜로새서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2.13-14)
소돔 성읍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였다. 반면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 원을 얻었다(로마서 5.17).
오늘 복음 루카복음 11장을 보면, 어떤 제자 하나가 예수님에게 청하기를,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준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인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복음의 중반부에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 서."(3-4절)
연중 17주일 전례를 지내는 오늘은, 작년에 처음으로 제정된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경축하는 날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담화문을 통해 “주님께서 '장수를 누리게 해 주신 모든 이와 더불어 경축하고자 하는 이 특별한 날, 교회의 바람대로 서로가 기쁘게 이날을 경축할 것을 요청하신다. 그리고 독거노인과 요양원의 어르신 같은 외로운 이들을 찾는 자비의 활동도 권고한다.
용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페신'은 그냥 가도록 풀어준다는 뜻과 누군가의 죄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는 행위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 비추어 소돔 성읍을 보았을 때 용서할 줄 아는 의인 열 명이 없었다는 뜻이었음을 성찰해볼 수 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은 의로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 모두에게 흘러넘쳤다고 선포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서로 용서하며 지내는 생활을 말한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공경하는 날로, 어른들과 노인들은 용서를 베푸는 날로 오늘 하루를 경축하며 건강하고 행복한 가톨릭 교회 공동체, 의로움과 자비로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을 이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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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정부주보⟫ 말씀의 향기
[의정부교구 임용훈 디모테오 신부님]
<진실한 것 청하기>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이가 기도를 통해서 갈증을 해소할 오아시스를 찾습니다. 그런데 정작 갈증은 풀리지 않고, 사막을 헤매게 될 때가 있지요. 그렇더라도 하느님과 함께하며 걸어갔던 그 기도의 과정은 인생의 더욱 값진 무엇으로 남습니다.
널리 알려진 기도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겸허하게 순명하는 것을 배우도록 나를 약하게 만드셨다. (・・・)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바랐던 모든 것을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나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풍성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 기도문은 남북전쟁 당시 이름 모를 군인이 작성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청한 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느님께서는 모든 청원을 다 들어주셨다는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악한 사람이라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느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을 주신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응답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꾸준하게 열심히 청하지만 그 결과가 간절한 바람과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종종 체험하면서 우리는 주님께 청하기를 일찍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일을 마련해 주시려고 잠시 유예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군인의 기도문처럼 사실 우리가 청한 것을 이미 다른 방법으로 다 이루어주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가장 뛰어난 부(요, 바른 행실이 평안(平安)을 가져온다. 진실(眞實)이 맛 가운데 가장 좋은 맛이요, 진실을 말하면 칭송을 얻고, 기꺼이 보시(布施)하면 친구가 떠나지 않느니라."(윤청광, 「불교를 알면 평생이 즐겁다」 中)
가장 좋은 맛이 '진실'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진실함이 아닐까요? 삶은 대박이 아니라 조금씩 적립되는 마일리지 같아서 진실한 것을 청하고 찾고 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엄청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훗날 정말로 소중하고 진실한 것을 얻게 된 후,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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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2022. 07. 24 연중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기도>
지금 여기
땅에서
하늘의 아버지를
향하여
아들 딸 함께
몸과 마음 모아
작은 벗들을 위해
정성껏 살아내는
믿음 희망 사랑 담긴
살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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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농담조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것 같습니다. 몇 달 전에 장염으로 고생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를 못하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5kg 이상이 빠졌습니다.
기본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본보다 특별한 것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기본은 당연히 주시는 것이고, 사랑한다면 특별한 것을 주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순간인데도 이 기본에 감사함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도 우리는 특별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먼저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랑의 길을 따르는 그 기본에 충실할 때, 주님 뜻과 함께 하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도 항구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한밤중에 잠자는 친구 집에 빵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십니다. 이것이 기본이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흔히 밤에 여행합니다. 도보로 여행하는데, 더운 낮에는 뜨거운 태양에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행하는 친구가 찾아든 시각은 늦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보통 해 뜨기 전에 그날 먹을 빵을 굽기에 한밤중에는 빵이 떨어지기 일쑤였지요.
그래서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마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리거나, 돌멩이를 집어서 문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집주인을 불렀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깨기에 충분합니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정과 귀찮음의 갈등이 보입니다. 웬만한 우정이 아니면 귀찮음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졸라대는 귀찮음에 화를 내지 않고 우정을 발동하여 필요한 것을 줍니다. 이처럼 끝까지 청하고, 끝까지 찾고, 끝까지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청하기 전에 미리 주시는 사랑이지만, 우리의 간절함이 더 빨리 하느님의 사랑을 이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한 것일까요?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행하고 있었을까요? 간절한 기도를 통한 기본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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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덕목은 기도일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신앙생활에서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될 좋은 몫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가장 좋은 몫은 활동이나 빵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청원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기도의 내용 ‘What’과 둘째 기도의 자세 ‘How’에 관한 것입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기도할 것인가? 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대한 답안으로는 ‘끈질기게’ ‘줄곧’기도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무엇을 What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주님께서 하신 주님의 기도를 자주 묵상하고 바쳐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후딱 해치우는 단순한 염경기도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같은 주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는 총 7개의 청원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전반부 세 개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 청원이고 후반부 4개는 우리를 위한 청원입니다. 완벽한 청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아버지의 이름·아버지의 나라·아버지의 뜻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나의 나라·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나라·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혹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면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줄곧 졸라 대면..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항구하게 청하고, 끈질기게 기도하고 ‘줄곧’ 졸라대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끈질긴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죄와 악에 기울어져 있던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기가 막힐 정도로 끈질기게 ‘줄곧’ 청합니다. 거의 거머리 수준입니다. 우리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먼저 의인의 숫자를 50명에서 출발합니다. 그 다음 의인의 숫자가 45명이라도 괜찮습니까? 계속 에누리 쳐서 5명씩 그리고 10명씩 줄여가더니 마지막으로 의인이 10명이라도 되면 되겠습니까? 하고 청합니다. 아브라함은‘감히 아룁니다’‘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줄곧 졸라 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청했다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반(半)만이라도 들어주십시오.’라고 청해봐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밑져봐야 본전입니다. 그분께 딱 붙어서 뻔뻔스러울 정도로 꾸준하게 청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왜 하느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했는데 자신이 평생 먹고 살 양식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까지 자자손손 먹고 살 양식을 청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 즉 탐욕입니다. 하느님은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램프가 아닙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우리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이유는 인간의 간청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청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의 면으로 보면 한낱 철부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바라는 대로 들어 주시면 우리 삶이 더욱 큰 불행과 죄악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가 좋지 않는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할 수 있지만 줄 수 없습니다. 뱀을 달라고 하고 전갈을 달라고 청하는데 그것을 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셋째, 왜 우리의 기도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하느님께서 유한한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수 천 혹은 수만 겁의 또 다른 섭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수 억겁의 인연과 구원경륜 속에서 항상 ‘순수현실(Actus Purus)이시고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아시기에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자주 삼각형이면서 동그라미인 것을 청합니다. 이것은 허구이고 모순이기에 하느님이 줘도 인간이 가지지 못합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와 죄의 물듦으로 청원 자체가 모순인 것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권능으로 동그라미이면서 삼각형을 만들어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한계로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싶을 때에도 끈질기게 ‘줄곧’ 기도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기도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기도하게 됩니다. 또한 기도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젠가는 기도를 할 줄 아는 능력도 상실하게 됩니다. 밥 먹듯이 기도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Ora et Iabora), 기도하고 밥 먹도록 합시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우리 모두 나름대로 기도제목이 많을 터인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아브라함을 본받아 항구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바치고,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기계적으로 줄줄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주님과 함께’ 정성을 다해 바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 7가지 청원 중에 특별히 ‘일용할 양식’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내리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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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넓고 깊고 높은 사랑입니다. 때로는 품으시고 때로는 침묵하시며 기다리시고 마침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양보하는 힘, 견줄바 없는 특권, 하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세상의 기둥이고, 지혜의 창고이며 영혼의 힘입니다. 낙심의 치료제이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로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프린치스코교황). 매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지금까지 기도를 안 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회당의 집회와 가정의 부모로부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유다의 아이들치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의 율법교사들은 기도에 대하여 매우 자상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서 어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까요?
자기들이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법이 분명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전인격적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수없이 외우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하고 기도하는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 그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뼈대가 되시고 거기에다 살을 붙이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은 물론 구체적인 삶의 행동은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청해야 하고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고 청하되 거기에 걸맞은 삶의 태도는 우리의 몫이란 말입니다.
사실 “기도의 목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기도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 기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웁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를 자꾸 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도 한밤중에 기도하시고 때로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그리고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이 활동하시면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건방진 삶을 사는 것인지요?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합니다. 대화는 일방적이 통보가 아니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문을 외우는데 급급해 하고 자기의 바람을 청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이 앞서고 떼를 쓰며, 침묵하시는 주님께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거지처럼 달라고만 하고, 때로는 흥정하고 심지어 협박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요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청하지도 않고 받길 원하고, 찾지도 않고 얻길 기대하며 두드리지도 않으면서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청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1-4). 사실 이럴 때는 구한대로 응답 되지 않는 것이 더 고마운 응답입니다.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이미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1요한 5,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하면서 갈구해야합니다. 벗을 찾아가 귀찮게 해서라도 빵을 얻어내듯 우리도 참고 기다리며 매달려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아브라함이 간절한 청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지녔지만, 우리에게는 한없이 약하십니다.
어떤 아가씨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제발 신랑감을 보내주세요! 제가 혼기가 꽉 찼습니다. 제발!” 그러나 도대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하느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사정을 얘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 아가씨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을 보내야 된다고 안달을 하십니다. 제발 사윗감을 보내주세요!” 과연 우리는 어떤 유형으로 기도하는지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숨결,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항구하게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혹시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숨은 한꺼번에 쉬고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꾸준히 고르게 쉬어야 합니다. 기도는 일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루의 좋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자투리 시간을 내놓지 말고, 시간 뿐 아니라 공간도 내 놓으십시오. 나를 위한 공간 꾸미기에 급급해하지 말고 기도할 장소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이 앞에서 결코 등을 돌리시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십시오. 옛 말에도 “울어야 젖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아가며 다리를 뻗어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편과 결과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보시기에 청하는 대로 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급해하며 답답해하여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못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8,26)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영적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믿으십시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늦춰질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기도를 ‘심장과 심장의 만남’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이야기하고 저는 그분께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심장의 고요함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심장이 충만해진 채 우리가 말하고 그분은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순결한 심장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을 정화합니다. 그리고 순결한 심장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게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제 뜻을 접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폰스)
우리가 많은 경우 우리의 바람을 청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원의를 먼저 알고 계십니다.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청원에 대한 응답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 하느님께서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다고 생각될 때에도 여전히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14,28) 그러므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종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귀한 선물로 만족하게 하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더하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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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택시기사와 신부님이 같은 시간에 죽게 되어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천국으로 가고 신부님은 연옥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아니! 하느님의 일을 해도 내가 더 많이 하였는데 너무하네요!”하고 투덜댔습니다.
그러자 그 옆의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저 총알택시 기사는 손님들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게 만들었고, 당신의 강론을 듣는 신자들은 다 졸고 있었는데 누가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아야 하겠느냐?” “인생이 짧든, 길든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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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삶>
-사랑, 항구한 기도, 주님의 기도-
참 빠르게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벌써 7월도 막바지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이자 제2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관심과 배려가 주효했던 기념일입니다. 교황님은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리라”(시편92,15)는 주제로 아름답고 깊은 담화문을 발표하셨고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조부모와 노인은 이 세상에서 ‘온유의 혁명’을 이루는 장인匠人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노년은 항해를 포기하고 돛을 접어야 하는 때가 아니라, 여전히 열매를 맺는 시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닌 가장 소중한 도구이며 가장 어울리는 일인 기도를 더욱더 언제나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배워 이 혁명을 이뤄가자. 그리하여 기도의 시인이 되고, 고유의 말을 찾아 나가는데 맛들이고, 하느님 말씀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잘 받아들이자.”
누구나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년에 죽음입니다. 어떻게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과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온유의 혁명을 이루는 것, 기도의 시인이 되는 것은 바로 기도의 은총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입니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의 꼴을 형성해 주는 것이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이뤄주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제가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바로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반드시 우선순위가 지켜져야 합니다. 바로 첫째인 하느님 믿음이요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진정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의 궁극 목표인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얼굴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닮았나 우리 얼굴을 검사하실 것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인지요.
그러니 말 그대로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기도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졸업이 없는 사랑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기도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봉헌회 형제자매님들의 신원이요 정체성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이자 봉헌회 회보, 첫표지의 글자입니다. 마침 2022년 7월, 220번째 회보를 읽어봤습니다. 알찬 내용, 꽃같이 환한 얼굴들로 가득한 사진들이 참 아름답고 풍요로웠습니다. 1면 ‘여름휴가’라는 서경윤 알베르트 신부님의 컬럼 마지막 말마디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매일 열심히 성무일도를 바치는 봉헌회원 여러분, 존경합니다.” 저는 이에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말 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참 좋은 기도와 삶을 위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참으로 기도만이 인간의 고질병인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궁극의 답이기도 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와 더불어 순수와 열정도 샘솟습니다. 참으로 기도를 잘해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시며 도반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대가, 기도의 대가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세례의 은총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닮아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삶을 살 수 있고, 저절로 사랑 안에서 기도와 삶은 하나가 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항구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만이 성덕의 잣대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 하나인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참으로 권위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기도와 믿음, 삶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백절불굴, 칠전팔기 영적탄력 좋은 파스카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입니다. 흡사 하느님과의 줄다리기 싸움처럼 참 집요한 아브라함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참 깊고도 깊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느님의 벗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려 여섯 번의 반복된 물음에서 불쌍한 중생들을 살리려는 아브라함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말그대로 감동입니다. 의인 50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옵니다. 마지막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열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아브라함이 바로 의인입니다. 이번 피정에 참여한 50명 봉헌회원님들이 바로 의인들입니다. 가라지밭같은 현실에서도 세상이 존속하는 것은 세상 곳곳에 의인들이, 성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서 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무엇이 필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달아 압니다. 바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 선물 하나 받으면 필요한 선물들이 줄줄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는지요.
셋째,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전 성경의 요약이자 예수님 삶의 요약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당신의 노하우 기도방법을 전수하십니다. 예수님의 단순소박한 본질적 깊이의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보다 두 청원이 빠졌지만 충분합니다. 아버지라는 정다운 호칭으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1.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2.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5.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는 일방적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무책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 숙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을 단순소박하고 투명하게 해줍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관상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의 선물에 응답하여,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을 위해,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또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자 훈련이고, 특히 기도도 선택이자 영적훈련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를 선택하여 훈련하듯 끊임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사랑의 기도가 우리를 주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의 삶으로 이끌어 주어 나날이 주님을 닮게 합니다. 기도의 시인으로, 온유의 혁명을 이루며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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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무엇을 청할 것인가?>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9-10.13)
오늘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맞이하는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지금까지 땀 흘리신 그들의 노고와 수고를 기억하는 날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인 자녀와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에 충실할 것과 그런 소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날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요즘 세상에 어르신들의 역할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들은 자녀와 손주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나누어 주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까?'
오늘 제1독서(창세18,20-32)는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비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소돔 땅에서 의인 오십 명이 아니라, 의인 열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소돔은 멸망했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아니 의인 한 명이 없어서 멸망한 것입니다.
의인을 보내 달라고 주님께 청합시다! 내가 의인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충실하게 믿는 의인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그래서 너와 세상을 함께 구원하는 의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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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JmmBagyG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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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주님 앞에
내놓기
한참 부끄러운
우리들
기도의 삶이다.
기도는
거짓없이
노력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들 삶을
지켜주는
기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을
만난다.
만남은
닮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는
기도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의미가 된다.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바라보고 만나는
살아있는
기도이다.
기도는 삶의
중심이다.
기도는
믿는 것을
실천하고
바라는 것을
먼저 베푸는
삶의 겸손이다.
기도는
마음의 성화이며
생활의 승화이다.
주님께서는
삶과 함께
기도를 주셨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도
노력하시듯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우리또한
기도로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사람과 기도는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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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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