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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시인과의 이야기
사랑으로 나는 /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 덧붙여 : 2000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 사상사)
눈물의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늦봄
나 복사꽃 그늘 아래에서 그대 안아 보지 못했네
오늘 환희 햇살 오월 하늘에 가벼이 날개 흔들며
날 아 가 고
복사꽃 곱게곱게 지네 허공을 붙잡았던 내 손톱들일까
내가 아픈 마음 꽃 위에 담요처럼 덮어 주네
이승만 생일까 저 곱게 지는 분홍빛 꽃들
말 배우기 전에 죽은 아기들의 영처럼
가슴에 넣어 두네
어느 생에선가 그것들
무연히 천사처럼 꺼내보리 무연히
열반의 그림자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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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정란(金正蘭.1953.1.6∼ )
시인ㆍ문학평론가ㆍ번역가. 서울 출생. 1972년 성심(聖心)여자중고등학교를 거쳐 1976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이어 프랑스 그르노블 3대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 <상상력의 연구와 신화비평>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하였다. 1976년 [현대문학]에 시 <스물네 살의 바다>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운동] 동인.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문), 2000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원주 상지대 인문사회대 교수.
【경향】참담한 현실 속에서 붕괴되어 가는 도시적 삶의 근원을 파헤치는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앞세우면서 풍요롭고도 사색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경력】
1976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1976 CBS 아나운서실 근무
1978 에어프랑스 근무(∼1982)
1987 강원대학교 불문학과 강사(∼1989)
1989 상지대학교 전임강사
1998 경향신문 정동칼럼 집필
【시집】<다시 시작하는 나비>(문학과지성사,1989), <매혹, 혹은 겹침>(세계사,1992)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스ㆍ타ㆍ카ㆍ토 내 영혼>
【문학 평론집】<비어 있는 중심-미완(未完)의 시학(詩學), 언어의 세계>
【사회문화 평론집】<거품 아래로 깊이> <생각의 나무>
【번역】<상징, 기호, 표지>(George Nataf 원저) <초현실주의>(D. Abadi 원저) <사랑의 이해>(E. Harding 원저) <20세기 문학 비평>(Jean Yves Tadier 원저) <람세스>(Chistian Jacques 원저) <첫 맥주 한 모금>(Philippe Delerme 원저) <다시 만난 어린 왕자>(Pierre Davidt 원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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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 축 늘어져 있는 일상을 발기시키겠다!> - 류신(평론가)
김정란의 시들은 세련되고 화사하게 치장한 여인의 모습과 같은 묘한 감각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김정란의 언어들은 매우 현란하고 자유분방하다. 그녀의 언어가 수놓는 이미지는 두텁게 배접한 종이처럼 겹쳐 있기도 하고, 튀밥처럼 가볍게 터져 오르기도 하며, 물방울처럼 공중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그녀는 '초월적인 기의'가 가뭇없이 사리진 공백 위에 유령처럼 떠도는 '백지화된 기표들'을 붙잡아, 이리 깁고 저리 꿰매어 다채로운 모자이크의 문양을 만든다.
그러므로 김정란의 시는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작위적이고, 시를 쓴다기보다는 시를 만들고 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언어는 관습화된 규범과 질서를 조롱하기 위한 일종의 기제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동'보다는 '충격'을 수단으로 부패한 우리 사회의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는 언어의 찌름. 타락한 말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해진 이 '휘황한 껍질의 삶'을 까발리는 언어의 칼날.
이처럼 시인은 "가짜의 삶, 가짜의 언어들, 그것들이/기대고 있는, 그것들이 아직도 끄떡없다고 생각하는/몇 천년 묵은 기둥"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첫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의 시세계에 대하여 박혜경은 자아의 본질적 순수는 그녀에게 나비와도 같은 가벼움으로 감지되며, 그 본질의 '꿈꾸는 핵'은 '각질의 삶, 각질의 언어'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철저히 해체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두 번째 시집인 <매혹, 혹은 겹침>에선 존재성의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 전경화된다. 자유분방한 일탈과 탈주를 꿈꾸던 기존의 시어들이, 이합집산의 유희를 즐기는 쪽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타락한 언어의 시원(始原)에 가 닿기 위해 실존적 고투를 감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의혹과 매혹의 심연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정신의 곡예를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이 기묘한 경계의 존재 방식에서부터 그녀는 "내 삶의 어디, 멀고 먼/근원"에서 솟아오르는 "영혼의 뿌리까지 흔들리는./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샘을 발견하고자 한다.
출판사와의 오랜 갈등 끝에 최근 그 모습을 드러낸 <스ㆍ타ㆍ카ㆍ토 내 영혼>에서 김정란은 '유령의 미학'(홍용희)이란 표찰이 잘 어울리는 매우 생경한 악마주의적 탐닉과 심미주의적 탐침의 시학을 동시에 펼쳐 보인다. 여기서 유령의 정체는? 아마도 그것은 불온한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며, 동시에 존재의 중심의 중심에서 꿈틀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극적 현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김정란의 시는 타성적인 기대를 순식간에 배반하는 지독한 불륜처럼 다가온다. 축 늘어져 있는 일상을 발기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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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님의 말씀인 듯.
‘사랑은 없다. 다만 사랑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라고 썼다가/ 사랑은 있다. 사랑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고쳐 쓴다.’ 김정란 시인의 <사랑은 있다>란 짧은 시다. 사랑하는 내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정란 교수(상지대 불문과)는 한때 세인의 입에 숱하게 오르내렸고, 한 문예지에 ‘문단이 문학성보다는 언론플레이를 통한 상업성 확보에만 급급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문학권력’논쟁의 불을 지핀 ‘싸움닭’인 동시에 신념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도 기억된다.
이 시에서 이해하고 믿고 이루고자 하는 사랑은 아무래도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며 더구나 부박하고 멜랑꼬리한 세태의 사랑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그의 다른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상처투성이의 내면에 대한 애잔한 아픔이라든가 아픈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처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주조인 그의 평론들을 환기한다면 역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과 생명과 신비에 그 사랑의 촉수가 닿아있는 듯하다.
다만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한 대목에서 실제로 시인은 ‘마초’들이 휘두른 칼에 수없이 살을 베이어서 견디지 못할 정도로 살과 마음이 다 아파서 이 나라를 훌쩍 떠났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낸다. 시를 읽으며 가로늦게 측은지정을 그 위에다 포개어본다. 한 여성 지식인이 ‘중세 마녀’란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독고다이’로 견디기는 참 힘겹고 위험했을 소용돌이의 한복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임을 자위했을 것이며, 꼿꼿하게 '죽어야 산다'며 ‘에코페미니즘’을 선창했던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이란 자연과 여성에게 자행되는 지배와 억압을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파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모두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지배문화 속에서 생겨났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생태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상호연관성이 에코페미니즘으로 연결되었고, 이 시도 같은 선상에서의 새로운 여성상, 그 사랑의 의미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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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교수의 기고문 전문
나는 예수쟁이이다. 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정 이런 식의 약간은 자기비하적인 용어를 사용하는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독교는 너무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진실로 예수라고 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지독한 주변인이었던 기독교의 창시자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변성을 자기 정체성 안에 통합해 넣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천한 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자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거하여 자신을 옭죄던 봉건성을 기독교라는 각성의 형식으로 극복했던 1세대 기독교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순교자도 한 분 계시고, 어머니 쪽으로도 내 가족이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는 그 연원이 깊고 특별하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 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요컨대 나는 기독교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후,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들이 전생애를 투입해 넣은 교회를 떠나지 못하셨다. 정치 문제로 이따금 당회장 목사님과 충돌하곤 하시던 내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복음주의에 소극적으로 안주하셨다. 당신이 당회를 그만두시는 정도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시고 말았던 것이다. 딸은 당신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당신의 정신 안에 설정하신 울타리 너머로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종교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 딸은 아버지의 울타리 너머로 아주 넓은 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택에 딸의 기독교적 이상은 명확한 비전을 확립하고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던 것같다. 딸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셨던 것 같다. 종교문제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충돌은 늘 거칠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사도 바오로의 성경구절을 적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울고 있는 내 책상 위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고 나가시고는 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적 이상은 결코 지금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예수 대신 미국을 섬기는 크리스찬이라니,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되던 악법을 폐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극우단체와 한 몸이 되어 시청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법석을 떠는 크리스찬이라니. 사랑이 아니라 증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자가 크리스찬이라니. 그들은 나에게 이미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들은 사제계급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쳐댔던 어리석은 유태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극우 기독교인들이여, 대답하라.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예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빨갱이”였다. 무슨 말이냐고? 예수는 기존의 질서에 전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항자였다. 그는 당대의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예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는 종교적 의미에서는 당대의 지배계급이었던 유태의 사제들이 설정해놓은 율법의,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서는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정해놓은 법의 울타리를 파괴한 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잡혀 죽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바가 체제와 제도에 의거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과 막바로 맺는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 각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 층위에서 전격적으로 제도가 설정한 존재의 개념에 저항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바깥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적 관념과 싸울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깊은 부름 외의 그 무엇에게도 귀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리아를 향해 “누가 당신의 아들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엘리야”라고 부르는 제자들의 명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인간 각자가 인간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내면의 부름과의 관계 안에서 “신의 아들”로 격상될 것을 주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아들의 자리에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제계급과 정치가들이 그어준 존재의 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을 조롱했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상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의 가치를 분양해주는 자는 세속의 제일인자인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왕, 우주인 바로 그분, 존재의 무한 허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는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일년에 수십억씩 긁어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 그는 체제가 허용하지 않은 사상을 지닌 죄로 죽었다. 예수는 당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었다. 부활의 도그마는, 나에게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보다는, 체제가,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웅크리고 있던 비겁한 제자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결단을 내린 전격적인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영적인 기적으로 여겨진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스스로 예수가 되기로 한 사건, 인간의, 제도의 아들 딸들이었던 자들이 신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 나에게는 부활의 기적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어느 날 정말로 부활한 예수의 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때, 상징은 진실로 육화된 모습으로 한 인간의 내면 안에서 현현한다. 나는 예수의 에피파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비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면적 혁명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던 일은 오순절, 즉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여 제자들의 혀를 강타했던 언어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 따라서 오순절의 기적은 제자들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한 사건이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자신의 말로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비겁한 겁쟁이의 위상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잡혀간 예수는 “네가 왕이냐?”라고 묻는 로마 총독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예수는 침묵한다. 채찍질을 당하면서 능멸과 조롱을 당하면서 예수는 그 혹독한 심문 동안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네가 너의 진정한 말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너는 나의 존재 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따라서 나는 너를 너의 무지 안에 던져놓는다고. 깨달음은 네가 너의 진정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결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시청 앞에 모여서 세상의 왕인 미국대통령을 향해 찬가를 불러대는 크리스찬들, 인공기를 태우며 사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족을 증오하며 어떤 야만적 트랜스 상태에 빠져드는 소위 예수의 신도들을 향해 예수는 다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것은 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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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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