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념'은 '지금 금' 자 밑에 '마음 심'을 붙여서 만들어졌다. 나는 한동안 왜 '념'이 그렇게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했다. 각묵스림과 대림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숙독하고 각묵스님의 강의를 여러편 듣고 또 그 '지침'에 근거하여 수행해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이것도 작은 '깨달음' 같다.
밤하늘의 '별'은 모두 '과거'의 모습이다. '빛'이 일정한 속도로 달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태양조차도 그렇다. 8분 20초전에 출발한 빛을 보고 있으니 8분 20초 전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원리를 적용해 보면 우리가 '6개의 감각기관'으로 '아는' 모든 것이 전부 '과거'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빛, 소리 등의 외부의 '자극'에 감각기관이 반응하고 이 '정보'가 뇌에서 해석된 다음 '반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뇌'가 아닌 다른 뇌에서 하는 '조건반사'적 반응은 아예 '모른 채' 진행되기 일쑤이다. '앗 뜨거'하고 손을 뗀 후에야 대뇌는 '손을 뗐구나' 알아차릴 뿐이다. 사실 위빠싸나 수행이란 이런 '자극'과 '반응'을 빠르게 '알아차리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알아차릴 '대상'들이 이렇듯 과거에 일어난 일이니 당연히 수행에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가급적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밀착해야 한다.
이와같은 논의를 통해 왜 '사띠'가 '념'으로 번역되었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경전을 번역하던 중국의 유학승들이 '고심'끝에 새롭게 '창안'한 한자어가 아니었을까? 수행을 통해 '알아차릴 대상' 즉 '법'이라는 것들이 짧은 시간안에 명멸하면서 더군다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때는 이미 '과거'이기에, 제대로 '법'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가능한 그 '법'이 일어나는 '순간'으로 밀착해 들어와야 한다. 바로 '법'이 발생하는 순간 즉 '현재시점'에서 알아차려야 하며 이런 이유로 '지금 금' 자 밑에 '마음 심'을 붙여서 글자를 창안한 것 아닐까 한다.
금강경의 구절을 통해 왜 사띠가 '염'으로 번역되었는지 알아보자. 금강경에 '여리작의'라는 장이 나온다. 여기 '작의'가 중요하다. '작의'란 가령 '화두'를 잡는 것과 같은 수행방법을 의미한다. 여기서 '작의'라고 한것은 '자연'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남방불교의 '법'은 '자연현상' 전부를 일컫는 의미일때가 있다. 좁게보면 '위빠사나 수행'에서 일종의 '관찰대상 목록'이다. 넓게보면 그 모든 '것'으로서 사람의 기능중에 '아는 기능'에 '인식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안다'는 것도 사실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기능'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아는' 기능을 그냥 '자연상태'에 내버려 두게 되면 빠르게 명멸하면서 이곳 저곳 '감각정보'를 추적하여 '감각기관'으로 왔다갔다 하게 된다. 소리가 나면 들리는 마음은 '귀'에 와서 머무르면서 소리를 좆는다. 빛이 나타나면 '눈'으로 가서 모양과 형태를 '만들고' 색깔을 인식한다. 이렇게 6군데 감각기관을 이곳 저곳 헤매면서 오로지 대상을 아는 '기능'만을 하는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들락거리게 된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정글속의 원숭이'로 비유하고 있다. 북방의 '선어록'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 마조스님이 거두어 들인 '사냥꾼 스님'과 나눈 문답에서 그렇다. "고삐를 단단히 묶어서 내 안의 소를 길들이고 있습니다." 소는 그냥 내버려 두면 이곳 저곳 방랑하면서 헤맨다. 그렇게 안될려면 '고삐'로 마음을 묶어야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런 비유를 통해 '아나빠나사띠' 즉 들숨날숨에 마음챙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렇게 화두를 잡거나 들숨날숨에 마음챙김하는 이것은 '마음을 가는대로 내버려 두지'않고 '챙겨야'하기 때문에 '작의'가 된다.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즉시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여리작의하여 '대상과 마음'을 모두 챙겨 마음이 어디에 머무르며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매순간 알아차리는 이것이 '사띠'이다. 그래서 지금 금 자 및에 마음 심을 붙인 '념'은 정말 탁월한 사띠의 번역어이다. 화두나 호흡챙김에서는 단지 '작의'의 방법이 다르지만 '사띠'를 증강시키는 방법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금강경에 '여리작의'라는 항목이 나온 것이다. 작의 하되 '이치'에 맞도록 한다는! 내게 이것은 마치 '법'을 관찰하는 위빠싸나 수행을 제시하는 구절처럼 해석된다. 의식적으로 하되 '억지로 붙들지 말라'는 것인데 어렵기만 하다. 이미 '작의'란 말 자체가 '지어서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화두수행이 '억지로 붙드는' 방향으로 왜곡될 우려가 크기에 더 그렇다. 이렇게 '작의'는 화두수행의 예에서 처럼 '언제나 의식적으로 붙들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화두를 '든다' 또는 '챙긴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으로 집약된다. 남방경전에서 나오는 '들숨 날숨에 마음챙기는 수행'에 따른다면 '숨'에 언제나 집중해야 한다.
내게 '작의'란 '챙김'으로 여겨진다. 화두를 챙기건 마음을 챙기건 모두 '작의'에 해당한다. 이렇게 '작의'를 둘때 그 '시점'이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의 무엇일까? 바로, 마음의 '아는 기능'을 '바로 지금' '작의'에 동원하는 이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사띠이며 '바로 지금'이기에 '지금 금 밑에 마음심' 붙은 '념'을 사띠의 번역어로 정착시킨 것이다.
다른 의미도 있다. 이렇게 '작의'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작의'중에 알아차림을 넣으면 간단해진다. '지금 알아차리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알아차린' 법들이 전부 '사실상 과거'에 일어난 '법'이라는 사실이다. 수행이 가장 잘 된 '아라한' 정도 되어야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릴'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보 수행자에게는 '법'이 일어나고 좀 지나야 '알아차릴 수' 있다. 요컨대 밤하늘의 별과 태양이 전부 '과거'의 모습이듯, 수행자가 작의를 지어 '알아차리는' 대상으로서의 '법'은 전부 '과거'에 일어난 사태들이다. 그래서 사띠를 한자말로 옮길때 '지금 금' 밑에 '마음 심'을 붙인 것이다. 바로 지금의 마음으로 지금의 '법'(마음 자체를 포함하여)을 챙겨서 알아차리라는 것이며 이렇게 알아차려서 '삼빠잔냐'즉 '통찰지'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념'이 사띠의 번역어로 큰 의미를 갖는다. |
출처: 생태와 경제 원문보기 글쓴이: 사띠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