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大望待望除隊日
1974년 3월 8일. 나는 만 34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출발을 했다. 그날은 내가 후에 결혼식을 한 날 다음으로 축복받았다고 생각되는 진짜 大望的인 待望의 날이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수색대로 함께 배치됐던 동기생 29명중 4명이 신원조사결과 또는 본인의 원에 의하여 다른 부대로 전출했고, 25명은 32개월 동안 한 부대 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제대를 한 것이었다. 사회에서 같은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동창생이 많기도 하거니와 매 학년 학급을 바꾸어 졸업한 후에는 서로를 기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부대원 전체가 200여명뿐인데 그중에서도 동기생 29명이 동고동락했으니 그 이름, 그 모습들은 헤어진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다행히도 우리 동기들은 말뚝상병 없이 모두가 대한민국 5大 將星인 병장으로 제대했다. 고 영*, 김 정*, 김 해*, 문 정*, 박 갑*, 박 기*, 박 기*, 박 동*, 박 양*, 박 은*, 서 병*, 염 은*, 이 갑*, 이 근*, 이 기*, 이 능*, 이 상*, 이 영*, 이 창*, 이 희*, 임 성*, 정 순*, 정 익*, 정 중*, 정 진*, 정 호*, 조 성*, 한 기* 등 28명과 그리고 나. 그중 이 근*, 이 영*, 정 익*, 조 성* 전우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었다. 고 영* 병장은 이발병으로서 2년 동안 내 머리를 깎아 주었고, 이 갑* 병장은 취사반장으로서 나의 건강을 항상 걱정해 주며 영양보충을 시켜 주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나와 항상 단짝이었던 이 근우 전우는 평택 출신으로서 동일 사단내의 신병 보충교육대로 전출하여 그 곳의 내무반장을 했다. 그가 근무하다 제대한 그 곳은 바로 전우들이 수색대로 차출되어 끌려가던 곳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가 고참병이 되어 전출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빳빳하게 풀 먹여 다린 개구리복(제대복)을 입고서 내가 제대하던 날 제대병들을 태운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를 위하여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던 본부소대 대원들의 모습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행정요원으로는 부중대장 김 종* 중위, 인사계인 양 종* 상사, 선임하사인 양 남* 중사를 비롯하여 내 후임자인 이 주* 하사, 그리고 오 동* 병장, 문 길* 병장, 김 옥* 병장, 송 계* 병장, 안 인* 병장, 이 영* 상병, 김 재* 상병, 황 상* 상병, 이 영* 일병, 김 재* 일병, 민 덕* 일병, 유 경* 일병 등, 마치 형제처럼 지냈던 이름들이다. 통신병 중에서는 이 정* 병장과 전 영* 상병이 생각난다. 또한 운전병 중에서는 라 종* 병장, 전 학* 병장, 한 상* 병장, 김 영* 병장, 주 영* 상병, 서 배* 상병 등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밖에도 취사반장 후임자인 김 기* 병장, 군복 정비병 양 종* 병장, 위생병인 김 학* 병장, 저건너다방DJ 구 천* 일병 등은 수십 년이 흘러간 지금에도 잊혀 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그 잊지 못할 모습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모임이라도 만들어 봐야겠다.
우리 동기 제대자 25명이 제대출발을 하기에 앞서 중대장인 신광* 대위는 제대병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사회에 나가서도 군복무 시절처럼 국가와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인사계 양 종* 상사는 만 45세로서 나보다 일주일 늦게 제대명령을 받았었다. 그는 트럭에 선임 탑승하여 우리들을 대광리 버스종점까지 배웅해 주었다. 양 상사는 제20사단 수색대에서 10년간을 근무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제대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또 부대살림을 주관하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그는 매우 인자한 성품이었다. 그의 가족은 신망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제대 후에 다른 직장을 갖기 어려워 신망여인숙을 인수해서 숙박업을 할 것이라고 했다.
제대동기 25명은 전원 대광리에서 버스를 함께 탔고, 서울 마장동 동마장 터미널에 내렸다. 모두들 낯익은 곳이었다. 여섯 번 휴가 때마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고, 귀대할 때면 다시 대광리행 버스를 타기 위하여 모이던 곳이었다. 터미널 옆 건물 2층에 있던 종점다방에 모여 커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뿔뿔이 헤어졌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팔방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향을 향했다. 32개월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들이니 모두들 헤어지기 섭섭하여 두 시간 동안이나 입대로부터 제대까지의 얘기로 꽃을 피웠다. 다른 부대로 전출 간 전우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들도 그날 각기 다른 곳에서 제대 출발을 했을 것이다.
나는 서울역 앞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그날 오후 수원에 도착했다. 얼었던 땅이 막 해동하려는 시기여서 고향엔 그리 바쁜 철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3년간을 살고 나오니 고향 모습은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밤마다 희미한 등잔불을 켜고 살았는데 동네마다 전기가 들어와서 농촌의 밤도 밝아졌다. 그리고 정부의 가장 큰 시책으로‘치산녹화 10년 계획’이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의 아궁이를 작게 개량하고, 산마다 입산을 금지시켜 나무 베는 것을 엄하게 통제했다. 자연스럽게 농촌의 연료는 볏짚 같은 농업부산물로 대체되었고, 슬레이트나 기와로 지붕개량을 하여 초가지붕에 소요되던 볏짚을 땔감으로 쓰게 되었다. 그 동안 새마을운동이 불길처럼 번져서 농촌마다 도로확장, 지붕개량, 교량가설, 경지정리 등 마을이 변모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마을마다 축산농가가 생겨나 한우가 아닌 얼룩소 유우가 사육되었고, 예전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팩 우유가 시판되고 있었다. 군사정부는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게으르고 의타심 강했던 배달민족을 새마을운동이라는 채찍으로 닦달질하여 근면하고 긍정적인 국민으로 개조해 가고 있었다.
고향집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인천 부평에 있는 제33사단으로 갔다. 제대신고를 하고 제대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사단에 도착하니 3년 전 같은 날 입대하여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지역과 부대에서 근무했던 친구들이 동일자로 제대하기 위해서 모두 집결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군복을 입은 뒤 처음으로 다시 만난 친구들이 정말 반가웠다. 모두들 무사히 군복무를 마쳤기에 그 곳에 모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반갑고 기쁜 일은 논산훈련소에서 헤어진 후 대전 육군병참학교에서 단기 하사관으로 근무했던 내 친구 DS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군복무 시절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군복을 입은 채로 만나지지는 않았었다. 전후방의 휴가기간과 횟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33개월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니 그 반가움과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우리들은 그동안 겪었던 희로애락을 얘기하면서 사단에서 하룻밤을 잤다. 개구리복을 입고서 그대로 잤다. 그리고 밤새도록 待望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했다.
우리는 다음날 오전에 제대증을 받았다. ‘야호! 이제 완전 해방이다.’제대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괴로웠건 즐거웠건 개 목살이로 끌려 다니던 군복무가 끝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감회에 너무나도 가슴이 벅찼다. 이제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들 벅차게 환호했다. 내가 除隊證을 받은 날짜는 1974년 3월 10일이었는데 제대증에는 전역일이 3월 14일자로 적혀 있었다. 내 군복무기록에 입대일이 1971년 5월 14일이니 정확히 34개월간 군복무를 한 것이었다. 제33사단을 빠져나온 나는 DS와 제대복인 개구리복을 입은 채로 소주병과 마른 오징어를 비닐봉지에 싸들고 八達山으로 올라갔다. 입대하기 전보다 많이 발전된 수원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군대생활 이야기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