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의 묘(춘천시 서면 방동리821)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관광적 기행문이 수백개 뜨고 풍수적 간산문은 몇 개에 불과하다. 이 묘에 관하여 ①명혈인가 ②왜 봉분이 3개인가 ③어느 묘가 진혈인가 ④ 목없는 무덤도 발복하는가 ⑤어느 좌향이 맞는가 하는 풍수적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다.
2. 평산신씨와 시조묘의 내력
*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15세손에서 19개 파로 분파하였으며 50만명(2011년 14위, 행안부고시)이다.
* 신숭겸은 곡성에서 성장하여 춘천으로 이주하고 궁예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가 918년 배현경 홍윤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쫓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고려개국벽상공신이 되었다. 황해도 평산에서 왕건과 사냥하던 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화살로 쏘아 맞히는 무예실력을 보여서 감탄한 왕건으로부터 신숭겸이란 성명을 하사 받았다.(당시는 성명없는 사람이 많았다) 왕건이 927년 견훤과의 팔공산 전투에서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신숭겸은 왕건의 갑옷을 받아 입고 왕건인양 행세하여 적을 유인하고 그 틈에 왕건은 병사로 가장하여 달아났으나 신숭겸은 전사했다. 견훤이 전주 본거지로 물러간 뒤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해보니 몸체는 찾았으나 머리를을 찾을 수 없어서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도선국사가 왕건의 신후지로 소점한 이곳에 안장했다. 그런데 금으로 만든 머리를 도굴당할 것을 염려하여 봉분을 세개 만들었다. 뒤에 도굴꾼이 출몰하였으나 도깨비가 도둑이 발목을 잡아 못 움직이게 하여 보호를 하였다. 곡성 태안사에도 장군의 애마가 머리를 물고 와서 절 뒤에 목무덤을 만들었고 팔공산에도 제단이 있다.
3. 풍수적 문제.
1) 다수는 이 묘가 조선의 8大 명혈에 속한다고 하나 일부 이기론자는 미미한 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평산신씨라는 후손발복은 차치하더라도 국이 넓고 사격이 장중하다. 봉황의 집이라는 설이 있으나 상제봉조형이 아닐가.
2) 세개의 봉분을 조성한 것은 황금 머리를 도굴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라는 견해와 장군의 부인묘라는 견해가 있고 신도비에는 어느 말이 사실인가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도굴을 방지하려면 봉분을 크게 만들고 돌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애당초 황금머리를 붙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적어도 도굴방지용은 아니라고 본다. 어느 묘가 진짜일가? 청룡쪽이 진혈이라는 주장은 소수이고 다수는 중앙묘라고 한다(백호쪽 묘가 허혈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현장에서 보니 청룡쪽은 기운이 약하고 중앙묘는 생기가 넘쳤다. 진혈에 들었기에 大姓의 시조가 되었을 것이다.
* 지도---
* 세개의 봉분---장례시(927년)에 도선국사는 죽고(898년) 없었다.
* 신장군은 머리없이 몸체만을 묻었다. 이를 두고 초혼장이라 생각하여 초혼장도 효력이 있다는 사례로 든다. 그러나 몸체만 묻어도 의리장이나 초혼장은 아니고 상당한 효력이 있다고 보아야 된다. 이 문제는 발복의 작동원리에 관한문제로 풀어야 될 것이다.
* 술좌로 썼는데 건좌손향이 맞다는 견해와 신좌을향이 맞다는 견해가 있다. 장군봉 여의산 구룡산으로 연결되어 혈처로 향하여 오는 몇 개의 좋은 사격이 있다. 어떤이는 이 방향을 안산으로 잡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달(月)도차면 기울어지는 법이다. 혈처의 여력이 굽어지는 끝을 본다면 그 방향은 큰일 날 방향이다(88향법에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2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