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도 거부 검토, 사법부 흔드는 대통령
2023. 6. 4. 20:56
https://v.daum.net/v/20230604205600002
대법원장이 후보 제청도 하기 전
대통령실 ‘특정 이념 성향’ 이유
여성 후보 2명 ‘임명 보류’ 시사
법원 안팎 “삼권분립 원칙 위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김명수 대법원장이 다음달 퇴임하는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으로 특정 후보를 제청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을 보류할지를 대통령실이 검토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도 전에 대통령실이 사실상 특정 후보를 찍어 배제를 시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법조계에선 결국 윤 대통령이 입맛에 맞는 ‘코드 대법관’을 꽂겠다는 것 아니냐는 해석과 함께 헌법이 규정한 삼권분립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논란은 지난 2일 ‘대통령실이 특정 후보 2명에 대한 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지 검토하고 있다’는 TV조선 보도에서 시작됐다. 대법관 제청은 법원 내·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후보추천위원회가 3배수 이상을 추천하고, 대법원장이 이 중에서 최종 후보를 대통령에게 제청한다. 이후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다. 추천위는 지난달 30일 후보 8명을 김 대법원장에게 추천했다. 그런데 대통령실이 여기에 특정 이념 성향의 인물 2명이 포함돼 있다며, 이들을 김 대법원장이 제청할 경우 윤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는지 검토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해당 보도 당시 김 대법원장으로부터 제청 명단을 전달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선제적으로 특정 후보 배제를 시사한 것이다. 대통령실이 임명 보류 대상으로 간접 지목한 후보는 박순영 서울고법 판사와 정계선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로 압축된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4일 경향신문과 통화하며 “아직 제청 및 임용 절차가 진행된 것은 없다”면서 “헌법과 법률이 정한 원칙에 따라 절차가 진행될 것이며, 아직 정해진 방침은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대통령의 임명권 모두 존중돼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선 보도에서 언급된 ‘특정 후보가 제청될 경우 임명을 보류할 수 있다’는 취지를 부인하지 않았다. 법원 안팎에선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삼권분립 원칙에 명백히 위배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라 대법관의 제청, 동의, 임명의 주체를 구별하고 그중 제청권은 대법원장 몫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제청에까지 개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행정부의 지명 관여는 위헌”…“코드 대법관 비판했던 여권, 내로남불”
그간 대법원장의 제청 전 대통령 측과 사전 협의를 해왔지만 이는 관례일 뿐,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규정은 헌법·법률 어디에도 없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행정부에서 사법부의 영역인 대법관 후보 추천 절차나 대법원장의 지명 절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위헌”이라며 “권력분립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사전 협의도 대법원장이 응하거나 요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나 행정부 일원이 무언가 압박을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봐야 한다”며 “제청 후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중대한 결격사유가 있지 않는 한 대통령은 임명하는 게 맞다. 그것이 사법부 독립 원칙에도 부합한다”고 했다.
대통령실의 특정 후보 배제 시사는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대법관 제청권을 견제·감시하고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 제도 취지를 무력화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추천위 위원들은 후보자들의 판결 등 각종 자료와 시민들 의견을 살펴본 뒤 추천 대상을 정한다. 추천위에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대법관 후보 추천과 관련한 행정부의 의견은 이미 반영돼 있다. 그런데도 각계에서 참여한 위원들이 합의를 거쳐 도출한 추천 대상을 대통령과 성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상 제청 전 배제를 요구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추천위에 참여한 한 위원은 “사회가 요청하는 대법관의 모습 등에 대해 다양한 위원들의 의견이 골고루 반영돼 후보 추천을 한 것”이라며 “추천위는 어느 개인의 입장이 강력하게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 현직 판사는 “대법원장이 특정 후보를 제청하지 말라고 대통령이 압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 부적절하고, 삼권분립에도 어긋난다”고 했다. 다른 판사도 “대통령은 대법원장을 지명하는 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데 대법원장의 제청까지 관여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코드 대법관’ 인사로 대법원을 장악했다고 비판해온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내로남불’ ‘자가당착적’ 행태를 보인다는 뒷말도 무성하다.
대통령실 측이 제청 시 임명 보류를 시사한 두 후보자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논란거리다.
법조계에서는 퇴임하는 박정화 대법관이 여성이고 현재 대법관 13명 중 여성이 4명밖에 되지 않는 상황을 감안해 새로 임명하는 대법관 중 최소 1명 이상은 여성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