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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8월의 끝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꼬리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거참! 대단해요. ‘2024년의 여름’이라 기억할 것입니다. 다만 아침 공기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뜨겁던 공기가 새벽에 이르러 완화되어 시원한 바람으로 들어오더라고요. 끈질기죠. 한낮의 이 뜨거움을 얼마나 더 견뎌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 예보도 그리 만만해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열대야는 졸업한 듯합니다.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다 싶기는 합니다. 오는 추석도 여름옷으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하기야 조금 빠르기는 합니다. 그러려니 하지요.
어제 아침 뉴스에서 도로 가운데 갑작스런 씽크홀이 발생하여 지나가던 승용차가 그대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80대와 70대 노부부가 타고 있었던 듯합니다. 생명은 건졌지만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해보니 저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어쩌면 다시는 운전대를 잡기 힘들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것 자체가 힘들 텐데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 땅속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일입니다. 후들후들 떨면서 다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트라우마로 힘들 텐데 말입니다. 하기는 그냥 걸어가다가도 빠질 수 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모두 대단히 용감들 하지요. 그냥 맘놓고 다니니 말입니다. ㅋㅋ 세상 두 쪽이 난다해도 살아있으니 좋은 거죠. 그 때까지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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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마지막 날 김종우 목사 드림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에이리언 - 로물루스>
사람은 지역 시간에 상관없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경제동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보다 100년 이후의 이야기, 그 때는 인간이 저 우주 넘어까지 다달아 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언제 어디에서 살든 변함없는 사실, 인간은 욕심덩어리일 뿐입니다. 기원 전이나 오늘이나 또 10세기를 뛰어넘어 다른 세기를 산다 해도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업은 이익을 창출해내기 위해 지구 밖으로까지 진출합니다.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어떻게든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이용하고 적게 임금을 주던지 더 이용하려 묶어두려 합니다. 물론 피고용인은 그 환경을 벗어나려 애씁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결, 어쩌면 주먹과 돌의 싸움 같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합니다. 찾고자 하는 자에게 길은 나타납니다. 문제는 위험을 감내해야 합니다.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도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많은 희생을 겪으며 이루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이름도 없이 싸우고 이뤄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느 영화 대사에서 듣던 말, 우리가 돈이 없지 깡이 없냐? 자신의 자존심을 돈 때문에 내버리지 못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아직 젊습니다. 이 좋은 시간을 이 노예생활과 다름없는 여기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기한이 다 되어서 담당자에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허락되지 않습니다. 강제 기한연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그곳을 빠져나갈 능력은 없습니다. 다른 행성으로 도망하려니 우주선이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승선 비용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마저 허락을 받아야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래저래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합니다. 혼자서 빠져나갈 길은 없습니다. 마침 친구들이 제의를 합니다. 가지고 있는 자기 차(?)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인 없이 배회하고 있는 폐우주선을 탈취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원하는 행성까지 갈 수 있답니다.
문제는 과연 그 떠돌이 폐우주선에 그만한 동력이 남아있느냐 하는 것이요, 또한 움직일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침 ‘레인’이 동생처럼 데리고 있는 합성인간 ‘앤디’가 그 눙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동승을 허락받습니다. 작전을 위해서는 레인의 동생이라는 합성 인간 앤디가 함선의 프로그램 마더와 접속하여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 몇이 모여 작전을 짜고는 살던 식민지를 떠납니다. 그리고 폐우주선 로물루스에 당도하여 도킹에 성공합니다. 모두 무사히 우주선으로 이동하여 조정실에 모입니다. 에너지를 얻으려 일행이 냉각실을 조사하던 중 전갈의 모양을 한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부화하여 깨어나 공격합니다.
합성인간 앤디는 말 그대로 기계인간입니다. 입력된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인지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주인 레인의 선을 위하여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보다 차원이 높은 지식을 얻기 위해 삽입되어 있는 칩을 새 것으로 바꿉니다. 그러니 혼란이 생깁니다. 새 칩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프로그램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움직이던 대로 하자니 기업의 이익을 반하게 되고 새 칩의 프로그램대로 행하자니 주인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익이냐 정의냐 하는 갈림길에서 헤매는 사람의 감정이라고 할까요? 그 혼란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아차린 레인이 칩을 다시 바꾸어버립니다.
앤디는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냉각실에 갇혀서 요상한 기생충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두 친구가 있습니다. 앤디만 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앤디는 문을 절대 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레인이 열라고 명합니다. 열어주면 그 안의 두 사람뿐만 아니라 바깥의 사람들도 공격을 받아 모두 죽게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눈앞의 위기를 보고 있는 친구들이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같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들을 일단 빼내야 하는 것이지요. 어찌 하겠습니까? 앤디가 탄식(?)합니다. 인간들은 안 돼!
마치 낙지 같은 요상한 기생충들과 드디어 나타나는 에이리언 그리고 나중에 또 다른 기묘한 인간과 에이리언의 합작물 등 싸움의 상대가 발전합니다. 바로 그 폐우주선 로물루스 안에서 말입니다. 외부로부터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 오로지 자기들만의 힘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더구나 곧 소행성 그룹과 총돌이 일어납니다. 어떻게든 이 우주선을 벗어나야 하는데 괴상한 괴물들과의 전쟁이 계속됩니다. 과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전 이야기들처럼 대부분 다 죽습니다. 한 사람만 남게됩니다. 그리고 사람인 듯 아닌 듯 앤디를 구출하며 떠나는데 말합니다. 그곳에 가면 꼭 고쳐줄게. 영화 ‘에이리언 - 로물루스’(Alien: Romulus)를 보았습니다.
정신 나간 질문
발상의 전환이라는 게 있습니다. 남들이 다 이렇다고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데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수업태도에 화가 난 선생님이 학생 전체에게 누워서 자전거 페달 밟기 벌칙을 주었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녀석만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화가 나서 윽박질렀지요. 야, 너는 왜 가만히 있어? 그러자 학생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지금 내리막길을 가고 있거든요..." 다들 벌을 주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에 이의가 생길 수도 없는 일이지요.
특히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더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남들과 정반대로 가야 살 길이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건물과 건물사이 골목으로 깊이 들어간 커피숍이 유명해졌습니다. 누가 봐도 그곳은 전혀 커피숍을 할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고객들의 일반적인 걸음걸이로 볼 때, 골목 입구는 단 3초면 지나치게 됩니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하여 이 점포는 약점을 극복하고 고객을 끌어 들였습니다. 어떤 조치를 하였을까요? 입구에 테마를 준 것입니다. 골목을 활용해서 거기다 자갈을 깔고 철길을 만들고 입구에 철로신호등을 설치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여기에 웬 철로야? 도심에서 철길을 걷는다니 대단한 흥밋거리 아닙니까? 하나 둘 고객들이 찾아왔고 자연 이야기꺼리가 되어 명소가 된 것이지요.
고정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탈피하지 아니하면 발전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눅 5 :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묵은 것, 오래 된 것, 이미 우리가 익숙한 것 그것을 내려놓고 새것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이지요.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쉽게 용납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한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 정말 그런가? 하는 질문을 해보는 겁니다. 발상의 전환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똑같이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이 달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매여있던 당신의 백성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지요. 요 8 :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동안 혹시 남들 다 그러려니 생각한다고 해서 우리도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간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자 이제 우리 잘 아는 세례 요한이란 사람을 보고자 합니다. 일단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거든요.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 역사 속에서만 보아도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도 솔로몬도 견줄 수 없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아마 모세를 하늘처럼 생각하던 당시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또 한 번 야단이 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요.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마 21 :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이 대답합니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는 ‘사람에게로서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러선 백성들이 두려웠지요. 그래서 대답을 기피한 것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길 예비 사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마 11 : 7 - 10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옛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주님이 오시기 전에 그 길을 예비하려고 사자가 먼저 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앞서 세례 요한이 먼저 온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즉 당신 자신은 언약의 사자로 세례 요한은 길 예비 사자로 올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마 3 : 11 - 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는 복음서에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 3 : 1 - 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사 40 : 1 - 3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아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말하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입니다. 그곳에 외치라는 것은 그곳에 거하는 하나님 백성에게 말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구원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한 이방 여인이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사정을 할 때 바로 그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리고 이사야 예언의 말씀 가운데 또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 다음 말씀입니다. 분명히 예루살렘에 말하라고 해놓고서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광야이고 사막에서 예비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광야와 사막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짐작하는바 광야에는 양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 같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 백성이 먹어야 할 양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진리의 말씀이 없다는 뜻이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제사장들 사두개인들을 세례 요한이 뭐라고 질타했는지 들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 3 :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당시 백성의 목자들이라 하던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 즉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요 8 : 44) 마귀의 자식들에게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광야이며 사막입니다.
오늘 우리가 출입하고 있는 교회가 그런 꼴이 되었다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분명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율법을 강론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려서 명절을 당해 그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성전에서 선생들과 들으며 물으며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2 : 41 - 47) 그런데 참 진리의 말씀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네 교회에서도 때마다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계명인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아니하면 생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구정물을 마시는 꼴이 된다는 말입니다. 먹으면 영생하는 물이 아니라 먹으면 죽는 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어떠했습니까? 행 17 :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는 자세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수이기 때문이지요. 생명이 달려있는데 건성으로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답은 성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실제 사역을 봅니다.
앞에서 세례 요한이 이미 예언된 ‘길 예비 사자’로 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사역을 하였는가 보도록 하지요. 마 3 : 4 - 6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으로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회개의 증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다시 복음을 증거해준 것입니다.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증거합니다.(행 18 : 24) 그런데 그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행 18 :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래서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그렇지요? 세례 요한은 예비 단계일 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고 생명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지요. 행 19 : 3 - 5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아멘!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혹시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메시야인가 하는 소망이 있었겠지요. 요 1 : 19 - 20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그리고 이어 23절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가 예수님이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지요. 29 - 30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다시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증거합니다. 요 3 : 28 - 30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맞습니다. 이제 언약의 사자가 등장하였으니 길 예비사자는 물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마땅히 자기 제자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까?
셋째, 세례 요한의 결과
당시 유대는 분봉왕 헤롯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헤롯 왕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좋지 못한 짓을 하였습니다. 무시무시했던 헤롯 1세부터 그 자손들이 대부분 그랬지요. 그 중 한 자가 자기 동생의 처를 빼앗아 아내로 삼습니다. 마 14 : 3 - 4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결국은 그 일로 말미암아 죽음에까지 이릅니다. 헤롯은 유대인도 아닙니다. 자기 백성도 아닌데 괜스레 남의 집안 사정 간섭하다가 옥에 갇히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이었는가?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그에게서 성령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는 예수님을 보고 제대로 고백하였지요. 요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가 뭐라 말합니까? 33- 34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아멘! 그랬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얼마 후 헤롯 집안일에 간섭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마 11 : 2 - 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당신이 맞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지요? 하나님이 이미 세례 요한을 떠나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아니하면 그 촛대를 옮긴다고 하십니다. 계 2 :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옛날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 고집대로 나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 촛대를 다윗에게로 옮기신 것이지요.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은 ‘길 예비사자’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 백성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벧전 4 :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하신 말씀처럼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라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가 천국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없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일생을 바쳐 수고한들 끝이 좋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솔로몬 왕이 그랬고 세례 요한이 그랬습니다.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죄도 짓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지요. 그냥 자기 고집대로 나간다면 그건 지옥행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 옆에 돕는 자를 붙여주십니다. 그런데 성경 역사를 보면 이 돕는 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처음 아담 곁에 붙여주신 하와부터 그랬습니다. 사실 하와로부터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모세 곁에 대언자로 붙여주신 형 아론은 어떠했습니까? 백성들의 요구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앞에서 잘 나가던 세례 요한도 결국은 자기 몫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끝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도 분명 먼저 길 예비사자를 보내십니다. 그 이야기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마지막 때 이야기인 계시록에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보내시기 전에 일곱 별 일곱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곁길로 새 나갔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편지를 통하여 경고하십니다. 계 2 :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런데 회개합니까?
세례 요한이 왜 자기 길에서 벗어났을까요? 엉뚱한 데 관심을 두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하신 목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으면 어서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자기 해야할 본분입니다. 그런데 자기 제자들도 그냥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괜스레 남 가정사에 간섭했다가 미움사서 옥살이를 하고 결국은 죽음을 맞게됩니다. 하나님께 칭찬 들을 일인가요? 당신이 과연 그입니까? 하는 정신 나간 질문이 왜 나옵니까? 본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요 성도라면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며 세상을 이기는 신앙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셨습니다. 무식하면 망합니다.(호 4 : 6)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지켜야할 약속이 무엇인지 알아야 지킬 것입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배우며 신앙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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