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계시
시편 19:1~14
오늘 읽은 시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그 자신을 계시하시는가를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두 가지 방면으로 계시하신 것을 노래합니다.
그 하나는 자연 계시에 대한 것을 노래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는 우주 만물을 통해서도 너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영광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에서, 천체의 구조와 그 아름다움에서, 그 질서 가운데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9-20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렇게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소위 종교성입니다. 짐승이 아무리 영리해 보이는 것이 있지마는 짐승에게는 종교성이 없습니다. 짐승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그 형식이 다를 뿐이지 누구에게나 종교성이 있어서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면 하나의 동물이요, 물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짐승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살고 그 본능을 만족시키면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에게는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곳, 의식주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물질적인 방면에 걱정이 없는 사람일수록 마음에는 더 공허를 느끼고 만족을 모르고 살며 고민에 잠겨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물질 뿐만 아니라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 영혼은 하나님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어서 그럽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만하게 지어졌습니다. 더구나 말씀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그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우주의 질서가 말해 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이 지구는 꼭 24시간만에 한 번씩 자전합니다. 이것이 25시간 걸리는 때도 없고 23시간 걸리는 적도 없습니다. 아주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는 365일 걸려서 태양을 한 바퀴 돕니다. 언제 400일 걸려서 태양을 한 바퀴 돈 적이 있습니까?
이 지구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달은 약 30일만에 한 번씩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음력을 만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이 지구는 일년에 네 계절이 있어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틀림없이 찾아옵니다. 요사이 삼복 더위로 얼마나 더운지 모르겠습니다. 낮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밤에는 잠들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사람들이 이 더위를 피해 보려고 바닷가에 수백만이 몰리고 하루에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 사람만도 6-70명에 달합니다. 아마 일년 내내 이런 날씨만 계속된다면 굉장히 지루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한 달만 이렇게 더우면 그 다음에는 낮에는 더워도 아침과 저녁에는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9월 중순이 지나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어떻게 제가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질서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질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름이 지나 봄이 되고, 겨울 지나 가을이 되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한 일입니까? 이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소위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상가라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유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우주가 그저 저절로 우연히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난 번 시편 14편을 생각할 때도 언급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계신 것과 그 지혜와 그 능력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6절까지 같이 읽어보십시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끝 까지 이르도 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 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 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것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노래한 것입니다. 여기 구분해서 말하면 하늘은 영어로 말하면 ‘Sky’입니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우주 과학자가 아니므로 가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 공기라는 것이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데 얼마만큼 지구에서 떨어지게 되면 공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기가 있는 소위 대기권에 속한 것을 ‘Sky’라고 합니다. 하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좀 지나면 달을 위시해서 수많은 별들이 있는데 거기를 궁창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Firmament’라고 합니다. 별의 세계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삼층천은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 ‘천당’, 영어로 ‘Heaven’일 것입니다.
사람은 몸의 구조상 짐승들보다 유리하면서도 축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은 아래, 땅을 내려다보도록 만들어졌고 사람은 위를 쳐다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위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땅을 내려다보며 살다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전부일 것이지만, 우리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다가 죽으면 이 몸은 땅에 묻혀 흙이 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하나님의 자비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밤과 낮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늘 밤만 있으면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늘 밤만 있으면 모든 식물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낮이 있어서 활동하게 합니다. 식물이 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늘 낮만 있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모든 식물이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더운 여름에 오후쯤 밭에 나가 보면 곡식들이 강한 햇볕에 쬐어서 거의 다 시들고 말라갑니다. 조금만 더 쪼이면 다 말라 버릴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석양이 되고 햇볕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곡식 잎이 기지개를 하게 되고 밤이 되면 이슬이 흠뻑 내리는데 아침에 나가 보면 이슬을 머금고 싱싱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곡식 하나가 자라나는데도 낮이 있고 밤이 있어야 합니다. 낮과 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합니까?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편하게 쉽니다. 언제나 낮이면 아마 퍽 피곤할 것입니다. 낮에 잠을 잔다고 해도 밤에 쉰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우리 심령에도 언제나 낮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처럼 모든 것이 밝고, 형통하고, 잘되고, 건강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밤과 같이 주변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어 보이고, 슬픔과 눈물이 앞을 가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필요합니다. 밝을 때 찬송합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에는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햇빛만 쪼이면 사막을 이룬다”는 말은 평범한 말이면서도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8장 22절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낮과 밤이 그처럼 교체되는 것은 여러 면으로 우리에게 유익된 깊은 면이 있습니다. 아침의 햇빛이 그날의 일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녁의 황혼은 밤의 안식을 돕습니다. 매일 낮과 매일 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며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부어줍니다.
3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산에 올라가 보세요. 이 산이 오래오래 전에 생겨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지만, 산은 언제나 조용합니다. 산은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어 인류 사회에 공급해 주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 자랑도 없이 예나 지금이나 그저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소란하던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산에 찾아가면 안식을 얻습니다.
태양을 보세요. 온 우주를 밝히는 태양이 동녘에 떠오를 때 무슨 굉장한 소리를 내는 것 아닙니다. 조용히 웃으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그렇게 크고 참되시지마는 소리없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큰 지구가 50억이 넘는 사람을 싣고 쉼없이 돌아가지만 지구는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 아니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조용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강하게 자라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할 때에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조용한 사람이라야 일을 바로합니다. 조용한 사람은 남의 일을 간섭하지 아니합니다. 이 우주 만물을 보세요. 제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조용한 사람은 일하면서도 조용합니다. 투덜거리지 아니합니다. 사실 조용해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바로 일할 수 있습니다.
시편 4편 4절에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했습니다.
37편 7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62편 5절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조용히 일하시는데 우리도 조용히 일하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가정, 조용한 교회, 조용한 나라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여기 시인은 태양에 대해서 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태양계에 속한 모든 위성은 태양이 그 중심입니다. 태양을 중심해서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영향권 아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태양이십니다. 우리의 생활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했습니다. 주님을 믿든 믿지 않든 그의 영향을 떠나서 살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 앞에 누구도 숨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절망적인 이방인의 왕도 되시고 가장 죄악이 관영한 곳에 심판자도 되십니다. 햇빛은 죽은 것에 비칠 때 더욱 썩어지고 말라 버리지만 산 것에 비칠 때는 더욱 생기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적 앞에 복음을 전파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복음에 능력을 부여하시어 그 복음에 복종케 하시거나, 아니면 그 복음에 대해서 정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각한 1-6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연 계시에 대한 것을 노래했습니다.
이제 7-11절까지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 다시 말하면 성경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같이 읽어보십시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 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 이다.
여기에 나타난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규례라는 말은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한 마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 것입니다. 여기 다섯 개의 문장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한 특성과 유용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 문장마다 ‘여호와’라는 말이 반복된 것은 공연한 반복이 아니라, 율법이 지닌 그 권위와 탁월함이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낙심하고 실의에 차있던 심령이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거룩한 진리에 이르게 되며 우리의 행한 일을 밝혀 줍니다. 따라서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데 유익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시편 119편 98절 이하에 보면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사는 우둔한 사람이 이 말씀을 접할 때, 지혜를 얻어 생명의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제 기드온 협회는 매년 수천 만 권의 성경을 인쇄해서 무료로 공급하는 기관입니다. 여기에서 단순히 성경을 펴서 읽는 가운데 구원받는 심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합니다.
야고보 1장 22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교했습니다. 거울은 정직합니다. 거울은 수정이 없습니다. 가감이 없습니다. 그대로 비치는 것이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거울에 나의 모습이 잘못 비쳤으면 내 모습을 바로잡고 거울 앞에서야 바른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거울은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처럼 정직합니다.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나타냅니다.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베드로,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복종하면 그것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합니다.
어두움이 없이 선명합니다. 찌꺼기나 더러운 것 없이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따라서 그 눈이 밝아집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어서 그 눈이 밝아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받아 들일 때 우리 눈이 밝아져서 내 자신의 죄악과 비참함을 보게 하여 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며,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좋아해야 합니다.
금은 세상 재물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이 제일입니다. 그래서 황금 만능을 부르짖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나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돈 앞에는 모두가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돈을 좋아합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돈이 싫은 사람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모해야 합니다. 금은 우리의 육신적인 것은 해결하나 영혼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더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능적인 즐거움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꿀은 단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짐승들이 누리는 기쁨이므로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즐거움은 심령의 기쁨이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고귀하게 합니다.
관능적인 즐거움은 기만적인 것이기 때문에 쉽게 권태를 느끼고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즐거움은 본질적이며, 우리에게 참 만족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시절을 좇아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우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십시다. 그리고 주신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고, 지혜를 얻고, 기쁨을 얻고, 자신을 바로잡고, 심령의 눈이 밝아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힘차게 사십시다.
복된 3대 고백
시편 19편 12-14절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2)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복된 3대 고백 (시편 19편 12-14절)
< 복된 3대 고백 >
말은 삶과 생각이 표현된 것이다.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특히 복되게 살려고 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말씀대로 살려는 자세다.
본문에는 말씀대로 살려는 다윗의 기도가 나온다.
그 기도를 통해 교훈 받는 복된 3대 고백이 무엇인가?
1.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고백
다윗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입니까?”라고 말한 것은 자기 허물을 깨닫는 삶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허물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눈빛도 흔들리고 마음이 맑아지면 눈빛도 맑아진다.
외모가 경쟁력이란 말도 있지만 진짜 경쟁력의 원천은 마음이다.
외면을 보는 눈보다 내면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
특히 자기 내면을 잘 성찰해야 한다.
자기를 볼 줄 아는 성찰의 능력을 키우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
타인과 접촉하는 시간이 많으면 자기를 살피는 능력이 떨어진다.
자기를 정직하게 살필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남의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용서의 능력과 가능성도 커진다.
더 나아가 내면의 성찰 능력을 키우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하라.
사람은 말씀과 하나님을 가까이할수록 자신의 허물을 조금이라도 더 깨닫는다.
말씀을 앞세워 비고의적인 허물을 줄일수록 그만큼 더 복된 존재가 된다.
2.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는 고백
무의식적인 죄인 허물보다 고의로 짓는 범죄가 더 큰 죄다.
고의로 죄를 지으면 그 죄에 의해 휘둘리다가 죄를 감추려고 거짓된 언행을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런 사실을 인식하고 다윗은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13절).
근원적인 ‘원죄’와는 달리 살면서 짓는 죄를 ‘자범죄’라고 한다.
자범죄 중 가장 나쁜 죄는 ‘고의로 짓는 죄’다.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으로 행한 죄보다 죄인 줄 분명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한 죄는
죄로 인한 결과는 같아도 그 죄질은 더 나쁜 것이다.
또한 고의로 짓는 죄가 나쁜 이유는 양심을 저버리는 죄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잘 몰라도 때로는 자기 양심이 죄로 인식할 때도 있다.
그때 내적인 하나님의 음성인 양심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각성시킬 때
그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고 죄를 짓는 것도 고의로 범한 죄가 된다.
또한 사전에 어떤 죄에 대해 경고를 받거나 주위의 선한 충고를 받고도 그 죄를 짓는다면
그것도 고의로 죄를 범한 셈이 된다.
그래서 늘 내적인 음성인 양심의 소리와 지혜자의 충고를 겸허하게 들을 줄 알라.
3. 말과 묵상이 열납되게 해달라는 고백
다윗은 하나님 앞에 고백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반석이고 구속자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먼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마음의 묵상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14절).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은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를 뜻한다.
성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말과 생각을 해야 한다.
즉 기도하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 하나님께 드려질 만한 합당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과 생각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생각한 것이 말과 기도로 나오는 것이다.
말과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한다는 다윗의 기도고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전을 준다.
바른 믿음은 바른 삶을 통해 잘 증명된다.
더 나아가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은 신언행일치(信言行一致)의 삶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성도는 언행이 일치된 진실한 모습을 통해 주님을 나타내는 ‘주님의 증거물’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말은 있지만 실천이 없는 삶은 부끄러운 삶이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