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후예였던 이정기가 산둥지역을 중심으로 제나라를 건국하신건 아실겁니다. TV -한국사전-에서도언급되었습니다. 나중에 이사도이후에 멸망하면서 당이 이들에 대해서 고구려 풍속에 물들었다고 해서 모두 척살할정도였다고 기록한바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당시 산둥지역에 한족에 동화는 되었지만 그래도 동이족인 지역인들과 산둥으로 강제이주된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고구려과 고조선의 풍습과 문화에 익숙해있던건 아닌가요? 그래서 이정기때부터 세워진 제나라의 토벌구실이 바로고구려 풍습에 물들었다라는건 이를 뒷받침 해주잖습니까? 너무 기록하나만 갖고 말하는건 좀 뭐하지만.. 고조선때만해도 산둥으로 조선인들이 넘어간바 있고 고당전쟁이후 고구려인들이 대거 강제이주되기도 해서 한번 질문해 봅니다.
산둥지역에 대한 그때까지의 연계는 그래도 있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지금 질문하는건 만주지역의 동이족과 산둥지역의 동이족에 대한 연계성도 의미를 내포하는 질문입니다^^;;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첫댓글 분명히 주지해야 할것은 이정기의 경우 당시 당나라 역사상 번진 절도사들의 독립적 군웅할거시대라는 특성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지 결코 고구려부활이라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군웅할거한 변방의 절도사들이 이민족출신이 대다수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당정부에 저항성이 있을만한 정신적 정서는 존재할수 있다고 봅니다.
당을 무너트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번진의 주체가 고구려유민이었고 당시 제나라는 고구려유민출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고구려풍습이 널리퍼졌다는것에 친밀감과 후련함을 느낄수 있겠지만 이정기의 제를 우리역사의 범주에서 볼수는 없겠죠
제일 중요한 건 이정기가 그 스스로 '고구려 부흥'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정기의 평로치청은 단순히 고구려 유민출신이 이 정도의 세력가가 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 역사에 범주에 넣을 수 없습니다. 이정기의 평로치청을 우리 역사로 이해한다고 하자면 LA에서 한국 사람이 시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 순간 LA의 역사가 한국 역사가 되는 걸까요?
그리고 산동지역이 이(夷)와 동북지방의 이(夷)가 서로 연관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산동지역에 고조선과 고구려인들이 다수 들어왔다고 해도 그것이 산동지역의 이(夷)와 동북지방의 이(夷)가 서로 관련있다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夷)라는 개념이 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단순하게 동북과 산동에 사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춘추전국시대의 진(晉), 초(楚), 오(吳)나라도 한 때 이적(夷狄)이라고 낙인찍힌 적이 있습니다. 이적(夷狄)이라는 집단은 어디 지역에 살고 있는 집단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춘추전국시대때 만이(蠻夷)나 융적(戎狄) 같은 경우 한눈에 볼 때는 종족적 의미인 것 같지만 사실은 종족적 의미도 아니고 단순히 공통적으로 용인된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비난하고자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夏: 중원)와 비교되는 이질성이라는 일반적 개념인 것입니다. 한 국가나 백성을 비도덕적이거나 덕성이 결여되었거나 심지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때 역시 만이나 융적으로 불렸습니다. 전국책을 보면 진나라 문화를 이질적으로 여겨 '융적'이라 말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