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시, 봄내〔春川〕에서의 고교 3년 역시 수난 시대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입학 시험 치러 춘천에 갈 차비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던 것은 그 수난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실에 대한 한탄 속에서도 미래에의 꿈이 새록새록 돋아나던 시절이기도 했다.
입학금과 첫 등록금부터 그때 막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누님이 마련하셨다. 누님은 동생들에게 참으로 헌신적이셨다. 누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와 동생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임을, 그 분의 정녕 눈물어린 도움을 처음 받던 고교 입학 때부터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의 고교 시절은 입학 당시의 몇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시작되었다. 먼저, 춘천에 갈 차비가 없어 중간까지만 차표를 끊고 무작정 차를 탄 탓에, 가는 도중 차표 검사할 때의 그 두근거리던 가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입을 바지가 없어 어머니께서 누님의 바지를 줄여 만드신 것을 입은 탓에, 신체검사 때문에 윗통을 벗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기숙사에 입사할 때 이불보를 살 돈이 없어, 바느질 하시던 어머니께서 수십 가지 천을 모자이크식으로 이어 붙여, 아주 현란한 총천연색 이불을 만드신 탓에, 3년 내내 기숙사 밖에 널어 놓고 말릴 수 없었던, 그 철없는 부끄러움!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다가올 3년의 시련에 비하면 정말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누님의 도움을 받으며 고1은 무난히 지나갔다. 부모님 대신 불과 네 살 위의 누님으로부터 헌신적인 도움을 받는 미안함은 실로 컸지만..... 그러나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 매 달, 매 분기 꼬박꼬박 내어야 하는 교납금과 기숙사비를 계속 누님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웠고, 그런 현실을 직시한 나는 고2 되던 이른 봄부터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기 시작했으니, 당시 내가 찾아낸 돌파구는 검정고시였다.
그렇다! 그 이후의 내 삶 역시 언제나 그러했지만, 나는 내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울타리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물론 좌절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그 울타리 너머로 더 넓은 세계를 기웃거렸다. 그렇게 보면,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소산'이라던 아놀드 토인비(A. Toynbee)의 역사 인식은 내 삶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련의 겨울을 이긴 나무 한 그루가 새 봄 언덕 위에서 신생(新生)의 잎새를 내미듯, 중학 시절 이래 내게 들이닥친, 가난이란 이름의 거센 파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젊음의 나무로 하여금 시련의 땅 속으로 더욱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기름진 토양이었고, 내 삶의 나무로 하여금 혼돈의 땅을 딛고 서서 더욱 튼튼히 자랄 수 있게 한, 아스라히 먼 햇살이었다.
2학년이 되자마자 나는 검정고시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인근의 고등공민학교는 물론, 교복 입은 재학생 신분으로 강원도 교육위원회까지 찾아 갔었다. 시험과목과 일정을 확인한 3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학교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푸른 하늘이 한 눈에 내다 뵈는 교실 맨 뒷 자리에 앉아 고교 3년 전과정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험은 8월 4일! 여름 방학이 되자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시작했지만 나는 속초집에 연락을 해서 '할머니 위독, 급히 오라'는 가짜 전보를 치게 하여, 한계령을 넘는 대신 경춘선을 집어 타고 서울로 갔다.
당시 누님은 서울 구로동의 손바닥 만한 자취방에서 기거하고 있었고, 형은 칼갈이 장사를 하면서 그 곳에서 차량정비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니, 낯선 서울 한 복판에서 뜻하지 않은 '3남매 상봉'이 이루어 진 셈이다. 시험 전 날, 낮엔 이 회사, 밤엔 저 회사를 전전하던 누님이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하신 '최후의 만찬'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누님의 지극한 정성 때문인지 시험에는 무사히 합격했다. 수험번호 2984번, 합격번호 666번! 고2 여름방학 때 고졸 학력을 따낸 것이다.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세상과의, 아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은 첫 번째의 승리였으니.....
든든한 배수의 진을 마련한 나는 학교에 가서 돈이 없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자퇴의사를 표명했지만, 담임선생님께서 교장선생님께 말씀 드려 한 달에 만 원씩 특별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학교는 계속 다니기로 함에 따라, 본의 아니게 이중학적자(二重學籍者)로서의 나의 기구한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고2도 다 지나고 있었다. 고2 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첫사랑이 아닐 수 없으리라! 폐허의 돌무더기 속에서도 한 송이 오랑캐꽃은 피어 나듯이, 척박한 시련의 젊은 가슴 속에도 한 송이 아름답고 절실한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것은 자연의 정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하튼, 어려운 가정형편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뇌에다 첫사랑의 혼돈까지 가세했으니 실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고3이 되자 두 살 아래인 동생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누님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누님이 부모님과 합세하여 동생의 학비 마련에 매달리는 바람에, 한 달에 만원씩 나오는 장학금으로 교납금과 기숙사비까지 충당해야 하는 나의 경우는 번번히 미납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9월이 되자 드디어 등교정지라는 차가운 현실의 벽이 나를 가로막고 섰다. 장학금을 받고서도 미납금 때문에 교실문을 등져야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중학 시절 이후 되풀이 된 것이다. 고2 땐 당시 고1이던 후배 한 명을 기숙사 호실에서 매일 한 시간씩 가르치는 조건으로 그 부모님이 나의 부족한 학비를 몇번 대어 주신 적도 있었지만, 고3 땐 그마저 여의치 못했으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9월 중순, 드디어 등교정지 첫 날이 왔고, 그 날 점심 때에는 내 생애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연출되었다. 다름 아니라, 텅빈 기숙사에 혼자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시는 사감선생님께서 밖에서 출입문을 잠그고 외출해 버리신 것! 그러니 점심 시간이 되어도 식당에 갈 수 없어 굶을 수 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있는데, 누가 1층 호실의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니 내 친구 하나가 식당에서 식판에다 밥을 타다 창문으로 넣어주는 게 아닌가!
철창(?) 너머로 받은 식판으로 그날 점심을 때우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았다. 다만, 그 친구의 진심 어린 우정에 속으로 한없는 감사의 눈물만 쏟을 뿐!
그런 가운데 9월 하순, 추석이 되었다. 다들 객지 생활을 하는 탓에 명절만 되면 급우들은 끼리끼리 무리 지어 3, 4일 간 귀향을 하지만, 집에 갈 차비가 없는 우리 형제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고3 추석날 밤, 텅빈 기숙사에 덩그러니 남은 두 형제가 창문을 통해 바라본 처연한 보름달과 그 아래 펼쳐졌던 화려한 춘천 시가지 불빛을!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날의 달빛과 불빛은 한없이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한다. 나의 타고난 로맨티시즘(romanticism) 때문일까?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내 주변 세계의 모든 것이 내게 전해 주는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한껏 누린 것 같다. 쓰라린 가슴 안고 쳐다본 푸른 하늘, 분주한 일상 속에서 문득 바라본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 등등을!
그렇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참된 낭만은 바로 그런 때, 그런 데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편안할 때 누리는 즐거움과 안락은 한갓된 '포만'이지 진정한 '낭만'은 아닐 것이다. 이기철 시인의 시귀처럼, '고통의 술잔에 입술을 대며 바라본 푸른 하늘'이 바로 참된 낭만이라면, 우리는 모두 그런, 진정한 로맨티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3 추석이 지나자마자 '로맨티스트'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다가왔다. 며칠 내로 미납금을 해결하지 않으면 제적된다는 최후통첩이 날아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반(3학년 4반) 아이들 모두가 주머니를 털고, 부족한 부분은 담임선생님이 즉석에서 보태셔서 그 고비는 넘어갔지만, 그 이후 졸업 때까지 누적된 4만원은 끝내 갚지 못했다.
10월 말, 육사에 진학하기로 했다. 돈이 없어 일반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니, 내가 태능의 '청백대열'에 합류할 생각을 한 것을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몇 달 후 그것은 '잘못된 만남'임이 드러났다.
군사독재 시절인 당시로선 육사는 꽤 인기가 있었는 데다, 여러 가지 치밀한 전형절차를 거치는 탓에 합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그 고비 역시 무난히(?) 넘어갔다. 육사 합격 후 연세대학에도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진학할 의사는 전혀 없었지만, 2년 간이나 나를 배려해 준 모교에 대한 보답으로 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1976년 2월, 육사 입교와 함께 나의 고교 시절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미납금 4만원은 끝내 갚지 못한 채........
4. 20대 시절(1976∼1986)
나의 20대는 서울 태능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시작되었다. 2월 한달 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 3월, 자랑스런 육사생도가 되었지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는 끊임없이 나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무엇보다도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그 곳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5월 31일 행동에 옮겼다. 육사는 높은 경쟁률과 치밀한 전형절차 때문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군형법이 적용되는 탓에 마음대로 나올 수도 없는 곳이다. 그 과정을 여기 다 밝힐 수 없어 심히 유감스럽지만, 여하튼 힘든 절차(?)를 거쳐 6월 1일 이른 아침, 내 몸은 드디어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 아래 서있게 되었다.
내가 육사에 진학하면서 우리 집은 한많은(?) 속초를 떠나, 역시 한많은(?) 미아리 고개 밑의 손바닥 만한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부엌도, 세면대도,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세 사람이 모로 누우면 꽉 차는, 집 아닌 '외딴 방'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당시 형편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청백대열'을 떠나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대학 진학은 커녕, 재수할 돈도, 기거할 공간도, 공부할 곳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나는 장래가 보장된(?) 태능을 떠났다, 아니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길, 마이웨이가 아니라는 게 유일한 이유였고, 그 때 이후 나는 아무리 여건이 어렵더라도 '나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괘도수정을 해왔다.
돌아보면, 가정형편 때문에 육사에 간 것도 필연이었고, '나의 길' 때문에 그곳을 떠난 것도 필연이었으니, 간 것도 필연, 나온 것도 필연인 내 삶의 아이러니는 '필연코' 나의 외적 환경이 낳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이후의 삶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된다.
여하튼, 그 해 5월 31일에서 6월 1일에 이르는 1박 2일 동안, 아득한 혼돈의 늪 속에서도 내 생명의 불꽃은 검정고시에 도전했던 고2 여름방학 이후 두 번째로 세차게 타올라, 내 젊음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삶이 고달플수록 더욱 세차게 타오르던 그 생명의 불꽃, 말이다.
4.1 주경야독(晝耕夜讀) 시절
그렇게 하여, 본의 아니게 재수생 신분이 되었지만, 학원 갈 돈 한 푼도, 공부할 공간 한 뼘도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사하느라 들여다 볼 책 한 권도 남지 않은 것은 정말 딱한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해 6월 초순, 나는 다시 춘천에 갔다. 입을 옷이 없어 육사 나올 때 받은 허름한 예비군복을 입고, 빡빡머리에다 흰 고무신을 신고서............ 가서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며 얻은 헌 책들을 라면 박스 하나에 넣고 어깨에 매고 상경했다.
당시 나는 남들 다 가는 재수 학원은 근처에도 갈 수 없었고, 도리어 주인집 꼬마를 포함한 동네 아이 몇 명을 모아 과외 지도를 하면서 틈틈히 공부를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인가를 고심한 결과, 일단 취직을 하고 나서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내가 선택한 대학은 전농동에 있는 서울시립대(당시 명칭, 서울산업대학)였고, 목민관(牧民官)이 꿈이었던 당시의 희망대로 행정학과(야간)를 선택했다.
1977년 봄, 대학 진학과 함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고, 박봉이었지만 고정된 수입이 있다는 사실은 당시의 우리 집 형편에 대단히 중요했다. 그러나, 종로 4가에 있는 전매청 산하 기관에 발령을 받기까지 정말 순탄하지 않았다. 첫 발령 때 대부분 지방 근무로 하는 인사원칙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안 나는 정말 눈 앞이 캄캄했다. 지방 발령의 경우 서울에서 야간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되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다급한 심정으로 담당 부서를 수차 방문하여 선처를 호소한 끝에 서울에 근무하게 되었으니, 또 한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그렇게 하여, 나의 '1차 주경야독 시절'의 문이 열렸고, 나는 일단 나의 새로운 생활에 충실했다. 최선·최상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바쁜 생활 속에서도 나는 늘 일기를 썼다. 나는 누구인지, 내 삶의 항해는 어느 언덕을 향해 가고 있는지, 단 하루도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한 순간도 노심초사하지 않은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일기 한 편이 있다. 78년 이른 봄, 숙직을 한 다음 날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매케한 도심의 공기를 마시며 종로 4가 거리를 한참 걷다 돌아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쓴 일기! 그 날 새벽, 20대 초반의 나는 분명히 이렇게 썼다.
"앞으로 20년 후 내가 40대가 되면, 그리도 안타깝고 절실했던, 그러나 진지하고 열렬했던 내 젊은 날의 기록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정리·출판하여 내 다음 세대들에게 선물로 남기리라"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출판에는 내가 지금부터 20 여년 전, 그 질풍노도의 시절에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 부끄러운 기록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해 왔다.
여하튼 그러던 사이, 고2이던 동생이 학교를 그만 두고 상경하여 나의 뒤를 이어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으니, 과연 '형제는 용감했다!' 처음엔 '너마저 고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는구나' 하며 가슴 아팠지만, 어려운 형편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 그를, 나는 지금도 무한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직장 2년차, 야간대학 2학년인 1978년 봄, '한많은 미아리 고개' 밑의 어느 점성가집의 초라한 문간방에서 아버지께서 '한많은' 생애를 마감하셨다. 북에 남겨 두신 당신의 두 혈육은 끝내 보시지 못한 채, 몽매에도 그리워하셨을, 그러나 우리에겐 그 그리움을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신 두 자녀를 가슴 속에 묻은 채..... 그리고 남에 남겨두신 당신의 네 자녀에겐 쉬임없이 넘어가야 할 큰 산 하나를, 끊임없이 헤쳐나가야 할 큰 수풀 하나를 남겨두신 채,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애이불비(哀而不悲)라 ― 지극한 슬픔 앞에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는 법! 나는 그 날, 천붕(天崩)의 슬픔 속에서도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돈이 없어 병원 한번 못 가시고, 약 한 첩 제대로 못드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4.2 연세와의 만남
78년 가을 쯤,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어느 정도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 자리한, 더 나은 삶, 보다 넓고 높은 세계를 지향하는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은 현실과의 안일한 타협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고, 나는 다시 새로운 변신(?)을 꿈꾸었으니, 내 삶의 변증법은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내 삶의 길, 젊음의 길은 정녕 '끝이 없는 길'이었다.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변증법의 주요 테마는 정(正)·반(反)·합(合)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와 철학, 문화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그 원리는 한 개인의 삶의 전개 과정에도 잘 적용되리라나는 믿는다. 생물학에 있어서도 한 개인의 발달과정, 즉 개체발생(onto-genesis)은 그가 속한 종족 전체, 그러니까 인류 전체의 발전과정, 즉 계통발생(phylo-genesis)을 되풀이 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 들이면서도〔正〕, 결코 그것과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않고〔反〕, 항상 보다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해 왔기 때문에〔合〕, 변증법의 원리는 내 지난 삶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여하튼, 주경야독이란 좋게 보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된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도 한 번 밖에 없는 나의 삶이 최선·최상의 것이 되기를 그리도 간절히 염원했던 내가 그런 '희미한 안개' 속에 그리 오래 머무를 순 없었고, 그 해 가을, 나는 또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으니, 당시 내가 찾아낸 돌파구는 연세대학 편입학이었다.
그러나, 편입시험을 준비할 시간이 전혀 없는 게 문제였다. 낮엔 직장인, 밤엔 대학생인 상황에서, 1년 내내 편입시험 준비만 하는 수많은 이들과 경쟁해야 하니...... 그러나, 그 이전이나 그 때나 내겐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해선 미련을 갖지 않는 것!
1979년 신년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첫 날,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신촌'으로 다이얼을 돌려 시험 일정을 알아보니, 불과 열흘 밖에 남지 않은 게 아닌가! 다급한 마음에 사무실에 1주일 휴가를 내고 아침부터 모교 도서관으로 출근(?)하여 딱 1주일 간 정신없이 시험준비에 매달렸다.
흰 눈이 내린 1월 하순 어느 날 아침, 집 앞 공중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내 손은 사뭇 떨렸고, 내 이름을 되묻는 담당자의 목소리 속에서 내 삶의, 내 젊음의 또 한 굽이가 세차게 휘몰아쳐 갔다. 이 세상과의, 아니 나 자신과의 정면승부(?)에서 얻은 또 한번의 승리였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엔, 고교를 중퇴하고 내 뒤를 이어 검정고시를 거친 동생이 서울대 공대에 합격하였으니, 우리 형제에게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가 아닐 수 없으리라! 여하튼 그날 아침,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들지 않는 작고 컴컴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기쁨을 나눈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나와 '연세'와의 두 번째 인연, 그리고 '교육학'과의 첫 번째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적은 교육학과 지원자 42명 중 1위였으니 정말 뜻밖이었다. '그런 성적'으로 왜 하필 교육학과를 선택했느냐고 의아해 하는 면접관들 앞에서 나는, 내 꿈에 대해, 그리고 내가 교육학을 필생의 학문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고, 그 때 그 분들의 고개가 크게 끄떡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렇다! 당시 교육학은 나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내가 남들보단 좀 더 힘들고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낸 만큼, 내 다음 세대들에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 편안한 젊음의 길이 열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게 당시 내 학문적 추구의 지상목표였고, 교육학은 그런 목표에 가장 적합한 학문 분야일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은 그 동안의 저축과 직장 동료들의 정성으로 그럭저럭 마련되었다. 그렇게 보면, 내 삶의 탑은 결코 나 혼자의 힘만으로 이룩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줄탁동시(줄啄同時)라는 옛말처럼, 나의 정성 어린 노력과 주변의 따뜻한 배려의 합작품이 아닐 수 없으리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매일 오후 5시도 못되어 하던 일 멈추고 가방을 꾸려 어색한 몸짓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뒷걸음쳐 빠져 나가던 20대 초반의 '이방인'이었던 나를 질시하고 배척하기는 커녕, 진심으로 격려해 주셨던, 부모 같고 형제 같던 사무실 동료들의 따뜻한 눈길과 정성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분들의 이름 석자, 그 음성, 그리고 떠나는 '이방인'을 위해 등록금까지 챙겨 주시던 그 따스한 마음들을, 20년 세월이 흘렀다 해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여하튼 그렇게 편입에는 성공했지만, 4학년 나이에 도로 2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병역연기 사유가 해소되어 바로 군입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문에 그리도 꿈꾸던 연세 동산과의 제대로 된 만남은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4.3 다시, 혈육 잃은 아픔
푸른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대망의 80년대가 밝아왔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살아가고 있던 우리 모두에게 그 첫 해인 1980년은 한 마디로 '상실의 해'였다. 백화난만했던 그 해 5월, 꽃 피는 남도(南道) 어느 곳에서 무수한 꽃다운 목숨들을 앗아가더니, 몇 달 후인 8월엔 내 형마저 데려 갔으니..... 그토록 선량하고 성실했던 형인데, 불과 두 해 전엔 아버지를 데려 가더니..... 두 해만에 두 혈육을 잃은 아픔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지긋이 두 입술을 깨물 따름이었다.
내가 형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사고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의 인사장교 N대위의 말 한 마디를 통해서..... "홍일병, 자네 형이 있나? 네! 그런데 그 형이.........빨리 출발하게!"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 너머 하늘을 한참이나 쳐다 보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난 세월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울 적마다 언제나 쳐다 보며 말없이 씩 웃었던 그 푸른 하늘, 말이다.
처음엔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었던 그 한 마디! 그러나 이미 다가와 내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선 그 현실!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어찌할 수 없지만, 이미 내 삶의 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그 현실! 그래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는 그 부조리한 현실! 그 날 저녁, 어둠이 깃든 한양대 병원 정문 앞에서 처음 만난 동생의 첫 마디, '형제는 단둘이다'라는 말은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이튿날 벽제에서 돌아온 우리 형제의 손엔 형의 마지막 흔적이 쥐어져 있었고, 우린 화장터 주위 아무 곳에나 뿌려 버리라는 어른들의 권고를 물리치고, 몰래 도봉산으로 가서 인적 드문 산마루 어느 비탈에 서있는 소나무 밑을 손으로 파고 그 흔적을 고이 묻었다. '이제 이 세상 그 누구를 내 형이라 믿고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면서.......
그렇게 형도 내 곁을 떠나갔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그 아래 끝없이 펼져진 여름 신록은 그대로 남겨둔 채......
4.4 '주독야독'(晝讀夜讀) 시절
내 삶의 역사에서 1981년 이후 몇 년 간은 정녕 생명이 꽃 피던 시절이었다. 81년 9월 2일 제대를 하고, 바로 그 다음 날인 9월 3일 복학을 했다. 그래서 나와 연세동산과의 제대로 된 만남도 그제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대학생의 과외마저 법으로 금지한 서슬퍼런 군사독재 정권 덕분에, 나는 낮에도 공부하고(晝讀), 밤에도 책을 볼 수 있는(夜讀) 전업 학생이 되었다. 과외를 할 수 없어 주머니 사정은 어려웠지만, 아름다운 모교 교정에서 맘껏 산책하고 사색하고 글도 많이 남겼다. 한 마디로 젊음이, 생명이 꽃 피던 시절이었다.
젊음이 꽃 피는데, 사랑의 꽃인들 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사람을 쉽게 좋아하고 사귀는 성격 탓에 연애도 많이(?) 한 편이었다. 사랑이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이 깃들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게 당시 나의 '사랑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나의 20대의 사랑은 한 마디로 플라토닉한 사랑(Platonic Love), 즉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의 사랑,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서의 사랑 쪽이었고, 그런 사랑은 내게 기쁨보다는 슬픔을, 행복보다는 고뇌를 더 많이 남겼지만, 그에 대해 나는 지금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
40대에 이른 지금, 나의 20대를 회고할 때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어려운 제반 여건 속에서도 한번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나의 길, 마이웨이를 걸어왔다는 사실과, 내가 만났던 많은(?) 여성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먼저, 속된 표현이지만 '고무신 거꾸로 신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자랑거리 중 나중의 것이 훨씬 더 자랑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그들에게 단한번도 마음의 상처나 피해를 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삶의 시공(時空)을 함께 하는 동시대인(同時代人), 그 누구에게든 도움은 주지 못할지언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가장 중요한 삶의 철학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무릇,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은 언젠가 한번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너도 나도, 길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강아지 한 마리까지도 언젠가는 모두 나와 함께 사라져야 할 존재들 아닌가! 이렇게 동일한 숙명을 지닌 이 땅 위의 모든 존재자들이 꼭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바로, 남에게 도움은 주지 못할지언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공동 운명에 대한 자각은 이 땅 위에 새로운 윤리·도덕 시대의 부활을 가능케 할 귀중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왔고, 나의 지난 날의 사랑 역시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5 다시, 주경야독의 시절로
1984년 8월, 나도 드디어 대학졸업이란 것을 했다. 74년 8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걸로 치면 정확히 10년만이었다. 남들은 군대생활 3년을 포함해도 7년이면 되는 과정을 군대생활 2년 반의 내겐 10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남들보다 2, 3년 늦은 것은 내겐 정말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의 삶이 있고, 내겐 또 나만의 삶이 있는 게 아닌가! 사람마다 주어진 여건이 모두 다른데, 어떤 척도로, 무엇을 기준으로 각자의 삶을 비교·평가할 수 있겠는가! 단지 주어진 각자의 제반 여건 속에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일 뿐, 타인과의 단순한 비교는 끊임없는 불행감과 불만의 씨앗만이 되는, 정말 우매하고 못난 일이라 나는 믿는다. 각자의 주어진 여건 아래서 최선을 다하면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이미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이 된다는 게 나의 오랜 신념이었고, 그 신념은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나의 길, 마이웨이를 용기있게 헤쳐 나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다시 공부를 더해서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나는, 당시 상황에서 최선·최상의 길이 무언지 또 다시 고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다시 주경야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방정식'의 해법은 그 이전이나 그 때나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방정식의 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수(변수)의 통제인데, 내 삶의 방정식에선 통제해야 할 변수가 한 둘이 아니었고,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중모색하던 1985년 봄, 마침 우리 집이 있는 종로구 명륜동의 한 대학에서 사무직원을 뽑는다는 신문공고를 우연히 보고 응시한 결과, 8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나의 '2차 주경야독 시대'가 문을 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