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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묵상글 들 ( 대림 제3주일. - 기쁨에 관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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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쁨에 관하여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첫째 독서의 첫 마디가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이고
이어지는 말들도 온통 ‘기쁨’, ‘환호’, ‘환성’ 같은 매우 희망적인 말들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늘 우리도 기쁨에 대해 생각게 되고,
우리의 기쁨은 어떤 기쁨이고 어떤 기쁨이어야 하는지도 생각게 됩니다.
기쁨은 첫째로 소유적 만족감입니다.
갖고 싶었던 컴퓨터를 갖게 되었을 때 기쁘지요.
둘째로 성취적 만족감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추진 중인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기쁩니다.
셋째로 인격적 만족감입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거나 기다리던 손자를 얻었을 때 기쁩니다.
기쁨이 이렇게 몇 가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꿈, 희망,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갖거나 이루거나 만나기까지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 중의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기쁨이 더 크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이 생겼는데 집을 갖는 것이 오랜 꿈이 아니거나
꿈이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갖게 되면
그 기쁨이 오랫동안 고생고생한 끝에 산 것에 비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쁨을 추구합니까?
돈을 얻는 기쁨과 사람을 얻는 기쁨이 있는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구원을 얻는 기쁨과 치유를 얻는 기쁨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병이 낫는 기쁨과 현존 체험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기쁨을?
다른 말로 하면
소유의 기쁨과 성취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성취의 기쁨과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인간 사랑의 기쁨과 하느님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대리 만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만족을 대신하는 만족을 일컫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다가 비만이 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기쁨에도 대리 기쁨이 있습니다.
상위의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위의 기쁨에 주저앉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저앉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성취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천상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 기쁨에 주저앉습니다.
구원의 기쁨 대신에 성취나 치유의 기쁨으로 만족합니다.
구원자가 오시길 기다리지 않고 손자가 오길 기다립니다.
스마트 폰 화면에 성화가 있지 않고 손자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는 기쁨은 인격적이면서도 성취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기쁨이요,
구원자를 만남으로써 원하던 구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사야의 이 예언이 주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됨을 얘기합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보내어 주님이 그 메시아인지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말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께 희망과 사랑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바흐의 칸타타(가톨릭 성가 180번), ‘인간의 희망이요 기쁨이신 예수’
이 성가를 들어보시길 추천하며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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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주일은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가 1984년 매년 대림 3주일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선을 실천하도록 일깨우기 위해 설정한 날입니다.
자선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자선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선을 단식과 기도와 더불어 신앙생활의 삼대 기둥의 하나로 여기셨습니다(마태 6,1-8). 주님께서는 자선을 권하시면서 그것을 완전히 이해타산 없이 ‘나팔을 불지 말고’(마태 6,1-4),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루가 6,35 ; 14,14)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6,30). 더욱이 주님께서는 어떠한 청에도 마음의 문을 닫지 말라고 하십니다(마태 5,42).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이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주님께서 받은 사랑과 위로와 평화의 영적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선이란 주님의 사랑에 입각해서 베푸는 경제적 물질적 원조 뿐만 아니라 영적인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선행위란 헐벗고 굶주린 이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는 일,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집이 없는 이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는 일,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을 찾아 주는 일, 그리고 죽은 이를 장사 지내 주는 일 등 여러가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마태 25,31-46). 그리하여 오늘 제 1독서 이사야서의 말처럼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꺽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불안하고 좌절하는 마음을 굳세게하고 두려워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선 행위는 인간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이 끝날 때까지 베풀어지는 손길이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제한 없이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또한 인종, 민종, 종교, 신분,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 한 마음, 한 시선으로 가난하고 고통 받은 이웃을 바라보게 하여 사랑과 자비로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실패로 점철되어 절망으로 인해 미래를 바라보는 눈 먼 이들을 희망의 눈을 뜨게 해주고, 인생 여정에서 불행과 좌절로 절름발이 인생을 사는 이들을 다시 제대로 일어 설 수 있도록 해 주며, 죄로 물든 영적인 나병환자들에게 사랑으로 품어 안아 상처받은 영혼을 깨끗이 치유해 주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의 말을 묵상하며 자선의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하는 주간 되시길 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지닙시다. 그리고 죄의 더러움에서 영혼을 씻어 주는 자선을 베풉시다. 사람들이 이승에 남겨 두는 모든 것은 결국 잃고 말지만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행위와 애긍은 가지고 가, 주님으로부터 상급과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알코이 (Alcoy) 의 아기 예수
스페인 –1568년
그 때 입상이 몸을 숙이기 시작하면서 그 이전까지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던 자그마한 오른손을 내려서 마루바닥 위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그녀의 입에서 놀라운 외침소리가 나왔다. 집안 사람들이 달려왔으며, 오래 전부터 언제나 똑바로 서 있는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았던 그 아기예수가 이제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도 미랄레 부인처럼 놀랐다. 그런데 나무로 된 그 조각품에는 약간의 흠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려뜨린 손가락이 분명히 지하실에 성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자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즉시 아무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몇몇 저명한 사람들이 관청으로 가서는 아기예수의 입상을 공식적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바로 아기예수 입상 아래에 있는 장 프레의 마구간을, 이미 두 번씩이나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던 마구간을 세 번째로 매우 조심스럽게 검사해 볼 것을 요청했다.
관청은 부탁을 들어 주었다. 야유와 저주를 일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미 전에 두 번의 다른 도둑질과 연관되어 있었던 장 프레를 사람들이 체포하여 구치소에 집어 넣었다. 그 동안에 사람들은 누렇게 변한 옥수수 수염아래에서 그 잃어버렸던 은으로 된 성작과 세 개의 성체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이것은 1568년 1월 3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판사가 그 죄수에게 성체를 갖고 무슨 일을 했는가를 물었다.
그는, “저는 모든 성체를 다 먹어치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판사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어떻게 모두 다 먹어치웠나? 사람들이 이미 세 개의 성체를 발견했는데!”
그러자 장 프레가 창백해지면서 소리쳤다.
“이제 저도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체가 나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저는 모든 성체를 다 먹었다고 분명히 확신합니다. 그런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세 개의 성체가 남아 있다니 !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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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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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이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를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에, ‘나는 메시아다’라고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니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살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은 사람은 살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고 다음에 살아간다면, 진정 하느님의 생명, 참된 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죽지 않고,
죽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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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정말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살고 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잘 준비된 마음 안에 예수님을 낳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의 색깔은 장미색입니다. 오늘 불이 당겨진 대림초도 장미색입니다. 오늘의 이 색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회개의 삶에 충실하여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다짐하게 하는 날입니다. 결코, 지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며 천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년의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로 바빌론 유배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인들은 오 천리나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고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희망을 잃고 살았습니다.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다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해 페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꽃을 피우고,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넣어주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립니다.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게 됩니다....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제 본디 모습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이러 저러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지 아닌지 궁금하고 한편으로 의심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3,10). 하며 회개의 절박함을 선언했던 요한입니다. 요한은 메시아를“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3,12), 잘못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병자들을 만나시며 먹고 마시고 하니까 그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기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서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11,5-6). 결국,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말씀이 그대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곧‘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6,47)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해야 합니다. 물론,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은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회복하시는 일을 하셨고, 죄악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셔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방법대로 주어지고,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덜대기도 합니다. 가정의 우환, 자녀의 문제,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사업이 잘 안 풀리고 …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응답이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고’깨어있어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반드시 옵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자기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돌틈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그것을 거두어 가서 기도해 준답니다.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틀에 갇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들어갑니다.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그냥 들어갑니다. 사람만 모자를 씁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실대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많지만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충만함은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지만 꽃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아직도 점집을 들락거리고 철학관을 찾으며 양다리 걸치기를 하시는 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는 것은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으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 주 예수님을 내 입에 맞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기대에 걸맞은 삶으로 기뻐하고 영원히 남을 것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콜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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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하면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머리, 허리, 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말은 다른데 끝에 말은 모두 ‘리’로 같습니다. 앞의 말은 우리 몸의 특정 부위를 뜻하는 것 같고 뒤의 말은 그냥 붙이는 접미사 같습니다. 비슷한 말로 예수님, 선생님, 임금님, 사장님의 ‘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며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제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접미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마르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우산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는 경우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글에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던 날입니다.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날씨도 흐리고 추웠다고 합니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됐습니다. 그 말이 변형되어서 1957년 국어사전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입니다. 70년에 걸쳐서 4번의 큰 박해가 있었고 만 명 이상이 순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교회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것처럼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은 신앙을 증거했던 ‘성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경기도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해미, 갈매못, 줄무덤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베론 성지가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한티성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신앙을 지켜온 곳들이 성지가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여의도에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집전하였습니다. 30년 후인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광화문에서 124위의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을씨년스러운 날을 광명의 날로 바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삶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하던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 했던 말들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이웃의 비난과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에서 야고보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항상 기도한다면, 언제나 기뻐한다면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찾아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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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읽다가 사람 몸에 0.2mg(70kg 사람 기준)의 금이 들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금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소, 산소, 수소, 구리, 아연 등이 몸 안에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 몸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리나 아연은 느끼십니까? 단 한 명도 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런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에 어떤 긍정적 요소가 없다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앞서 금, 구리, 아연 등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부정적 요소나 긍정적 요소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냥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잘못된 마음에서는 나오는 것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요소도 차고 넘칩니다. 기쁨, 희망, 사랑, 행복 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적은 긍정적 요소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으며, 세례받으실 때의 사건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도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고쳐 준다는 이야기, 안식일 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세례자 요한의 감옥 생활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지금처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햇빛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감옥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까지 더해지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의심을 지우고 굳게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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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F.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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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참 그리스도의 모습
선지자 세례자 요한, 그 어떤 힘과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단지 진실만을 보고 그 진실을 전달하는데 충실했던 사람이지만, 의붓형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은 부도덕한 헤로데 왕을 공격한 죄로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과 다른 모습에 당황하여 제자를 보내 물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열어 놓은 사람인데 지금은 그분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고통스런 상황에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지가 흔들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선포했던 그리스도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매우 위엄 있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엄하지도, 권위를 드러내지도 않고 너무나 인자하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 선포하였는데 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료하고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다음으로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앞둔 극한 상황에서 절망을 느꼈고 그 동안 자신이 했던 모든 것에 의심이 들었고 실패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처럼 온 힘을 다해 의로움을 전파했건만 불의를 겪고 있고, 그리스도 구원을 전파했는데 지금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열정과 희망은 모두 타버렸고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문하는 말에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구하러 오지 않으십니까? 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저를 감옥에서 죽게 하시는지요? 왜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경멸과 조롱을 받게 하십니까?”
그는 이사야의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온갖 폭행과 고통을 겪고 끝내 죽음을 목전에 둔 절망 속에서 그분은 그리스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직접 여쭤보게 되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참으로 대담한 질문이지만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즉 이사야의 회개의 말을 다시 새기고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새롭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같이 작은 씨앗으로 태어나신 아주 작은 어린양이시며 호화로운 왕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같은 판결을 하는 판사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고 위안을 주고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행렬처럼 화려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친근한 이웃처럼 조용하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부자와 권력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한, 나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그리스도의 모습을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참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를 바란다면 어떤 권력과 돈, 거짓도 없는 가장 소박한 교회를 세워야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참 그리스도의 모습인 겸손과 소박함 사랑을 그대로 옮겨 놓아야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면, 명예와 권력을 피하고, 돈을 두려워하고 허영을 버리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 만족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이웃과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동안 주님을 만났습니까? 어떤 모습의 주님을 만났습니까? 주님께서는 천지가 진동하듯이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도 화려한 승리자의 모습으로도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작게 오시지만 따뜻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단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덜어 줄 두 손만을 가지고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자비의 눈빛과 위안의 미소로 우리 곁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주 잠시, 왔다 가실 것입니다.
주님이 왔다 가시더라도 어디에든 사랑의 표징이 있는 곳은 주님의 모습이 새겨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 이번 성탄절에 저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2. 세레자 요한의 메시지 중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이번 대림시기에는 절제와 회개, 기도 속에서 영적인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회개는 절박함과 처절한 자기 반성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맑은 영혼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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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다려라, 만나라-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주여, 오소서. 오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오실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림 촛불 셋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라우다테Laudate’ ‘기뻐하여라’ 주일이자 기쁨의 장미 색깔 제의를 입기에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제39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신앙 실천 행위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실천하며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영원히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기다릴 것도 사라지고 이제 믿는 이들에게는 기다릴 대상은 주님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광야인생, 기다릴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는지요! 이런 주님을 기다림이 없이 무슨 희망으로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산다면 정말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주님을 참으로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필립비서 말씀이 반갑게 떠오릅니다. 그대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에 맞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4,4)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서두 말씀도 온통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막이 상징하는 바 우리들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주님의 영화와 영광이 빛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런 기쁨의 빛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라에 이어지는 두 번째 권고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기쁨은 힘이자 빛입니다. 기쁨의 빛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다음에 “기다려라”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고맙게도 잘 맞습니다. 재림이란 말마디를 적당히 바꿔 전문을 읽어봅니다. 아마도 기다림의 달인은 충실한 농부일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기쁨의 기다림 앞에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원망, 절망, 실망이 사라진 희망과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인내의 기다림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에 이어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라”입니다.
대림시기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는 날마다 이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만남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가톨릭 교회 전례도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가 정화은총이고 성화은총입니다. 영육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과 행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억지로 뺏어 올 수 있는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참으로 믿는 이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한 두 번 만남이 아니라 결정적인 성탄의 만남에 앞서 대림시기 날마다 앞당겨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고마운 것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가 힐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 이르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 온전한 치유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을 만날 때 전존재의 치유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이런저런 것들에 매여 참 자유로움도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탄에 앞서 이 은총의 대림시기,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앞당겨 만나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1.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주님을 기다리십시오.
4.주님을 만나십시오.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해야할 구체적 과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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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1. 대림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여기>
마태오 11,2-11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지금여기>
절망을 누른
치솟는 희망
어둠을 삼킨
타오르는 빛
가름을 멈춘
뜨거운 함께
굴레를 벗긴
넘치는 자유
슬픔을 넘는
한없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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