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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성경해석법의 허구성
이근호 목사
누구나 성경을 소지할 수가 있고 누구나 나름대로 이해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있어 옳고 그른 것의 차이는 명확해야 한다. 구조주의 성경해석법이라는 것이 신학교에서 퍼지고 있다. 과연 합당한 성경 해석법이냐를 조명해 봐야 한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인간들 각자의 방식을 모두 긍정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구조주의 해석법이라는 것이 일정한 격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해석하는 방법이라면 비판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주의 성경해석법은 나름대로 자신만만한 규칙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규칙성의 정당함과 우수성을 자랑한다. 따라서 이 해석법의 본질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1. 구조주의 해석자의 주장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언어와 문장의 밭 한 가운데 서 있는 것과 같다. 외부에서 초월적인 선입견을 수입해서는 안되고 문장과 언어가 서 있는 상황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성경 본문은 나름대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야기 함ꡒ에 대해서 어떤 원칙을 찾아내게 되면 성경의 이야기도 이 원칙에 맞추어 참 뜻을 찾아낼 수 있다. 원칙이란 특정 고유 구조와 모델을 지니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과연 인간의 ꡓ이야기 늘어놓음ꡒ에 대해서 개성 있는 갖가지 고유 구조들과 형식들이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특별히 연구를 많이 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뜻을 전하고자 할 때는 마음 속 깊이 있는 작자의 의도를 숨길 수 없는 상태에서 언어 구조에 필연적으로 담아 낸다. 그러기에 이러한 심층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표층구조를 살피는 것이 작업의 시작이다. 물론 완벽한 진리란 인간 세계에서는 상주하지 않지만 그러나 학자로서 완전을 향한 시도와 몸부림은 필히 수행해야 될 의무요 사명이다. 세심한 구조 분석을 시도하면 할수록 보다 더 깊이 있는 성경 본래의 뜻을 발굴될 수 있다. 결국 교회에 공헌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렇게나 성경 해석을 하게 된다면 교회 내부는 설교의 혼란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성경을 대하는 그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뭔가 나름대로 자기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본문 해체 작업과 순리적인 바른 해석에 도달되기 위해 분투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무원칙적이고 무절제적인 자의적 해석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모두가 수긍하고 인정하고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는 체계적 성경해석법을 제시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당연한 임무요 몫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기뻐하는 작업이다.
2. 구조주의 해석법의 허구성
1)그레스만 구조 의미론이 갖는 한계성
그레스만 구조 이론은 인물 위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주위에 다양한 인물들이 그물관계로 형성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주인공 되는 인물은 하나이다. 만약 주체가 되는 인물이 여럿이 된다고 한다면 그레스만 논리는 무의미하다. 성경을 일반적인 문학 저술가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간주한다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를 보여주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책이라면 인간들이 함부로 고정 인물을 주체로 볼 수가 없다. 등장하는 인물 전부가 중심 주체가 되어 버려 서로 얽혀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럴 경우에 하나 하나의 인물에도 그레스만 이론을 대입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을 충분히 감당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 문학책에서 중심 주체를 하나로 삼는 이유는 독자에게 흥미를 주고 이해도의 간편함을 위하여 문제의 해답을 발굴하는 재미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탐색하려는 독자를 염두에 두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좋게 하려는 책이 아니다. 영웅을 통해 대리 행위를 구경할 만한 책이 아니다. 인간들에게 정의의 성취감과 안도감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또 한 부분 한 부분이 서로 상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원활하게 ꡐ이야기 매듭 짓기ꡑ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분석을 해야 할 범위 확정이 분석자의 취향과 의도에 따라 일방적일 가능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는 연극이 아니다. 시 형식으로 쓰여졌다 해서 일반적인 시로서 분해할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해석을 전면 거부하는 책이다.
인간의 언어활동 배후에는 인간의 충동이 들어있고 그 충동은 욕망으로 배출된다. 본인들이 무슨 언어를 골라 사용했든지 간에 그 언어에는 목적과 지향점이 있다. 성경도 언어로 쓰여져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단 한 가지 철저하게 인간의 종교적 성향과 희구를 포획하여 그 악마성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간의 정신의 허구성과 신에 대한 도전성을 지향하면서 사고한다는 것은 성경이 아니면 밝혀내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그들의 문화활동에 의미를 두고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성경은 그런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순례하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일이다. 아직도 자신의 완전한 죄악성을 거부하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상징에 불과한 인간들로 하여금 언어를 결합시켜 배를 만들고 거기에다 영혼을 실어놓고, 있지도 않는 진리의 섬을 향하여 항해에 나서게 만드는 그 배후세력. 하나님은 그 마귀에 대해서 한시도 눈을 떼시지 않는다. 그들이 이제는 어떤 자태로서 현대인들을 현혹하고 있는지 계속 주시해 나가신다.
2) 구조주의와 구조 분석 작업의 차이성이 모호해짐
단순히 문장 구조를 살피는 것과 구조주의의 의식과는 다르다. 단순한 구조는 독자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독자가 그 구조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해명할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ꡒ왜 꼭 이 구조만 이 부분에 쓰여졌을까?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되기 위해서는 더 쉽고 더 이해 잘하게 만드는 다른 구조가 동원될 수도 있을 텐데……ꡓ라는 의문점에 대해서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의 다양성과 융통성에 대해서 무지하면서 어떻게 특정 구조에 보편적이고도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원칙을 진리로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구조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문장의 구조를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론에 대한 진위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까지 이미 지니고 그 문장을 대했다. 그렇게 해서 비록 문장 구조를 참고는 하되 거기에 종속되지는 않았다. 결론이 마음에 안들면 임의대로 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임의대로 조정해 버린다. 분명 구조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은 바로 이점이 불만이었다. 여기에서 말도 안 되는 상식 밖의 알레고리 설교가 온 교계를 정복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구조주의 해석법으로 다소나마 설교 문제가 해결될까? 덜 알레고리로 나아갈까? 아니다. 오히려 설교단에서 서서는 안되는 자들을 양성화시켜 대량으로 불신앙을 온 교계에 퍼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국 교회 설교의 문제점은, 알레고리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알레고리 설교를 해서라도 기어이 교회를 키워 보겠다는 악마적 발상에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 해석법을 가르쳐 주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게 된다. ꡒ알레고리 설교자가 아니라 바른 성경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본인이기에 나는 반드시 설교할 자격이 있노라ꡓ라고 말이다. 이런 문제는 성경 해석법하고는 무관하다고 여기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거짓된 목회 탐욕이 구조주의적 해석법 가지고 얼마든지 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해석법의 결론은 항상 종교적 결론으로 도출되는 속성 대문에 이러하다. 즉 인간이 신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과 신의 자비로운 응답이 내용의 주류로 되어 있다. 또한 이 내용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생활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참된 복음적 결론은 찾을 길이 없다. 왜냐하면 복음의 특이한 내용은 구조주의 사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래의 항목에서 거론된다.
3) 잘못된 방향 설정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외부에서 유입할 수 있다고 여긴 데서부터 말썽은 시작되었다.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가 무엇인가? 그리고 성령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못마땅한 이유가 무엇인가? 구조주의는 여기에 대한 정당한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외부의 모든 사상을 공격하고 정죄하고 있다. 다른 해석 방법을 용납해 주지 않는다. 성령이 제시하는 해석법은 항상 절대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종말에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하나님 심판 활동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ꡒ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ꡓ라든지 ꡒ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3:6)ꡓ, ꡒ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ꡓ(마태복음 13:11~17)라는 예수님 말씀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은 그 해석을 통해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기존의 인간이 지니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해석에 대해 냉혹한 처벌을 하고 계신다. 구조주의적 해석법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납득이나 이해를 우선으로 한다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미성취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하나님으로서는 그럴 수 없다. 구조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인류 보편적 성향에서 도출된 문학비평학을 가지고 성경을 재조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작부터가 성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면 성경은 이들 구조주의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가?
4)비독립적 존재인 인간이 마치 어떤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자각하고 난 뒤 성경 해석에 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편견과 선입감을 제거하고 성경 본문 자체에서 말하는 바에 주목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해도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을 최종 증명할 때까지 이 선입감마저 보류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만 매여 있는 것까지 반대하고 있다면 분명 이들의 배후에는 불순 세력이 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적 세력으로부터 한시도 독립된 적이 없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와 노력들은 배후 인물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리인 역할에 복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정신만 차리면 마치 독립적인 안목과 심성과 판단성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성경 해석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증언해야 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변모시킴
사도 바울도 한 명의 신학자라는 이유를 들어 학문 작업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구조주의자들은 뭔가를 해석해야만 하고 또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모든 논조의 주장은 하나 하나가 증언이라는 점을 이들은 모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의 밑바탕에는 자기만이 받은 계시(ꡒ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ꡓ 갈라디아서 1:8~9)의 유일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자기 만이 받은 다메섹의 신비 체험을 기초로 하고 있다.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스데반도 그랬고 베드로도 변화산의 체험을 그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도들과 오늘날 문학 비평가들이 신학 논쟁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합일점이 도출될 수 있는가? 마치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합일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도들은 모두 증언자들이다. 결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이사야 예언을 거론한 것이라든지,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같은 이사야의 본문을 인용한 것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이다. 학문이란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공동의 장인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런 이성의 장을 파괴하면서 다가온다. 같은 신앙인 사이에서는 이성적 논리의 성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논쟁을 하다 보면, 계속해서 신앙에 근거한 신앙을 내세우게 되고 다른 한 쪽은 하늘의 일을 인간의 언어 안으로 감금하려는 노력에 집착하게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6) 증명될 필요도 없는 것을 강제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는 원줄기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언약이다. 이 핵심 자리의 완전성을 이들 구조주의자들은 모호한 것으로 의심해 놓고서 작업에 들어간다. 학문을 할 대는 일단 의심해 놓고서 시작하는 데카르트의 합리적 사고가 또다시 철학을 통해서 전염되어 들어온 것이다. 사태가 이러니 이들 구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모호성과 비확실성을 유포, 전파하는 전도자로 자청해 나서는 것이다. 성경 해석이 복음 증언의 전반부 발판을 형성하는 것처럼 선전해서 기존의 성령받은 자들의 복음의 완전성을 핍박하고 있다. 구조주의로 하나 하나 탐색해서 전체 성경의 해답이 풀릴 때까지 복음 전파를 일단 중지해야 될 판이다.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는 자는 모두 교만하고 무식한 자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의 작업이 내린 결론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같은 복음적 결론이 도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들은 변명하기를 성경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 작은 부분을 임의로 잘라서 내린 결론과 보다 넓은 범위로 내린 결론 사이에는 모순과 마찰이 허다하다. 성경 전체를 구조주의적으로 분해했을 때 나온 결론이 세세한 부분을 구조주의 형식으로 내린 결론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큰 부담이다. 실제로 일치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이들의 작업을 부정하고 정죄하고 어리석고 교만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7) 성령의 초월성과 자유성에 도전하고 있다.
성령의 초월성과 자유성은 단순히 인간의 이성의 검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 작업을 공격하고 정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를 듬뿍 담고 일하시는 십자가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종말 때의 성령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성령의 정죄성을 피해 도망가서 나름대로 이성적 해석학을 시도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사역을 단지 아직 포착되지 않는 우발적 사건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리고 언젠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정복될 미개척지 같은 대상으로 본다. 성령, 즉 십자가의 영으로 하여금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변두리로 밀어내어 놓고서 뭣하겠다는 말인가?
8) 결국에는 복음으로 최종 해석의 진위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과정이 되는 구조주의적 해석법까지도 마땅히 복음적으로 판단해야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복음의 미확정성을 내세워 그 어떤 판단의 잣대도 거부하고 있다. 단지 ꡒ어느 구조가 보다 완벽한 대칭 구조로 그럴싸하게 보여주느냐ꡓ만 다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성경을 구조주의 틀로 새로 재편찬해 주어야만 하는가?
9) 십자가 정신 속에서의 성경 해석 문제
성경은 문자들에 대한 이성의 공격으로 정복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성경 문자를 대하는 순간, 인간의 이성에서 뿜어 나오는 옛사상과 죄악성으로 인해 해석하려는 문자로부터 도리어 정죄와 공격의 대상으로 포착되는 순간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마가복음 기독론에서 ꡐ메시아 은닉ꡑ이라는 아이디어나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에 대한 구구한 해석 같은 것들이다. 이런 해석은 곧 인간들이 그들의 죄성을 근거로 해서 평소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성질의 메시아를 구상했으며 또는 어떤 유형의 유토피아를 사모했는가를 여지없이 포착되고 있다.) 구조주의는 인간 쪽에서 비십자가정신으로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한계성 중의 하나이다. 성경은 이런 차원에서 인간들의 그 어떤 성경 해석 방법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차별성을 십자가를 가운데 끼어 넣어 대비하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정신으로 성경을 대하게 되면 거기에는 오직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한다는 소식만 성경에 들어 있을 뿐이다. 이로써 성경은, 인간들이 성경을 전혀 해석할 자질이 없을 정도로 죄 덩어리로 태어났음을 확인시킨다.
교회는, 기발하고 유용한 하나의 성경 해석을 통해서 모인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모였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긍휼의 선택성만 도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할 따름이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를 완전히 배제시킨다.
3. 결론
성경 해석은 오직 성령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우상시하는 분이 아니라 성경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특별한 성경 해석법을 거론하시는 분이 아니다. 분명하게 예수님을 제시하는 해석법은 없다. 오직 성령님만이 예수님을 지목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내신다. 그 과정에 도입될 해석법이 없이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해석법을 의존하는 것에 대해서 성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어야 한다. 특별한 해석법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시는 성령님께 굴복 당해야 마땅하다. 예수님만 말한다면 무슨 주장이라도 다 용납되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거짓 예수의 모습을 얼마든지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성경적 해석법이란 성령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모습을 증언하는 것에 국한해야 한다. 곧 성령론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성령님의 성경 해석은 기존의 나름대로의 해석법을 주장하고 나오는 인간의 해석법을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여기에 구약의 신약의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법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은 소위 신학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점을 보이신다. 신앙이 없는 자들이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의 한 부류가 소위 구조주의적 해석법을 들고 나오는 자들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복음에 대한 불확신과 자신 없음을 감추고 변명하는 수단으로 성경과 복음에 대한 재정립에 나섰다. 그 방법의 하나가 구조주의적 방법이다. 이들에게 있어 진리와 거짓이란 복음의 고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에 있어 자기들과 같은 구조주의 방식을 도입했는가 아니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과 영생이 구조주의에 있는가 아니면 복음 자체에 있는가? 만약 복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혼탁하게 되고 명확도를 떨어뜨린다면 그 구조주의 방식은 과감하게 차 버려야 마땅하지 않는가?
구조주의 해석법의 또 하나는 성경주의의 파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경을 상대로 해석 인간들이 성경마저 정복하려는 시도이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인간의 무엇을 공격하는지 모르는 자이다. 참된 성경 해석은 요한복음 5:39에 나와 있는 바와 같다. ꡒ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ꡓ 어떤 성경 본문이든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