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평이나 될까? 작업실 문을 열자 팔월의 태양에 달궈진 방안 공기가 빠르게 빠져나왔다. 김치와 생수 한 병을 품고 있던 조그만 냉장고가 내뿜는 열기마저도 버거워 보일 정도로 방 안은 뜨거웠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화선지와 미완성 작품, 창가에 놓인 새러 심블릿의 명저 ‘예술가를 위한 해부학’만이 이곳이 ‘화가의 방’임을 짐작케 해준다.
번개와 폭우가 치던 지난 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다던 한국화가 설박(28·본명 박설)씨가 광주시 동구 금남로 1가 ‘대동 아트스튜디오’에서 맞은 2011년 8월 1일 아침 풍경이다.
“덥지 않냐?”는 말에 “작업하던 화선지가 바람에 날려, 선풍기도 켜지 못한다”고 답하는 그녀의 눈빛은 잘 번진 농묵처럼 활기찼다.
그녀는 먹을 먹인 화선지를 찢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작업을 하기에 화선지가 바람에 날리면 작업을 망칠 수 있다.
이곳에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고향집은 누구나 하룻밤 잠을 청하고 싶어하는 죽설헌(竹雪軒)이다. 그녀는 사철 꽃이 피는 그림 같은 나주 죽설헌의 주인장인 한국화가 박태후 화백의 딸이다.
그녀가 시원한 고향집을 마다하고 삼복 더위에 이곳에서 먹고자는 것은 ‘나에게 가장 엄하기’라는 자신의 예술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지난 5월 첫 개인전(‘어떤 풍경’·금호갤러리)을 연 뒤 출품 의뢰가 이어졌고, 그녀는 매 번 신작을 내놓고 있다. 최근 작업에 매달린 것도 지역 미술관 여러곳이 함께 기획하는 ‘무등산전’에 출품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젊으니깐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작업은 고난의 연속이다. 화선지에 물을 먹인 뒤, 다시 종이를 잘게 찢어 담묵과 농묵으로 나눠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수차례 반복해 종이를 이어붙인다.
그녀에게 주어진 색은 오로지 흑과 백이다. 화선지에 스민 먹의 짙음과 옅음에 따라 실루엣의 경계와 산자락이 생기고, 하얀 여백은 바다와 구름이 된다.
의도하지 않은 먹의 스밈과 번짐이 만나 새로운 산수화 ‘어떤 풍경’ 연작이 탄생하게 됐다. 딱 맞아떨어지는 화선지 조각을 찾아내는 것만큼 그녀의 예술 인생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작업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나도 화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녀는 한동안 붓을 놓고 방황을 했다. 직장도 구해보고, 6개월 동안 캐나다에서 머물기도 했다.
“어느날 제대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의 방황은 화선지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오랫동안 잃어버린 조각들을 맞추려는 노력이었던 거죠.”
가족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도 컸다.
“아버지는 늘 ‘누가 뭐라고 해도 네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라’고 말하세요. 저 또한 제 작업을 하다 보면 무언가 이뤄낼 것 같아요.”
그녀는 최근 해외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도전하기 위해 더욱 많은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한국화를 다양하고 현대적으로 선보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작가들과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어떤 풍경’ 시리즈가 2년 됐는데 새로운 작품을 고민하고 있어요.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전남대 미술학과를 나온 뒤 동상이몽전, 광주비엔날레기념특별기획 디저트전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