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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리수필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갈뫼
중국 윈난성(雲南省) 다리(大理) 얼하이(洱海) 호수 가의 목련(木蓮)
백목련 지는 봄날에
김희준
샤넬 향수보다 진한 향기를 담장 너머로 뿌리던 순백의 목련이 덧없이 꽃 이파리들을 대지에 흩어버리는 봄날입니다. 영화 제목처럼 봄날은 가는 가 봅니다.
지난주에는 여든을 훨씬 넘긴 연세의 장인어른 생신이었습니다. 장인 어른은 눈썹마저도 하얗게 새었지만 아직도 차를 운전하고 밭일을 할 만치 노익장을 과시하며, 노인회나 향교에 출입하며 지역 사회의 원로로 활동하십니다. 하지만 일흔일곱 희수를 맞으신 장모님의 얼굴에는 전보다 많은 검버섯이 보이고, 기력이 쇠미하신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밤늦게 모이는 자식들을 위해 콩가루와 밀가루를 반죽하여 기계보다 더 정교하게 썰어 만드는 칼국수를 이번에는 장만하지 못해 팔목보다 당신의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하시었습니다.
장모님은 오남매 중에서 자네가 제일 안부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만날 때마다 타박을 하십니다. 저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고 무뚝뚝한 것이 점잖하다고 여기는 유교 문화가 발달한 경상도 지방의 남자가 아내 대신 전화를 자주 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며 변명을 하였지요. 그러면서 내가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하루에 한 번은 전화를 드릴 것이라며, 아내에게 왜 어머니에게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느냐며 장모님의 예봉을 피하였지요. 그러자 기독교, 불교, 유교라는 종교의 벽도 아주 간단히 초월해버리며 자유롭게 처신하는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하신 우리 장모님은 즉석에서 저의 입을 막아 버리시더군요. ‘아, 자네가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 저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지요.
처가에 다녀와 새벽에 아내에게 가만히 말했습니다. “당신, 엄마가 살아 계실 적에 자주 전화를 드려라. 나처럼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텐데.....” 평소 속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과묵한 편인 아내는 침묵으로 대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학 일학년을 마치고 엄마가 돌아가시자 감미롭기만 하던 저의 삶은 하루아침에 마치 맹물을 마시는 것처럼 아무런 맛이 없어졌고, 세상의 만물이 빛을 잃어버리고 말던 제 실존의 체험을 아내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지난 삼월 초 아내의 생일에 초청하여 같이 저녁을 먹었던 미국인 남녀 선생님은 고맙게도 아내에게 베고니아 꽃 화분을 선물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미국인 아가씨 선생님의 생일을 맞아 두 사람을 위하여 틱낫한 스님의 설법집,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들>> 영문판을 선물하였습니다. 그 책의 서문과 제9장을 우리말로 옮겨서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하였습니다. 제9장은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스님의 설법입니다.
요즈음 저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읽고 싶어졌습니다. 저와 동갑인 작가의 소설 <<외딴 방>>을 오래 전에 사 놓고는 아직도 읽어보지 않고 있지만요. 최근에 영문판이 나와서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그들도 우리처럼 잃어버린 어머니의 존재를 되찾는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작가는 영국의 비비씨 방송에도 일곱 번 출연하여 소설의 주요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계획도 잡혀 있을 정도로 서구인들에게 한국 어머니들, 아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삶을 소개하는 등, 작가로서는 영광스러운 여정을 소화하기에 벅차다고 합니다. 마침 우리 학교 교무실의 어느 선생님 책상 위에도 이 책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께 부탁하여 대출을 하였습니다. 담당 선생님도 소설을 읽고 많이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에게도 문자 메시지를 보내어 학교에서 빌려오도록 하였습니다. 한 권은 제가 읽고, 한 권은 아내가 읽으며 우리의 잠든 감성을 일깨울 심산이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처럼 지하철에서 어느 날 홀연히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저는 이 책 읽기를 외면하였습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부르는 노래, 아니면 남자들이 군에 입대하면 교관이 얄밉게도 부르게 하여 훈련병들을 울리고 마는 노래가, ‘어머니 은혜’입니다. 한국의 천재라고 불리었던 국문학자 무애 양주동 박사께서 작사한 노래이지요. 박사님도 어린 날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박사님의 가슴에 늘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노래는 다름 아닌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지요. 민중들이 가장 많이 읽어 온 이 경전은 ‘효도의 왕국’, 한국을 탄생시킨 원천이겠지요.
어릴 적, 겨울 농한기에 호롱불 아래서 어머니가 돋보기를 끼고 낭독하다가 건네 준 이 <<은중경>>을 소리내어 읽다가 그만 눈물을 떨구고 말았습니다. 부처님이 사위성 밖을 거니시다가 해골 무더기를 향하여 합장하고, 그를 의아하게 여기던 제자들의 질문에 어머니의 은혜 열 가지를 조목조목 설법하시는 장면이 지금도 제 마음에 생생합니다. 현실의 어머니 모습과 경전 속의 어머니 모습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신경숙의 이 소설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저의 눈물샘을 자극할까봐서 저의 무의식이 피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하여 어머니를 더 깊이 이해하고, 우리 곁에 살아 계시는 장모님과 이모님과 어머니들을 통하여 이젠 제 곁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두 아이의 부모이고, 많은 어린 학생들의 선생님인 저희는 이 소설을 읽어야 진정한 부모로, 교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의 생애는 문학과 역사와 종교가 만나는 인문학의 교차로일 것입니다. 세상의 뒤안길에서 사신 우리 어머니들의 인고의 삶은 고스란히 한국 현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에 가슴에 흰 카네이션을 달아야 하고 풀이 죽을 제 삶에 틱낫한 스님은 짙붉은 꽃, 장미를 달아 주시는 행복을 선물하시는군요. <<능엄경>>이나 <<법화경>>의 비유대로 스스로를 거지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잊어버린 호주머니 속의 보석을 되찾는 기쁨을 스님은 ‘알아차림’이라는 심오한 기술을 통해 되찾게 합니다. 지금 여기 내 곁에 계시는 우리의 어머니를 알아차려야 할 까 봅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도 이 소설 읽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집에 가거들랑, 내일이면 계시지 않을 지도 모를 어머니와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미소 지으며 꼭 안아 드려라고 하였습니다.
알아차릴 줄 안다면, 우리들의 영혼은 깨어날 것입니다. 저 백목련 꽃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찬란한 봄날을 맞이하고, 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범어사에서 설법하시는 틱낫한스님
틱낫한 스님 휘호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
Teachings on Love
Preface
서문
Happiness is only possible with true love. True love has the power to heal and transform the situation around us and bring deep meaning to our lives. The Buddha's teachings on love are clear, scientific, and easily applicable to daily life. Every one of us can benefit from these teachings.
행복은 오직 진실한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진실한 사랑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 주변의 환경을 바꾸며, 우리의 삶에 깊은 의미를 가져다준다. 부처님의 사랑에 관한 가르침들은 명쾌하며, 과학적이고, 일상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 가르침들에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When the Buddha's son Rahula was a young novice monk, the Buddha advised him to practice being like the Earth and its oceans and rivers. No matter what people pour onto the Earth, whether milk, flowers, or compost, the Earth receives it all. Why? Because the great Earth is vast and has the power to transform everything into soil, plants, and flowers. If you pour a handful of salt into a cup of water, the water become undrinkable. But if you pour the salt into the river, people can continue to draw the water to cook, wash, and drink. The river is immense, and it has the capacity to receive, embrace and transform.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어린 행자였다. 부처님은 그를 대지와 대지의 바다와 강들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수행할 것을 조언하였다. 대지에 사람들이 우유든, 꽃이든, 거름이든 무엇을 쏟아 부을 지라도 대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왜 그런가? 대지는 광대하고 모든 것을 흙으로, 식물로 그리고 꽃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줌의 소금을 한 컵의 물에 넣는다면, 물은 마실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강물에 그 소금을 넣는다면, 사람들은 요리나 씻고 마시기 위해 그 물을 계속 끌어 쓸 수 있다. 강은 막대하고 받아들이고 품으며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If our heart are big, we can be like the river. When our hearts are small, our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are limited and we suffer. We can't accept or tolerate others and their shortcomings and we demand that they change. But when our hearts expand, the same things don't make us suffer anymore. We have a lot of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and can embrace others. We accept others as they are, and then they have a chance to transform. So the big question is: how do we help our heart to grow? With practice, your heart will become infinitely large like the heart of the Buddha, capable of embracing the whole cosmos.
만일 우리 마음이 크다면 우리는 강과 같이 될 수 있다. 우리 마음이 작을 때, 우리의 이해와 연민심은 한정되고 우리는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그들의 단점들을 받아들이고 관용할 수가 없고, 그들이 변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커지면 같은 것들 어떤 것들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게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많은 이해와 연민심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은 바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큰 물음은, ‘어떻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자라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참을성을 가지면, 당신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처럼 무한하게 커지게 될 것이며, 온 우주를 품을 수 있을 것이다.
The French writer Antoine de St. Exupery wrote that to love is not just to look at each other but to look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I reflect on that statement a lot. One day I was visualizing a couple who were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and I began to laugh, because the direction they were looking in was the direction of the television set. When two people no longer find joy in looking at each other and instead look in the direction of a distraction, this is not true love.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는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말을 많이 되새겨보았다. 어느 날 나는 같은 방향을 바로보고 있던 한 부부를 떠올렸고,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고 있던 그 방향은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서로 마주보면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대신에 오락물을 향해 바라보는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So what does it mean to love? To love is to look at each other and to look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If we know how to look, then looking at each other is also wonderful. Because if you know to look at each other and discover the basic goodness and beauty within the other person, you have a chance to discover that love is something real; each of us is given opportunities to experience love as something that really exists. Love is the energy helping us to be strong and to care for the well-being of other people and other living beings.
그러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하는 것은 서로 마주보고 같은 방향을 함께 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바라보는 법을 안다면, 그러면 서로 마주보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서로 마주 보는 법을 알고 다른 사람 속에서 기본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가진다면, 사랑은 실재하는 어떤 것임을 발견할 기회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사랑은 우리가 강해지는 것을 돕고,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들의 행복을 보살피는 에너지이다.
Because we don't know the art of mindful living, we make mistakes in our daily lives, and internal formations arise in us and those around us. We make our families, friends, and colleagues suffer because we don't understand them well enough and we have no patience. Slowly, our relationships become strained and one day we may find communication has become completely blocked.
우리가 알아차림 하는 삶의 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일상 삶에서 실수를 하며, 우리 내면과 우리 주변에 행업(行業)을 일으킨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친구, 동료들을 괴롭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잘 이해하지 않으며 참을성이 없기 때문이다. 천천히, 우리의 인간관계는 껄끄러워지게 되고 어느 날 우리는 서로간의 소통이 완전히 막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All of us need love and all of us need to love. The realization of the Buddha on the morning of his enlightenment was that all of us have the capacity to love and to understand. But we seem not to believe it and we continue to cause suffering to ourselves and others. Maybe we haven't had the time to look deeply into the nature of our love, to sum up what our love is about, and understand why it is that when we love, suffering arises from it. In Buddhism, the meaning of love is very deep but also very clear. In this book, I explore the elements that make up true love and practices that allow us to develop it within ourselves.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우리 모두는 사랑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을 얻은 아침에 부처님이 알게 된 것은 우리 모두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믿지 않고 있는 듯이 보이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사랑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우리가 사랑할 때 왜 괴로움이 사랑으로부터 일어나는가를 이해할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사랑의 의미는 아주 깊지만 또한 매우 분명하다. 이 책에서, 나는 진실한 사랑을 이루는 요인들을 탐색하고 우리가 우리 내면에 사랑을 개발할 수 있도록 수행한다. (김희준 옮김)
-Thich Nhat Hanh, Teachings on Love
틱낫한 스님,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
제9장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어머니’에 관한 생각은 ‘사랑’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맛있습니다. 사랑 없이 어린이는 꽃 필 수가 없고 어른은 성숙할 수가 없지요.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나약해지고 위축되고 맙니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잡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 왔다!” 나이든 사람일지라도 어머니를 여읠 때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또한 자신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으며, 갑자기 자신이 홀로 되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 고아처럼 버려지고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요.
모성을 칭송하는 모든 노래와 시들은 아름답고, 쉽사리 아름답습니다. 심지어 많은 재능이 없는 작사자들과 시인들도 이들 작품들에 그들의 심혈을 쏟아 부은 것처럼 보이며, 그들 작품들이 연주되고 노래될 때는 연주자들 또한 그들이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로 너무 일찍 어머니를 여읜 경우가 아니라면, 깊이 감동된 것처럼 보입니다. 모성의 덕성들을 찬탄하는 작품들은 세계 어느 곳이든 역사가 있은 이래로 있어 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는 것에 관한 간단한 시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는 나에게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대는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느낄 것이고, 그러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날이 멀지만 반드시 닥칠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 해에 비록 내가 아주 어렸지만 엄마는 나를 떠나갔네.
그래서 난 내가 고아가 된 것을 알았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고 나는 침묵 속에 괴로웠네....
눈물이 흐르도록 내 버려두었고
난 고통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어.
저녁이 엄마의 무덤을 뒤덮었어.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감미롭게 울렸지.
엄마를 잃는 것이 온 우주를 잃는 일임을 난 깨달았네.
우리는 오래도록 부드러운 사랑의 세계 속에서 헤엄쳤고, 심지어 그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였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었을 뿐이지요.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복잡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시 사람이 어머니는 “사랑의 보배”라고 말하면, 시골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미 너무 복잡한 것입니다. 베트남의 시골 사람들은 그들의 어머니들을 바나나, 꿀, 쌀, 사탕수수 같은 여러 가지 최상의 것들에 비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이들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나에게 어머니는 최고 좋은 품질의 바 후앙 바나나, 최고 좋은 넾 뫁 감미로운 쌀, 제일 맛있는 미아 라우 사탕수수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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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걸려 열이 나면, 입맛이 쓰고 밋밋하고 아무 맛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직 어머니가 와서 나를 이불 속에 눕히고, 이불을 턱 위로 부드러이 끌어당기며, 손을 불덩이가 되어 담금질 하는 내 이마에 올릴 때, 엄마의 그 손은 정말로 손인지 아니면 천상의 비단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엄마가 가만히 “불쌍한 내 새끼!” 라고 말할 때, 내 몸은 어머니 사랑의 감미로움으로 회복되고 감싸임을 느낍니다.
아버지의 일은 거대한 산처럼 엄청납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봄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넘쳐흐릅니다. 어머니 사랑은 모든 사랑의 감정들의 기원이 되는 우리 사랑의 첫 맛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감사하게도 나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나는 이해와 연민의 개념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사랑의 바탕이 됩니다. 많은 종교적 전통들은 이것을 알고서,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처럼 어머니의 존재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요람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은 거의 울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불행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정신입니다. “어머니”라는 말이 주장되었을 때, 이미 우리는 마음이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에서부터 믿음과 행동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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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우리는 오월에 ‘어머니 날’을 기립니다. 나는 베트남의 시골 출신이라서 이런 전통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토쿄의 긴자 거리를 티엔 안 스님과 같이 방문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의 친구들인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서점 바깥에서 만났습니다. 한 학생이 따로 그에게 물었고, 가방에서 흰 카네이션을 꺼내어 내 가사에 달아 주었습니다. 난 놀랐고 당혹스러웠지요. 이런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몰랐고,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방의 어떤 풍습일 것이라고 여기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가고 있을 때(나는 일본말을 하지 못한다.), 티엔 안과 나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고, 오늘이 이른바 ‘어머니 날’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호주머니나 옷깃에 붉은 꽃을 달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것에 자랑스러워 합니다. 내 가사 위에 달린 흰 꽃을 보고 난 갑자기 아주 불행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떤 다른 불행한 고아와 다를 바 없는 고아였고, 우리 고아들은 더 이상 우리의 단추 구멍 속에 붉은 꽃들을 자랑스럽게 달 수가 없었습니다. 흰 꽃들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어머니 생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붉은 꽃을 단 사람들은 아주 행복합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서 너무 늦어지기 전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풍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베트남과 서양에서도 이런 풍습을 가지기를 제안 합니다.
어머니는 사랑의 한량없는 원천이고, 다함없는 보배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삽니다. 어머니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아직도 가까이에 어머니가 있는 그대들은 “신이시여, 저는 어머니를 가까이서 바라보지 못하고 이 모든 해들을 어머니 곁에서 살아 왔습니다. 단지 잠시 보며 보잘 것 없는 푼돈이나 이런 저런 것들이나 물어보면서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말기 바랍니다. 그대는 따뜻해지려고 어머니 곁에 눕고, 어머니에게 샐쭉해지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대는 오직 어머니의 삶을 복잡하게 하고, 어머니를 걱정하게 하고, 어머니의 건강을 해치고, 어머니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합니다. 자식들 때문에 많은 어머니들이 일찍 죽습니다. 어머니의 일생 동안 우리는 어머니가 밥하고, 빨래하고, 우리가 어지럽힌 뒷자리를 청소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우리는 오직 우리의 지위와 직장 일만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더 이상 우리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없고, 우리도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오직 어머니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에야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평소 결코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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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는, 울람바나 명절(우란분절/백중절)에 우리는 마우드갈야야나 보살(목련존자:목련 존자는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였다. 목련경)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 효심, 아버지의 일, 어머니의 헌신 그리고 자식의 의무에 대해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의 장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효심 없는 자식은 쓸모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효심, 헌신은 단지 인위적일 뿐입니다. 사랑이 표현되는 것으로 족하고 의무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고, 목이 마를 때 물 마시는 것처럼 완전히 자연적인 것입니다. 모든 자녀는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자녀는 어머니가 필요하고, 어머니는 자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자녀가 필요하지 않다면 자녀도 어머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머니도 자녀도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와 ‘자녀’라는 말을 잘못 쓰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생님들 중의 한 분이 물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할 때 너는 무엇을 해야만 하지?” 선생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하고, 어머니를 돕고, 어머니가 연세 드셨을 때 돌봐드려야 하고, 어머니가 산 뒤로 사라졌을 때 조상의 제단을 지키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서 “무엇”이라는 말이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나 덕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고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대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익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맑은 물이 솟는 샘과 같고, 최고의 사탕수수와 같으며, 최상의 품질을 가진 감미로운 쌀과 같습니다. 이것으로 이익 되는 방법을 모른다면, 당신에게 불행한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삶에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불평하는 날을 피하는 것을 돕기 위해 나는 단지 이것을 당신의 ‘주의’와 ‘관심’ 속으로 불러오기를 원합니다. 당신 자신의 어머니의 존재와 같은 선물이 당신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심지어 당신이 대기업의 회장이거나 우주의 제왕일지라도 당신은 아마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조주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스스로 생겨났고 어머니를 가지는 좋은 행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나를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의 누나는 결혼하지 않고, 나는 스님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새 인생을 살든, 동경하던 이상적인 삶을 살든 우리 둘은 어머니 곁을 떠났지요. 누나가 결혼한 날 밤에 어머니는 천한 가지 일들을 걱정하였고 심지어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나를 위해 오는 자형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가벼운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어머니는 한 입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십팔 년 동안 누나는 우리와 같이 밥을 먹었지만 오늘은 누나가 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가정으로 가기 전에 여기서 마지막 밥을 먹는 것이다.” 누나가 울었습니다. 누나의 이마가 접시 위로 드러나며 고개를 떨구며 말했습니다. “엄마, 나 결혼하지 않을래요.” 하지만 누나는 그럼에도 결혼하였지요. 나 자신을 위한 스님이 되기 위해 나는 엄마 곁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 가족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해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이상을 가졌고, 스님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만큼 나는 힘들어졌습니다.
인생에서,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는 한 손에 한 마리씩이지 동시에 두 마리 생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기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런 선택을 하여야만 했던 것에 미안합니다. 어머니, 이 너무나도 소중한 보배에서 완전히 은혜로울 기회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였지만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부드러운 바나나, 감미로운 쌀밥, 달콤한 사탕수수 맛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일을 쫒지 말고 어머니 곁의 집에만 있기를 제안하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도덕적인 교훈이나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미 말했습니다. 나는 단지 어머니는 바나나 같고, 품질 좋은 쌀 같고, 설탕 같다는 것을 당신에게 일깨워주고 싶을 따름 입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움이고, 어머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 나의 형제와 자매들은 어머니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엄마를 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막대한 손실을 낳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무지’ 때문이든 ‘주의 결핍’ 때문이든 그러한 손실을 감내할 필요가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붉은 꽃, 장미를 그대의 옷깃 위에 달 것이고,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조언을 하려고 하였다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밤 학교나 일터에서 돌아올 때, 혹은 다음에 어머니를 방문할 때면 어머니 방에 조용히,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 어머니 곁에 앉으십시오.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어머니가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한참 동안 어머니를 바라보십시오. 어머니를 잘 보기 위하여, 어머니가 거기에 살아계시고, 당신 곁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어머니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러고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런 짧은 물음을 물어 보기 바랍니다. “엄마, 아세요?” 어머니는 좀 놀랄 것이고, 당신에게 미소 지으며 “애야, 무얼 말이냐?”하며 되물을 것입니다.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말하십시오.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세요?”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물어 보십시오. 당신이 서른이든, 마흔의 나이가 되든지 간에 당신은 어머니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냥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 어머니와 당신 두 사람 모두 행복해지고 영원한 사랑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어머니가 당신 곁을 떠날지라도 당신은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오늘 노래하라고 주는 후렴구입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찬송하고 노래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관심’이나 ‘망각’ 속에서 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빨간 장미는 이미 내가 당신의 옷깃 위에 달아드렸습니다. 행복하시길. (김희준 옮김)
-Thich Nhat Hanh, Teachings On Love(2007)
틱낫한 스님,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중국 추성 맹부(孟府), 맹자고택(孟子古宅)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 중국 추성 맹부(孟府), 맹자고택(孟子古宅)
어머니 예찬
母親頌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가장 감미로운 말은 ‘어머니’이고, 가장 감미로운 외침은 ‘엄마!’이다. 이 간단하지만 또한 의미심장한 말 속에는 희망, 애정, 어루만짐 그리고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친근감, 달콤하고 호감의 감정들로 가득하다.
인생에서 어머니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비통에 젖을 때, 어머니는 위안이 되어 준다. 낙담에 빠질 때 어머니는 힘이 되어 준다. 어머니는 동정과 연민과 자애의 원천이다. 누군가 어머니를 잃는다면 그는 얼굴을 묻을 품을 잃고, 그를 축복해줄 손을 잃고, 보살펴 줄 그의 눈을 잃고 마는 것이다. ...... 자연계의 일체 모든 것은 모성을 상징하고 표출한다. 태양은 대지의 어머니이다. 따뜻함으로 대지를 잉태하고 햇빛으로 대지를 감싼다. 대지는 수목과 화초의 어머니이다. 대지는 나무와 풀을 낳고 키우고, 북돋아 기르며, 곧바로 장대하게 자르게 한다.
나무와 풀은 또한 향기롭고 달콤한 맛의 열매와 생명력 넘치는 씨앗의 자애로운 어머니이다. 우주 만물이라는 어머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충만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불멸의 절대정신이다.
어머니라는 이 말은 과일의 씨앗이 깊은 흙속에 묻혀 있는 것과도 같이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 갈무리되어 있다. 우리가 슬퍼하거나 기뻐할 때, 어머니, 이 말이 우리의 입술에서 만리 창공에 부슬비가 뿌릴 때 장미꽃떨기에서 향기가 넘치는 것같이 흘러나온다." (김희준 옮김)
-레바논,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 1883-1931)
*중국 추성 맹자 고택의 감은당(感恩堂)에 중국어로 번역되어 걸려 있는 이 글은 칼릴 지브란의 자전 소설, <<부러진 날개(The Broken Wings)>>가 출전이다.
오암당(鰲巖堂) 의민(毅敏, 1710-1792) 스님 진영, 보경사(寶鏡寺)
오암당(鰲巖堂) 의민(毅敏, 1710-1792) 스님 승탑, 보경사(寶鏡寺)
薦母疏
어머니 추천재(追薦齋) 소문(疏文)
滿十方三寶之內 無邊無極者 莫如覺皇之恩波 通三際二親之中 莫重莫深者 孰若萱堂之辛苦 古今一致 凡聖同揆 昇忉利三十朝 乃本師追慕之愴意 下無間四五度 是目蓮薦拔之哀情
시방(동서남북 4방, 동남, 동북, 서남, 서북 4유, 상하-공간)에 가득한 삼보(三寶,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 수행 공동체) 안에 가없고 끝없는 것이 부처님의 은혜 물결 만 한 것이 없고, 3제(과거, 현재, 미래-시간)를 통털어 양친(兩親) 가운데에 막중 막심한 것이 무엇이 어머니의 쓰라린 괴로움만 하리.
고금에 한결같고 범인과 성인이 함께 어머니의 은혜와 괴로움을 헤아리니, 도리천에 올라 어머님을 위해 서른 날을 설법하신 것은 우리의 근본 스승, 부처님이 어머니를 추모하는 슬픈 뜻이었고,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네댓 차례 내려가 어머님을 구한 일은 목련 존자가 어머니 영혼을 구원해 극락세계로 천도하려는 애절한 정이었습니다.
今者 小子 早入桑門 遙聞聖跡 空歎匪蒙之恨 自負伊慰之羞 胎中十月之憂 高如華岳 膝下三年之苦 深似鯤波 回乾就濕 惟憐百體之漸長 嚥苦吐辛 只恐四肢之未壯 送三子從釋敎 智過孟母之擇隣 忘一生 斷愛緣 情逾湛氏之截髮 今則風悲喬木 淚凝白雲之帝鄕 月照空門 恨隔靑松之丘山 未奉倚門倚閭之孤蹤 竟無呼家撫我之慈音 平時 尙恨一朝之遲歸 此日 那堪一生之永訣 千思百計 難報鞠養之鴻恩
지금 소자가 일찍이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성인의 행적을 아득히 전해 듣고 그 은혜 입지 못한 것을 공연히 한탄하고, 위로받는 부끄러움을 스스로 지고 있습니다.
태중의 어머님 열 달 근심 태산같이 높고, 무릎 아래 삼 년을 키운 괴로움 고래 사는 물결치는 바다처럼 깊사옵니다.
마른자리에 저를 옮겨 뉘고 어머님 젖은 그 자리에 누우시고도 저의 백 가지 몸이 점차로 자라는 것만을 어여삐 여기시었습니다. 어머님이 쓴 것을 삼키고 제가 매운 것을 토해내게 하여도 다만 저의 팔다리가 힘이 없을까 염려하였습니다.
셋째 자식을 보내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게 하였으니, 지혜는 남달라 맹모삼천(孟母三遷)을 하시니 일생을 잊고 사랑하는 자식과의 세속 인연을 끊어도 정은 담씨(湛氏, 천태(天台) 지자(智者) 대사의 6세 법손으로 당의 고승 담연(湛然, 711-782))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출가한 것보다 더하셨습니다.
지금에 바람이 키 큰 나뭇가지에 슬프게 불고, 눈물은 흰 구름의 제향(帝鄕, 하늘, 上天)에 방울지며, 달빛이 텅 빈 문에 비추니 푸른 솔이 두른 어머님 산소가 멀리 떨어진 것이 한스럽습니다. 문설주에 기대고 동구에서 기다리는 어머님 외로운 발걸음도, 집으로 불러 나를 어루만지는 어머님 자애로운 음성도 끝내 들을 수 없사옵니다. 평시에 하루아침이라도 늦게 돌아오는 것을 한스러워했건만 오늘은 어이하여 일생에 긴 결별을 감당하셨습니까? 천 번을 생각하고 백 번을 도모하여도 어머님 날 길러 주신 크신 은혜 갚기 어렵사옵니다.
一心三朝 敬度香火之薦席 憑三齋 供三寶 願我亡靈 抛三有 證三德逍遙於三聖光中 追七日 陳七 願我孤魂 謝七趣 開七覺 享樂土於七寶臺上 亦願以此功德 上至有項 下及無間 同沾此會之良緣 盡獲毘盧之華藏
일심으로 3일을 경건히 향불 피우고 어머님 영혼을 천도하는 법석(法席)을 열어 3재(三齋)를 베풀어 3보(三寶)를 공양하옵니다. 원하옵건대, 어머님 영혼이시여! 3유(三有: 욕유, 색유, 무색유;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몸을 버리시고, 3덕(三德)을 확증하시어, 3보의 빛 가운데에 노니소서!
7일을 추천하고 7축(七軸, 영혼을 위해 진설하는 7줄의 음식)을 진설(陳設)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어머님 외로운 혼백이시여! 7취(七趣)에서 물러나 7각(七覺)을 열고 7보(七寶) 연화대(蓮華臺) 위에서 극락정토를 누리소서!
또한 바라옵건대, 이 공덕이 위로는 천상 세계에 이르고 아래로는 무간지옥에 이르러서 뭇 중생 이 법석의 좋은 인연에 함께 젖고, 모두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蓮華藏) 세계를 얻으소서! (김희준 역주)
-오암당(鰲巖堂) 의민(毅敏, 1710-1792) 스님, 오암집(鰲巖集)
*오암당 의민 스님은 포항 청하면 월포 용두리 오두촌에서 김해 김씨 유가(儒家)에서 아버지 김하(金河)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품는 태몽을 꾸었고, 20세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 보경사의 친척 되는 각신(覺信) 장로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효심이 깊어서 일생 아버지와 동생을 보살피며 보경사에 머물렀다. 서산대사 9세 법손으로 영남 좌도의 대학승이고 시승(詩僧)이었다. 흥해의 향리, 천재 시인이었던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1712-1779) 진사와 교유하였다. 제자 동봉 회관(東峯 誨寬) 스님이 편찬한 오암집의 서문은 흥해 군수로 왔던 문장가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이, 발문은 경주의 문사이고 사간원 정언을 역임한 지연거사(止淵居士)・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 1748-1812)가 썼다.
*7취
미혹한 중생들이 생사를 반복하며 돌아 다니는 일곱 갈래. 지옥취(地獄趣)ㆍ아귀취(餓鬼趣)ㆍ축생취(畜生趣)ㆍ인취(人趣)ㆍ신선취(神仙趣)ㆍ천취(天趣)ㆍ아수라취(阿修羅趣). 『능엄경』
*3덕(三德)
[1] 지덕(智德)ㆍ단덕(斷德)ㆍ은덕(恩德). 불과(佛果)의 공덕을 나눈 것. (1) 지덕. 부처님이 평등한 지혜로 일체 것을 다 아시는 덕. (2) 단덕. 부처님이 온갖 번뇌를 다 끊어 남김이 없는 덕. (3) 은덕.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구하여 해탈케 하는 덕.
[2] 법신덕(法身德)ㆍ반야덕(般若德)ㆍ해탈덕(解脫德). 열반을 얻은 이에게 갖춘 덕을 나눈 것. (1) 법신덕. 부처님의 본체니, 미계(迷界)의 고과(苦果)를 벗어나서 얻은 상주 불멸하는 과체(果體). (2) 반야덕. 지혜(智慧)라 번역하니, 만유의 실상(實相)을 아는 진실한 지혜. (3) 해탈덕. 지혜에 의하여 참다운 자유를 얻은 것. 『열반경』에 삼덕비장(三德秘藏)이라 한 것은 이를 가리킴. 부처님의 4덕은 이 3덕에 갖추어 있다 함. 또 천태종에서는 이 3덕이 서로 고립(孤立)한 것이 아니고, 혼연 융합하여 평등이 곧 차별인 묘한 작용이 있는 것을 부종불횡(不縱不橫), 비삼비일(非三非一)의 3덕이라 함.
[3] 살타(薩埵)ㆍ랄사(剌闍)ㆍ답마(答摩). 수론학파의 술어로서 자성(自性)을 구성하는 요소라 함. 『금칠십론』에는 이 셋이 차례대로 희(喜)ㆍ우(憂)ㆍ암(闇)으로 체(體)를 삼고, 이 3덕이 서로 상우(相優)하고, 상의(相依)하고, 상생(相生)하고, 상교(相交)하고, 상존(相存)하는 배합으로 온갖 물(物)ㆍ상태 등의 상위가 생긴다고 해석함.
*3성(三聖)
[1] 화엄 3성. 비로자나불ㆍ문수보살ㆍ보현보살.
[2] 미타 3성. 아미타불ㆍ관세음보살ㆍ대세지보살
*상문(桑門): 사문(沙門), 불문(佛門)
*추천재(追薦齋):망자의 해탈을 기원하는 불교식 제사.
*소문(疎文): 불교식 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