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본문 : 고전1:21-24
제목 :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교회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한다고 했지만 원문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과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라는 말 안에는 온 우주와 세상과 시간에 담긴 나의 모든 것의 종결이 들어있습니다. 지혜는 헬라어로 ‘sopia’입니다. 헬라인은 정말로 항상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헬레니즘은 헬라인이 세운 문화입니다. 원래는 그리스 사람들인데 그리스인의 조상이 헬렌 족속이어서 그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지혜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으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기록했겠습니까?
헬라인의 지혜로움이 우리에게 전달된 단편적인 예를 두 가지 들면 먼저 헬라인이 등장하기 전에는 농부, 어부와 같은 단순한 직업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직업의 개념 자체를 바꿔버렸습니다. 마라톤을 잘하면 그것이 직업이 되고 창을 멀리 잘 던지면 그것이 직업이 되는 등 새로운 직업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축구, 마라톤, 달리기, 레슬링 등 스포츠 꽃인 올림픽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남의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흉내내고 그것에 감정이입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쇼를 했습니다. 그게 바로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는 헬라어입니다. 영어가 아닙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헬라어는 이런 식으로 어마어마한 내용과 이름을 영어 문화권에 전해주었습니다. 3000년 전에 드라마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당시 모든 국가는 왕이 모든 것을 통치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는 신격화된 파라오의 절대 통치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고 노예의 본성으로 애굽에 길들여져 한 사람의 통치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인간의 통치하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질서와 어울리는 것이지 어떤 지배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섬기는 것을 큰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큰 자가 되려거든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헬라인의 국가관도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군사, 경제, 의술, 예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피라미드, 스핑크스, 미라 등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최악의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권도 무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왕을 세우지 말고 똑똑하고 사회에 헌신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200명의 어른들을 모아 그들을 통해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다른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민주주의를 헬라인들은 실행한 것입니다.
한 사람, 즉 왕이 다스리는 ‘오토그라시 아르케’에서 민중이 다스리는 ‘데모크라시’로의 전환, 이것이 바로 헬라인의 지혜의 결과입니다. 지혜는 개인으로부터 국가까지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이런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기에 ‘헬라인은 지혜를 원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얻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BC 330년경 알렉산더대왕 시대의 고린도의 철학자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철학자를 찾던 왕이 주변 나라들로부터 인도까지 정복한 후 지혜를 구하려고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다리 밑에 앉아있던 디오게네스는 왕에게 저리로 가라고 손짓하면서 짜증을 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받고 있던 햇빛을 왕이 가렸기 때문입니다. 명예나 권력이나 돈보다 햇빛을 귀하게 여긴 디오기네스, 참으로 재미있고 놀랍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헬라인들도 ‘만물이 그리스도에게서 낳고’라고 말합니다. 즉 민주주의도, 스포츠도, 과학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똑해서 발견하여 이름 붙인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금은보다 귀한 지혜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고전1:30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세상에서 얻는 헬라인의 지혜는 그림자일 뿐, 그리스도께서 지혜의 실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지혜가 바다라면 우리의 지혜는 두 손을 모아 뜬 바닷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지혜입니다.
헬라인이 지혜를 구했다면 로마인은 성공을 구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늘 땅을 많이 갖는 것을 원했는데, 성공지향적인 그들의 방식은 헬라인의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명예 또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이상은 명예롭게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로마와 관련된 비유를 많이 드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셨는데 사실 가이사가 세금을 걷어봤자 다 하나님께로 오게 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백부장이 자신의 월급으로 건축헌금을 많이 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백부장이 많이 아끼는 종을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께 부탁하는 장면에서 ‘그는 우리 유대인들에게 잘하고 회당 짓는 데도 큰 힘을 실어주는 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황제의 것이 황제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으로 다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성공은 복음으로 다 회수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성공이시고 우리의 기업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헬라인의 지혜와 로마인의 성공은 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표적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런 유대인의 삶은 세계의 역사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그들의 소원은 우리의 삶에 하늘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자기가 일해서 먹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먹여주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게 우리 민족에게 나타난 표적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표적을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라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산 떡은 표적이 아닌 나다. 즉 만나가 표지하는 실제 생명의 떡이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표적이신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산 떡으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또한 표적을 구하며 일이 잘 되기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산 떡이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순종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그 어떤 사역도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표적을 가장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우린 그분으로 인해 특별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의 결심도 아니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실체는 마치 표적처럼 하나님께서 내 안에 딱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양심을 걸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믿는가?” 헬라인처럼 예수님을 믿고 지혜를 얻고자 하거나, 로마인처럼 예수님을 믿고 강함을 소유하고자 하거나,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믿고 내 삶에 표적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에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으며, 미흡하고, 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유대인은 여기서 걸립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끔찍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주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이자 실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본질이십니다. 예컨대 경찰은 그의 얼굴, 체격, 말씨 등의 외적 요소가 아닌 그가 입고 있는 제복과 그 제복에 공권력을 부여하는 국가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듯 예수님도 무엇을 가져오거나 이루어내는 예루살렘 청년이 아닌 그리스도라는 인간 이상의 차원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선지자이시고, 참 랍비이시며, 하나님 본질 자체인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도 성령과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충만하심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겹쳐진 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차원을 뛰어넘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며 그분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무능인 동시에 인간의 전능입니다. 가장 무능해짐으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큰 지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얻는 가장 엄청난 성공, 십자가야말로 우주보다 넓은, 인류의 역사를 뛰어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만세 전에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일부러 외면하거나 무시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완전함을 얻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절대 진리이십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다른 세상의 지혜, 성공, 표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우리와의 연합을 통해 당신의 영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실제적 영광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진리, 참 생명, 참 구원자이신 예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