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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자유롭게 글쓰기 이정기와 제나라에 대해서..
밀리터리 나그네 추천 0 조회 214 07.08.23 01:59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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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23 10:10

    첫댓글 분명히 주지해야 할것은 이정기의 경우 당시 당나라 역사상 번진 절도사들의 독립적 군웅할거시대라는 특성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지 결코 고구려부활이라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 07.08.23 10:11

    다만 그렇게 군웅할거한 변방의 절도사들이 이민족출신이 대다수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당정부에 저항성이 있을만한 정신적 정서는 존재할수 있다고 봅니다.

  • 07.08.23 10:16

    당을 무너트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번진의 주체가 고구려유민이었고 당시 제나라는 고구려유민출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고구려풍습이 널리퍼졌다는것에 친밀감과 후련함을 느낄수 있겠지만 이정기의 제를 우리역사의 범주에서 볼수는 없겠죠

  • 07.08.23 17:16

    제일 중요한 건 이정기가 그 스스로 '고구려 부흥'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정기의 평로치청은 단순히 고구려 유민출신이 이 정도의 세력가가 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 역사에 범주에 넣을 수 없습니다. 이정기의 평로치청을 우리 역사로 이해한다고 하자면 LA에서 한국 사람이 시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 순간 LA의 역사가 한국 역사가 되는 걸까요?

  • 07.08.23 11:20

    그리고 산동지역이 이(夷)와 동북지방의 이(夷)가 서로 연관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산동지역에 고조선과 고구려인들이 다수 들어왔다고 해도 그것이 산동지역의 이(夷)와 동북지방의 이(夷)가 서로 관련있다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夷)라는 개념이 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단순하게 동북과 산동에 사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춘추전국시대의 진(晉), 초(楚), 오(吳)나라도 한 때 이적(夷狄)이라고 낙인찍힌 적이 있습니다. 이적(夷狄)이라는 집단은 어디 지역에 살고 있는 집단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07.08.23 14:54

    춘추전국시대때 만이(蠻夷)나 융적(戎狄) 같은 경우 한눈에 볼 때는 종족적 의미인 것 같지만 사실은 종족적 의미도 아니고 단순히 공통적으로 용인된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비난하고자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夏: 중원)와 비교되는 이질성이라는 일반적 개념인 것입니다. 한 국가나 백성을 비도덕적이거나 덕성이 결여되었거나 심지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때 역시 만이나 융적으로 불렸습니다. 전국책을 보면 진나라 문화를 이질적으로 여겨 '융적'이라 말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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