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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1일 [연중 제6주일]
마르코 1,40-45
은총 때문에 지옥문도 열렸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믿음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무슨 믿음일까요?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능력자시라는 믿음입니다. 거기다가 하나의 믿음이 더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그런 은총을 청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강아지 취급을 당하면서도 강아지도 주인 자녀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자신이 은총을 청할 자격이 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치유된 나병 환자는 처신을 잘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음에도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고 다니십니다.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셨다는 소문은 많은 나병 환자들을 불러 모으게 될 것이고 또한 예수님도
부정하게 되셨을 것이기에 비난의 대상도 되실 수 있으십니다.
어쨌든 이러한 불순종은 예수님께서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게 만듭니다.
이 말은 치유를 입은 나병 환자가 오히려 그 받은 은총으로 예수님과 멀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언제나 은총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지옥에 이르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거부할 때 지옥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승에 선인과 악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은총의 피를 흘리신 후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천국도 그렇지만 지옥의 문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 때문에 열립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1033항)
지옥이란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거부한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천국의 은총을 맛보았으면서도 스스로 거부한 이들은 지옥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살에 177억 복권에 당첨된 마이크 캐롤이란 영국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이혼과 새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면에서 비뚤어지는 아이로 성장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아닌 열등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열등감은 자격이 없다는 스스로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돈을 얻게 되니 자기 열등감을 그것으로 올리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로 4년 만에 다 탕진하고 청소부와 공장 노동자를 하며 간신히 살아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삶을 살기는 했지만, 훨씬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모든 것들이 은총입니다.
그 은총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할 때 더 큰 은총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신화에 따르면, 포세이돈은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크고 흰 황소를 주었는데, 그 황소는 다시 신에게 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미노스 왕은 그 황소를 이용해 왕이 되었음에도 신에게 다른 황소를 바쳤습니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그 황소가 왕비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미노스는 어쩔 수 없이 미노타우로스를 미로에 가두고 산 사람을 계속 제물로 바쳐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지옥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이 저주가 되지 않게 하려면 그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미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미 에덴동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땅의 소출의 십분의 일은 감사히 주님께 바쳐야 했지만, 바치지 않아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키체덱에게 바칩니다.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가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미사의 상징입니다.
미사는 은총 중의 은총인 생명나무,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은총으로 우리 자격이나 높이려 십분의 일도 봉헌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성체성사가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으로 받은 외아들 이사악까지 감사히 바치려고 했음을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1일 [연중 제6주일]
복음: 마르 1,40-45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인 동시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러나 주일과 겹치는 관계로 전례 우선순위에 밀려 오늘은 기념없음으로 표시됩니다.
돌아보니 저도 이런저런 병고에 참 많이 시달렸습니다.
특히 30여 년 전에는 상태가 심각해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은혜롭게도 그때 마침 루르드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제가 갈 상황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루르드에 딱 도착했는데, 당시 1월 초순이었는데, 아직도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동굴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테트의 생가를 방문하고, 사흘 내내, 묵주기도와 함께 루르드를 산책하였습니다.
루르드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따뜻한 느낌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성모님께서 평생토록, 사시사철, 시시각각으로
제 인생 여정에 동반하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병고로 인해 제 내면에 고착화되어 있던 근심 걱정과 불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저를 꼭 안아주신다는 느낌이 참 행복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잘 왔다. 내 아들아!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느냐?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아들 예수님께서 잘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병자들의 위로요 안식처인 성모님께서 병고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극복 가능한 질병은 치유시켜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병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병고를 통해 주님의 고통과 수난에 더 깊이 참여하며, 더 영적으로 변화되길 더불어 청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병고에 대한 오해과 편견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과거에는 병에 대한 오해가 참 많았습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도 나병은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기에 그 벌로 인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병고와 맞서느라 죽을 지경인데, 당시 환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손가락질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오늘 우리 안에서 병고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면, 조용히 기도해 드리고, 투병을 위한 도움을 드리기보다는 다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그렇게 절친하게 지냈던 관계인데도, 병문안 한번 가지 않습니다.
“그 소식 들었어? 누구누구가 말기암이래?
그렇게 퍼마시더니, 그때부터 내가 알아 봤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인데, 처자식들은 어짠댜?”
병이라는 것은 결코 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무조건 적대시하고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까칠한 손님 같은 존재입니다.
잘 다스리고 보살피며 극복해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알게 되고, 영원한 보루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많은 환자들께서 품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투병 생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투병하느라 돈이란 돈은 다 까먹고,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병과 맞설 때,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모든 환자 여러분들, 여러분의 삶에 분명히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아니라 환자 여러분도 병실 안에서, 병과 함께 훌륭한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1일 [연중 제6주일]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이었다. 레위기에도 나오지만, 나병에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아무에게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레위 13,45-46). 떠돌아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여겨졌다. 이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41절) 라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하는 고통의 의미이다.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에 대시며(41절)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 것이다.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다른 행위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기적이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인간 사이의 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경계가 모두 극복되어 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또 예수께 그 기적 후에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몰려가지만, 그분은 백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지금의 모든 가르침은 오로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충만하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선교 사명이 자칫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칫 현세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래서 우리의 자제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10,31-11,1). 이것을 나병환자의 치유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평범한 생활 테두리를 넘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길 때에도 기꺼이 수락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펴나가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던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초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