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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駒驪의 根幹之地, 낙랑군(樂浪郡:平壤), 중아(中亞)가 고향(故鄕) [5편]
장잠(長岑)의 지명(地名) 이동(移動)
2024년 02월 29일
○ 『낙랑군(樂浪郡)』은,
조선사(朝鮮史)에서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과 함께 고구려(高駒驪)의 핵심(核心) 근거지(根據地)였다.』는 것은 주지(主旨)의 사실(事實)이다.
그래서 전한서(前漢書)에서조차 이르기를 : 「낙랑군(樂浪郡)은, 25개 현(縣)을 속현(屬縣)으로 다스렸으며, 호수(戶數)는 “62,812”였으며, 구(口)는 “406,748人”이었다」라고 기록(記錄), 설명(說明)하고 있다.
역시(亦是) 전한서(前漢書)에서도 이르기를 : 「낙랑군(樂浪郡),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은 “조선(朝鮮)의 근간지지(根幹之地)였다”」라고 하였으며,
➊「낙랑군(樂浪郡), 전한(前漢)의 전성(全盛) 때 25개 현(縣)을 속현(屬縣)으로, 호수(戶) “62,812”였으며, 구(口) 406,748」이었다.
➋「현토군(玄菟郡), 3개 현 : 호(戶) : 4만 5천여 호(餘戶) : 구(口) 2십 2만여」
➌「요동군(遼東郡), 18개 현 : 호(戶) : 5만 6천여 호(餘戶) : 구(口) 2십7만여」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3군의 「현(縣) 46개, 호수(戶數)는 ‘164,000’, 구(口) ‘구십(九十) 만인(萬人)’이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때는 전한(前漢) 시대(時代)임을 생각한다면 :
「2 천년(千年)이 지난 뒤」의「AD 1,792년 한양(漢陽) 도성(都城) 호수(戶數)가 8만 여호(餘戶)라고 한다」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19세기(世紀)의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는 조선(朝鮮) 도성(都城)의 호수(戶數) “4만 여호”였다고 하였다. 기막힌 소설(小說) 같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전한(前漢) 때의 낙랑군(樂浪郡)【곧 고구려(高駒驪) 도성(都城)이다】에는 62,812호(戶)에, 40여만(餘萬) 구(口)가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 쉽게 말해 「“무려(無慮) 2 천년(千年)”이 지난 뒤의 반도(半島)의 유일(唯一)한 “조선왕조(朝鮮王朝) 도성(都城) 호구(戶口)”가 비슷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상식적(常識的)이지 않은, 외계인(外界人)들이나 귀신(鬼神)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설명(說明)되는 것에 대해 분노(憤怒)를 금할 수 없다. 누구(?) 말대로 대노(大怒), 격노(激怒)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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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世紀) 최신(最新) 과학기술(科學技術)에, AI까지 발전(發展)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어떤 인사(人士)는, 대통령(大統領)이 얼마나 되고 싶었던지 손바닥에 임금 “王”자(字)를 쓰고 다녔다고 전(傳)해져 한바탕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21세기(世紀) 오늘이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시대(時代)인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시절(時節)인지, 서슬 퍼런 제국주의(帝國主義) 시절(時節)인지를 구분(區分)하지 못하는, “몽중(夢中)”에서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런 자(者)가 어찌 어찌하다가 지도자(指導者)가 되는 바람에 오늘의 우리 사회(社會)가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정상적(正常的)인 정치(政治)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정의(正義)와 평등(平等)과 공정(公正)”을 부르짖었지만, 『역대(歷代) 그 어떤 정권(政權)보다도 무능력(無能力)하고, 무책임(無責任)하며, 불합리(不合理)한 모순(矛盾)덩어리요, 불평등(不平等)이 만연(漫然)하고, 가장 정의(正義)롭지 못한 정권(政權)이며, 가장 불공정(不公正) 자(者)들의 집합체(集合體)가 되어버렸다.』〉
자유(自由)가 넘치고 넘쳐 범람(汎濫)할 지경(地境)임에도,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時間)이 날 때마다 “자유(自由)”를 외친다.
〈그렇게 애타게 외치는 자유(自由)는 :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어떤 자유(自由)를 말하는 건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지금 “전제 공산주의국가(國家)”라서 백성(百姓)들의 자유(自由)가 없어, 철창(鐵窓)에 갇혀 있는 듯하여, 안타깝게, 불쌍 타 여겨 자유(自由)를 찾아주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외치는 자유(自由)는 어떤 자유(自由), 누굴 위한 자유(自由)를 말하는 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의 정적(政敵)”이라고 알려진 반정부활동가 ”나발니“는 말하기를 “대한민국 민주주의(民主主義)처럼 개혁(改革)하고 싶다”라고 까지 외쳤다고 전해진다. 그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그분”은 어떤… …누구를 위한 자유(自由)를 그렇게 “무작정(無酌定), 무대포”로 외치고 있는 것일까?
이러니 “지금도 주취(酒臭) 속에, 몽중(夢中)에 계시다”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고도 남을 일이다.
〈하라는 정치(政治)는 하지 못하면서 권력(權力)을 향(向)한 욕망(慾望)과 욕심(慾心)에 혈안(血眼)이 되어있다.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면 : 「이렇게 권력(權力)을 탐(貪)하고 욕망(慾望)과 욕심(慾心)에 혈안(血眼)이 되었던 자(者)들의 99.99%가 비참(悲慘)함으로 생(生)을 마감했다」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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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高駒驪)는 이미 수천(數千) 년 전(前)부터 있었던 나라였다』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에 기록(記錄)과 함께 설명(說明)하였다.
또 고대(古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지중해(地中海)∼흑해(黑海)∼“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Altai,山)=벨루하산[Belukha, 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시원(始源)한다〉라는 것을 설명(說明)하였으며,
이에 맞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고구려(高駒驪)’ 땅의 여러 지명(地名)에 대하여 함께 고찰(考察)하며, 설명(說明)하였는데, 오늘의 주제(主題) 역시(亦是) 이와 같은 것이다.
○ 「낙랑군(樂浪郡)」은, 고구려(高駒驪)의 도성(都城)이 있는 핵심(核心) 근간지지(根幹之地)였음은 주지(周知)의 사실(史實)이다.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으로 장잠현(長岑縣)이 있는데, 요동(遼東) 땅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륙사(大陸史), 조선사(朝鮮史)”에서 똑같이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이 「장잠현(長岑縣)은 “요동(遼東)” 땅에 있었다」라고 하며, 그렇다면 ➊ “낙랑군(樂浪郡)은 요동(遼東) 땅”에 있었다는 것 또는 ➋ 요동(遼東) 땅과 평양(平壤)을 포함(包含)하는 광활(廣闊)한 땅을 속지(屬地)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잠현(長岑縣)은 요동(遼東)에 있었다. 장잠현(長岑縣)은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이었다」라는 것에 비춰보면 : 장잠현(長岑縣)이 있는 곳이 “요동(遼東) 땅이자, 낙랑군(樂浪郡)의 땅이기도 한 것이다”에 착안(着眼)한 것이다.
옛 고전(古典) 원전(原典) 속에서 “장잠현(長岑縣)과 장잠(長岑)”을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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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後漢書 崔駰【後漢書 卷五十二, 崔駰列傳 第四十二】편을 보면 :
『정백(亭伯)은 최인(崔駰)【AD ?—92年】의 자(字)로,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에게 잘못 보여 “요동(遼東)의 장잠현(長岑縣)”으로 쫓겨났다』라고 하였다. 【及憲為車騎將軍,辟駰為掾。憲府貴重,掾屬三十人,皆故刺史、二千石,唯駰以處士年少,擢在其閒。憲擅權驕恣,駰數諫之。及出擊匈奴,道路愈多不法,駰為主簿,前後奏記數十,指切長短。憲不能容,稍□之,因察駰高第,出為長岑長[一],駰自以遠去,不得意,遂不之官而歸。永元四年,卒於家。所著詩、賦、銘、頌、書、記、表、七依、婚禮結言、達旨、酒警合二十一篇。中子瑗. 注[一]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後來,竇憲命令崔駰去擔任樂浪郡的長岑長,崔駰拒絕前去任職】
• 즉(卽) 「장잠(長岑)은, 요동(遼東)에 속해 있는데, 낙랑군(樂浪郡) 속현(屬縣)이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 주변일대(周邊一帶) + 압록강(鴨綠江) 남북(南北) 안(岸) + 요동(遼東)까지를 낙랑군(樂浪郡)이 속현(屬縣)을 두고 다스렸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장잠(長岑)”을 찾는다면 : ‘본래(本來)의 요동(遼東) 땅’과 ‘평양(平壤)=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을 찾을 수 있게 된다.
(2) 隋書 卷四 帝紀 第 四 煬帝 下 : 大業八年. 壬申【AD612年】
➥《而高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 碣之間, 荐食遼, 獩之境. 雖復漢, 魏誅戮, 巢窟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高句驪)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遼)와 예(濊)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漢),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락(種落)들이 다시 모여들었다.》하고는,
➥ 《左 第 一 軍 可 鏤 方 道 , ➊ 第 二 軍 可 長 岑 道 , 第 三 軍 可 海 冥 [冥 海]道, 第 四 軍 可 蓋 馬 道 , 第 五 軍 可 建 安 道 , 第 六 軍 可 南 蘇 道 , 第 七 軍 可 遼 東 道 , 第 八 軍 可 玄 菟 道 , 第 九 軍 可 扶 餘 道 , 第 十 軍 可 朝 鮮 道 , 第 十 一 軍 可 沃 沮 道, 第 十 二 軍 可 樂 浪 道 : 좌(左) 12군(軍) 중의 제1군은 루방도(鏤方道)로, 제2군은 장잠도(長岑道)로, 제3군은 해명도(海冥道:冥海道)로, 제4군은 개마도(蓋馬道)로, 제5군은 건안도(建安道)로, 제6군은 남소도(南蘇道)로, 제7군은 요동도(遼東道)로, 제8군은 현토도(玄菟道)로, 제9군은 부여도(夫餘道)로, 제10군은 조선(朝鮮道)로, 제11군은 옥저도(沃沮道)로, 제12군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가라》하였다.
➥ 《右 第 一 軍 可 黏 蟬 道, 第 二 軍 可 含 資 道, 第 三 軍 可 渾 彌 道, 第 四 軍 可 臨 屯 道, 第 五 軍 可 候 城 道, 第 六 軍 可 提 奚 道, 第 七 軍 可 踏 頓 道, 第 八 軍 可 肅 慎 道, 第 九 軍 可 碣 石 道, 第 十 軍 可 東 暆 道, 第 十 一 軍 可 帶 方 道, 第 十二 軍 可 襄 平 道, 凡 此 眾 軍, 先 奉 廟 略, 駱 驛 引 途, 總 集 平 壤 : 우(右) 12군(軍) 중의 제1군은 점선도(黏蟬道)로,제2군은 함자도(含資道)로, 제3군은 혼미도(渾彌道)로, 제4군은 임둔도(臨屯道)로,제5군은 후성도(候城道)도, 제6군은 제해도(提奚道)도, 제7군은 답돈도(踏頓道)로, 제8군은 숙신도(肅慎道)로, 제9군은 갈석도(碣石道)로, 제10군은 동이도(東暆道)로, 제11군은 대방도(帶方道)로, 제12군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아가도록 하여, 선봉의 묘략(廟略)으로, 서로 인도하며 모조리 평양(平壤)으로 집합하게 하라.》하였다.
➡➡ 이때의 모습을 ‘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는 기록(記錄)하기를 :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輸者倍之. 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 : 모두 1백13만 3천8백 인(人)이였는데, 부르기를 ‘2백만(百萬)’이라고 하였다. 그것의 군량운반(軍糧運搬)을 맡은 자는 그 배(倍)가 되었다. 남(南)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社)에게 제사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고, 계성(薊城) 북(北)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祭)를 지냈다.》라고 하였다. 또,
(3) 자치통감(資治通鑑) 수기(隋紀)에서는 :
➥ 《煬皇帝 大業八年. 壬申,公元六一二年): 壬午, 詔左十二軍出鏤方, ➊ 長岑, 溟海,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等道 : 좌(左) 12군(軍)의 제1군은 루방도(鏤方道)로, 제2군은 장잠도(長岑道)로, 제3군은 해명도(海冥道:冥海道)로, 제4군은 개마도(蓋馬道)로, 제5군은 건안도(建安道)로, 제6군은 남소도(南蘇道)로, 제7군은 요동도(遼東道)로, 제8군은 현토도(玄菟道)로, 제9군은 부여도(夫餘道)로, 제10군은 조선(朝鮮道)로, 제11군은 옥저도(沃沮道)로, 제12군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가라》하였다.
《右十二軍出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蹋頓、肅慎、碣石、東□施、帶方、襄平等道,駱驛引途,總集平壤,우(右) 12군의 제1군은 점선도(黏蟬道)로, 제2군은 함자도(含資道)로, 제3군은 혼미도(渾彌道)로, 제4군은 임둔도(臨屯道)로,제5군은 후성도(候城道)도, 제6군은 제해도(提奚道)도, 제7군은 답돈도(踏頓道)로, 제8군은 숙신도(肅慎道)로, 제9군은 갈석도(碣石道)로, 제10군은 동이도(東暆道)로, 제11군은 대방도(帶方道)로, 제12군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아가도록 하여, 선봉의 묘략(廟略)으로, 서로 인도하며 모조리 평양(平壤)으로 집합하게 하라. 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號二百萬,其饋運者倍之。: 모두 1백13만 3천8백 인(人)이였는데, 부르기를 ‘2백만(百萬)’이라고 하였다. 그 군량운반(軍糧運搬)을 맡은 자는 그 배(倍)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於仲文出樂浪道,左驍衛大將軍荊元恆出遼東道,右翊衛將軍薛世雄出沃沮道,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右御衛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御衛虎賁郎將衛文昇出增地道,➋ 皆會於鴨綠水西。: 좌익위대장군우문술은 부여도(夫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우중문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遼東道)로 나가고, 우익위장군설세웅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좌둔위장군신세웅은 현토도(玄菟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장군조효재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遂城道)로 나가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 위문승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아가라. 압록수(鴨綠水) 서(西)쪽에사 모두 집합(集合)하라》라고 하였다.
➊ 장잠도(長岑道) : 장잠(長岑)은 현(縣)의 이름으로 “요동(遼東) 땅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낙랑군(樂浪郡) 속현(屬縣)이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1) 후한서(後漢書)에서도 기록(記錄)하고 있듯이 “장잠(長岑)”은, 注[一]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 장잠(長岑)은, 현(縣)으로,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遼東)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수양제(隋煬帝)에 의해 「좌(左) 12군(軍)의 제2군으로 출정(出征)한 것은 섭좌무위대장군(攝左武衛大將軍) 번자개(樊子蓋)로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갔다.」라고 하였다.
➡ 〈후한(後漢)【전한(前漢) 때도 동일(同一)】때도, 수양제(隋煬帝) 때도 변함없이 “장잠(長岑)”은 낙랑군(樂浪郡) 속현(屬縣)으로 요동(遼東)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➋ 〈압록수(鴨綠水) 서(西)쪽에 모두 집합(集合)하라 : 皆 會 於 鴨 綠 水 西〉라고 하였는데, 참 민망(憫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압록수(鴨綠水)는, 곧 압록강(鴨綠江), 청하(淸河) 등으로 불렸던 강(江)이라고 전해지는데, 21세기(世紀) 오늘날에는 “한반도(韓半島)와 만주(滿洲) 땅을 분계(分界)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화(華)와 이(夷)의 분계처(分界處)”라고 하는데,
이 말에 따르면 만주(滿洲) 땅에 살고 있었던 “옛 흉노(匈奴) 오랑캐, 숙신(肅愼), 선비(鮮卑), 글란(契丹), 말갈(靺鞨), 달단(韃靼), 달달(達達), 여진(女眞)족들이 화(華)요, 중화(中華)요, 화하(華夏)요, 중국(中國)”이라는 웃기는 이야기가 전개(展開)되고,
그 남(南)쪽에 살고 있던 조선족(朝鮮族)이 바로 오랑캐(夷)가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反對)로 설정(設定)하면 : “조선족(朝鮮族)이 화(華)요, 중화(中華)요, 화하(華夏)요, 중국(中國)이 된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 이 하천(河川) 즉(卽) 압록강(鴨綠江)은, 동북(東北)의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여 꾸불꾸불 서남(西南)으로 흘러 의주(義州) 땅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이기 때문에, “압록수(鴨綠水) 서(西)쪽에 모두 집결(集結)하라”라는 명령(命令)은, 곧 압록수(鴨綠水)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모두 빠져 죽으라는 말과 같다.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거조해망(擧措駭妄)한 역사기록(歷史記錄)이다. 물론(勿論) 이것은 “압록수(鴨綠水)”가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일 때 해당(該當)되는 이야기다.
수양제(隋煬帝)가 수백(數百)만 대군(大軍)을 출정(出征)시켜 고구려(高駒驪)를 침공(侵攻)할 당시(當時)에는 “압록수(鴨綠水)” 서(西)쪽 땅에 수십만(數十萬)의 대군(大軍)이 집결(集結)할 수 있는 땅(地)이 있었기 때문일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을 것이다. 21세기(世紀) 사는 우리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것이리라!
➥ 《中略. 初,九軍渡遼,凡三十萬五千,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資儲器械巨萬計,失亡蕩盡. 帝大怒,鎖系述等. 癸卯,引還。: 초(初)에 9군(軍)이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모두 30만5천 인(人)이었으나, 요동성(遼東城)에 이르러 돌아온 자는, 오직 2천7백 인(人)이었으며, 자재기계(資材器械) 등은 수백(數百)만 모두를, 실망(失亡) 탕진(蕩盡)하였다. 수양제(隋煬帝)가 대노(大怒)하였다. 계묘(癸卯)에 이끌고 되돌아왔다.》라고 하였다.
• 「9군 305,000 병사(兵士)【장병(將兵)】」들이 고구려(高駒驪)를 침공(侵攻),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다시 돌아온 자(者)는 「겨우 2,700인(人)의 병사(兵史)였다」고 하면 : 고구려(高駒驪)에 의해 9군(軍)은 전멸(全滅), 궤멸(潰滅)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황(戰況)은, 인류 역사상(人類歷史上)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전쟁사(戰爭史)이자 일대(一代)의 서사시(敍事詩)로 기록(記錄)되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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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資治通鑑 隋煬帝 大業 8年【AD 612, 주석(註釋) 有】 : 위의 글 ‘(3)’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수기(隋紀)다. 주석(注釋)을 보기로 하자.
➥ 《壬午, 詔左十二軍出鏤方, ➠ 長岑, 溟海,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等道, 【帝指授諸軍所出之道,多用漢縣舊名。漢志 : 鏤方, 長岑, 朝鮮, 屬樂浪郡. 蓋馬,屬玄菟郡,有蓋馬大山。: 수양제(隋煬帝)가 여러 군(諸軍)이 나아갈 길을 직접 지시 가르쳐주었는데, 많이 사용한 것이 한(漢)나라 현(縣)의 옛 지명(地名)이다. 한지(漢志)에 : 누방(鏤方), 장잠(長岑), 조선(朝鮮)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했고, 개마(蓋馬)는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 遼東, 漢郡名. 溟海,蓋即漢樂浪郡之海冥縣。建安、南蘇、扶餘, 皆高麗國城守之處. 沃沮,亦古地名,是時其地已入新羅界. : 요동(遼東)은, 한(漢)나라의 군(郡) 이름이다. 명해(溟海)는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해명현(海冥縣)이다. 건안(建安), 남소(南蘇), 부여(夫餘)는 모두 고려국(高麗國)의 성(城)을 지키는 곳이다. 옥저(沃沮)는 또한 옛 지명으로, 이때에 그 땅은 신라(新羅)의 지경(地境)에 들어갔다.】右十二軍出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蹋頓, 肅慎, 碣石, 東暆, 帶方, 襄平等道, 【漢志 ; 黏蟬, 含資, 渾彌, 提奚, 東暆, 帶方等縣, 屬樂浪郡. 候城, 襄平, 屬遼東郡. 臨屯亦漢武帝所置郡名. 蹋頓,即漢末遼西烏丸蹋頓所居. 肅慎,古肅慎氏之國, 其地時為靺鞨所居. : 한지(漢志)에,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제해(提奚), 동이(東暆), 대방(帶方)등 현(懸)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했고, 후성(侯城), 양평(襄平)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했다. 임둔(臨屯) 역시(亦是) 한무제(漢武帝)가 그곳에 둔 군(郡)의 이름이다. 답돈(蹋頓)은, 한(漢) 말에 요서오환(遼西烏丸) 답돈(蹋頓)이 있었던 것이다. 숙신(肅愼)은, 옛 숙신씨(肅愼氏) 나라인데, 그 땅은 지금 말갈(靺鞨)이소그곳에 살고 있다. 碣石,禹貢之碣石也. 杜佑以為此碣石在高麗中。佑曰: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秦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 갈석(碣石)은,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이다. 두우(杜佑)에 의하면 갈석(碣石)은 고려(高麗) 땅 안(中)에 있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산(山)이다. 그 증험(證驗)이 장성(長城)의 동(東)쪽 요수(遼水)에서 끊어져 고구려(高駒驪)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遺址)가 그대로 있다.】駱驛引途, 【駱驛相繼不絕也】 總集平壤,【平壤城高麗國都也亦曰長安城, 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杜佑曰:高麗王自東晉以後居平壤城,即漢樂浪郡王險城 : 평양성(平壤城)은 고려국(高麗國)의 서울(都城)이다. 또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 동서(東西)가 6리(里)로, 산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남(南)쪽에는 패수(浿水)에 임한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고려왕(高麗王)은 동진(東晉) 이후(以後)에 평양성(平壤城)에 살았는데,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 왕험성(王險城)이다.】 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라고 하였다.
• 위의 것은, “자치통감(資治通鑑) 원전(原典)의 주석(註釋)”을 번역(飜譯)한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찾을 수 있는데, 물론(勿論) 그동안 필자(筆者)가 누누이 주장(主張)했단 것들이다.
➠➠➠ 〈한(漢)나라가 고구려(高駒驪)인지, 고구려(高駒驪)가 한(漢)나라인지 구분(區分)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고,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한(漢)”은 “고구려(高駒驪)”일 수밖에 없다. 그 땅 즉(卽) 동방(東方)의 주인(主人)은 토착민(土着民)들로 바로 “구이(九夷)”들이었기 때문이다.
• 「갈석(碣石)과 갈석산(碣石山)은 바로 우공(禹貢) 때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장성(長城)이 고구려(高駒驪)의 요수(遼水)로 이어졌고, 「갈석산(碣石山)은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건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다음 기회(機會)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 資治通鑑 隋煬帝 大業 8年 :《總 一 百 一 十 三 萬 三 千 八 百 , 號 二 百 萬 , 其 餽 運 者 倍 之 . 癸 未 , 第 一軍 發 , 終 四 十 日 , 引 師 乃 盡 , 旌 旗 亙 千 里. : 총【보기(步騎), 수군(水軍) 포함(包含)】 1,133,800이니, 2백만(百萬)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의 군량을 수송(輸送)하는 자(者)까지는 배(倍)가 되었다. 계미(癸未)에 제1군(軍)이 출발하였고 끝날 때까지 40일이 걸려, 끝이 없이 갔는데, 정기(旌旗)가 천리(千里)에 뻗쳤다.》라고 하였는데,
• 이때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冑․纓拂․旗旛, 每團異色. : 수양제(隋煬帝)가 직접 절도(節度)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 1인과 기병 40대(隊)를 두었다. 1대(隊)는 1백 인이며, 10대(隊)가 1단(團)이다. 보병은 80대(隊)였는데, 4단(團)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으며, 단(團)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 매일 1군씩 파견하되, 서로 거리가 40리씩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정기(旌旗)가 9백 60리에 뻗쳤다. 御營內, 合十二衛 ․ 三臺 ․ 五省 ․ 九寺, 分隸內外 ․ 前後 ․ 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 어영(御營)【수양제(隋煬帝) 진영(陣營)】에는 12위․3대․5성․9사가 있는데, 내외 ․ 전후 ․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里)에 뻗쳤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5) 해동역사(海東繹史) 고구려(高句麗) 2 : 수양제(隋煬帝)
《觀德王雄檢校左翊衛大將軍。出遼東道。次瀘河鎭。遘疾而薨。: 관덕왕 웅(觀德王 雄)이 검교좌익위대장군(檢校左翊衛大將軍)이 되어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가 노하진(瀘河鎭)에 주둔하였다가 병에 걸려 훙하였다. 吐萬緖。請爲前鋒。帝嘉之。拜左屯衛大將軍。牽馬步數萬。指蓋馬道。: 토만서(吐萬緖)가 선봉이 되기를 청하니, 양제가 가상히 여겨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에 제수하였다. 마병과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개마도(蓋馬道)로 나아갔다. ➠ 樊子蓋。徵攝左武衛將軍。出長岑道。: 번자개(樊子蓋)가 섭좌무위대장군(攝左武衛大將軍)에 징발되어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갔다. 史祥拜左驍衛將軍。出蹋頓道。사상(史祥)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에 제수되어 답돈도(蹋頓道)로 나아갔다. 周法尙以舟師指朝鮮道。: 주법상(周法尙)이 주사(舟師)로서 조선도(朝鮮道)로 나아갔다. 陸知命爲東暆道受降使者。: 육지명(陸知命)이 동이도수항사자(東暆道受降使者)가 되었다. 李景出渾瀰道。攻高麗武厲城破之。賜爵苑邱侯。: 이경(李景)이 혼미도(渾濔道)로 나아가 고구려의 무려성(武厲城)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원구후(苑邱侯)에 봉작하였다. 並隋書.》라고 하였다.
○ 위에서 인용(引用)한 사서(史書)는 “장잠(長岑)”과 관련(關聯)된 내용(內容)들인데,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부터 수당(隋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장잠(長岑)”은, 고구려(高駒驪)로 대표(代表)되는 “조선(朝鮮)”의 땅으로, 요동(遼東)에 있으면서, 낙랑군(樂浪郡)에 소속(所屬)된 땅으로 통치(統治)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원조(元祖), 본시(本是)의 「장잠(長岑)」은 어딜까? 이게 오늘의 주제(主題)다.
(6) 신당서(新唐書) 고종(高宗) 본기(本紀)를 보면 :
《龍 朔 元 年, 四 月 庚 辰, 任 雅 相 為 浿 江 道 行 軍 總 管, 契 苾 何 力 為 遼 東 道 行 軍 總 管, 蘇 定 方 為 平 壤 道 行 軍 總 管, 蕭 嗣 業 為 扶 餘 道 行 軍 總 管, 右 驍 衛 將 軍 程 名 振 為 鏤 方 道 行 軍 總 管,左 驍 衛 將 軍 龐 孝 泰 為 沃 沮 道 行 軍 總 管,率 三 十 五 軍 以 伐 高 麗. 八 月 甲 戌,蘇 定 方 及 高 麗 戰 于 浿 江, 敗 之 : 용삭(龍朔) 원년(元年)【필자(筆者) : AD 661年이다.】4월, 경진(庚辰),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행군총관(浿江道行軍總管),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 소정방(蘇定方)을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總管),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夫餘道行軍總管),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행군총관(鏤方道行軍總管),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를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行軍總管)으로 하여, “35만”군(軍)을 이끌고 고구려(高駒驪)를 쳤다. 8월, 갑술(甲戌)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總管) 소정방(蘇定方)과 고구려(高駒驪)군(軍)이 패강(浿江)에서 싸웠으나 [당군(唐軍)이] 패(敗)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4월(月)」의 것이다.
《龍 朔 元 年. 十 月, 鄭 仁 泰 為 鐵 勒 道 行 軍 大 總 管, 蕭 嗣 業 為 仙 崿 道 行 軍 大 總 管, ➥ 左 驍 衛 大 將 軍 阿 史 那 忠 為 長 岑 道 行 軍 大 總 管, 以 伐 鐵 勒 。 : 용삭(龍朔) 원년(元年)【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 「정인태(鄭仁泰)를 철륵도행군대총관(鐵勒道行軍大總管), 소사업(肅嗣業)을 선악도행군대총관(仙萼道行軍大總管),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任命)하였는데, 이는 “철륵(鐵勒)”을 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10월(月)」의 일이다.
【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 : 新羅 太宗 8, 文武王 元年, 高駒驪 寶藏王 20, 百濟 豊 元年이다.】
➡ 위의 “원전(原典) 원문(原文)” 기록(記錄)에서 눈에 금시(今時)에 들어오는 구절(句節)이 있다. 바로 『장잠도(長岑道)』다.
「수양제(煬皇帝) 대업(大業) 8年」은, 바로 “AD 612年”인데, 이때 수양제(隋煬帝)가 출정(出征)시킨 좌우군(左右軍) 24군 중에서 좌군(左軍) 제2군이 바로 문제의 〈樊子蓋。徵攝左武衛將軍。出長岑道。: 번자개(樊子蓋)가 섭좌무위대장군(攝左武衛大將軍)에 징발되어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갔다.〉라고 한 것이다.
➊ 수양제(隋煬帝) 대업(大業) 8년【AD 612年】: 좌(左) 12군의 제2군인 「섭좌무위대장군(攝左武衛大將軍) 번자개(樊子蓋)는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갔다.」라 하였고,
➋ 당고종(唐高宗) 용삭(龍朔) 원년(元年)【AD 661年】:「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이 『장잠도(長岑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이 되어 나아갔다.」라고 한 것이다.
➌ 여기서 다른 것은, 바뀐 것이라고는,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高駒驪) 침공(侵攻)에 올인(Allin)하는 바람에 “수(隋)”나라가 멸망(滅亡)했다」라는 것이고, 「수(隋)를 이어 당(唐)나라가 새롭게 개국(開國)했다」라는 것일 뿐이며,
가장 중요(重要)한 상대국(相對國)인 『“고구려(高駒驪)”는 변함없이 “동서(東西) 6,000리(里)”가 넘는 거대(巨大)한 영토(領土)를 다스리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 또한 『“장잠(長岑)” 역시(亦是) 변함없이 “낙랑군(樂浪郡) 속현(屬縣)으로 요동(遼東) 땅에 건재(健在)하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즉(卽) AD 661년【당(唐) 용삭(龍朔) 원년(元年)】에도, AD 668년【당(唐) 총장(總章) 원년(元年)】구월(九月), 이적(李勣)에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되기 전(前)까지도 “장잠(長岑)”은 변함없이 고구려(高駒驪) 땅으로 낙랑군(樂浪郡)에 소속(所屬)되어 있었으며 요동(遼東) 땅에 건재(健在)하고 있었다는 사실(史實)이다.
➡ ➍ 그렇다면 : 『당(唐) 고종(唐高宗) 용삭(龍朔) 원년(元年)【AD 661年】:「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이 『장잠도(長岑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이 되어 철륵(鐵勒)을 치기 위해 임명(任命)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이다.
• 「철륵(鐵勒)은 칙륵(勅勒)」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의 영역(領域)은 아무리 보수적(保守的)으로 잡아도,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으로부터 우랄산맥【Ural, 山脈=오랍산맥(烏拉山脈)】을 넘어 구라파(歐羅巴) 북방지대(北方地帶)에 까지 광범위(廣範圍)하게 분포(分包)되어 살던 부족(部族)들을 총칭(總稱)한다.』라는 것이다.
【물론(勿論)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철륵(鐵勒)의 효기(梟騎)를 동원(動員)하여 후백제(後百濟)를 치게 된다.】
•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인용(引用)한다면 : 『장안(長安)으로부터 8,000∼17,500리(里)에 걸쳐 있었다』라고 기록(記錄)하였다. 이러한 고전(古典) 원전(原典)의 내용(內容)이 생생(生生)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기록(記錄)을 능가(凌駕) 또는 부정(否定)할 수 있는 기록(記錄)은 지금까지 발견(發見)되지 않고 있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 장안(長安)으로부터의 거리(距離)를 나타낸 것이다.】
… 설연타(薛延陀) : 철륵(鐵勒)의 별부(別部)로, 장안(長安)에서 14,000리 떨어져 있다.
… 동라(同羅) :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리 떨어져 있다.
… 다람갈(多濫葛) : 설연타(薛延陀) 동(東)쪽 지경에 있다. 동라수(同羅水)가 있다.
… 곡설(斛薛) : 철륵(鐵勒)의 별부(別部)로, 다람갈(多濫葛)의 북(北)쪽에 있다.
… 아질(阿跌) : 철륵(鐵勒)의 별부(別部)로, 다람갈(多濫葛)의 서북(西北)에 있다.
… 글필우(契苾羽) : 다람갈(多濫葛)의 남(南)에 있다.
… 회흘(回紇) : 설연타(薛延陀) 북경(北境), 장안(長安)에서 16,900리 떨어져 있다.
➡➡➡ 이러하다면 : 당시(當時) 용삭(龍朔) 원년(元年)【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 《「정인태(鄭仁泰)를 철륵도행군대총관(鐵勒道行軍大總管), 소사업(肅嗣業)을 선악도행군대총관(仙萼道行軍大總管),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任命)하였는데, 이는 “철륵(鐵勒)”을 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최소(最小)한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진격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 묻는 것은, 위의 글 “➊+➋”에서 말하는 “AD 612年의 장잠도(長岑道)와 AD 661年의 장잠도(長岑道)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㈠ 『수양제(隋煬帝) 때【AD612】의 사건(事件)』이고,
㈡ 『당고종(唐高宗) 때【AD661】의 사건(事件)』이라는 것이고,
㈢ 이에 따라『세월(歲月)이 50년이 지났다』라는 것이고,
㈣ 『24개소(個所) 고구려(高駒驪) 침공로(侵攻路) 중의 1개소(個所)』이고,
㈤ 『3개소(個所) 철륵(鐵勒) 침공로(侵攻路) 중의 하나였다』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요동(遼東) 땅에 있던 “장잠(長岑)”이 50년(年)이 지난 뒤 10,000∼13,000리(里) 떨어진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옮겨졌다」라는 것인가?
➎ 누구 맘대로 지명(地名)을 옮길 수 있나? 「장잠(長岑)」은, 당시(當時) 사가(史家)들의 표현(表現)을 빌리자면 『고구려(高駒驪)는 점점(漸漸) 켜져 동서(東西) 6,000리의 나라(國家)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런 대국(大國)의 핵심요지(核心要地)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이었는데 누구 맘대로 옮겨갈 수가 있겠는가?』
본시(本是) 즉(卽), 「“장잠(長岑)”은, “서토(西土)=서역(西域)=중아(中亞) 땅에 있었다.”」 라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왜냐하면 한반도(韓半島)라는 좁디좁은 땅에서는 “고구려(高駒驪)는 점점(漸漸) 커져 동서(東西)가 6,000리의 땅을 가진 나라였다”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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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때 “수양제(隋煬帝)의 침공【AD612年]과 당고종(唐高宗)【AD661年】시절(時節)의 조선사(朝鮮史)에서는
➊ 삼국사기(三國史記) : 《二十三年, 春正月王壬午, 帝下詔曰 :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 碣之間, 荐食遼. 濊之境. 雖復漢. 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 23년 봄 정월 ‘임오’ 일에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高句驪)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渤海)와 갈석(碣石)사이에 모여, 요(遼)와 예(濊)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 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左十二軍, 出鏤方. ➥ 長岑. 溟海.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等道 ; 右十二軍, 出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踏頓. 肅愼. 碣石. 東𦖮. 帶方. 襄平等道. 絡驛引途, 摠集平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輸者倍之. 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北. 》라고 하였다.
• 〈崇 聚 勃. 碣 之 間, 荐 食 遼. 濊 之 境. :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遼)와 예(濊) 땅을 잠식(蠶食)하여 왔다〉라고 하였다.
➠ 요동(遼東) 땅은 주(周)【周 : BC 1,140 年頃)】이후(以後) 줄곤 ”조선(朝鮮)의 근간지지(根幹之地)였다“는 것은, 이미 고전(古典)에 다 기록(記錄)되어 있는 이야기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미 조선(朝鮮)은 처음부터 “요(遼)”땅에 있었다. 주【周 : BC 1,140 年頃)】로부터 기자(箕子)가 봉(封) 받았다는 땅이 바로 “요(遼) 땅”이다.
그런데 “발갈지간(勃碣之間)”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역사통설(歷史通說)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바로 하북성(河北省) 남쪽 발해(渤海)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발해(渤海) “바닷가(邊)”에 있는 “갈석(碣石)과 발해(渤海)”는, 똑같은 곳이기 때문에 「∼의 사이(之間)」라는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곧 ‘발갈지간(勃碣之間)’이란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의 땅”을 말하는 것인데, 통설(通說)에서 『갈석산(碣石山)에 장성(長城)이 있는데, 이 장성(長城)이 바닷속으로 이어졌다』라고 하였으니, “발갈지간(勃碣之間)”이란 어디 땅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바닷속으로 이어진 ‘몇 치의 땅’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터이다. 이건 익살스러운 희극(戲劇)이다.
그렇다면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 〈큰비(大雨)가 내려 발해(渤海)가 범람(汎濫)했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濊)”는 ‘맥(貊)=맥(貉)’의 한 부족(部族)이며 고구려(高駒驪)의 일원(一圓)이었고, 요(遼) 땅은 이미 “고구려(高駒驪)”의 것이었음은 명백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잘 알고 있는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高駒驪)를 미물(微物)이니 불손(不遜)하니 어리석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資格)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다.
「수(隋)」나라는 기껏해야 “38년”을 지탱한【隋 AD 581-618, (計38年)】왕조(王朝)이며, 사실(事實) 이것 역시 왜곡(歪曲)의 산물(産物)인 괴물(怪物)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수천(數千) 년 전(前)부터 그곳 땅에서 살고 있던 “조선(朝鮮)【총칭(總稱)】영토(領土)”을 가지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벌인 필요는 없다.
이를 다른 각도(角度)에서 바라보면 : 「예(濊) 땅은 부여(夫餘)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부여(夫餘)는 고구려(高句驪)에 이미 수백(數百) 년 전(前)에 흡수(吸收)되었다. 따라서 수(隋)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단 “수(隋)”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일원(一員)으로, 고구려(高句驪)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면 가능(可能)한 일이다.”
또 이해불가능(理解不可能)한 것은 : 수양제(隋煬帝)의 24군 중 “우(右) 12군”에 진격(進擊) 목표지점(目標地點)을 “갈석도(碣石道)”라고 하였다.
“갈석(碣石)”은 발해(渤海) 연안(沿岸)의 바닷가에 있으며, 이곳은 “수양제(隋煬帝)의 땅”이자,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은 “수양제(隋煬帝) 자식(子息)”들인 “수(隋)”나라의 백성(百姓)들이었다. 이런 이곳에 12군(軍) 중의 하나인 “1군”【보병(步兵), 기병(騎兵) 및 정찰대(偵察隊) 포함(包含) 12,000인(人)】을 출정(出征)시켜 평양(平壤)에 집결(集結)하라는 말은, 수양제(隋煬帝)는 제정신을 가진 인간(人間)이 아니었다는 뜻과 같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 “갈석(碣石)과 발해(渤海) 또는 발해(勃海)와 갈석(碣石)”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남(南)쪽 바다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확인(確認)시켜주는 것으로, “갈석(碣石)과 발해(渤海) 또는 발해(勃海)와 갈석(碣石)”은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해 주고 있다.
➋ 東史綱目 下 四郡考 ‘낙랑고(樂浪考)’ 편을 보면 :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최인(崔駰)이 “장잠장(長岑長)”이 되었다』 하였는데, “장잠(長岑)은 곧 낙랑(樂浪)의 속현(屬縣)”이다. 또한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낙랑군 치(樂浪郡 治)는 조선현(朝鮮縣)이다.”라 하였으며, 주석(註釋)에, “우거(右渠)가 도읍(都邑)한 곳을 군치(郡治)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며, 응소(應劭)는, “낙랑(樂浪)은 옛 조선국(朝鮮國)이다.”라 하였다.
➌ 海東繹史 5권 世紀 5 사군사실(四郡事實) : 장잠(長岑) 상고할 수가 없다. 후한(後漢) 때에는 같고, 진(晉) 때에는 대방(帶方)에 속하였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전권(全權)을 휘두르면서 방자하게 굴었는데, 탁군(涿郡)의 하급 관리로 있던 최인(崔駰)이 글을 올려 그의 장단점에 대해 자주 지적하였다. 이에 두헌(竇憲)은 그를 멀리하여, 최인(崔駰)의 고과(考課)를 높게 매겨 바깥으로 내보내, “장잠장(長岑長)”이 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장잠현(長岑縣)은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었다.】 최인(崔駰)은, 멀리 외지(外地)로 나가 뜻을 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드디어 부임(赴任)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라고 전한다.
○ 위에서 인용(引用)한 『조선사(朝鮮史)+대륙사(大陸史)』에 기록(記錄)되어 있는『장잠(長岑)』이란 지명(地名)은 오늘날의 동방(東方)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음은 위의 설명 글 『(6) 신당서(新唐書) 고종(高宗) 본기(本紀) 龍朔 元年. 十月』조(條) 기록(記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 곧, 《龍 朔 元 年. 十 月, 鄭 仁 泰 為 鐵 勒 道 行 軍 大 總 管, 蕭 嗣 業 為 仙 崿 道 行 軍 大 總 管, ➥ 左 驍 衛 大 將 軍 阿 史 那 忠 為 長 岑 道 行 軍 大 總 管, 以 伐 鐵 勒 。 : 용삭(龍朔) 원년(元年)【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 「정인태(鄭仁泰)를 철륵도행군대총관(鐵勒道行軍大總管), 소사업(肅嗣業)을 선악도행군대총관(仙萼道行軍大總管),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任命)하였는데, 이는 “철륵(鐵勒)”을 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 : 新羅 太宗 8, 文武王 元年, 高駒驪 寶藏王 20, 百濟 豊 元年이다.】
즉(卽), 장잠(長岑)은, “철륵(鐵勒)=칙륵(勅勒) 부족(部族)들의 거점지(據點地)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아니면 천우신조(天佑神助)와 같이 『정말로, 정말로 우연(偶然)이 같은 이름으로 존재(存在)하는 동명이처(同名異處)일까?』이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왜냐하면,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대륙사(大陸史)에서도, 「장잠(長岑)은, 현(縣)의 이름으로, 요동(遼東) 땅에 있었으며,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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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륵(鐵勒)을 토벌(討伐)키 위해 선발(選拔)된 세 부대(部隊)는 :
《龍 朔 元 年. 十 月, 鄭 仁 泰 為 鐵 勒 道 行 軍 大 總 管, 蕭 嗣 業 為 仙 崿 道 行 軍 大 總 管, ➥ 左 驍 衛 大 將 軍 阿 史 那 忠 為 長 岑 道 行 軍 大 總 管, 以 伐 鐵 勒 。 : 용삭(龍朔) 원년(元年)【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10월(月), 「정인태(鄭仁泰)를 철륵도행군대총관(鐵勒道行軍大總管), 소사업(肅嗣業)을 선악도행군대총관(仙萼道行軍大總管),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任命)하였는데, 이는 “철륵(鐵勒)”을 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➊ 「鄭 仁 泰 為 鐵 勒 道 行 軍 大 總 管」
• 두리뭉실 “철륵(鐵勒)”이라고 하였는데, 통전(通典)에 의하면 : 『대진(大秦)의 동(東)쪽 및 구라파(歐羅巴)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현 신강성(新疆省)까지 넓은 지역에 산재(散在)해 살고 있던 종족들이다.』
• 장안(長安)으로부터 7,000∼10,000리 하는 곳은, 모두 서역(西域), 서토(西土)를 말하며, 14,000리, 16,900리, 17,500리 하는 곳은 구라파(歐羅巴) 북방지대(北方地帶)로 발틱해(Baltic, 海)에 이르는 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現) 역사상식(歷史常識)을 훌쩍 뛰어넘고,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자각(自覺)해야 한다.
➠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말하기를 :
… 설연타(薛延陀) : 철륵(鐵勒)의 별부(別部)로, 장안(長安)에서 14,000리 떨어져 있다.
… 동라(同羅) :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리 떨어져 있다.
… 다람갈(多濫葛) : 설연타(薛延陀) 동(東)쪽 지경에 있다. 동라수(同羅水)가 있다.
… 곡설(斛薛) : 철륵(鐵勒)의 별부(別部)로, 다람갈(多濫葛)의 북(北)쪽에 있다.
… 아질(阿跌) : 철륵(鐵勒)의 별부(別部)로, 다람갈(多濫葛)의 서북(西北)에 있다.
… 글필우(契苾羽) : 다람갈(多濫葛)의 남(南)에 있다.
… 회흘(回紇) : 설연타(薛延陀) 북경(北境), 장안에서 16,900리 떨어져 있다.
➠ 구오대사(舊五代史) : 경사(京師)로부터 8천(千) 여리(餘里)에 있으며, 본 아장(牙帳)은 ‘천덕(天德)’ 서북(西北) 파릉수(婆陵水) 위에 있다. 【本 牙 在 天 德 西 北 婆 陵 水 上】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회흘(回紇) : 설연타(薛延陀)의 북쪽 파릉수(婆陵水) 위에서 살았으며, 장안(長安)에서 7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 수(隋) 대업(大業) 때는 울독군산(鬱督軍山)에 5부가 있었으며, 당(唐) 정관(貞觀)초에는 한해부(瀚海)에 내부하였다. 설연타(薛延陀)는 장안(長安)에서 14,000 여리 떨어져 있다.
➠ 신당서(新唐書) 회흘(回紇) : 모두 ‘적북(磧北)’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데, 설연타(薛延陀)의 북쪽 ‘파릉수’ 위에서 산다. 경사(京師)에서 7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 무리가 십만(十萬)이며, 뛰어난 병사가 반이다. 땅은 소금끼가 있는 ‘적(磧)’ 지대이며, 큰 다리를 가진 양을 많이 기른다. 【皆散處磧北. 居薛延陀北娑陵水上,距京師七千里. 眾十萬,勝兵半之. 地磧鹵,畜多大足羊.】
➠ 북사(北史) 철륵(鐵勒) : ‘서해(西海)’의 동(東)쪽에, 산(山)과 계곡(溪谷)에 기대어 산다. ‘독낙하(獨洛河)’ 북쪽에 있다. ‘이오(伊吾)’의 서쪽, ‘언기(焉耆)’의 북(北)쪽이며, ‘백산(白山)’에 기대어 산다. ‘금산(金山)’서남(西南)에 있다. ‘억해(嶷海)’를 얻어 그 동서(東西)에 산다. ‘불늠’【佛菻 : 명사(明史) 열전(列傳) : 불늠(佛菻)은 한(漢) 때의 대진(大秦)이다. 당(唐) 때는 불늠(佛菻)이다.】의 동쪽에 있다. ‘북해’(北海)의 남쪽에 있다.【自西海之東, 依山據谷. 獨洛河北. 伊吾以西, 焉耆之北, 傍白山. 金山西南. 得嶷海東西. 拂菻東. 北海南】라고 하였다.
➋ 「蕭 嗣 業 為 仙 崿 道 行 軍 大 總 管」 : “선악도(仙崿道)”에서 “선악(仙崿)”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즉(卽) 오늘날의 천산산맥(天山山脈)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일컫는다.
『선악(仙萼)』: 하천(河川)의 이름으로 『선악하(仙萼河)』를 말하는데, 이곳은 『“적북(磧北)”에 있다.』라고 하였다.
『적북(磧北)』이란 『포류해【蒲類海 : 신강성(新疆省) 언기(焉耆), 이리(伊犁)에 있는 호수(湖水)로 이곳에 포류현(蒲類縣)이 있었으며, “박사등호(博斯騰湖)”를 말한다.】주변(周邊)을 “적중(磧中)”이라 하였으니, “적중(磧中)”을 중심으로, 『적북(磧北). 적서(磧西). 적남(磧南)』으로 구분(區分)한다. 「“적북(磧北)”이란 곧 “천산산맥(天山山脈) 북(北)쪽의 준갈이사막(準喝爾沙漠)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다. 아래를 보자.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山西 仙崿河 :《仙萼河在磧北. 唐龍朔初, 遣鄭仁泰等伐鐵勒, 分軍出仙萼河. 二年, 仁泰等敗鐵勒於天山, 追逾大磧, 至仙萼河, 為敵所敗. 舊唐書:磧北有仙萼河, 唐討回紇, 置仙萼道行軍總管. 新唐書:回鶻牙北六百里至仙娥河. 仙娥, 即仙萼之訛也. : 선악하(仙萼河)는 적북(磧北)에 있다. 당(唐) 용삭(龍朔) 초, 철륵(鐵勒)을 치기 위해 정인태 등이 파견되어, 군대를 나누어 선악하(仙萼河)를 나갔다. 2년, 정인태 등은 천산(天山)에서 철륵(鐵勒)을 부수고, 쫓아 대적(大磧)을 넘어, 선악하(仙萼河)에 이르렀는데, 적(敵)을 그곳에서 쳐부수었다. 구당서(舊唐書) : 적북(磧北)에 선악하(仙萼河)가 있는데, 당(唐)이 회흘(回紇)을 토벌키 위해, 선악도행군총관(仙萼道行軍總管)을 두었다. 신당서(新唐書) : 회골(回鶻)의 아장(牙帳) 북쪽 6백리(百里)에 ‘선아하(仙娥河)’에 도달하는데, ‘선아(仙娥)’는 곧 ‘선악(仙萼)’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➌ 「左 驍 衛 大 將 軍 阿 史 那 忠 為 “長 岑 道” 行 軍 大 總 管」
위의 글 “➊+➋”에서 철륵(鐵勒)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부터 출발(出發)하여 서쪽(西), 서북(西北)쪽을 향해 진군(進軍)했을 것이고,
➠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 아사나충(阿史那忠)”은,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에서 당고종(唐高宗)의 명(命)을 받고, 병사(兵士)들을 이끌고 정반대(正反對) 방향(方向)인 장안(長安) 동(東)쪽인 요동(遼東) 땅의 고구려(高駒驪) “장잠(長岑)”을 향해 진군(進軍)했다?
아마도 그렇게 진군(進軍)했다면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 아사나충(阿史那忠)”은, 「아사나충(阿史那忠)과 지휘관(指揮官)들은 그 자리에서 참수(斬首)되어 기시(棄市)를 당하고, 병사(兵士)들까지도 모반죄(謀叛罪)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당연히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 아사나충(阿史那忠)”과 그 휘하 장병(將兵)들은 서(西)쪽으로, 서북(西北)쪽으로 진군(進軍)하여 “장잠(長岑)”를 바라보며 행군(行軍)했다는 것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렇게 진군(進軍)하여 철륵(鐵勒)을 쳐부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➍ 즉(卽), ➠➠➠ “AD 612년(年)”에는, 『수양제(隋煬帝)의 좌(左) 12군(軍)의 하나인 제2군(軍)의 최종(最終) 진격로(進擊路)가 장잠도(長岑道)였다. 고구려(高駒驪)를 치기 위한 것이었다.』
➠➠➠ “AD 661년(年)” : 『철륵(鐵勒) 또는 ‘회골(回鶻)=회흘(回紇)’을 치기 위해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은,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이 되어 “장잠도(長岑道)를 향해 진군(進軍)했다”』 이러한 예(例)는,
㈠ 「서방(西方)의 ‘철륵(鐵勒)=회흘(回紇)’ 땅에 “장잠(長岑)”이 있었다.」「동방(東方) 고구려(高駒驪) 땅에 “장잠(長岑)”이 있었다.」라는 것인데,
㈡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범양군(范陽郡)=범양국(范陽國)’이 있고, 서토(西土)의 “아무다리아강(Amu Darya, 江)과 시르다리아강(Syr Dar ya,江)”의 양안(兩岸)의 동(東)쪽에 ‘범양군(范陽郡)=범양국(范陽國)’이 있었다는 경우(境遇)와 똑같고,
㈣ 신강(新疆省)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沙漠) 서(西)쪽에 유림현(楡林縣)이 있고, 섬서성(陝西省) 북방(北方)에 유림현(楡林縣)이 있는 경우와 똑같고,
㈤ 신강(新疆)에 유성(柳城)이 있고,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에도 유성(柳城)이 있는 것과 똑같고,
㈥ 신강(新疆) “구차국성(龜玆國城)이 장안성(長安城)과 똑같다”라는 것, “중원(中原)의 장안성(長安城)과 고구려(高駒驪)의 장안성(長安城)과 똑같다”라는 것… …이런 똑같은 지명(地名)을 하나하나 열거(列擧)한다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 《「서방(西方)과 동방(東方)」이라는 아주 이질적(異質的)인 환경(環境), 문화(文化), 풍속(風俗), 인종(人種), 언어(言語) 등이 전혀 다른 땅(地 : 土)에서, 또한 전혀 다른 곳에서 「성곽(城郭)이나 시읍(市邑), 시가(市街), 사찰(寺刹), 사원(寺院) 등을 똑같게 만들고, 주요(主要) 지명(地名) 등을 똑같게 만들 수 있는 확률(確率)」은 얼마나 될까?》
➠➠➠ 이런 확률(確率)은, “제로(0)”일 수밖에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 〈“성곽(城郭), 시읍(市邑), 시가(市街), 사찰(寺刹), 사원(寺院) 등을 똑같게 만들고, 주요(主要) 지명(地名)이 똑같을 경우(境遇)”, 『서방(西方)이든 동방(東方)이든 주인(主人)은 하나였다』라는 것으로 해석(解析)될 수밖에 없다.
즉(卽), 「나라(國家) 또는 ‘민족(民族)=부족(部族)=종족(種族)’이 ‘이동(移動)했다’라는 흔적(痕迹)이요, 그 증거(證據)라고 볼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➎ 조선사(朝鮮史)에서 이를 바라보면 : 『서방(西方) 또는 서토(西土)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땅에 있었던 고구려(高駒驪)【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고려(高麗)=고려(高驪)=고구려(高句驪)=고구려(高駒驪)】가 점진적(漸進的)으로 해가 뜨는 ‘양곡(暘谷)=양곡(陽谷)’의 땅 장안성(長安城)까지 천도(遷都), 이동(移動)하는 과정(過程)에서 만들어지고, 탄생(誕生)되었던 것들이다』라고 해석(解析)할 수밖에 없는 구조(構造)라는 것이다.
○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인들이 말하고 있는 지명(地名) 등에서 아주 혼란(混亂)스럽게 만드는 것이 “적북(磧北)”이라는 곳인데, 역사서(歷史書)에서도,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도, 무협소설(武俠小說)에서도, 영화(映畫)에서도, 게임 등에서도 “적북(赤北)”이라면 “오늘날의 만주(滿洲) 북방지대(北方地帶)나 외몽고(外蒙古)의 광활(廣闊)한 땅을 말한다”라고 하는데, 이건 대표적(代表的)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특이지명(特異地名)이다. 즉(卽),
적중(磧中)•적북(磧北)•적서(磧西)
(1) 자치통감(資治通鑑) 唐紀 26 : 《玄宗先天元年 : 辛酉, 沙陀金山遣使入貢。沙陀者, 處月之別種也, 姓朱邪氏。處月居金娑山之陽, 蒲類之東, 有大磧, 名沙陀, 故號沙陀. : 신유(辛酉), 사타금산(沙陀金山)이 사신(使臣)을 보내 입공(入貢)하였다. 사타(沙陀)는 처월(處月)의 별종(別種)으로, 성(姓)이 ‘주사(朱邪)’이다. 처월(處月)이 사는 곳은 금사산(金娑山)의 남(南)쪽이며,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에, 『대적(大磧)』이 있다. 이름이 사타(沙陀)고, 예로부터 “사타(沙陀)”라 불렀다.》라고 하였는데,
곧, 〈磧(적)은 沙陀(사타)이며, 沙陀(사타)는 “비탈진 모래언덕”이란 뜻이다〉라고 고전(古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2)『대적(大磧)』 :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석(註釋) : 《考 異 曰: 薛 居 正 五 代 史 後 唐 太 祖 紀 曰: 太 祖 姓 朱 邪 氏 ,始 祖 拔 野 古 ,貞 觀 中 為 墨 離 軍 使。: 고이(考異)에서 이르기를 : 설거정(薛居正)의 "오대사(五代史)" 후당(後唐) 태조기(太祖紀)에서 이르기를 : 태조(太祖)의 성(姓)는 주사씨(朱邪氏)이다. 시조(始祖)는 “발야고(拔野古)”이다. 정관(貞觀) 중에 “묵리(墨離)”군사(軍使)이다. 太 宗 平 薛 延 陀 ,分 同 羅、僕 骨 之 人 ,置 沙 陀 都 督 府 ,蓋 北 庭 有 磧 曰 沙 陀 ,因 以 名 焉。: 태종(太宗)이 설연타(薛延陀)를 평정(平定)하고 동라(同羅), 복골(僕骨)인 들을 나누어 사타도독부(沙陀都督府)를 두었는데, 모두는 북정(北庭)에 있는 적(磧)을 “사타(沙陀)”라 하여, 이것으로 인하여 이름이 되었다. 永 徽 中 ,以 拔 野 古 為 都 督。其 後 子 孫 五 世 相 承 ,曾 祖 盡 忠 ,貞 元 中 繼 為 沙 陀 府 都 督。 : 영휘(永徽) 중 ‘발야고(拔野古)’는 도독(都督)이 되었으며, 그 뒤로 자손(子孫)들 5세로 서로 계승하였는데, 증조(曾祖) ‘진충’에 이르러, 정원(貞元) 간에 ‘사타부도독(沙陀府都督’을 이었다.》라고 하였다. 곧,
『적(磧)』의 땅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내에 있으니, 오노목제【烏魯木齊:우루무치】와 토노번(吐魯番)이며, “포류해(蒲類海)”는, 『오노목제(烏魯木齊:우루무치)와 토노번(吐魯番) 서남(西南) ‘언기(焉耆), 이리(伊犁)’주위에 있는 ‘박사등호(博斯騰湖)’를 말하는 것이며, 이곳에 옛 ‘포류현(蒲類縣)’이 있었다.』 이곳의 동(東)쪽에 대적(大磧)이 있으며, “적(磧)의 가운데 땅”이라고 하여 ‘적중(磧中)’이라 한다.
(3) 《구양수오대사기(歐陽修五代史記 曰)에서 이르기를 :《李氏之先, 蓋出於西突厥, 本號朱邪, 至其後世, 別自號曰沙陀, 而以朱邪為姓, 拔野古為始祖. 其自序云, 沙陀者, 北庭之磧也。當唐太宗時,破西突厥諸部, 分同羅, 僕骨之人於此磧 ,置沙陀府 : “이씨(李氏)”의 선조는 서돌궐(西突厥)에서 나왔다. 본래(本來)는 “주사(朱邪)”라고 불렸는데, 그 후세에 스스로 호칭해 이르기를 “사타(沙陀)”라 하였으며, “주사(朱邪)”를 성(姓)으로 하였고, 발야고(拔野古)는 시조다. 그 스스로 서(序)에서 “사타(沙陀)”는 “북정(北庭)의 적(磧)이다”라 하였다. 당시 당(唐) 태종(太宗)이 서돌궐을 깨뜨리고 동라(同羅), 복골(僕骨) 인들이 나누어 이 “적(磧)”에 사타부(沙陀府)를 두었다. 蓋沙陀者大磧 也, 在金莎山之陽, 蒲類海之東, 自處月以來居此磧, 號沙陀突厥. : 모든 “사타(沙陀)”는 “대적(大磧)”이다. “금사산”의 남쪽(陽)에 있으며, “포류해”의 동(東)쪽이다. “처월(處月)”이래로 이 “적(磧)”에 살았으며, 호칭하기를 “사타돌궐(沙陀突厥)”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 여기서 또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철륵(鐵勒)=칙륵(勅勒)”의 한 부족(部族)이었던 “발야고(拔野古)와 복골(僕骨)”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 『독락하(獨洛河) 북쪽에 “복골(僕骨), 동라(同羅), 위흘(韋紇), 발야고(拔野古), 복라(覆羅)” 등이 있는데, 나란히 “사근(俟斤)”이라 호칭하며, 몽진(蒙陳). 토여흘(吐如紇). 사결(斯結). 혼(渾). 곡설(斛薛) 등의 여러 성(姓)이 있으며, 뛰어난 병사가 2만쯤 된다.』라고 서두(序頭)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 문제(問題)는 : “복골(僕骨). 동라(同羅). 위흘(韋紇). 발야고(拔野古). 복라(覆羅)”등은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리∼16,900리 정도 떨어져 있다”라고 한 것이다.
㈠ “위흘(韋紇)=회흘(回紇)=회골(回鶻)”은, 장안(長安)으로부터 16,900리 떨어져 있다.
㈡ “동라(同羅)”는, 설연타의 북(北)쪽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17,500리다.
㈢ “설연타(薛延陀)”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4,000리 떨어져 있다.
㈣ 복골(僕骨) : 《복골(僕骨)은 철륵의 별부로, 그 풍속은 돌궐과 거의 같다. 다람갈(多濫葛)의 동(東)쪽에 있다. 동라(同羅)와 함께 서로 두터운 관계로 이웃끼리 사이가 아주 좋다. 최고(最高)로 북쪽에 치우쳐 산다: 僕骨,鐵勒之別部, 習俗與突厥略同. 在多濫葛東境, 勝兵萬餘, 與同羅宿敦鄰好, 最居北偏.》라고 한 것을 보면 :
이들 복골(僕骨)은, “동라(同羅)와 이웃사촌으로 살았다”라는 것인데, “동라(同羅)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7,500리 떨어져 있었다”라는 것이다.
㈤ 발야고(拔野古) : 복골(僕骨)의 동(東)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무다리(木脚)를 하고서, 얼음 위에서 사슴(鹿)을 쫓는다. 경종(耕種)은 사렵(射獵)이 업(業)이다. 나라에는 좋은 말이 있다. 또 철(鐵)이 나온다. 풍속(風俗)은 철륵과 똑같고, 언어(言語)가 조금 다르다.[人皆著木腳, 冰上逐鹿. 以耕種射獵為業. 國多好馬, 又出鐵. 風俗與鐵勒同, 言語稍別]라고 하였으니, 추운 곳에 사는 종족(種族)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이들이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중부지방(中部地方)의 “적중(磧中)”에 살았다』라는 말은, 『최소한(最小限) 이들이 ➊ 우랄산맥(Ural, 山脈)과 카스피해(Caspian, 海)를 건너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을 거쳐 신강성(新疆省)까지 이동(移動)했거나, ➋ 당(唐) 태종(太宗)에 의해 강제(强制) 이동(移動) 당했거나 ➌ 왜곡(歪曲), 조작(造作)으로 신강(新疆) 땅에 만들어졌거나』라는 것으로 해석(解析)될 수밖에 없다.
➠ 위의 “신강주변도(新疆周邊圖)”에서,
㈠ 천산산맥(天山山脈) 남(南)쪽의 쿠져, 사이람, 구를라 지역이 적중(磧中)이며,
㈡ 그 서(西)쪽의 우치투르판, 악수, 이식쿨호 등지(等地)가 적서(磧西),
㈢ 그 북(北)쪽의 천산산맥(天山山脈)과 북방지대(北方地帶) 준갈이등지가 적북(磧北),
㈣ 그 남(南)쪽의 타림분지, 포창해등지가 적남(磧南)이다.
㈤ “적동(磧東)”은 없다. 왜냐하면 그 동(東)쪽은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금산산맥(金山山脈)=알타이산맥(Altal,山脈)”에 닿기 때문이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용어(用語), 지명(地名), 특정(特定)한 곳을 가리키는 특이지명(特異地名), 산명(山名), 강명(江名)” 등을 21세기(世紀) 오늘날의 것으로 이해(理解)하면서 역사연구(歷史硏究)를 한다면 : 치명적(致命的)인 오류(誤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 “조선사(朝鮮史)”는 아주 치밀(緻密)하게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을 거쳤으며, 이는 시방(時方)도 진행형(進行形)이며, 「“서구(西歐)+일본(日本)+중국(中國)”등지에서는, 국가적(國家的)으로 대대적(大大的)인 지원(支援)을 아낌없이 받으며 공개적(公開的)으로 진행(進行)되고 있으며, 이는 애국애족(愛國愛族) 개념(槪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정반대(正反對)의 상황(狀況)이 벌어지고 있다. 즉(卽)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은, 정부(政府), 정권(政權)의 적극적(積極的)인, 아낌없는 지원(支援)과 협력(協力)으로 ‘명예(名譽)와 부(富)와 출세(出世)’를 보장(保障)받기에 이른다.
➡➡➡ 여기에,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을 몰아내려는, 자주(自主)와 자립(自立)과 독립(獨立)을 외치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탐구(探求), 연구(硏究)하는 재야학자(在野學者)들은… …꼴통 진보(進步) 또는 좌익계(左翼系)로 몰리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현실(現實)이다.
이러한 현상(現狀)은 : 1,948년 이후(以後)부터 지금(只今)까지, 이 땅에서 친일파(親日派)가 득세(得勢)하는 것과 무관(無關)치 않으며, 이는 국민(國民)들의 역사인식(歷史認識)과도 무관(無關)치 않은 것이다.
이게 가장 슬픈 일이고, 분노(憤怒)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요즘 KBS에서 방영(放映)하는 「고려(高麗)와 거란(契丹 : 遼)」의 전쟁사극(戰爭史劇)이 시청자(視聽者)들에게 인기(人氣)가 많다고 하는데, 「고려(高麗)와 거란(契丹 : 遼)」이 싸우는 그곳은 「한반도(韓半島) 땅이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인(韓國人)들은, 그 전쟁(戰爭)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관심(關心)조차 없다.
거란【글란(契丹) : 요(遼)】은, 본시(本是)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으로 요택(遼澤)【선비(鮮卑)들이 소멸(消滅)된 뒤에】가운데에 살던 자(者)들로,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보면 : 「요택지중(遼澤之中)에서 남(南)쪽으로 유관(楡關)까지 1,100리(里) 떨어져 있다. 또 유관(楡關)에서 남(南)쪽으로 700리 떨어져 유주(幽州)가 있다【舊五代史 : 契丹者, 古匈奴之種也. 代居遼澤之中, 潢水南岸, 南距榆關一千一百里, 榆關南距幽州七百里, 本鮮卑之舊地也】」라고 하였으니,
이를 역(易)으로 올라가면 : 『유주(幽州)에서 북(北)쪽으로 700리(里)를 가면 ‘유관(楡關)=투관(渝關)=산해관(山海關)’이 있고, 이곳에서 북(北)쪽으로 1,100리(里)를 가면 요택지중(遼澤之中)에 닿는다』라는 말이 되는데,
이게 말 그대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은, ‘유관(楡關)=투관(渝關)=산해관(山海關)’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는 ‘진황도시(秦皇島市)’라고 설명(說明)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유주(幽州)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진황도시(秦皇島市)인 ‘유관(楡關)=투관(渝關)=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남(南)쪽으로 700리(里)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강소성(江蘇省)’ 앞 바다 심해(深海)에 “유주(幽州)”가 있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건 선조(先祖)들을 능멸(凌蔑)하는 행위(行爲)다.
이런 설명(說明)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인정(認定)을 받으려면 위에서 말하는 지형적(地形的)인 조건(條件)을 갖춘 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동방(東方) 땅에는 없다’라는 것이고 『서방(西方)과 동방(東方) 사이 땅인 “중아(中亞)” 땅에 존재(存在)할 수밖에 없다』라는 점이다.
➡➡➡ 이 설명(說明)대로 〈“유관(楡關)은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투관(渝關)==림유관(臨楡關)=림투관(臨渝關)】”이라고 하는데 : 그 남(南)쪽 700리(里)에 유주(幽州)가 있다고 하였으니, 산동성(山東省)과 강소성(江蘇省) 사이의 앞바다 한가운데에 “유주(幽州)”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이게 가능(可能)한 일인가?
➡ “고전(古典) 원전(原典)” 기록(記錄)대로 : 이들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찾으면 : 이들은 “서토(西土)=서방(西方)”에 있어야 하는 종족(種族)들이다.
➡ 「그런데 한국인(韓國人)들은 무슨 헛소린가? 한다! 알아보지도 않고, 설명(說明)조차 들으려 하지 않고, 뭔 헛소리? 하면서 애국자(愛國者) 나셨네! 하면서 비웃는 말투로 말이다.」
북사(北史) 한 구절(句節)을 보자 : 《太和三年, 高句麗竊與蠕蠕謀, 欲取地豆干以分之. 契丹舊怨其侵軼, 其莫賀弗勿干率其部落, 車三千乘, 眾萬餘口, 驅徙雜畜求內附, 止於白狼水東 : 태화(太和) 3년【AD 479, 高駒驪 長壽太王 67年】에 고구려(高駒驪)가 몰래 연연(蠕蠕=柔然)과 모의(謀議)하여 “지두간(地豆干)”의 땅을 빼앗고 나누기로 하였다. 글란(契丹)은 구원(舊怨)으로 앞서 침략하고는, 막하불물간(莫賀弗勿干)은 수레 삼천(三千) 개에 무리 만여(萬餘) 구(口) 및 가축(家畜)들과 함께 내부(來附)하면서 백랑수(白狼水) 동(東)쪽에서 머물렀다. 중략(中略). 其後復為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이 그곳을 핍박(逼迫)하였다. 또 만가(萬家)=만호(萬戶)가 고구려(高駒驪)에 위탁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들 “거란(契丹 : 遼)”이 동아세아(東亞世亞)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으며, 그 후손(後孫)이나 후예(後裔)들이라고 하는 무리 또한 없다.
왜냐하면 “옛 거란【契丹 : 遼】족”들은 주변(周邊)의 부족(部族), 종족(種族)들에게 흡수(吸收), 동화(同化)되어 그 흔적(痕迹)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程度)로, 다른 종족(種族)의 이름으로 불리며, 구분(區分)되어 오늘날의 동구라파(東歐羅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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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고전원문(古典 原文)과 함께 설명(說明)한 것들은, 모두 옛 조선(朝鮮)의 영토(領土) 내(內)에 있었던 것들이다.
『서방(西方)과 동방(東方)의 땅에 걸터앉아 있었던 옛 나라가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였다.』
➡ “지중해(地中海)∼흑해(黑海)∼장백산[長白山-白頭山=Belukha,mt]”으로부터 기원(起源)하는 고대(古代)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점진적(漸進的)으로 동천(東遷)하게 되는데… …구미호(九尾狐) 또는 서왕모(西王母)의 전설(傳說)이나 설화(說話)들도 고대(古代)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동천(東遷) 과정(過程)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지중해(地中海)∼동구라파(東歐羅巴)∼흑해(黑海)∼장백산[長白山=白頭山=Belukha,mt]”사이의 여러 땅에서 살아가던 조선족(朝鮮族)들의 지명(地名)이 옛 고전원전(古典原典)에 기록(記錄)이 될 수 있었던 이유(理由)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萬若),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일부(一部) 땅에서 반만년(半萬年) 아니 수만(數萬) 년을 살아왔다면 : 그 지명(地名)들이 서(西)쪽 “1 만리(萬里)∼1만(萬) 5 천리(千里)∼2 만리(萬里)”의 먼 땅에 있어야 할 이유(理由)도 명분(名分)도 없다. 지명(地名)은, 흔적(痕迹)이요, 유물(遺物)이며, 유적(遺跡)이다.
○ 「조선사(朝鮮史)를 폄하(貶下)하는 자(者)들이 누군가?」 바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이며,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와 친일(親日)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다.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에는 : 분명(分明) “토착왜구(土着倭寇)” 세력(勢力)이 존재(存在)한다. 보수우파(保守右派) 속에 기생(寄生)하면서 본국(本國)과 소통(疏通)하며, 한민족(韓民族)의 발전(發展)을 방해(妨害)하며 저지(沮止)하며 끊임없이 국론분열(國論分裂)을 획책(劃策)하고 있다.
또 “빨갱이”의 원조(元祖)가 정적(政敵)들에게 들이대는 “빨갱이” 타령(打令)을 보면, 이건 희극(戲劇)이다. 『보수우파(保守右派) 뒤에 숨어있는 친일(親日)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은 태극기(太極旗)와 성조기(星條旗)와 일장기(日章旗)를 흔들어 대는 것을 보면 … 이들이 무슨 세력(勢力)이겠는가?』
오늘의 열도(列島) 우익(右翼)과 정치계(政治界)는 : 오늘도 독도(獨島)를 향한 야욕(野慾)을 숨기지 않고 있으며, 남북한(南北韓)을 이간(離間)질시키며 통일(統一)의 최대(最大) 장애물(障碍物)이 된 지 오래다. 여기에 부하뇌동(附和雷同)하는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들까지, 한민족(韓民族)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다. 이건 팩트[Fact]다.
○ 「3.1절」이다.
AD 1,919년 3월 1일 :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이 일제(日帝)의 식민통치(植民統治)에 항거(抗拒)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發表)하며 조선(朝鮮)의 독립(獨立) 및 그 의사(意思)를 만방(萬邦)에 알린 날」이라고 정의(正意)한다.
무려(無慮) 「104년 전(前)」의 일로, 「올해가 105주년(週年)이 되며, 1세기(世紀)가 훌쩍 지났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어떤가?
AD 1,919년(年) 그때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當時)는 일제(日帝)에 강점(强占)되어 식민통치(植民統治)를 당했고, 그 이후(以後)는 “미(美) 군정(軍政)”과 함께 “미국(美國)의 반식민지(半植民地)” 시대(時代)를 살고 있다.
➠➠➠ 「당시(當時)의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이 영면(永眠)하고 있는 지하(地下)에서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 지금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망징패조(亡徵敗兆)의 기류(氣流)에 가둬 놓고 있다. 바로 “윤석열”을 위시(爲始)한 친일파(親日派)들의 득세(得勢)와 잃어버린 주권(主權)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좀 심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결코 심한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國家)의 3대 요소가 무언가? 「국민(國民)과 영토(領土)와 주권(主權)」이다.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국민(國民)과 영토(領土)는 있으나, 주권(主權)【국가(國家) 의사(意思)를 최종적(最終的)으로 결정(決定)하는 최고(最高)ㆍ독립(獨立)ㆍ절대(絕對)의 권력(權力)】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부분(部分)인 국가(國家) 방위(防衛)와 수호(守護)에 관한 전시작전통제권(戰時作戰統制權)이 없다는 것이다.
평화시(平和時)에도 군대(軍隊)가 필요(必要)할까? 그것은 억제력(抑制力)으로 필요(必要)한 것이고,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하면, 국가(國家)의 방위(防衛)와 수호(守護) 및 국민(國民)의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보호(保護)하기 위해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한 것인데, 가장 핵심적(核心的)으로 군대(軍隊)를 동원(動員), 이동(移動) 및 적(敵)을 맞아 싸울 작전(作戰)을 펼칠 수 있는 작전권(作戰權)이 없다는 것은, 이런 군대(軍隊)는 있으나 마다한 것이다.
평화시(平和時)에만 사용(使用)할 수 있는 군대(軍隊)가 왜 필요(必要)하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미국(美國)의 식민(植民) 통치(統治)를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이야기다.
1. 전시작전통제권 [시사상식사전] : 한반도 유사시 군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로, 현재 우리나라의 전시작전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다.
【“네이버 지식 IN”을 인용(引用)해 보면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 포격사건을 자행 : 해병대원 전사자 2명, 군인 부상자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 민간인 부상자 3명, 도합 사망자 4명과 부상자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연평도의 각종 시설 및 가옥이 파괴되어 재산 피해를 입었든 사건을 기억 하시겠지… …이사건 이후 MB가 보복한다고 ‘KF-15’를 두대 출격(사실상 무장도 하지않은 빈수례로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식)시켰다가 주한 미군 사령관 “월트 샤프” 대장의 명령으로 즉각 회항한 사건은 ----작전통제권의 갑을 관계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네이버 지식 IN”을 인용(引用). 끝. 】 이게 ‘팩트’다.
➡➡➡「“전시작전통제권”에 대해 “정부(政府)”를 대변(代辯)하는 듯한 분들의 헛소리를 하지만, 국민(國民)들은 개돼지가 아니요, 바보가 아니다. 국민(國民)들을 속이려 하지 마라.」
2. 대한민국 정책 자료실, 정책자료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최종수정일 : 2024.02.07.] : 〈작전통제권이란? : 군사적으로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은 특정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즉, 현재의 ‘한미 연합방위체제’ 하에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국 합참의장”이, “전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군사령관”이 각각 행사하고 있다. 전시 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은, 전시에 연합사령관이 한미안보협의회의(SCM) 및 한미군사위원회회의(MCM)를 통해 “한미 양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지정된 부대를 지휘하는 제한된 권한이며, 줄여서 ‘전작권’이라고 한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설명(說明)한 : 그 이하(以下)도 그 이상(以上)도 아니다. 즉(卽) 평화시(平和時)에는 작전권(作戰權)이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헌데 평상시(平常時)에 군대(軍隊)를 무엇에 쓸까? 내란(內亂)이나 반란(叛亂) 등을 진압(鎭壓)하기 위해서… …그러나 반대(反對)로 우리나라에서는 평화시(平和時)에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하여 ‘쿠데타’을 일으키는 등의 민주주의(民主主義) 헌법(憲法)을 강제(强制) 정지(停止)시킨 전례(前例)가 있다.
진짜 필요(必要)한 작전권(作戰權)은 : “전시작전통제권(戰時作戰統制權)”이다. 위 ‘정책(政策)브리핑’에서도 설명(說明)하고 있듯이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의 “OK” 싸인이 없으면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해도,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적(敵)을 섬멸(殲滅)할 수 있는 작전(作戰)을 펼칠 수 없으며, 또한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로 되어있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로, 기분 상하지 않게 ‘양국(兩國)의 대통령(大統領)’이 협의(協議)하여… …라고 하지만,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하면 양국(兩國)은, 자국(自國)의 이익(利益)을 위한 우선순위(于先順位)로 정책(政策)을 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結局) “미국(美國)의 결정(決定)”에 따라 웃기는 상황(狀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게 현실(現實)이요, 이건 팩트[Fact]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說明)하지 않고, 국민(國民)을 호도(糊塗)하려 하는 짓은, 반국가적(反國家的) 행위(行爲)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주인(主人)은, 국민(國民)이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대통령(大統領)이 주인(主人)인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주인(主人)은 바로 국민(國民)들이다.”〉
「대통령(大統領)은, 주인(主人)인 국민(國民)들에게 봉사(奉仕)하기 위해 스스로 후보(候補)가 되어 선출(選出)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을 제대로 구분(區分)하지 못하고 ‘대통령(大統領)’이 ‘이 나라의 주인(主人)’인 냥 하는 행위(行爲)는,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무지무식(無知無識)한 것이고, 주권(主權)을 가진 국민(國民)을 능멸(陵蔑)하는 행위(行爲)다.
○ 「“3.1절”을 맞아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의 애타는 외침을 마음속 깊이 새기자.」
제대로 된 “자주(自主), 자립(自立)”의 “독립(獨立) 국가(國家) 건설(建設)”을 위해 : 국민(國民) 모두 “국론(國論)을 통일(統一)시킬 수 있는 훌륭한 일꾼들을 선택(選擇)해야 한다”라는 정의감(正義感)과 애국애족(愛國愛族) 사상(思想)에 사로잡혀야 한다.
정의감(正義感)과 애국애족(愛國愛族) 사상(思想)에 사로잡히는 일은 열 번, 스무 번 사로잡혀도 좋을 것 같다.
2024년 02월 29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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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양과 장안성과 한성"에 대한 것은 이쯤으로 하고,
다음 편에서는 "대동여지도와 김정호"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김정호"라는 분에 대해서 백과사전부터 인터넷까지, 고서(古書)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알 길이 없는, 생몰년대도 없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60 평생중에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빼고 나면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없는 평생을 지도를 만들기 위해 팔도강산을 답사했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가장 급한 해결책은 먹고 사는 것이고, 경비입니다. 도대체 누가 김정호에게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게 평생을 지도제작에 매달릴 수 있도록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면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의 생몰년대도 모르는 것이고, 그의 출생부터 모든 것이 "추정, 추측"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사견(私見)을 전제로 대동여지도와 현지도, 우주에서 본 한반도지도"등을 함께 보면서 "김정호"라는 분과의 대화를 해보고자 합니다.
좋은 의견이나 김정호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면 함께 해 보고자 합니다.
즉,
"金正浩(김정호)라는 분은,
1. 조선인(朝鮮人)인가?
2. 왜인(倭人)인가?
3. 일제(日帝)가 만들어낸 허구(虛構)의 인물(人物)인가?
판단키 어려운 부분입니다.
헐버트가 1905년에 작성한 제주도 지리 연구논문을 보았습니다. 제주도를 그린 또 다른 지도에서는 Dutch island라 적혀있고, 네덜란드 섬이란 것이지요. 다 아시다시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협력관계 이상이었다고 보여지니까요. 보고서를 쓸 정도면, 동일체 일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도를 퀄파트라 적어 놓았더군요. Quelpart 로 검색하니까 바로 1905년 헐버트의 제주도 지리연구서가 나오더군요. 그당시에는 한라산이라고 표현했는데, 섬이름은 Quelpart 라 불렸다고 하더군요. 일본이 영국이고, 네덜란드이고 그러니까 이자들이 한반도를 다 뒤져서, 지도를 작성하지 않았나 쉽습니다. 뭐 거제도에서 영국놈들이 4~5년 지도를 그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선지리서에 한라산이 고려시대 폭발한 것을 인용하면서, 상세히 폭발 장면 현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https://jeju.guru/h-b-hulberts-the-island-of-quelpart/
안녕하세요! "지천태"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좋은 정보를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카페에 대한 성원과 깊은 관심에도 감사들 드립니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라는 분의 작품 세계를 보면 : 당시의 실정으로, 한 사람이 발로 걷고, 뛰며, 달리며 8도강산을 헤집고 다녔다는 이야기로 보면 : 전국 팔도 요지 요지에 김정호를 알만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어야 하며, 지방 곳곳에 김정호와 관련된 야사(野史)가 넘쳐나와야 정상적인 사회였을 겁니다.
그러나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며,
김정호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모든 것들이 '특급비밀' 등급을 받고 그 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전해집니다.
이건 쉽게 말해 "그런 인물은 실존하지 않았다"는 말을 대신하는 말과 같습니다.
특히 그 분의 작품이라는 지도와 지리지를 보면 황당함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지리학의 선구자"라는 칭송과 찬사를 거품을 물며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편에서 3편으로 나누어지는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관한 필자의 해설은,
아마도 "김정호를 칭송하며 찬사를 쏟아내는 분들에게는 많은 욕을 먹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진실은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제작했다는 지도는 조선반도 즉 한반도를 그려 놓았는데,
서문과 지리지에서는
전혀 다른 땅을 설명하고 있다면 이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곧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측에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거짓이 판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거짓의 사회는 부역매국노와 친일분자와 친일사대주의자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들로부터 거짓사회의 모든 것들이 이어져 왔기 때문입닉다.
언제 쯤 우리는 거짓을 몰아내고 진실이 판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까요?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리며,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