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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기후의 현실
근래 들어 전 세계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폭염과 가뭄, 폭우와 홍수, 강추위와 폭설 등의 이상 기후 현상에 더하여 지진과 화산 폭발로 압축되는 자연재해, 그리고 과다한 이산화탄소 배출과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 온도 상승이 초래할 심각한 재앙 등은 지구촌 공동체를 덮치고 있는 기후 위기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 준다.1
이러한 기후 위기 상황은 곡물 생산 감소를 초래함으로써 주요 곡물 수출국들이 곡물 수출을 제한하거나 금지하게 만들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세계 7위의 곡물 수입국인 우리나라처럼 식량 자급률(사람이 먹는 주곡 작물의 자급률, 최근 3개년[2020-2022년] 평균 44.1%)이나 곡물 자급률(식용뿐만 아니라 사료용을 포함하는 곡물 전체의 자급률, 최근 3개년[2020-2022년] 평균 19.5%)이 낮은 나라로서는 치명적인 식량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후 위기가 가져다줄 식량 부족 상황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처럼 각종 농산물 가격의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물가 시대의 경제적 타격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이끄는 무한 경쟁 구조를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회 상층부 사람들은 이러한 고물가 시대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회 하층부 사람에게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뿐이 아니다. 기후 위기를 자주 겪으면서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자들이 전체 온실가스의 절반 가까이를 배출하고 하위 50%의 저소득층은 고작 10%밖에 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후 위기의 주범은 선진국과 인류의 상층부인데, 그 피해는 가난한 나라들이나 하층부 사람들이 더 크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앞으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기후 재앙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기후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까지 하다.
소득 불평등 구조에서 오는 지방 소멸의 위기
이렇듯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의 상황은 소수의 사회 상층부와 다수의 사회 하층부 사이에 있는 소득 불평등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른바 소득 불평등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게 큰 문제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지수가 높은 이유로 계층 간 임금 소득의 차이를 들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매우 높은 부동산 가격을 꼽을 수 있다. 우리 사회 상층부가 가지고 있는 자산의 대부분이 부동산 등 토지 자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의 세습이 일상화되는 와중에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사회 구조가 굳어지다 보니, 이른바 금수저 세습에 대한 젊은이들의 사회적 저항감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불평등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인 9.6에 이를 정도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한눈에 알게 해 준다.
이러한 불평등 상황은 한국 사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그중 중요한 것이 지방 소멸 위기의 주범이라 할 수도 있는 도농 사이의 현저한 불평등 구조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땅의 청년 농민들은 1960년대 이후 공업화와 도시화 중심의 국토종합개발로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농가 부채의 증가와 농업 소득의 감소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농어촌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국토의 종합적인 개발이 결과적으로는 도시 중심의 편중된 개발로 변형되면서, 영세농의 불편함과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젊은 농민들이 정든 시골을 떠나는 이농 현상이 가속화된 것이다.
이에 더해,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초저출산율(0.72, 2023년) 상황과 인구 감소(출생아 수 23만 명, 2023년)의 현실은 지방 소멸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으며, 국가 소멸의 위기를 예견케 하고 있다. 도시의 변두리 지역과 농어촌 지역의 소멸 위기로 규정되는 지방 소멸의 위기는 정부가 추진해야 할 최고의 국정 과제임이 분명하지만, 한국 교회 역시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화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바울의 가르침(고전 12:12-27; 엡 4:12)이 보여 주듯이, 농어촌 교회를 엄습하고 있는 고통과 절망의 상황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 모두가 당연히 느껴야 할 통증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방 소멸 위기의 한복판에 있는 농어촌 교회
현재 한국의 농어촌 교회는 대부분이 소멸 위기에 직면한 농어촌 지역에 있다. 일반적으로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을 때 초고령 사회라고 하는데, 농어촌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상태다. 그뿐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살펴보더라도 2025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면서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합계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는 와중에 노령 인구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불어나게 되면, 대한민국의 식량 생산 기지나 다름이 없는 농어촌 지역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많은 농어촌 교회의 경우, 이전의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라 할 젊은이들의 이농과 초저출산이나 무출생의 영향으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거나 아예 없는 까닭에 학교가 폐교되고, 교회학교 역시 운영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교회학교가 사라지면 농어촌 교회 역시 활기를 잃을 수밖에 없으며, 교회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해진다. 이 때문에 농어촌 목회자 중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앓기도 하고 부정맥에 시달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방 소멸 위기가 가져다주는 농어촌 교회의 소멸 위험으로 인해 농어촌 목회자들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유입된 이주민들, 곧 이주 노동자들이나 결혼 이주여성들로 인해 농어촌 지역의 인구 감소 속도가 상대적으로 늦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어촌 지역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난다 할지라도, 현재로서는 농어촌 지역의 초고령화 추세와 청년 인구의 계속된 이농 추세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주민들과 귀농 귀촌인들의 농어촌 지역 유입이 지방 소멸의 위기를 충분히 막아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단지 지방 소멸의 예상 시기를 다소 늦춰 주고 있을 뿐이다.
위기 극복을 위한 농어촌 교회 선교 전략
우리 사회 안에 있는 교회들은 도시에 있건 농어촌 지역에 있건 모두 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농어촌 교회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이유로 존립 자체가 위협 당하는 심각한 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땅의 교회들은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을 도무지 이루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도시 교회와 농어촌 교회, 자립 교회와 자립 대상 교회 등의 차이가 너무도 현격히 벌어져 있는 탓에, 하나가 돼야 할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 그 까닭에 농어촌 교회를 위한 선교 전략은 무엇보다도 심하게 뒤틀리고 왜곡돼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 위해서는 농어촌 교회가 속해 있는 마을들을 소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선결 과제가 될 것이다. 출산율을 높이고 이농 현상을 막고 인구 유입이 이루어지게 하는 한편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농어촌 지역이 얼마든지 정주 가능한 매력적인 곳임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정부는 최저 출산율 현상과 인구 감소 및 지방 소멸 등의 위기 상황 극복을 최고의 국정 과제 중 하나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방 소멸과 국가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결혼 친화적이고 출산 친화적인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당연히 정부나 지자체와 협력하는 분위기 속에서 농어촌 지역과 농어촌 교회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마을 목회
농어촌 교회가 소멸 위기에 놓인 농어촌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농어촌 마을이 도시 지역으로 떠난 사람들의 역이주나 도시 지역 주민들의 새로운 귀농, 귀촌을 통하여 생기를 회복할 때 농어촌 교회도 소생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가 성립된다.
“마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기본 명제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그러기에 농어촌 교회는 자신이 몸담은 마을의 소생과 회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농어촌 마을의 회복이야말로 농어촌 교회를 회생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임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농어촌 교회에 주어진 이 과제는 농어촌 교회가 지역 마을과 분리된 채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문을 활짝 열고 마을 속으로 들어가되,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단순히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마을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 나감으로써, 마을 만들기나 마을 세우기를 목표로 하는 마을 목회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다. 달리 말해서 농어촌 교회가 단순히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역 마을과 소통하며 지역 마을을 부요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농어촌 교회가 구체적으로 지역 마을과 마을 주민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결적으로 요구된다. 지역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곳의 특성과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다음에는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마을 목회 실천 방안들을 모색하고 설계하되,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부터 우선순위를 정해 실행에 옮기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마을 목회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어촌 교회 목회자가 마을 목회에 대한 비전과 실천 의지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실천에 옮기는 데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발굴하고 조달할 수 있는 리더십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일을 인적, 물적 자원이 빈약한 농어촌 교회가 자력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그 까닭에 농어촌 지역에서 효율적인 마을 목회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도시 교회와 농어촌 교회의 협력 관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 도시 교회는 단순히 여러 농어촌 교회 목회자들에게 매월 일정액의 후원금을 지원하는 방법보다, 그렇게 분산된 후원금을 한데 모아서 특정 농어촌 교회가 속해 있는 마을의 이장이나 면장과 자매결연(MOU)을 맺고, 그 마을 전체를 다양한 형태로 섬기는 이른바 ‘아웃리치’ 사역 방식을 취하는 것이 마을 목회의 이상에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연히 총회나 노회는 도시 교회들이 농어촌 마을들과 자매결연을 할 수 있도록 중간 조정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도시 교회↔마을’ 단위의 도농 협력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게 해야 한다.
도시 교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농어촌 지역과 농어촌 교회를 도움으로써 도농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 가는 방식은 일자리 창출과 청년층의 귀농, 귀촌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농가 소득의 증대를 통하여 출산율 증대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2. 이주민 수용 목회
청년층의 급격한 농어촌 지역 이탈과 초저출산이나 무출생으로 인한 농어촌 인구 감소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나 지자체, 교회가 이제껏 언급한 다양한 해결책들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지만,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인구 감소 추세가 그리 쉽게 꺾이진 않았다. 인구 감소와 초저출산 내지는 무출생으로 인한 지방 소멸 위기와 국가 소멸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문제는 정부나 지자체만의 일이 아니요, 교회나 특정 집단만의 일도 아니다. 그야말로 국민 전체가 위기 의식을 갖고서 모두의 힘을 모아야만 하는 아주 중대한 국가적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의 개발과 실천이 필요하며, 청년층이 결혼과 출산을 피하게 하는 경제적 불확실성과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 전체의 인식과 구조가 바뀌지 않을 경우, 결코 출산율을 높일 수도 없고 지방 소멸과 국가 소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설령 정부와 지자체 및 국민 모두의 노력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인구 감소의 위기를 벗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국내의 각종 통계 지표에 반영되려면 앞으로 20-30년은 걸릴 것이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서는 내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출산율 제고 노력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땅으로 꾸준히 들어오는 이주민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인구 정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그렇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3년 말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들은 250만 명 정도로, 국내 총인구의 5%에 육박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이제 서구 선진국들처럼 서서히 다인종 국가 내지는 다민족 국가로 변해가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단일민족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주민들을 내국인과 똑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주민들을 단순히 노동력 확보나 인구 문제 해결이라는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관점에서만 보려 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까닭에 이주민들의 국내 유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인구 증가를 꾀하려는 시도에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내 체류 이주민들에 대한 다문화 인식 개선 교육 내지는 다문화 시민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주민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존중하는 한편으로, 국가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는 그들을 내국인과 동일한 차원에서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들을 대하는 신앙인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구약성경에서 번역자에 따라서 ‘객’이나 ‘나그네’ 또는 ‘거류민’ 등으로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히브리어 ‘게르’는 우리 사회의 이주민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바, 토라 규정의 상당 부분이 고아·과부와 함께 고대 이스라엘의 3대 약자로 규정되는 게르를 이스라엘 백성과 동등하게 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레 23:22; 신 10:18 등).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공동체 안에 있는 게르를 보살피고 섬겨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스스로가 게르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본래 바벨론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옮겨갔던 게르였고(창 23:4), 게르의 신분으로 가나안 땅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요셉의 때에 이집트로 옮겨가 살았던 야곱과 그의 일가족 역시 고센 땅에서 430년 동안이나 게르 공동체로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까닭에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과거에 이집트에서 게르의 신분으로 살았었음을 언급하시면서(출 22:21; 신 10:19 등), 그들 중에 머물고 있는 나그네(게르)를 학대하거나 압제하지 말고 가족처럼 사랑하고 보살펴 줄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이 점에 비춰 볼 때 한국 사회에 머무는 이주민들은 구약성서가 강조하는 게르요, 한국 사회가 사랑으로 품어야 할 외국인 약자임에 틀림이 없다. 더욱이 일제 시대에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만주나 러시아 등지로 이주함으로써 구약성서가 말하는 게르의 삶을 살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사회의 게르를 향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섬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와 “자기 자신”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레위기 19:33-34의 가르침이 그렇다. 이러한 이주민 환대 목회는 한국 사회가 지구화와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성공적으로 이겨 낼 수 있도록 돕는 국제적 경쟁력과 성장 동력의 증진을 가능케 할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지방 소멸과 국가 소멸의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인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 줄 것이다.
3. 농어촌을 살리는 농어촌기본소득
지난 2020년과 2021년도에 정부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활동 위축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국민의 생계 안정과 소비 촉진을 목적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바가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정치권과 학계 일부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전 국민에게 상시적으로 일정액의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기본소득에 관한 학문적인 논의는 양극화 현상과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서구 학계에서 심도 있게 논의돼 왔고, 한국 사회에서도 20여 년 전부터 단편적으로 거론돼 오다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언젠가는 모든 국민에게 지급하게 될 기본소득은 우선적으로 한국 사회의 약자들인 농민들에게 지급돼야 할 것이다. 이른바 농어촌기본소득이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의 변두리에 처한 농민들은 온갖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농촌과 농업 및 식량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도시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른바 3농(농업, 농촌, 농민)의 소외 현상이 발생했고, 농가 소득의 감소로 인하여 도농 소득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농업 소득으로만 생활할 수 있는 전업농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고, 막노동이나 기간제 공무원,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대리운전, 택시운전 등을 겸하는 이른바 겸업농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농업에 종사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소득 증대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겸업농의 비중이 늘어난다고 해도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농가 소득의 이러한 감소는 자연스럽게 더 풍족한 삶을 갈망하는 청년층의 이농과 농어촌 지역의 인구 감소를 초래했고, 마침내는 지방 소멸 위기 시대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업이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농업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공익의 가치를 존중함과 아울러 지방 소멸 위기에 직면한 농업과 농촌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 가장 확실한 해답이 바로 농어촌기본소득이다. 농어촌기본소득은 농업 종사 여부와 관계없이 지자체나 정부에서 농민과 비농민을 구분하지 않고 농어촌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보편성) 사람들 개개인에게(개별성) 조건 없이(무조건성) 정기적으로(정기성) 일정액의 현금(현금성)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일이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농어촌기본소득의 지급은 가급적 지자체와 정부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농촌과 도시 사이에 존재하는 소득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폐단을 이겨 내고, 이를 통하여 우리 사회의 약자 계층인 농민들의 소중한 생존권과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농어촌기본소득은 우리 사회의 역동성이나 통합 또는 일체감 형성을 감소시키는 소득 불평등과 사회적 빈곤율을 저하시킴으로써 지속 가능한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가능케 할 것이요, 지금도 현실화되고 있는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식량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명과 건강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생명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케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농어촌기본소득은 소멸 위기에 놓인 농촌으로의 역이주를 가능케 함으로써, 농어촌 지역이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에 힘입어 인구 증가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농어촌기본소득의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함께 농어촌기본소득의 법제화를 가능케 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한동안 천대받았던 농업을 대한민국의 기간산업으로 격상시키는 한편으로, 농촌을 지키면서 식량 주권과 식량 안보의 파수꾼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농민을 국가가 책임지는 공익 농민(준공무원)으로 대우함으로써, 비록 소액일지라도 농어촌기본소득이 농업 종사자들에게 일종의 월급과도 같은 효과를 얻도록 한다면, 초고령 사회의 그늘 속에서 신음하는 농어민들의 근심과 고통이 사라질 것이요, 소멸 위기에 놓인 농어촌 지역에 다시금 젊은 인력이 되돌아와 농어촌 마을들과 교회들을 생기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註
1) 본고는 필자의 다음 글을 요약, 수정한 것이다: “지방 소멸 시대의 농어촌 선교 전략과 실천에 관한 연구,” 〈선교신학〉 제75집(2024), pp. 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