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헤드비제스(10.16),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0.16)
헤드비제스(10.16)
성인명 헤드비제스 (Hedwig)
축일 10월 1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수녀
활동지역 슐레지엔(Schlesien)
활동연도 1174-1243년
같은이름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지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성녀 헤드비지스(Hedvigis, 또는 헤드비제스)는 1174년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안덱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 4세(Berthold IV) 백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Franconia)의 키칭엔(Kitzinge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살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나중에 슐레지엔(중부 유럽의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 남서부 지역이나 체코, 슬로바키아, 독일에 걸쳐 있다)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Henry the Bearded)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law)의 성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크트(Neumarkt)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해 트레브니츠(Trebnitz)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독일어 지명으로 영어로는 실레지아[Silesia],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Slask]로 부른다)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다.
성녀 헤드비제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제스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세운 트레브니츠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농사를 짓기 위해 척박한 슐레지엔 땅을 개간하고 많은 독일 이주민을 초대해 새로운 도시와 촌락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늘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 영성적 이익을 위해 헌신했지만, 성녀 헤드비제스 자신은 극도의 가난을 실천하며 하느님만을 섬겼다. 또한 수도복을 입고 딱딱한 침대에서 자며 추운 날씨에도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등 고행과 절제의 생활을 실천했는데, 적어도 한겨울만은 신발을 신고 다니라는 브로츠와프 주교의 조언에 순종했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제스는 1243년 10월 15일 자기 딸 제르트루다(Gertrude)가 원장으로 있던 트레브니츠의 시토회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남편과 함께 수녀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폴란드와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20세기에 와서 성녀 헤드비제스는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의 수호자로서 공경받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폴란드의 공작부인인 성녀 헤드비제스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10월 15일에 선종했는데,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10월 17일에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5일 목록에서 슐레지엔의 트레브니츠 수녀원에서 다음날 기념하는 성녀 헤드비제스의 선종을 기념한다고 했다. 그리고 10월 16일로 축일을 옮겨서 바이에른 출신이자 폴란드의 공작부인이었던 성녀 헤드비제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며 그들을 위한 구호소를 설립했고,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자신이 설립하고 딸이 원장으로 있는 트레브니츠 시토회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10월 15일에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0.16)
성인명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Margaret Mary Alacoque)
축일 10월 1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환시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647-1690년
같은이름 마가렛, 마거리트, 마거릿, 마르가레타, 마르가리따, 마르게리타, 마르그리트, 말가리다, 말가리따, 메리, 알라콕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7월 22일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샤롤(Charolles)과 마콩(Macon) 사이에 있는 베로브르(Verosvre)의 오트쿠르(Hautecour)에서 클로드 알라코크(Claude Alacoque)와 필리베르트 라멩(Philiberte Lamyn)의 7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나 마르가리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대대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숲에서 기도하고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을 좋아했다. 네다섯 살 때 이미 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서원하며 예수님께 자신을 봉헌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는데, 여덟 살 무렵에 아버지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성녀 알라코크는 대모의 집인 코르슈발(Corechval) 성(城)으로 보내져 생활하면서 상류 가정의 예의범절과 교양을 배웠다.
그 후 그녀는 샤롤의 클라라회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아홉 살 때 첫영성체를 한 성녀 알라코크는 클라라회 수녀들의 생활에 감동해 수도 생활을 더 갈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경계통의 병을 얻어 2년 만에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5년 정도 병상에 누워 지냈는데, 자신의 병만 낫게 해 준다면 일생을 성모 마리아의 딸로 자신을 봉헌하며 살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기적적으로 병이 나아 건강을 회복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족의 재산을 관리한 삼촌과 친척들은 그녀와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온갖 멸시와 학대를 서슴지 않았다. 1669년 견진 성사를 받은 그녀는 결혼하라는 가족과 친척의 압력을 거부하고 평소 생각해 온 수도 생활을 실천하고자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했다. 그녀는 엄격한 금욕과 기도 생활로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일찍이 환시를 여러 번 보았는데, 특별히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예수 성심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가 당신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하고 매주 목요일 밤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고통에 동참하는 성시간을 통해 구속 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성체 축일 다음 금요일을 당신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정하도록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그리스도의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해 나갔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장상 역시 그녀의 경험한 환시의 진실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더 엄격하게 그녀를 대했다. 동료 수녀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수도 생활은 그녀가 참아 내야 할 시련의 시간이자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 신부였던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인 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는 면담을 통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새로 부임한 원장 수녀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그녀에게 더욱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다. 1684년 원장으로 선출된 마리 크리스틴 멀랭(Marie Christine Melin) 수녀는 덕과 재능이 출중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멀랭 수녀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 대한 수녀원 내의 반대를 종식하고 그녀를 딸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원장과 수련장 직분을 맡김으로써 수녀원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 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1686년부터 수녀원에서 비공개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할 수 있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으며,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 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1690년 10월 17일 병으로 수녀원에서 선종할 때까지 예수 성심 공경의 신심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그녀의 고해 신부였던 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선종하고 75년 만의 일이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예수 성심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성체의 신비와 예수 성심 사이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분명히 천명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축일은 교회의 전통대로 선종한 날인 10월 17일 전례 안에서 기념했는데,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하루 전인 10월 16일로 변경하여 지내게 되었다. 이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성 이냐시오(Ignatius)의 축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의 10월 17일로 옮겨 지정되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0월 16일 목록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가 동정녀로서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여 완덕의 길을 훌륭하게 걸었고, 신비로운 은사와 예수 성심에 대한 특별한 헌신을 지녔던 그녀가 교회 안에서 예수 성심 공경을 증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했다. 그리고 10월 17일에 프랑스 오툉(Autun) 근처 파레르모니알에서 주님 품에 안겼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