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오일장 나서기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은 순수한 만큼이나 그 수명이 길다. 오일장만 가면 그 시절에 그런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가슴이 띤다. 어디를 가도 늘 맨 먼저 들르는 곳이 내 경우는 시장 통이다. 아마도 먹거리 진 맛보다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 면면들이 더 사는 맛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장 통에는 늘 순대집이 존재한다. 요즘도 찾아가지만 느끼하다고 한사코 말리는 아내 말처럼 예전 그 맛은 아닐진대 나는 여전히 맛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맛이 아니라 그 시절의 향수가 흩뿌려 그런 것이다 싶다.
지금도 떠오르는 여릿한 그 느낌, 후미진 끝에는 길목을 가로지른 천막이 존재하고 그 천막보다도 작은 허름한 순대 집은 암탉이 알을 품 듯 장작개비와 큰 솥을 보듬고 큰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안채의 할머니는 채에 걸러진 고기를 인절미 썰듯 바쁜 손놀림으로 외벽에 세운 장대 깃발은 배꼽 시간을 알아차린 듯 펄럭이며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다. 깃발이 아니어도 바람결 타고 퍼지는 삶은 돼지 특유의 냄새나 주변 똥개들이 기웃하는 풍경으로서도 곳이 어디이고 무슨 광경이 같이 사는지도 잘 알듯하다.
막 끄집어 올린 돌돌말린 희뿌연 순대가 긴 꼬챙이에 들려 너울너울 춤을 추면 어린 눈은 금세 휘둥그레 하였다. 고기 맛보기 귀하던 어린 시절 그렇게 광경을 꼭꼭 채워 담았지만 생각해보면 통 털어 너 댓 번이나 먹었을까. 어느 부위인지도 모를 온갖 돼지부위들이 총망라된 늘 따스한 순대 국 한 그릇이다.
오늘도 나는 오일장을 더듬는다. 나에게 이만한 구경거리는 없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오일장은 변함이 없다싶다. 세상 돈 돌고 돌듯 대전 주변 장은 돌고 돈다. 신탄진 장이 끝나면 그 다음 날 바로 유성장이고 그 다음은 옥천 장, 그리고 금산 장이다. 장을 돌다 보면 신발장수 옷장수 어묵장수 약초장수... 뱅뱅 도는 장돌뱅이를 보고 또 본다. 왁자지껄 시골장터는 흡사 흥정의 전쟁터다. 흥정은 자리 잡는 데부터 시작이다. 옥신각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른 아침부터서 부산한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장돌뱅이가 장터 한가운데 목 좋은 곳에 진지를 구축한 포병이라 할 것이면 길바닥에 옹기종기 모여드는 할머니는 영락없는 노쇠한 보병이다. 터랄 것도 아닌 도로변에 거죽하나 깔고 포병을 에워싸고 소총을 닦듯 살붙이를 꺼내들고 계신 할머니부대. 굽은 등에 성치 않은 무릎 관절 탓인지 각개전투 하듯 보초 서듯 애 뉘이듯 겨우 하는 용신으로서는 가격 흥정은 제대로 하려나 의심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오물오물 한 끼니 채우고는 한사코 그 자세에 그 자리이다. 오가던 구경 길 마음이 주저앉고 나는 탄복하고 만다. 널려진 풍경이 그만그만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계절 따라 동네 따라 다른 풍경이 늘 담겨있다. 봄볕이 제법인 날, 그래도 장터는 수지가 맞는다. 옥수수 알갱이 뻥 뻥 날리는 뻥튀기는 또 제철이 아닌가. 신탄진장에선 연기의 씨감자가 도톰하고 유성에선 계룡산 산자락 눈비 맞은 더덕이나 씀바귀가 상큼하다.
물이 맑다는 옥천에서는 올갱이가 지천이고 잉어와 미꾸라지가 제법인 그쯤이다. 새 봄 장만이 알고 보면 다 곱은 손 등 굽은 할머니 덕분이 아닌가. 한푼 두푼 소쿠리가 어느 새 동이 났는지, 중천 쯤 일찌감치 작파한 할머니도 여럿 계시다. 조금 전 만해도 쑥 냉이 도라지 흥정이셨는데 몸빼 바지 하나 신발 한 켤레 종자 씨 봉투 담긴 검은 봉지 주렁주렁 매달고 허겁지겁 이신 모습을 보면 괜스레 흐뭇해진다.
먹을거리든 생필품이든 원하는 물건을 아무 때나 구입하기가 어렵지 않은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무언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발품 팔아 먼 길을 나서야 했고, 그것마저 매일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날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장터가 하나의 커다란 잔치판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테다. 팔기 위해 기다린 사람,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 만나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 즐거운 놀이를 한판 벌이는 곳. 그곳이 바로 시골의 오일장이다. 시대가 변하였다 하여도, 오일장은 여전히 즐겁고 흥겹다. 나도 덩달아 즐거이 찾는 그 오일장이 아니던가.
일상이 숨 쉬는 장터.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며 오가는 길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좌판과, 길을 막는지 모르고 골목 한가운데 서서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 덕에 발걸음을 멈추기 십상이다. 어쩌면 조금은 불편하고 시끌벅적한 곳. 소비자를 고려한 효율적인 동선까지 연구한다는 대형마트의 전략을 생각하면 오일장의 그것은 너무도 비효율적이다 못해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고 느껴지는 정도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은 게 희한하다. 이에는 그 보다 더 확실한 속 깊고 넉넉한 마음씨가 담뿍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장터는 장터이며 또한 일상의 공간이다. 장이 서지 않을 때 그곳을 찾으면 당연히 일상의 공간으로써 언제 그러했느냐 하듯 너무도 조용히 삶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라 쓸쓸하기 그지없다. 또한 장날 마감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정지되어 죽어있는 듯 한 그 허전함에 한 인간의 일생을 보는 것 같은 착각도 어쩔 수없이 하게 되는 터라 파장 무렵에는 애잔함을 바로 느낀다.
그 살아 숨 쉬는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할머니의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아주머니의 두부와 묵을 살펴보다가, 아저씨의 칼 가는 솜씨도 구경하고, 대장간 망치소리를 감상하기도 하며 그렇게 남의 삶을 내 삶으로 끌어들여 정답게 얘기하는 곳. 그리고 이윽고 주막에 들러 뜨끈한 국밥 한 그릇과 달달한 탁주 한 사발로 속을 달랜다. 방금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탁주 맛있게 먹어 놓고서, 요상하게도 파전 녹두전 지지는 소리에 그 향기까지 함께 묻어오면 어느 참 젓가락질이다. 오일장을 찾게 하는 커다란 재미는 바로 먹는 재미이다.
또한 오일장의 재미는 넉살 좋은 이웃들의 웃음을 드라마 촬영하듯 쭉 훑으며 자연스레 구경하는 재미에 있다. 출연료 없는 천연 쇼다. 쇠 이빨이 부러져버린 쇠스랑을 들고 대장간을 찾아 고쳐 달라 하면 ‘쇠가 부러졌는데도 나무자루는 멀쩡한 것’ 보라며 아직도 전통방식을 따라 물푸레나무를 자루로 삼는 자부심을 자랑한다. 헌데 다음에는 자루가 부러져 버려 다시 대장간을 찾으니 이번엔 ‘두드리는 솜씨가 좋으니 쇠가 단단하다’는 자랑이 이어진다.
그들의 장끼를 내가 하는 양 지켜보다보면 어느 새 나 같은 사람이 한 바닥 늘어진 터라 관중을 의식한 쟁이는 재주를 한껏 더 뽐낸다. 한마디씩 거드는 풍자 같은 그런 익살이 녹아 시간 가는 줄을 알 리 없다. 직접 광고가 딸린 쇼에 취하고 기술에 취하고 말장난에 취해 또 다른 볼거릴 놓치는 것 같아 겨우 자리를 뜰 수밖에는 없다. 잡다한 잡동사니 좌판을 늘어놓은 아저씨는 목도 쉬지 않는지 종일 흥겨운 노랫가락을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어대고, 국수집 사장님의 노랫가락은 잘 익은 국수발이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부드럽기만 하다.
그저 모든 것이 흥겹고 즐겁다. 내가 오일장을 보람차게 느끼는 즐거움은 또 있다. 그곳은 농촌의 시작이 맨 먼저 이루어지는 곳이며 농촌의 거둠이 제일 나중까지 이어지는 생산 현장이기도 하다. 직접 씨앗 받아 심으신 것인지, 그 씨앗 좀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다른 토종씨앗은 또 없는지. 먹을 것도, 씨앗도 모두. 어린 아이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아이 귀여워해주지 않으시는 어르신이 없으니 한 움큼은 기본으로 덤이다. 언제나 참으로 넉넉하다.
대충 그렇게 눈요기가 끝나는 시점,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두리번거리며 시장 통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양편에서 들려오는 주민들과 상인들의 질펀한 대화소리에 뭔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면서 배실배실 웃음부터 난다. 정겨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장통 안엔 짜장면 탕수육 등을 먹을 수 있는 중국집도 있는데, 가격이 눈길을 끈다. 내가 좋아하는 홍합이 가득 들어있는 짬뽕과 짬뽕 밥이 단돈 4천 원. 가격도 놀랍지만, 식사 시간이면 부러 이곳까지 들르고 싶을 정도로 맛있다. 이 정도 가격으로 엄지만한 칠게 튀김, 김치 전등등 살 게 너무 많다.
내가 장터에서 사는 주요 품목은 메밀 묵 하나, 단팥죽 하나, 호떡 한 봉지, 그리고 즉석에서 만든 어묵이다. 오늘은 무척 추운 날, 나는 어묵 장사 할머니가 곱은 손으로 바라막이를 하기에 여념이 없기에 리어커를 반드시 세워 방패로 쓰도록 도와주고 덕분에 메밀 묵 한 조각을 더 얻었다. 물론 파장 무렵에 들르면 떨이가 한창일 테지만 곧 닥칠 애잔해지는 파장 후유증이 싫어 나는 그 시각에 그곳에 남아 본적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분명 어느 맛이라 할 때 떨이로 챙기자는 속셈보다는 구경하는 맛과 사람 보는 맛을 진하게 연민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오일장 나서기는 나의 소소한 행복 속에서도 보배 중에 보배가 아닐까 싶다.
첫댓글 얼마나 세세한지 마치 활동사진을 보듯 눈에 그려지네요. 벌써 오일장의 봄날이 기다려집니다. 날이 풀리면 꽃 묘목이나 화분 사러 유성장에 가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읽었습니다~^^*
아이구...오일장에 일부러 가야겠습니다. 천안에도 상설시장이 있는데, 대전만 못합니다. 장 구경을 하고 반드시 순대국밥 한 그릇 먹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