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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린도 교회 개척 일지(고전2:1-5)-2025.2.16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2년여 동안의 전도 기간에 기억에 남을만한 전도사역은 아덴에서의 전도입니다. 아덴은 헬라의 수도로서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민주주의 발상지 헬라의 도시국가 역할을 해 온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불렸습니다. 아덴은 학문과 예술의 도시였고, 무엇보다 3만여 개의 우상을 섬길 정도로 영적으로 어두운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주민 수보다 우상의 수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아덴에서 전도사역은 바울의 마음을 몹시 불쾌하게 했습니다. 성안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바울의 마음에 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행17:16).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급한 마음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그리고 저잣거리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곳에서 복음을 변증하는 방식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아덴 사람들은 철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바울은 그곳에서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학파 사람들과 쟁론을 벌였습니다(행17:18). 에비구레오는 쾌락주의를 신봉하는 에피쿠로스학파요, 스도이고는 금욕주의를 신봉하는 스토아학파입니다. 그만큼 아덴은 토론과 쟁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그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피터지는 쟁론을 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바울은 학문적으로 그들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자입니다. 바울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쟁론과 변증에 있어서는 남다른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결코 토론과 쟁론을 통해서 전해지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복음에 대한 변증이 필요할 때도 있지요.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의 쟁론에서 승리해야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변증하는 방식으로 전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신학으로 짐작해 볼 때 충분히 그런 방식으로 전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은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유연한 방식이었거든요(고전9:19-22).
이로 볼 때 철학을 신봉하는 아덴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주장하는 학문 세계를 터치했겠지요. 세상 학문은 끝이 없는 논쟁입니다. 그중에서 철학은 자기주장과 고집이 더욱 강합니다. 답은 없고 끝없는 논쟁만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다른 종교성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교성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접촉점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기롱하고, 나중에 다시 듣겠다고 거절했습니다(행17:32). 그래서 아덴에서의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고린도 교회를 가슴에 품은 바울 사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행18:1). 그곳에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은 어느 때보다 더 충만했습니다.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좋은 동역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에서 내려온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여 명실공히 최고의 전도팀이 꾸려진 셈입니다(행18:5). 그러나 그곳에서의 전도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들의 방해가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대적하여 훼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행한 바울의 행동이 우리를 매우 의아하게 만듭니다(행18:6). 그들 앞에서 바울은 자기 옷을 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저주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거침없는 말을 토해냅니다(행18:6). 기독교 역사상 최고 전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바울을 괴롭혔는지 알 수 없으나 최고의 전도자가 취한 행동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울이 그들을 포기한 것처럼 막말을 토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밤에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라고 말입니다(행18:9).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행18:10).
고린도 지역에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영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행18:11). 그렇게 탄생한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비교적 부흥의 탄력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기라성 같은 복음의 일군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색당파로 나누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파와 아볼로파, 게바파와 그리스도파입니다(고전1:12).
무엇보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지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영적으로 우쭐거리는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교만했다는 말이지요. 그런 교우들을 향해 바울 사도는 직격탄을 날립니다(고전1:26-29). 한마디로 너희들의 수준을 알라는 것이지요. 너희 중에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1:26).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듯한 간증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를 상기시킵니다(2:1). 자기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덴에서 전도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하심으로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었던 것이지요. 자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람의 말로 설명하려거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 사람들도 철학과 웅변술을 중시하여 세속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비전을 들었습니다. 이 성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영혼이 수없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울이 반드시 그곳에 복음을 전해야 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답을 알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결과를 알고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비전이 바울의 비전이 되고, 하나님의 꿈이 바울의 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바울과 함께 하실 것이고, 대적을 막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행18:10). 낙심한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만 가지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지요. 두려울 것도 없구요. 사실 전도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천후 전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알고 전도에 열정을 가진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진정한 전도자가 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전도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극심한 훼방으로 고린도에서 바울의 전도사역이 큰 위축을 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약할 때 두렵고 떨릴 때 바울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데 무엇이 약하고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떨리겠습니까?
(2) 전도자 바울의 자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고린도에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렵고 떨었다고 증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 자체가 무섭고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떨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물론 당시 고린도 도시의 타락과 부패한 죄악상으로 말미암아 적잖은 두려움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때로 바울은 연약함 가운데 있었다고 증언합니다(갈4:13).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은 천사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영접해주었습니다. 심지어 눈이라도 빼어서 줄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런 차원으로 접근해보면 바울이 고린도지역에서 복음을 전할때 연약하고 두렵고 떨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른바 고린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바울은 아덴에서의 전도를 떠올리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아덴에서의 전도는 쟁론하는 방식으로 했거든요. 그리고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약간의 두려움과 떨림이 생겼을 수는 있습니다. 바울도 연약한 사람이거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무능력과 영적 통찰력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 두려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덴에서의 전도가 두고두고 오버랩 됐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고린도 사람들의 철학적인 사변이나 교만한 태도 역시 바울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2장3절에서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만의 문제로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자 바울이 시시하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런 약한 마음을 갖는 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바울의 연약함과 두려움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지 않을까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 역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음을 잘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의 두려움이나 연약함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연약함과 두려움은 많이 가질수록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기가 쉽습니다. 자기 것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연약함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경험이나 노하우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캐리어가 쌓으면 베테랑이 됩니다. 프로가 되는 것이지요. 많은 주의 종들이 프로 근성으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나 연약함도 없습니다. 설교에 대한 두려움이나 전도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경험으로 당당하게 승부합니다.
이는 위험한 도박입니다. 심지어 어떤 동역자는 설교 준비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자들은 강단에 올라가서 주시는 말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은사를 받은 자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개입하실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연약함이나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실 공간도 없고 소지도 없습니다. 천하의 전도자 바울의 연약함이나 두려움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최소한 보통 사람들이 갖는 그런 연약함이나 두려움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자기에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부어지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되었거나 주의 사명을 가진 자들에게는 이런 거룩한 두려움이나 떨림이나 약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만지십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힘이 빠져야 하고, 자기 안에 있는 인간적인 자신감 내지는 자만심이 빠져야 하나님이 작업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가끔 말씀 드리지만 밀가루로 반죽하여 음식을 만들 때 밀가루가 곱게 곱게 빻아져야 반죽이 잘됩니다. 반죽이 잘되면 원하는 음식도 잘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김치를 담는 원리와도 같습니다. 밭에서 가져온 배추를 씻어 소금으로 간을 잘해서 숨이 죽으면 김치 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소금 간을 해도 배추가 살아 있는 것처럼 죽지 아니하면 김치 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간이 배지 않아 맛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김치 담을 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추가 다시 배추밭으로 가겠다고 말입니다. 숨이 죽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믿음의 원리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은 잘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핸들링하시기에 합당한 자로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기를 죽이는 바울의 표현이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연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지십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입혀주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사람의 말과 지혜의 반대적인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전도할 때나 주의 일을 할 때 자기들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들의 현란한 수사와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승부합니다. 시쳇말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말과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기 위한 스피치 훈련을 많이 합니다. 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말을 잘하기 위한 책들도 많이 봅니다. 심지어 삼국지를 많이 읽으면 말을 잘한다고 하여 삼국지를 참 많이들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지혜를 총동원하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사람의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도나 하나님의 일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승부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사람의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는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의 말도 약간의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깊은 세계를 터치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이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성령이 나타나면 능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성령의 나타남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동반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의 방식을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입혀주십니다. 성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을 통해서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십니다(10절). 그러면서 2장11절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밖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고전12:3).
(3)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경험한 자입니다.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구원의 도를 깨닫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을지라도 모두가 다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체험했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합니다(2절). 예수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예수와 십자가만 생각하고 말하고 증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혹은 의지가 대단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를 붙들고 계신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예수와 십자가만 생각하고 말하고 증거하도록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열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중에서 전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부어지지 않으면 전도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전도 이후의 모든 과정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양육이 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고 핵심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본적이고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현란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 가운데 말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죽하면 예수쟁이들은 말만 잘한다고 비난하겠습니까? 말만 잘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주 불쾌한 말이지요. 하지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도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의 능력은 성령의 나타남에 달린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가진 자는 분명한 복음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합니다(2:2).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하여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2:8). 이는 예수님만 얻기 위함이요, 그분께 발견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빌2:9).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무엇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복음을 무엇으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가진 자였고, 복음의 능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전도자의 무기는 복음입니다. 복음이 없으면 전도의 열정이 일어나지 않고 전도의 능력도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전도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전도는 전적으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품어야 할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믿음의 출처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고전4:20). 그 능력이 성령의 나타남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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