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을 걸어주면 좋겠네>
(1)
어제 월요일에는 우체국을 다녀왔다. 큰아들 이름의 통장을 아내가 아르바이트 비용 입출금 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적을 공간이 다 차서 재발급을 나에게 의뢰한 것이다. 지난주에 갔다가 아들의 신분증이 없어서 거절되는 바람에 이번이 두 번째다.
작은아들 명의의 사무실 운영 통장은 아들 신분증 없이 내가 여러 번 갱신했었는데, 창구 직원이 새로 온 사람이라서 그런지 하여튼 이번은 두 개의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게 되었다. 구 통장은 마그네틱테이프의 고장으로 서명도 한 번 더 요구받았다. 은행에서 겪는 일은 때로 귀찮고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정확성과 신뢰성 차원에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햇빛이 강하고 기온도 높은 편이어서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사이의 그늘을 통과하여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누가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었다. 약간 놀라서 오른쪽으로 돌아보는데,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누군가 느닷없이 묻는 것이 아닌가. 키가 나보다 작아서 조금 내려다보였다. 순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미 근접하여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했다. 나이는 육십 대 정도, 눈이 약간 충혈된 것으로 보아 낮술을 한잔 걸친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평소의 나와 달리, 찰나의 경계심과 방어 심을 가지고 역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시죠?”
“뒤에서 뵈니, 하도 짱짱하고 건강하신 것 같아서요!”
순간 나는 약간 긴장이 풀어져서 속으로 ‘아, 그랬었구나.’하고는 대답했다.
“그래요? 일흔셋인데요. 댁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아이고, 한참 아래입니다! 제게 형님뻘이십니다. 한 십 년?”
“그래요?!”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건강하십시요!”
하고는 떨어져 갔는데, 오면서 금방 뒤돌아보니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가 왜 그런 감탄 섞인 질문을 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보니 걸음걸이는 연로한 노인으로 느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젊어 보인다는 뜻인가, 아니면 복장과 걸음걸이가 팔팔하게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늙어 보인다는 것인가.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분명히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느낌으로 하는 말이었으니까. 그때의 내 옷차림은 등산용 반 팔 티셔츠에 청색 반바지, 공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화는 아들의 것을 신어서 비교적 ‘젊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친구들이나 아내로부터 완전히 노인 걸음이라고 지적받은 바 있어서, 그래서 그날따라 마음속으로 장교 후보생 시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고 있었다. 머리도 맑고 몸도 가뿐한 상태였다.
나는 낯모르는 사람한테서 의외의 말 보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욱 애어(愛語)의 연기(緣起)를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2)
6월 들어서 두 번째 토요일에 모처럼 휘경동 도량에 나갔다. 몇 달만이다. 2월 22일 예정되어 있었던 포교사 시험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7월경으로 연기되었다가 5개월여 만에 7월 11일로 잡힌 것이다. 시험 대비 특강을 한다고 하여 나간 것이다. 수강 방식은 대구 본사에서 하는 강의를 동영상으로 받아서 듣는 강의이다.
일생의 모든 시험 준비가 다 그랬지만, 시간이 넉넉하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코로나 거리두기 기간에 공부에 집중할 것 같았지만, 공부를 더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집이나 교재 공부하기를 중단하고 허송세월을 하고 말았다. 교재 공부하기가 중단되었던 기간이 길어지면서, 작년부터 해온 공부까지 까먹은 상태이니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한다.
종무소에 도착하니 토요일 오후인데도 터줏대감 격인 ‘천진향’ 보살이 다른 직원 두 명과 함께 아직 근무 중이다. 신도회장인 00보살도 보인다. 도반 간의 평소 인사는, 합장한 채 ‘관세음보살’ 하는 것인데 오늘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자동으로, “하이고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어요!”라고 한다. 모두들 ‘까르르’ 웃는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종무소를 나와서, 아내의 백팔 염주를 바꾸러 맞은편 매점으로 들어갔다. 포교사 대비반 학사관리를 담당하는 부학감 00보살이 보인다. 무척이나 반갑다. 그동안 수강에 필요한 교재를 복사하고, 그걸 배부하는 일에서부터 음료수와 간식 뒷바라지까지, 여러 가지를 신경 쓰고 챙기느라 수고를 많이 하는 분이다. 매우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인사를 하니 그녀도 무척 반가워한다.
“일부러 또 나오셨네요!”
“강의 교재 복사물도 나누어 드리고, 얼굴들 좀 보려구요!”
“저는 부학감 보살님 뵈었으니 소원 성취했습니다!”
“하하하! 소원 성취요?”
부학감 보살님의 표정은 매우 밝고 기분 좋은 것 같았다. 나는 내친김에 한 발 더 나갔다.
“오늘 혹시 우리 수강 끌날 때까지 계실 건가요?”
“아닙니다만, 왜 그러시죠?”
“시간이 되시면 곡차를 한 잔 대접해드리려구요!”
“아이고, 엄청 좋아하는데…. 차를 운전하고 와서요.”
“저런! 그럼 시험 끝나고 모시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보살의 행위 지침인 ‘사섭법(四攝法)’의 ‘애어섭(愛語攝)’을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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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용어 보충 설명
사섭법(四攝法) :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대승보살의 네 가지 행위 지침
1) 보시섭(報施攝) : 무엇이든 나누고자 하는 마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베풀어 주는 것
2) 애어섭(愛語攝) : 항상 따뜻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기어(綺語) 같은 잘못된 언어생활을 고쳐 바르고 좋은 말을 씀으로써 개인의 품위와 인격을 향상하고, 동시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감.
3) 이행섭(利行攝) : 항상 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
4) 동사섭(同事攝) : 나와 남이 일심동체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것
오늘2021.12.24 아침 황악산모습입니다(사진 전호영 송설43 회)
첫댓글 글도 글이지만 황악산 모습이 아주 정답게 느껴져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황악산이 내게 말을 걸 듯하고 구름이 어서 가자며 손을 끌 듯도 합니다. 저 산 어드메쯤 누가 훠이훠이 눈길을 가고 있을 것 같아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눈길을 줍니다. 차암 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