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시 73:27-28)
시편 73편의 마지막 두 구절들은 시편 전체의 실제적인 결론 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막 과거에의 회고를 끝마치고 다가오는 미래에 있어서 그는 자신에 관한 한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시편의 저자들은 생의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분명한 원리들을 세웠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경험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니 불신자들의 삶이 더욱 형통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건하게 살아야 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좁은 길로 걸어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이와 같이 질문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까지 그는 정말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야를 여셔서 생에 대한 올바른 조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복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기자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지의 미래를 직면할 때엔 이와 동일한 결론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는 해답을 얻게 될지 저는 궁금합니다.
이 기자의 말씀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 있음이 내게 복이라."
만사가 어그러질 때 또는 형통할 때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결론을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27절)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
로 대조시킴으로써 그 의미심장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든지 아니면
멀리 하든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일만 남아 있지 그 외의 다른 어중간한 자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결론 지었습니다. "내게 있는 진정한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문제는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외형과 외적인 번영으로 인해 이 시편 기자는 시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를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그의 불행의 원인이 오직 한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모든 일은 그릇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마치 대서양을 횡단하는 배와도 같습니다. 북극성을 시야에서 놓쳐 버리게 되면 나침반도 소용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우리는 확신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보면,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의 상태로 인하여 그가 빗나가게 되었지만,
이제 다시는 함정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결심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2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평원에 있던 도시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불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대가가 무엇일까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참으로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불신자들이 일시적으로 번영하게 되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는 망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편 전체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이 보았던 것처럼,
모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정죄 아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 멸망으로 나아갑니다.
이 세상은 헛되고 공허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모든 보화의 본질은 동록입니다.
"주를 멀리 하는 자는 망하리니."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에게는 비참한 운명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주일에 곡식을 거둬들이기로 결심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곡식을 거둬들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창고는 곡식들로 차고 넘쳤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는 자기 교회의 목사님을 만났을 때에 목사님의 강론이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런 재앙도 제겐 일어나지 않았는걸요."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추수를 망치지도 않았구요. 목사님께서는 제가 하나님의 날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더랬지요.
그런데 목사님의 그 강론이 지금 어떻다고 생각하시죠?" 노 목사님은 그 농부를 보면서 이렇게 단순하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을에만 결산을 하시지는 않는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저의 삶을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결심합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싫어하는지요!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위대하심과 위엄을, 그리고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조성자이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도록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여호와시라는 특별한 계시를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행복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 자신을 자녀들에게 맹세로 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와 같이 하나님 가까이 에서 그의 삶을 보내고 싶으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우리에게 와서 "저는 당신과 교제를 계속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매우 고마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특권이요 명예로 생각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요일 1:3)의 사귐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항상 사는 이것은 시편 기자가 그 무엇보다도 더욱 사모한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의 사상을 고양시키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변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들 자신도 변할 가능성을 지닌 피조물들입니다.
이 세상은 정함이 없으며 불확실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이든지, 우리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영원하신 분의 존전, "빛들의 아버지"이시며 "변함도 없으신"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아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위엄과, 영광과, 사랑과, 자비에 있어서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제와 친교를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심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저자가 겪은 고통스런 경험을 통하여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가서야 비로소 넘치는 기쁨을 회복하게 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고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걸음 그분께로 가까이 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편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내 죄가 용서받았음을 아는 것도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때입니다.
저는 그분의 사랑을 의식합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있을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환경으로부터 높이 들어 올려집니다.
하나님의 존전은 은총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28절).
하나님의 존전은 안위의 장소입니다.
미지의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기도하는 제목 한 가지가 있다면 안전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쇠잔해 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럴 때면
스스로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어디에서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시편에는 이 진리가 가득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강한 망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을 해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28절)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는 구원을 맛볼 것이며 안도감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즉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문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편 기자도 고백하기를 하나님 곁에 머물러서 그분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그분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일생의 과업은 저의 생애와 입술로, 저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삶을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분과 교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더 이상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시편 기자가 영혼의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방에 홀로 있을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죄가 다 용서되었음을 알고,
그리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의식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마음에 평안을 느끼지 마십시오.
우리가 배워야 할 또 다른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두 가지 법칙입니다.
즉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약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졌다고 느끼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즉시로 여러분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심으로써 교제를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마음의 결단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리고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빛을 받으며 그의 복된 교제를 즐기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